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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422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1.12.24 20:59
조회
37
추천
3
글자
9쪽

Episode241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6)

DUMMY

"인간은 본디부터 창조주께 가장 사랑받던 종족이었기에, 신께서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무수한 선물과 그들을 따르는 돌가죽, 이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다. 저기 높이 치솟으신 위대한 분께 경배와 감사를!"


그 말과 함께 하온은 손에 들고있던 동화책을 툭 덮어버렸다.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래요. 이런게 창세신화라니 낮도 두껍지."


여기 산골짜기 오두막에 도달한 뒤 하온은 벌써 세번째 태양을 지나쳤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또 사흘이 지나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간 내내 하온은 사라의 손을 붙들고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흑광석이 없는 이상 그의 정신은 뇌파에 그쳐 사그라들 뿐이었고, 기도는 어디까지나 행운을 구걸하는 막연한 기도에 머물러버린다.


하온이 사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동안, 하온을 돌보는 것은 사루비였다. 주위에서 먹을만한 식재를 캐오고 사냥을 해온 뒤, 먼지쌓인 부뚜막에서 죽이나 스프 따위를 끓여 하온에게 가져다주었다.


사루비가 그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동안 할 일이 없는 것은 이제 왕눈이 괴물 달랑 하나, 더군다나 하온과 사루비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 탓에 괜시리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도 뭐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지니 이제 몸은 편해도 마음이 편하지 못해서, 낙엽도 다 떨어진 숲 속에서 눈도 심심하고 하니 집 안을 좀 뒤져보니 하온이 쓰던 방 구석에서 어릴적 읽었던 책더미들이 한가득 쏟아져나온다.


껀수 잡은 왕눈이 괴물은 옳거니 하며 그것들을 하온과 사루비 앞으로 싸들고 온 뒤, 이제 먼지를 털어 하나하나 펼쳐보던 참이다.


이런 산골짜기에선 의식주 해결하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되는지라, 하온과 사루비도 나름 심심하기는 매한가지. 그래서 하온도 그 중 하나를 집어들어 오랜만에 내용을 훑어본 것이다. 물론 어린애가 읽던 책이라 별달리 빼어난 문장이 적혀있는 것은 적었지만, 시간을 때우기에는 그나마 낫다.


"그러고보니, 너희··· 사루비 씨한테도 그런거 있어요? 돌가죽 탄생설화 같은거."


"나는, 어, 저희도 있기는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인 하온, 돌가죽인 사루비, 뭔지모를 왕눈이 괴물. 세 종족이 한데 모여 각 종족의 탄생설화에 대해 말을 튼다.


간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사루비도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서 돌가죽만의 창세신화를 이야기해준다.


"돌가죽은 신에게 설계된 첫번째 생명이었으므로,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고자 했다. 백리를 한달음에 가는 속도도, 천근만근도 들어내는 힘도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신에게 만들어진 생물인 덕이었다. 그러나 자유만은 주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신에게 만들어진 생물인 탓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을 섬기지도, 내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찾아 싸워야 한다. 신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찾아서."


이에 하온은 눈을 꿈뻑이고는 감상을 되돌려주었다.


"신화치곤 굉장히··· 반항적이네요."


"저희 부모님이 혁명군이시니 좀 변형을 주셨을 가능성은 있겠지요."


이제 남은 것은 왕눈이 괴물 하나, 종족 불명(사라는 뭔가 아는 듯 했지만)의 괴생명체에게 과연 창세신화랄만한 것이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괴물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서 힘차게 입을 열었다.


그라는 존재의 발생요인은 워낙에 모든 반역자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나머지 둘은 귀를 쫑긋 세우고는 발음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했다.


"신이 가장 슬퍼하던 날, 떨어트린 눈물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이 태어났도다."


집중한 보람도 없이, 내용은 그게 다였다.


“...그게 다예요?”


“엉.”


하온은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담아 되물었지만, 괴물은 참으로 매몰차게 즉답한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탄생설화가 어떻게 있어요? 괴물씨는 동족 만난 적 있어요?”


애초에 동족이 있기는 한가 싶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하온이 쳐다본다. 반면 왕눈이 괴물은 새삼 당당하기만 하다. 그러곤 몸을 한껏 부풀리며 이토록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아니. 내가 지어냈어. 멋있지 않냐?”


"이럴때마다 은근히 어리신 구석이 있으셔요."


"뭐 인마, 이제 나같이 생긴 놈도 나밖에 안남았거든? 탄생설화가 뭐 어떻건 내맘이여."


둘이 아옹다옹 보기좋게 놀던 가운데, 사루비만은 그 초월적인 감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는 시선을 돌렸다. 창문을 벌컥 열더니 상체를 쭉 뻗어, 시야를 넓게 펼친 뒤 인기척을 찾아헤맨다.


"하온 님. 누가 오고있습니다."


빼빼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꾸물거리는 두 개의 작은 점. 그것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온도 다급히 일어서서 상황을 살피러 그의 옆에 다가섰다.


"안보여, 어딘데?"


"저기, 저쪽 끝. 보이십니까?"


"아··· 음, 고마워요."


서서히 다가오는, 대체 누군지를 알고싶은 두 명의 실루엣. 적만 아니면 고마운 일이지만, 하온으로서는 아무래도 조금 더 선호하는 정체가 따로 있다.


"혹시 할아버지인가···?"


대화를 들은 왕눈이 괴물도 하온의 머리 위로 꾸물꾸물 올라가 눈알들을 저편에 고정했다. 다행히도 눈알 수십개는 제값을 하는가보다.


"하온, 환영인사 준비해라. 방 어질러놓은거 다 치우고."


안그러면 저쪽에서 어슬렁대며 오는 집 주인에게 예의가 아니지.



***



새빨갛고 뒤틀린 공간의 새빨간 하늘 아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수백차례 오고가며 살벌하게 공기를 뒤흔든다.


"그땐 그 수 말고 나한테 방법이 없었잖아! 손놓고 그냥 당해줘야 분이 풀려?!"


"지난 시대에도 그런 식이었고, 그렇게 좋은 명분이 있으니까 끝을 모르고 싸워댄거다!"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어!"


"그 자들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냐!"


"자꾸 이상한 억지 부리지 마!!"


"그런 억지도 부리지 못할거였으면, 우리를 깨우지도 말았어야지!!"


창에 의식을 빼앗긴 심상 속, 사라와 마귀는 쓰러진 이래 계속 이렇게 피곤한 분쟁을 지속하고 있다.


팔은 팔대로 마귀의 공격을 받아치고, 몸은 몸대로 마귀의 이빨에 찢어지고, 입은 입대로 마귀의 입과 싸워대는 이 필사적인 전투 속에서 혼란과 피로만 날이 갈수록 쌓여갈 뿐이다.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라는 여전히 영문도 모르는 상태다. 인간이 밉다고 그렇게 날 쪼아댔으면서, 이것들 지금 내가 인간을 죽였다고 저렇게 슬퍼하는 건가?


마귀는 여전히 증오만 쏟아낼 뿐, 사라는 계속되는 죽음 속에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몸이 분해되고 다시 수복되는 과정 속에서 그녀의 파편이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바닥에 깊이 깔린 피웅덩이에 의해 이 공간으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날아온 적의 거대한 송곳. 그 찌르기 한방에 머리통이 날아가버렸다. 그것은 흔들리던 촛불에 훅 불어온 입김과도 같았다.


의식이 연기 한줄기를 남기고 꺼져들면서, 그 빈 공간에 기묘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사라도 이전에 하온과 함께 겪어본 감상이지만, 본질은 무언가 달랐다.


'목소리가 들려와···. 위치는 조금 아래, 거기서 서쪽인가? 여기로 다가오고 있잖아. 동족? 아니, 내 동족이 아닌데···. 하지만 정말 화나있네, 여기 이 애들처럼···.'


마치 자신과 이어진듯한, 위치와 감정이 손에 닿을듯이 느껴지는 감각.


'이건··· 어어? 지나치면 안되잖아.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나? 잠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눈이 뜨인다. 온 세상이 새빨간 색 하나로만 이뤄진 것에 혼비백산하여 팔다리를 마구 움직였고, 곧 피의 호수에서 요란스럽게 첨벙이며 몸을 일으켰다.


“푸하앗!!”


허둥지둥 얼굴에 묻은 피를 걷어내고, 가까스레 숨을 고르는 사라를 보며 마귀들은 혀를 찬다.


"너희 종족은 어찌나 이리 고집불통인지, 아직도 죄를 인정하지 않는거냐?"


"지금 나 먹어치우려고 했지?! 식충식물 마냥!!"


"하도 고집을 부리길래, 힘으로 깨닫게 해주려던 것 뿐이다."


"고집이라고? 사과라도 해주길 원하는거면 미안한데, 난 싫어!"


(사라는 약 2초 후 미안이란 단어를 써버린 것을 깨달았지만 모른척 한다.)


"무게만 잔뜩 잡으면 다인줄 알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면서 또 억지만 부리잖아!"


"이미 늦었다. 가르쳐준들 네가 이해할 수나 있을까!"


사라는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너무 뛰어난 논리에 반박을 못했다기보다는, 억울함이 한도를 넘어서서 반박할 말조차 잊어버린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공허한 상태가 5초간 지속되고, 마침내 머릿속에 섬광처럼 떠오른 한 문장은 이것 뿐이었다. 사라는 악에 받쳐서 힘껏 소리질렀다.


"믿어주질 않는데 이해해줄 리가 있나!!"


그리고 이번에 말문이 막힌 것은 마귀들이었다.


작가의말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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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Episode245_재결합(3) +1 22.01.21 28 3 10쪽
245 Episode244_재결합(2) 22.01.17 39 3 10쪽
244 Episode243_재결합(1) 22.01.14 30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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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Episode242-1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7)> +1 21.12.29 29 3 6쪽
» Episode241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6) +2 21.12.24 38 3 9쪽
240 Episode240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5) 21.12.21 26 3 6쪽
239 Episode239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4) +1 21.12.13 34 3 7쪽
238 Episode238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3) +5 21.12.10 38 3 7쪽
237 Episode237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2) 21.12.02 30 3 10쪽
236 Episode236_할아버지의 느린 시계(1) 21.11.29 28 3 7쪽
235 Episode235_이런 정신나간 것을 보았나(4) +2 21.11.24 35 3 9쪽
234 Episode234_앞담화(6) 21.11.19 30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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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Episode232_앞담화(4)> 21.11.13 24 3 7쪽
231 <Episode231_앞담화(4)> +1 21.11.10 28 3 9쪽
230 Episode230_앞담화(3) 21.11.03 35 3 9쪽
229 Episode229_앞담화(2) 21.10.20 35 3 7쪽
228 Episode228_앞담화(1) +2 21.10.13 37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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