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거 사람을 호구로 보네
“허허...무슨 아르바이트인지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교수님에게 물었다.
로스쿨 학생에게 교수가 시킬 만한 아르바이트가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신입생이라서 적응하기도 바쁘리란 걸 누구보다도 아실 텐데.
안익태 교수님이 대답했다.
“아아, 자네에게 큰 부담은 아닐걸세. 당장으로선 내 일을 도와줬으면 하거든.”
“정확히 어떤 일을...?”
“요즘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안 교수님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칸막이 너머로 향했다.
미리 출력을 해두었는지 바로 자료집을 하나 갖고 오셨다.
꽤 두꺼워보이는 A4용지 뭉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법률용어사전이라고 하네.”
“법률용어사전?”
나는 프로젝트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료를 펼쳤다.
자료내용은 크게 좌우 칸으로 나뉘어서 아래로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예시)
방해배제청구권 妨害排除請求權 [독]negatorischer Anspruch
방해예방청구권 妨害豫防請求權
법학용어들이 왼쪽 칸에 배치되어 쭉 나열되고 있다면 우측 칸으로는,
(예시)
소유자가 소유권을 방해하는 자에 대하여 그 방해의 제거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민214).
타인의 권리를 방해할 염려가 있는 자에 대하여 그 예방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민214).
각 단어들에 대응하는 의미 해설이 배치되었다.
크게는 민사법, 형사법 등으로 나뉘는 걸 봐선 각 분야의 용어를 해설하기 위한 모양이다.
이미 교수님께서 상당히 프로젝트 진척도를 진행했는지 해설칸이 빈 곳을 보기 어려웠다.
거의 다 끝내신 것 같은데 왜 내게 이 프로젝트를 제시하셨을까?
“아.”
읽어보니까 해설 내용이 다소 어려웠다.
전문용어들이 많으니 법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비록 법학이 용어 사용에서 정확한 표현을 요구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렵다.
가령 물상보증인에 관한 내용 정의를 보자면 이러했다.
(예시)
물상보증인 物上保證人
타인의 채무를 위하여 자기가 소유하는 재산을 담보에 제공하는 것을 물상보증이라 하고 그 재산을 제공한 사람을 물상보증인이라고 한다. 타인의 채무를 위하여 저당권 또는 질권의 목적물을 제공하는 것이 그 예이다. 물상보증인과 채권자의 계약으로 저당권 또는 질권을 설정한다. 물상보증인은 채무를 부담하지 않으므로 채권자는 이에 대하여 청구를 하거나 그 일반재산에 대하여 집행하지는 못한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것이다.
법학도에게 있어서 용어 사용의 정확성은 중요한지라 문제가 안 되겠지만,
만약 이걸 일반인을 상대로 보급한다고 했을 때 보자마자 읽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터.
‘내가 일반인을 상대로 이걸 쓴다고 한다면 이렇게 했겠지.’
(예시)
물상보증인 物上保證人
남의 빚을 담보하기 위해 내가 가진 부동산이나 동산을 저당내주는 것을 물상보증이라 한다.
그 물상보증을 한 사람을 물상보증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보증인과 달리 빚 갚을 의무는 없다.
의무가 없으니까 그에게 빚 갚으라고 할 수 없고 담보물 외 다른 재산에 딱지붙일 수도 없다.
조금 더 일상적인 용어로 치환해서 적었을 것이다.
법적 용어의 정확성은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 등의 전공자에게 요구되는 것.
일반인에게는 그가 체험해본 일상의 경험 범주 내에서 이해할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이제야 교수님의 의도를 깨달았다.
“제가 비전공자니까 용어사전의 해설을 일반인 버전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허허 역시 자네로군.”
안 교수님이 내 답변에 씨익 웃었다.
별다른 설명을 안 하시고 자료집부터 건네셨던 건,
그 자료집을 읽기만 해도 내가 당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어서겠지.
물론 그 믿음이 맞긴 했지만.
“이 용어사전을 일반인 버전으로도 출간하시려고요?”
내 물음에 교수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인터넷에 무료공개를 할 걸세.”
“네?”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정도로 법학 용어들을 집약해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고가 든다.
게다가 그 용어사전을 다시 대중의 이해에 쉽게 치환시키는 건 추가적인 수고가 들고.
그래서 응당 합당한 가격을 받아서 판매하리라 생각했거늘.
내 반응에 교수님이 대답했다.
“원래 법학은 민중의 학문이네. 민중의 일상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학문이지.”
현대 법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민법도 고대 로마, 아니 그 이전까지 거슬러간다.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소유, 거래, 신뢰, 신용의 개념이 필요해지게 되자 규칙이 생겼고,
규칙을 사람들이 납득하게끔 정비하는 과정에서 법리라는 것이 원시적인 형태로 생긴 것.
나아가 분쟁에서 규칙의 의미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이 필요해지면서,
바로 법관과 변호사라는 직종이 원시적으로나마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법학은 민중에게 어려운 것이 아니어야 한단 말이네.”
지금이야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요구되는 법과 법리도 복잡, 정교화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중에게 법학이 여전히 어렵고 일상과 동떨어진 존재로 여겨져선 안된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법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따라야 할 합의된 규칙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법에 대한 기본 소양이 있어야 준법정신과 시민정신이 함양되거든.”
특히 요즘처럼 자기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시대에선 법적 소양의 필요성은 커진다.
법적 소양이 있어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무분별함을 자제할 선을 그을 수 있으니까.
법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특히 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한 번쯤 해야 할 의무 아니겠는가.
“일반인들도 읽고 법학에 대한 이해를 기를 수 있는 용어사전을 만드는 일 말일세.”
“오...”
안 교수님에게 그런 기특한 생각이 있을 줄은 몰랐다.
기특하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례하고 건방질 수도 있겠지만,
경험상 교수라는 사람들은 제 잘난 맛에 남 무시하는 성향이 있거든.
자기 연구주제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연구자로서 충실해서 양반이다.
어디 TV 패널로 기웃거리면서 정치권에 자리 얻어보려는 놈들은 말 다했다.
‘뭐랄까, 나도 교수님의 사명감에 동의한다마는.’
그래도 하나 짚고 가야할 것이 있다.
“혹시 저도 무급봉사를 하라는 게 아니시죠...?”
“음?”
교수님이 내 질문에 눈썹을 올리더니,
“푸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노교수가 한동안 웃더니 이내 진정하면서 말했다.
“암, 페이는 중요하지. 내 자네를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고...”
교수님이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일단 이번 1학기 동안 300만원으로 수주할 수 있겠나?”
“300만원이요?”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눈이 커졌다.
교수가 이런 일을 시킬 때는 싸게 후려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미 채워 넣은 해설을 다시 쉬운 일상어로 바꾸는 작업은 쉽다.
한 학기가 3달이라고 한다면 달에 100만원 씩이니까 업무난이도에 비해 높게 받는 것이다.
“어...괜찮네요?”
달에 100만원이라면 생활비에 요긴하게 보탤만한 금액이다.
“그렇지? 자네 공부에도 도움이 될 일이라 생각하네.”
확실히 그렇지만 요구하는 업무의 진척도 중요하다.
한 학기 동안 민사법 용어사전 전체를 하라는 건 좀 무리 같고.
일단 교수님에게 물었다.
“으음...만약 하게 된다면 예상하시는 진척도는 어느 정도까지?”
“자네 생각에는 얼마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나?”
“으윽.”
그렇게 나오시겠다?
내가 내 입으로 어디까지 해오겠다고 말하게 하려는 의도다.
그래야 나중에 못하겠다고 낙장불입을 할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달 100만원씩이니 너무 적은 양은 양심 없다고 욕먹을 테고 너무 많은 양은 무리하는 거다.
‘내가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타협점을 제시했다.
“민사법 용어사전의 절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자신이 있나?”
교수님의 저 반응은 정말 자신 있냐고 묻는 게 아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재차 확인하는 거겠지.
하지만 남의 돈을 벌어먹는 일이 어디 그리 쉽던가.
교수님에게 말했다.
“네, 자신 있습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 메일주소를 알려주면 전자계약서를 그쪽으로 보내겠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게나.”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교수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졸지에 300만원짜리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버렸지만 후회는 없다.
어차피 법학용어를 정리하는 일은 내가 공부하면서 해야 할 일이니까.
해야 할 일을 돈까지 받아가면서 하는 셈이니 나름 이득이라 할 수 있다.
‘당장으로서는 작품 수입을 낼 수도 없고.’
지금 구작들을 다른 출판사에 이관해도 오탈자 수정, 표지제작, 이펍 제작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5개 작품들을 모두 정상적으로 서비스해서 수입을 낼 때까지 3개월은 걸린다.
그때까지 300만원으로 어떻게든 아껴 쓰면 모아둔 돈을 까먹는 일이 덜해질 것이다.
‘그나저나 왜 안 교수님은 나를 선택한 거지?’
다른 비전공자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혹시 단지 내가 소설가 출신이기에 글쓰는 일에 더 친숙하리라 생각하신 건가.
그렇게 따지자면 확실히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는 글쓰는 일을 더 많이 하기는 했지.
그건 그렇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1시 30분이라.’
오후 4시에 수업이 있으니 2시간 정도는 시간이 남는다.
물론 이 시간마저 자습에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로스쿨생의 태도겠지.
적어도 채지은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4층으로 내려가서 구름다리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할 때였다.
“생각을 해봐, 우리하고 같이 스터디를 하는 게 낫다니까?”
“스터디는 서로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건데 그쪽이랑 괜찮겠어?”
“기왕에 스터디를 한다면 동문들끼리 하는 게 나을걸.”
도서관으로 넘어가자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슬쩍 가서 보았는데,
“죄송하지만 그리 말씀하셔도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아요...”
‘엉?’
지은이가 다른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동문이 어쩌고 하는 걸 봐선 서울대 선배들 같은데.
아마도 동문끼리 모인 스터디에 들어오라고 권유하는 모양이었다.
‘동문으로서 후배를 챙겨주는 걸까, 아니면 지은이가 특별해서 그런 걸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구만.
그러고보니 한양대 출신끼리는 뭐 없나?
하긴 우리 한양대학교는 학벌에 의미를 안 둬서 각자도생 느낌이 강하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못 들어간 떨거지라는 느낌 때문에 애교심(愛校心)이 매우 적거든.
‘사실 동문이랍시고 끌고 밀어주고 하는 것도 서연고급의 체급은 되어야 의미 있는 거라.’
오히려 그래서 나는 좋다.
쓸데없이 인간관계에 휘말리는 것보단 혼자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이런 은둔형 성격 때문에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형진이라는 사람, 학부도 낮고 법학을 배워본 적도 없다는데 왜 데리고 가려는 거야?”
“에.”
거기서 그런 말을 박아버리면 상처받는데요.
“최유하도 그렇고 너희 조기졸업자들은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니?”
“좋은 스터디 없이는 내신관리나 로클럭 준비에서 한계가 있는 거 몰라?”
“우린 다 너를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지은아.”
선배들의 말에 잠자코 있던 지은이 입을 열었다.
“네, 다들 저를 위해서 말씀하시는 거 다 알겠어요. 그런데,”
지은이 싸늘한 시선으로 물었다.
“서울대라는 분들이 남 내려치는 말을 하는 게 맞나요? 형진 오빠가 그리 만만해 보여요?”
“뭐?”
그녀의 질문 아닌 질문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자신들의 설득이 먹히는 대신 오히려 반감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설마 로스쿨생들이 주먹다짐을 하겠냐마는 혹시 모르니 은신을 풀었다.
“어, 지은아! 거기 있었냐?”
“어? 오빠...?”
지은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화제의 인물이 등장하니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나는 능청맞게 웃으며 지은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열람실에서 안 보이길래 어디 갔나 했네. 커피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으련?”
“어...”
지은이 내 제안에 혼란스러워했다.
한창 험악해지는 대화 분위기가 갑자기 흐트러지니 어쩔 줄 모르겠지.
나는 일단 그녀를 놔두고 다른 서울대 학생들에게 물었다.
“헤헤, 동기시죠?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커피 어떻습니까? 제가 사드리죠.”
역시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들이 뒷담을 한 장본인으로부터의 제안이니 그럴 수밖에.
대답이 없으니 다시 지은에게로 돌아와서 물었다.
“저분들은 싫은가보다. 넌 갈래?”
“...네.”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건 누구보다도 그녀일 테니.
그래서 손을 내밀자 지은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둘이서 자리를 떠나려고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기요.”
“네?”
지은이의 동문 선배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애 순진하다고 등쳐먹지 마세요.”
“허허...”
이 시발새끼가 웃는 얼굴로 말하니까 사람을 호구로 보나.
자기들이 최고 학벌이라고 해도 콧대 높은 거에 정도가 있어야지.
하지만 화난다고 바로 욕 박으면 하수이기에 한마디 짧게 돌려줬다.
“지는.”
이어서 지은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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