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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서재입니다.

벨럼 데오룸: 케난그르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게임

완결

FromZ
작품등록일 :
2023.02.28 19:41
최근연재일 :
2023.04.02 07:25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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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8
추천수 :
403
글자수 :
504,944

작성
23.03.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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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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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0. Prologue. 이교도 (4)

DUMMY

***



긴다리설원곰의 가슴 정중앙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 구멍을 통해 반대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파괴적인 스킬이었다.

···퍼억!

이윽고 녀석이 쓰러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음조차 하지 못한 채 즉사해버렸다.


“바실레이···?”

“야, 야! 새가슴! 이 새끼야!”


반면에 바실레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커허···! 허어···.”


베이톤는 붉어진 눈시울로 친구의 목에 있는 상처를 틀어막으려 했다.


“이거 어떡해? 야, 멀대야. 이거···.”

“이건···. 이거는···.”


바실레이는 아시로스의 손을 힘없이 붙잡았다.


“시이발···. 내가 너, 살렸다.”


“미안하다. ···미안해.”


바실레이의 목에 생긴 상처는 어떻게 조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피의 제단에서 목을 베인 제물처럼 그는 엄청난 혈액을 쏟아내고 있다.


“흐, 흐으.”


“내가 정신만 빨리 차렸어도···.”


“좆까. 머, 멀대 새끼. 흐흐.”


그는 빨갛게 물든 이를 보이며 씩 웃고는 베이톤에게 시선을 옮겼다.


“허윽···. 너는···. 우리 엄마, 아빠한테···. 나, 어떻게, 싸웠는지···.”


그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베이톤은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무, 물론이지! 내가 다 말해줄게! 너는 우리 중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웠어! 존나, 누구보다도 멋있었다고···! 네가 우리 모두를 구한 거야!”


“아니, 아니지···. 아, 멋있는 건···. 맞는데, 모두를 구한 건···.”


왜 그랬을까.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겁이 많은 바실레이가.

그 새가슴 바실레이가 말이다.


“애, 애늙은이···. 너···. 스킬···.”


그리고 어째서 그랬을까.

누가 죽더라도 쓰지 않기로 했는데. 죽을 위기에 있더라도 절대 쓰지 않기로 했는데. 그렇게 다짐하고 임한 싸움이었는데 어째서 마지막에 스킬을 써버렸을까.


“뭔지 모르, 모르겠는데, 허윽···. 네가, 모두를 구했어···. 다들 봤지? 곰이···. 퍼엉, 하고···.”


테렉시스는 형언할 수 없도록 복잡하면서도 아직 정답을 알 수 없는 불과 몇 초 전의 기억을 병적으로 되짚었다. 그러면서 죽어가는 친구를 무거운 눈으로 말없이 마주했다.


“내 영혼은 네가, 바다로···. 보내주라···. 테렉시스.”


이건 이 세계의 많은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습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음을 앞둔 자. 특히 전장, 던전 등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환경에서 명예롭게 혹은 부득이하게 죽음을 앞둔 자.

그런 사람은 고귀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네가, 쿨럭···! 네가 없었으면 저기 멀대 새끼는 물려 뒈졌을 거야. 흐흐···. 다음엔 코흘리개···. 네 차례였을 거고···.”


베이톤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고 아시로스는 사후세계를 약속했다.


“카일레의 입구에서 기다려라. 그때도 우리랑 같이 가는 거다.”


“좆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카일레는 내가 먼저 돌파할 거야. 흐, 흐흐···.”


바실레이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테렉시스를 재촉했다.


“자, 이제···. 보내줘.”


“난 네 영혼을 거둘 자격이 없어.”


테렉시스가 망설이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택은 테렉시스가 아니라 바실레이가 하는 것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자의 고귀한 선택을 거부하는 건 모욕이었다.


“그건 내가···. 물고기의 눈으로 널, 지켜보면서, 판단할 테니까.”


이 이상의 고통을 줄 수도 고귀한 선택을 거부할 수도 없는 일.

끝내 테렉시스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 차가운 날붙이를 친구의 목에 댔다.

아시로스와 베이톤.

그리고 테렉시스가 기도했다.


“카일레의 자비가 기다리기를.”

“카일레의···. 흐흑···! 자비가 기다리기를!”

“···자비가 기다리기를.”


부디, 섬기는 신이 없어 갈 곳도 없는 영혼을 이콘이 헤아려 거두어주기를.


‘이콘. 이것이 내 첫 번째 부탁이다.’


그날 테렉시스는 도태되었지만 최상위 포식자였던 짐승과, 평소에 밉상이었지만 소중했던 친구의 삶을 모두 거두었다.

그렇게 조금의 기쁨도 없이 단숨에 4레벨이 되었다.



***



달과 별들의 시간이다.

테렉시스, 베이톤, 아시로스는 설산의 커다란 바위 아래의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멧돼지 다리를 뜯고 있다.

세 사람 모두 낮에 경험한 친구의 죽음 탓에 침울한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테렉시스와 아시로스는 각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 안색이 너무 안 좋았다.


“킁···.”


그나마 낙천적인 성격인 베이톤은 뭐라도 화제를 던지기로 했다.


“이렇게 설산에 있으니까 어렸을 때 이야기꾼한테 들었던 게 생각나네.”


테렉시스와 아시로스는 말없이 그에게 주목했다.


“어느 날, 전장의 지휘관인 젊은 남자가 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겨울의 산을 지나고 있었어.”


테렉시스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의 도입부였다. 전생에 들었는지 이번 생에서 들었는지는 긴가민가하지만 말이다.


“그때 그 남자와 병사들은 패배를 겪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잔뜩 맥이 빠진 상태였지. 추운 날씨에 살이 에였고, 보급품은 바닥을 드러냈고, 부상자들도 많았어. 군마(軍馬)는 진작 다 잡아먹었고.”


아시로스는 멧돼지 다리를 내려놓았다.


“군마가 뭐냐?”


테렉시스가 대답했다.


“말. 바다 건너에서 사람들이 타고 다닌다는 짐승이다. 그걸 군대가 쓰면 군마지.”


“···그래서? 베이톤.”


“너무 많은 이들이 가는 길에 쓰러져서 나중에는 스무 명도 안 되는 짧은 행군이 이어졌다는 거야. 그 남자와 병사들은 배를 곯고 있었어. 그러다 때마침 똑같이 배를 곯고 있던 늑대 무리와 마주치게 됐지. 그들은···. 킁, 당장 식량이 될 수 있는 늑대 무리를 사냥하기로 했어. 마침 창과 방패, 숙련된 궁수(弓手)들도 있었으니까.”


“궁수는 또 뭐냐?”


“활잡이. 군대에서는 궁수라고 해.”


베이톤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늑대 열댓 마리를 사냥하는 건 쉬운 일이었지. 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짐승들의 한(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어.”


그들은 늑대들과 싸웠다.

다섯 마리를 해치웠을 때 무리는 흩어져 도망쳤고, 수컷 우두머리는 끝까지 남아서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 수컷은 어찌나 용맹하고 포악한 우두머리였는지 병사 한 명을 죽였다. 하지만 피해는 그걸로 끝이었다. 덕분에 그 젊은 남자와 병사들은 밤에 굶주린 배를 채우고 아침에 다시금 행군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약 2주간의 행군을 이어가던 중에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수컷 우두머리의 새끼들이었어. 새끼들이 각자 새로운 무리를 이루어서 나타난 거야. 그 숫자는 족히 50마리가 넘었지. 그야말로 늑대 대군(大軍)이었어.”


“아비의 복수를 하러 나타난 거냐.”

“짐승의 한···.”


“그렇지. 아비이자 우두머리였던 늑대. 그 녀석을 죽인 인간들을 차마 용서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2주 동안 그들의 냄새와 흔적을 추적하면서도 각자 무리를 키우고, 늑대 형제들이 힘을 합쳐서 대군이 되어버린 거지.”


아시로스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면서 숫자를 세었다.


“늑대 한 무리에 여덟 마리가 일반적이니까, 각자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된 녀석들이 여섯 마리쯤 되었다는 거네.”


“그렇지. 그날 그들은 늑대 무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처절하고 치열한 싸움이었대.”


싸움에 숙달된 병사들이라도 다들 다치고 지쳐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리고 아무리 짐승들이 상대라고 한들 수적 열세가 심했다.


“무엇보다 그 늑대 대군은 앞뒤 가리지 않고 복수심에 미쳐버린 것처럼, 자기들 무리와 가족이 병사들에게 몰살을 당하더라도 오로지 달려들었다고 해. 정말 어느 녀석도 도망치지 않고 마지막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싸웠대. ···결국 많은 병사들이 또 목숨을 잃었고 지휘관이었던 남자까지 크게 다치고 말았지. 그들이 고향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자는 그 남자를 포함해 고작 다섯 명. 나머지는 모두 늑대들한테 당한 거야.”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잖아.”

“그 늑대들 대단하네.”


“훗날 병사들은 이 경험담을 주변에 해주기 시작했어. 그게 여러 사람의 귀에 들어가서 세상의 많은 이들이, 특히 사냥꾼들이 늑대 사냥 전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만 사실이다. 북쪽, 섬 지형에서 나타나는 섬늑대들을 사냥하는 자들만 가지는 관습.’


테렉시스는 그 이야기의 교훈을 중얼댔다.


“늑대 무리를 사냥할 일이 있다면···. 수컷 우두머리는 죽이지 마라.”


“그 이야기는 뭐라고 부르냐?”


당시 이야기꾼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늑대 새끼들의 이야기.”



***



고대부터 인간은 창만 있다면 지상의 모든 짐승을 사냥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화약무기가 등장하고도 충분히 진보하기 전까지는 창이 냉병기의 전장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테렉시스가 가지고 있는 전생의 지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화약무기에 대한 내용을 뺀 지식을 테렉시스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다.

젊었을 때 설인들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있어서일까. 테렉시스의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강조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창은 최고의 무기였다고.


‘검이 없다면 나뭇가지를 깎아라.’


테렉시스는 오밤중에 모닥불의 빛에 의지하며 여분의 나무창을 하나 깎아내는 중이다. 바실레이가 생전에 쓰던 검은 그의 주검과 함께 고이 묻어버렸다.


“다 됐다.”


테렉시스는 베이톤에게 나무창을 넘겼다.


“옆에서 보니까 생각보다 쉽네.”


“끄트머리만 잘 깎으면 되니까. 근데 이쪽 숲에 있는 나무로 만든 거라서 쉽게 부러질 거다. 언제든지 손도끼 꺼낼 생각도 하면서 쓰라고.”


“명심할게.”


조용히 모닥불을 보고 있던 아시로스.

왠지 모르게 그의 눈길이 싸늘했다.


“테렉시스.”


“왜?”


“그 스킬은 뭐였냐?”


“무슨 스킬?”


테렉시스는 일부러 되물으면서 잠깐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뭘 말하는 건지 알잖아.”


“마지막에 그거?”


“어.”


테렉시스는 침을 한번 삼키고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발동됐어. 뭔가 스킬이 생겼나.”


“번개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가 이중 속성인 것 같다. 빛이랑 불이겠지.”


“진심이냐?”


아시로스는 예리했다.


“너, 나중에 바다를 건널 거라면서? 그곳에는 사람의 속성을 보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차피 들킬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지적한 것들은 테렉시스가 몇 번이고 생각해왔던 내용이었다.


“테렉시스. 우리한테는 이러면 안 되지. 우리는 너와 함께 자랐고 오늘 낮에 목숨까지 내걸고 싸웠는데. 게다가 바실레이는 마지막에 널···. 우리끼리는 비밀 같은 거 없어야 하잖아.”


어느 누가 플라스마 속성 스킬을 보았을까. 어느 누가 그런 스킬에 대해 분석을 하고 문헌을 남겨두었을까. 그래서 플라스마 스킬을 다루기 위해, 힘을 가지기 위해, 살아남고 누리고 베풀기 위해 나아갈 길이 멀다. 턱없이 멀고도 험하게 느껴진다.

그토록 멀고도 험한 여정을 홀로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어차피 다 밝혀지게 될 비밀.

이미 보여버린 이상, 더는 숨길 수가 없다.


“아시로스, 베이톤.”


차라리 이 비밀을 먼저 알게 된 자들이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들이라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여긴다.


“나는 이콘이라는 신에게서 힘을 받았다.”


테렉시스가 그 한마디를 내뱉자 정적이 흘렀다. 어찌나 조용했는지 모닥불까지 침묵하는 듯했다.

잠시 정지했던 아시로스와 베이톤.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테렉시스를 쳐다봤다.


“수룡은 신이 아니야. 그냥 몬스터지. 너무 강하고 숫자도 적은 몬스터라서 신화적으로 느껴지는 것뿐이다.”


“뭐, 뭐···?”

“농담이 지나치군.”


“이콘이 진짜 신이야. 우리를 보살펴줄 수 있는 신이라고. 더 나아가서 지상의 많은 존재들이 섬겨야 할 존재지.”


그러자 아시로스는 모닥불 앞에 놓인 손도끼를 천천히 쥐었다.


“···그만해라.”


“네가 캐물었잖아.”


“이제 안 물어볼 테니까 그만해.”


“너도 베이톤도 생각 좀 해봐. 우리 마을사람들, 스킬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냐? 그중에서 자기 속성이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또 몇이나 있고?”


“닥치라고.”


“수룡은 허상이야. 대륙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당연하게 아는 지식을 왜 우리만 모르겠어? 간단하잖아. 그들은 진짜 신을 믿지만 우리는 신이 아닌 것을 믿고 있으니까. 그래서 다들 축복을 못 받았으니까. 천계와 어떠한 연결점도 없는 삶을 살아오고 있었으니까.”


아시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오른손에 손도끼를 꽉 쥐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게 진실이야.”


그러자 베이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나지막이 물었다. 조금 더 확실한 질문으로.


“애늙은이, 너······. 이교도야?”


테렉시스는 일어서서 베이톤과 아시로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더욱 강조했다.


“우리들은 모두 무교(無敎)였던 거야.”


그때 아시로스의 왼쪽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테렉시스는 그의 주먹에 맞아서 넘어졌다. 안쪽 뺨과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러나온다. 이어서 아시로스의 발길질이 시작되려던 찰나, 베이톤이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잠깐, 이건 아니잖아! 우린 친구라고! 야! 애늙은이! 너답지 않게 왜 이런 장난을 쳐? 땅 위라도 수룡은 전부 듣는다고!”


그러자 아시로스가 베이톤을 가볍게 밀쳐내고 테렉시스에게 손도끼를 들이밀었다.


“마지막 경고다. 대답 잘 해.”


테렉시스는 입에 고인 피를 옆으로 뱉어냈다.


“흐···! 흐흐!”


그러고는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긴 우정조차 ‘이교도’라는 사실 하나에 갈라설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한 현실이 허탈했다. 또한 지금이라도 말할 수 있게 되어 후련했다.


“웃기냐? 씨발놈아.”


“흐흐흐.”


“처음부터 우리를 속인 거라면···. 설마 처음부터 한방에 곰을 죽일 수도 있었다는 거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건 우리가 목숨을 건 싸움이었어.”


“나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비밀을 지키려고 했지.”


“그러면 씨발놈아! 그 비밀 끝까지 지키던가! 왜 마지막에 그 지랄을 해서···”


“몰랐다고 씨발놈아!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고! 바실레이가 그렇게 쓰러지고 뭔가 아니다 싶었는데 네 목덜미까지 물릴 뻔했잖아! 거기서 비밀이고 뭐고 그냥 몸이 튀어나갔다고!”


아시로스의 집요한 물음이 테렉시스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이윽고 그는 오랫동안 내면에 쌓였던 무언가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 거기서 끝까지 비밀을 지켜? 그래! 그게 정답이지! 존나 역겨운 사실 하나 알려줄까? 나도 진심으로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어! 내 친구들이 죽더라도 끝까지 스킬은 쓰지 말자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어! 진심으로!”


“바실레이가 죽었다고! 걔는 너 쓰라고 도끼까지 챙겨왔고 마지막엔 너한테 영혼까지 맡겼어!”


“알아! 내가 쓰레기 짓을 했지! 이왕 쓰레기 짓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차라리 너희들 다 뒈지고 마지막에 나 혼자 살아남아서 비밀도 지키고! 경험치도 독식하면 됐는데, 그게 진짜 멋있고 현명한 판단이었는데!”


“뭐라고, 이 새끼야?”


“그렇게 했으면 이 순간에도 날 보는 천계의 모든 눈동자들이 만족했겠지! 안타깝게도 나는 어중간하게 대처해서 이런 꼴이고! 안 그러냐?! 베이톤?”


“나, 나는 잘···. 그보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조금만 진정하자. 응?”


아시로스는 테렉시스에게 한걸음 더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너는 어중간하게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목숨을 걸어버린 거다. 차라리 처음부터 밝히던가. 처음부터 밝히고 처음부터 곰을 단번에 해치웠으면 됐잖아.”


“네가 이렇게 반응하는데?”


“···.”


열이 오른 테렉시스는 상대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다.


“베이톤 쟤는 아예 내 머릿속이 어떻게 된 줄 알고. 바실레이는 독실한 ‘신자’니까 너보다 더 격하게 반응했겠지.”


그저 쏟아냈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내가 어디 씨발, 미래에서 과거로 온 놈이냐? 그리고 따져보면 나는 잽싸게 굴러서 자리 잡았는데 너는 일어나서 무방비로 등이나 내줬잖아. 바실레이는 그런 널 지키려다가···. 근데 이 씨발새끼야, 왜 내가 걔를 죽인 것처럼 몰아가는 거냐?”


“둘 다 그만해! 나중에 말하자고!”


“그만하긴 뭘 그만해,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리고 테렉시스는 다시 선을 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참다가, 참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할게.”


죄책감, 원망, 친구의 죽음, 각자의 책임, 거짓말과 배신감에 대한 것보다 더욱 선을 넘는 이야기.

앞서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뜨겁게 증발해버릴 정도로 위험한 이야기.

누구라도 귓구멍을 틀어막고 상대의 혀를 자르고 싶을법한 이야기.

이 모든 갈등의 출발점.

그것은 그의 반복적인 ‘신성모독 행위’였다.


“수룡은 신이 아니야···. 이 병신새끼들아, 수룡은 신이 아니라고! 우리한테 아무것도 못해준다고!”


“이교도 새끼! 당장 죽여버···”


타악!

테렉시스는 잽싸게 일어나서 아시로스의 다리를 걸고 엎어졌다.

퍽퍽퍽!

그리고 그는 화가 난 채로 울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퍼억! 퍼억!

자신의 등을 찍어대는 게 손도끼가 아니라 팔꿈치, 주먹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56 k7******..
    작성일
    23.03.10 10:34
    No. 1

    제목만 바꾸면 좋을듯..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67 여행가즈아
    작성일
    23.03.11 12:53
    No. 2

    어릴적 반복된 경험은 곧 세뇌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게 종교나 사상이라면 특히 그렇더군요.

    여기서 자유로울수 있는 인간은 얼마 안되는 듯 합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극한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걸로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건 현실에서든 게임속에서든 어디에서든 사람사는 곳이라면 벌어지는 일이겠지요.

    인간은 참 나약하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아요.
    그래서 소설에서 만큼은 좀 덜 나약해지길 바래봅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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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0. Prologue. 이교도 (5) +2 23.03.04 413 13 16쪽
» 0. Prologue. 이교도 (4) +2 23.03.03 439 11 18쪽
3 0. Prologue. 이교도 (3) +1 23.03.02 488 13 18쪽
2 0. Prologue. 이교도 (2) +1 23.03.02 620 21 19쪽
1 0. Prologue. 이교도 (1) +12 23.03.02 1,046 2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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