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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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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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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성장(12)

DUMMY

※※※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당진천과 공손령을 적대했다. 당가의 절반을 적으로 돌렸다 봐도 좋았다. 하지만 백연의 마음은 더없이 차분해져 있었다.


‘애초에 이리 될 일이었다.’


당소하와 당진천의 공존은 불가(不可). 당가주가 그에게 말했듯이, 가주가 되지 못하면 당소하는 죽는다.


저들이 입밖에 낸 조건이 진실이라 해도, 상황이 그리 놔두지 않을 것이다. 당소하가 평생을 낭인으로 떠돌며 이름을 버리고 산다면 몰라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조금 더 일찍 시작되게 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 결과.


당장 백연 자신이 조금 위험해질 가능성은 높았다. 앞으로 경기까지 남은 이틀. 저쪽에서 무슨 수작을 부려올지가 궁금해진다.


‘무엇이든.’


백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때였다.


“소가주가.”


화아아아악-!


메마른 음성이 귀를 파고드는 순간, 감각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한순간에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극도의 긴장감.


터무니없이 거대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내공 기파를 비롯한 어떠한 기운도 발출하지 않고 있음에도. 본능이 즉시 반응한 것이었다.


백연의 반대편이었다.


당가주 천독.


막 처소에 돌아온 듯 했는데, 햇살 아래 그늘진 눈매가 백연을 무감하게 응시한다. 늘어진 암녹빛 장포가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사람을 보는 눈은 있구나.”


무심히 던지듯 중얼거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백연을 스친 시선이 그의 뒤로 이어진다. 안에 자리한 이들을 꿰뚫어 보듯이.


압도적인 존재감의 초월자. 소년이 입을 여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진기로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게감이 입술을 다물리게 만든다.


그러나, 천독이 백연의 곁을 막 스쳐지나가는 순간.


“......당가주.”


백연은 느릿하게 입을 여는 것에 성공했다. 호흡이 짓눌리는 듯한 감각 속에서였다. 막 그를 지나쳐가던 천독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백연은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냈다.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언제나 당소하가 천독에 대해 입버릇처럼 하던 말. 그게 정말 진실인지.


“당신은 정녕, 무(武)가 모든것에 앞서는 겁니까?”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천독의 시선이 백연을 향해 힐끗 떨어져 내렸다. 그 속에서 백연은 찰나가 쪼개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직후.


빛바랜 잎사귀 하나가 바람을 타고 백연의 발치에 떨어지고.


“그렇다.”


한없이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그 한마디를 뒤로하고 천독은 그대로 걸어 사라졌다. 펄럭이는 암녹빛 장포의 자취를 보며 백연이 느릿한 한숨을 뱉었다.


“젠장.”


왠지, 입맛이 썼다.



※※※



오후에 이르렀다. 무연봉은 아침보다도 사람으로 더욱 들어차 있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끊일줄을 몰랐다.


흘러넘치는 인파가 산의 능선을 타고 흩어진다. 그 위에 들어찬 가(假) 건물들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본디 엄격하게 무당산을 관리하는 무당파에서도 일시적으로 상인들의 장사를 위해 허용해준 것인데, 그를 위해 얼마나 후원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덕분에 무당산의 능선은 어느 대도시의 상권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여기 당과요. 갓 구워낸 당과가 싸다 싸.”

“검도부창편(劍刀斧槍片), 비도나 암기도 가리지 않고 날을 갈아드립니다. 만년한철(萬年寒鐵)광석으로 된 숫돌은 어디가도 못보는 진귀한 물건이니......”


제각기 목이 터져라 외친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조차 덮어버리는 큼직한 음성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비무제전 본선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었다.


“공손월의 무위를 보았소? 확실히 구파나 오대세가의 기재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소. 저번에야 뇌룡을 만나 그랬지만, 이번에는 분명 높이 올라갈 재목이오.”

“이번에는 종남의 무인들이 꽤 인상적인 성적을 낼 듯 보이던데. 송하라는 청년의 검이 범상치가 않더이다. 투검(鬪劍) 홍유각이 직접 지도한다더니.”

“청성의 어린 아해들은 어떻고? 그 기세가 참으로 날카로웠소.”


점심을 넘어, 늦은 오후에 이르기까지 두시진 사이 이미 여러 경기가 지나갔다. 쟁쟁한 구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 그리고 그들을 맞상대로도 훌륭한 경기를 보이며 승리를 쟁취한 예선의 신성들.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야기할 거리가 끊임이 없었다. 자고로 사람들은 언제나 순위를 매기고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법.


저잣거리 코흘리개 아이들도 검왕과 검제중 누가 더 세니 누가 더 약하니 하는 논쟁을 즐긴다. 천하오대검수도 그 속에서 강약을 따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기 마련. 비무제전은 그런 것이 가장 극대화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무인의 이름은 바람보다 빠르게 사방에 퍼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무림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 꼭 한번씩 끼어들겠지.


“이번은 특히 더 쟁쟁한 이들이 많지 않소? 모든 경기가 눈이 즐겁더구려.”

“인상적인 이들이 많았지.”

“그렇지만 역시 오늘 가장 대단했던 것은 검룡 아니겠소.”

“이번에도 막을자가 없어 보이더구려.”

“우승은 이미 화산의 것이 아닌지.”


모두가 가벼이 논평한다. 일찍 경기를 치룬 검룡 유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들.


그러나 역시 그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것이 곧 비무제전의 가장 큰 재미였으니까.


“우승이라, 아직 시기상조 아니오?”

“검룡을 상대할 이가 누가 있겠소.”

“그야 뇌룡도 있고, 무엇보다 암화가 있지 않소!”


곤륜의 암화. 이제는 이런 논쟁 어디에서나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름이다. 수많은 눈이 그의 행적을 주시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생각은 암화 한명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치뤄진 예선의 여파 때문이었다.


“암화......확실히 곤륜파도 본선에서 괜찮은 성적을 낼지도 모르겠소.”

“어쩌면 구파중에 그보다 밑으로 가는 문파가 꽤 있을지도 모르오.”

“에이. 말도 안되는 소리. 암화 하나면 몰라도 어찌.”

“거, 노인장은 예선을 안봤나보구려? 내가 전 경기를 다 본 입장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한 털보의 입으로 모인다. 당당하게 예선의 모든 경기를 봤다 주장하는 사람. 이윽고 씩 웃은 그가 짧은 논평을 뱉었다.


“곤륜파는 높이 갈것이오. 암화는 우승이고.”

“어허 이사람.”

“과하구먼.”

“너무 확신하는 것 아니오?”


그러나 털보는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그가 가벼이 말을 덧붙였다.


“못 믿겠으면 곧 있을 곤륜파의 경기를 보면 아시겠지.”

“오늘 누가 나오지?”

“조금 있다가 곤륜파의 청율이라는 무인과, 소림의 금강 각정의 경기가 있소.”

“금강? 에잉. 볼것도 없구먼. 금강의 무위가 얼마나 드높은데.”


그러나 털보는 사람들의 의심섞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고 보시오. 내가 무공은 삼류지만 눈은 일류라 자부하니까.”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론은 같은 대화들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예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곤륜파.


그들의 힘이 과연 본선의 쟁쟁한 무인들을 상대로도 통할 것인가. 그것도 그 이름이 드높은 소림의 각정을 상대로.


청율과 각정의 경기가 본선 첫날 상당한 이목을 끄는 경기가 된 이유였다.


그 덕일까.


곤륜파의 소년 소녀들이 도착했을때 경기장은 이미 물샐틈 없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들어올 수 있는지 몰랐다. 이러다가 무너지는 거 아니냐?”


언제나 경기장 아래쪽, 대기 장소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곤륜파의 아이들. 이번에는 아니었다.


본선부터는 규정이 더욱 빡빡하게 관리되는 탓이었다. 문파들을 위해 마련된 객석의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 내려다보니 경기장 위의 무인들이 한없이 작아보인다. 마침 허공을 수놓고 있는 싱그러운 매화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화산파......이 다음이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늦어서 다행이네.”

“사숙은 잘 준비하고 계시려나. 긴장하면 안되는데.”

“걱정마. 아까 얼굴 보니까 웃고 계시더라.”

“그야 사숙은 항상 웃고 있잖아. 긴장해도 티도 안나고.”


백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숙이 긴장을 하긴 하나?”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와 차분하고 산뜻한 사숙이다. 그 안에 담긴 고민이야 백연 자신이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청율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전부를 펼치는 사람.


그리고 그 노력을 겉으로 부러 드러내지도 않는 사람.


백연이 무궁각을 지나칠때마다 청율은 그의 무공과 비급을 연구하고, 스스로 학습하며 깨우치고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백연의 얼굴을 보면 언제 그러고 있었냐는 듯이 웃으며 차를 내주고는 간간히 궁금한 것을 물어보다.


그랬기 때문인지 몰라도 청율은 사형들과 사숙조들을 포함한 곤륜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압도적으로 발전이 빨랐다. 백연이 진득하게 붙어 가르쳐준 적도 없음에도 그랬다.


무궁각주라는 직책 아래 그의 비급을 백연 자신보다도 많이 읽어낸 사람인 까닭일까.


그에 더해 본래 청율이 지니고 있던 풍부한 경험과, 운연동공 이전에도 지니고 있던 운연공의 세월과 무위가 더해졌다.


적어도 사형들이 걱정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 검이 각정에게 통하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걱정말고 보자. 뭐가 되었든.”


백연이 중얼거렸다.


“사숙의 검을.”



※※※



“하루 이틀 정도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좋을법 했는데.”


무대 아래에서 검을 패용하며 중얼거린다. 머리칼을 한켠으로 단아하게 묶어내린 청율이었다.


“아쉽군요.”


그를 향해 눈치를 주는 무당파의 무인이 있었다. 청율은 싱그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정리하고 갈 것이 많았다.


품에서 비급 여러권을 꺼내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보자기에 비급을 담은 청율이 그것을 한번에 덮어 꽉 묶었다. 매듭이 지어지기 직전, 맨 위에 오른 비급의 표지에 적힌 글자가 반쯤 눈에 띄었다.


태청(太淸).


“장문인. 이것을 좀......”

“주거라. 가져다 놓으마.”


유일하게 청율과 동행한 운결이 비급이 담긴 묶음을 건네받았다.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안에 든 비급만 대여섯 권에 달했다.


대회장에 오면서도 비급을 살피기를 멈추지 않은 탓이었다. 읽고 또 읽어 이제는 보지 않고도 술술 써낼 수 있을 정도임에도 무엇이 부족한지.


“다치지 말거라.”

“예.”


운결에게 포권한 청율이 경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태껏 그를 기다리고 있던 무당파의 무인이 한숨과 함께 그를 안내하고.


사박.


어느 순간 청율은 경기장의 위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예선에서 두어번 올라왔던 장소.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사방에 들어찬 사람의 수는 그 어느때보다도 많았고, 그에게 쏟아지는 이목도 마치 폭풍과 같았다.


그리고 건너편.


회색 빛깔 승포를 걸친 승려가 서 있었다. 청율의 키가 작지 않음에도 살풋 올려다 보아야 할법한 체격. 허름한 옷 아래로 언뜻 보이는 근맥이 강철을 엮어낸 것 마냥 단단하다.


“기다리게 해 죄송하군요. 잠시 정리할 것이 있었던지라.”

“아미타불. 괜찮습니다. 무(武)의 겨룸에 있어 모든것을 내보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지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청율도 미소로 화답했다.


머릿속으로는 승려의 무공을 되새기면서였다.


“예선 기간동안 시주의 활약을 보았습니다. 그 검끝에 담긴 고민이 한없이 무겁더군요. 시주의 세월과 고민을 이 손으로 받아낼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받아낼 수 있을지는 보아야겠지요.”


중얼거린 청율이 검을 빼들었다. 건너편의 각정도 기수식을 취하는 것이 보인다. 여타 무인과 다르게 상체를 고정하고, 하체가 단단하게 땅을 짓누르는 모습이다.


호흡이 교차한다. 머릿속에 떠도는 고민을 날숨에 갈음해 가둔다.


‘이길 수 있을까.’


이틀, 아니 하루만 더 주어졌다면. 그런 생각이 재차 스쳤지만 전부 털어냈다.


그렇게 상념이 호흡에 실려 뱉어지고.


삐이이이-!


귓가에 날카로운 음절이 틀어박히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승려가 자리를 박차고 청율의 코앞으로 쇄도해왔다. 상체가 전혀 흔들리지 않음에도 일직선으로 대지를 가르는 움직임이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천하를 논하는 절세 신법의 묘리가 대기를 짓이기며 맹렬한 일권으로 화해 청율을 내리찍으며 자욱한 분진을 일으키고.


쩌어어엉!


그와 동시에 시뻘건 불꽃이 솟아오르며 흩어지는 먼지를 집어삼킨다. 아홉겹 화염의 꽃잎이 혀를 날름거리며 대기를 달궈낸다. 청율의 검끝에서 피어난 불꽃과 주먹이 힘을 겨루는 것도 찰나. 각정의 몸에서 웅혼한 기파가 물결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미타불.”

“......!”


각정이 염불을 외며 돌연 몸을 뒤튼다. 내지른 주먹을 회수하며 손등으로 돌아치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한순간 퍼져나온 황금빛 기파가 불꽃을 간단히 찢어발기며 흩어버렸다. 동시에 그는 일보를 더 내딛어 청율의 검격 안으로 파고들었고, 묵직하게 펼쳐진 일장(一掌)이 그대로 청율의 복부를 후려쳤다.


파아악!


공기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청율의 신형이 뒤로 수장을 날아갔다. 몸을 뒤틀어 경기장 위에 검을 박으며 간신히 멈춰선 그가 크게 각혈했다.


‘속도가.’


압도적이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흔들림 없이 전진해오는 직선적인 보신경. 각정은 금강부동신법에 능하다더니 실로 그렇다.


속도만이 아니었다. 방향을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짓쳐 들어오는 움직임. 그 무게감도 가볍지 않다. 방금 전 일권을 막아낸 것 한번으로 손아귀가 찢어질듯 아파온다.


‘따라붙어야 한다.’


우선은 인지를 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검을 짚으며 일어난 청율은 눈가를 훑듯이 쓸어내렸고, 그의 눈매는 삽시간에 흐르는 듯한 자색 안광으로 물들었다.


그때 각정은 이미 다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주욱 전진하는 신형이 한순간 몸이 늘어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뒤로 날아간 청율과의 간격을 단번에 좁히는 움직임.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쩌엉!


청율의 눈에 비친 각정의 신형은 한줄기 음률처럼 이어지며 사선으로 짓쳐왔고, 궤적을 인지한 청율은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꽃잎같은 화염이 회전하며 각정의 권격을 비껴치고, 뒤이은 여파는 한줄기 광풍이 되어 청율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안법 신공이군요. 신묘합니다.”


직후 이어지는 청율의 검을 짧게 끊어쳐 막아낸 각정이 미소와 함께 뱉었다. 강자의 여유였다. 청율은 그 말에 대답할 틈이 없었다.


이어지는 전진 보법. 또다시 검로를 회피하며 안으로 짓쳐 들어오는 각정의 움직임이 거침없었다. 그와 동시에 청율의 인지와 감각이 극한까지 늘어났고.


화아아악-!


주변의 모든것이 이지러지며 시간이 늘어났다. 간극이었다. 그 속에서 청율은 화신풍으로 후퇴 보법을 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불꽃이 휘감긴 검격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각정의 주먹을 내리쳤다.


콰앙! 쩌저정!


두 무인의 신형이 잔상처럼 이어지며 권격과 검격을 교환했다. 단숨에 간극에 접어든 이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전혀 대등하지 않았다.


금강부동신법의 기파를 휘감은 각정이 소림의 권장법을 포탄마냥 내뻗었다. 찰나지간 일어나는 불꽃은 전부 그 앞에서 삽시간에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자령안으로 보고 있음에도 전부 피할 수가 없다.


백청색 무복이 권법 경파에 조금씩 해지며 찢겨나가기를 반복한다.


쩡!


그 틈새에서 각정의 권장을 찰나지간 끊어낸 청율이 적화검류를 펼치며 반격했으나, 시뻘겋게 달아오른 검은 각정의 어깻죽지를 내리치자마자 바위를 친 것 마냥 굉음과 함께 튕겨나갔다.


외공 금강불괴(金剛不壞)였다. 신체를 강철마냥 단단하게 단련해주는데, 그 강도가 어지간한 검격으로는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 금강 각정이 그 별호를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콰아앙! 카각! 쩌저정!


두 신형이 얽혀들었다 풀려난다. 그렇게 연격을 이어내길 한참. 어느 순간 한차례 더 가속한 각정이 그대로 웅혼한 기파를 끌어모아 강렬한 권격을 내치고.


콰앙!


다시 한번 청율의 신형이 뒤로 튕겨나갔다. 주욱 미끄러진 청년이 기침과 함께 경기장 끄트머리에 간신히 멈춰섰다.


“하아, 하.”


거친 호흡에 피냄새가 섞여 나온다. 비릿한 맛을 삼키며 청율이 눈앞을 응시했다. 각정은 여전히 호흡 한점 흐트러지지 않은채로 기파를 조율하고 있었다.


‘역시.’


강하다.


그가 세상을 유람할 적, 자주 이름과 그 별호를 들어보았던 승려이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임에도 소림의 미래를 이끌 인재중 하나라 평가 받던 인물. 당시의 자신은 이렇게 각정과 손을 섞을 상황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올라 있었다.


비록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다 하더라도.


“어렵군요. 아이들에게 자신있는 양 말해뒀는데.”


후우.


숨을 뱉으며 청율이 몸을 바로세웠다. 그런 그를 기다린 듯 가만히 서 기파를 그러모으고 있는 각정.


청율은 그런 각정의 모습을 응시하며 가만히 생각했다.


이대로는 이길수가 없었다. 잘 알고 있다. 자령안으로 어찌저찌 각정의 속도와 투로를 따라간다 해도, 그의 적화검류로는 각정의 금강불괴를 뚫어낼 힘이 부족했다. 창명류수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축기량으로는 각정을 짓누르기는 커녕 역으로 찍혀눌릴터.


적화검류나, 창명류수검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곤륜의 무공에는 부족한 점이 없었다.


백연이 엮어낸 무공. 그 아이가 지금 여기에 서 있었다면 적화검류의 불꽃 하나만으로 간단히 각정의 방어를 뚫어내고 화염을 흩뿌렸겠지.


그것은 삼재(三才)로도 천하를 논할 자질의 차이였으며, 검을 파고드는 의지의 차이였으며, 소년이 걸어온 무도(武道)의 무게가 지니는 힘이었다.


백연이 청율보다 짧은 세월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청율 자신은 그저 책에 새겨진 구결을 파고들어 머릿속에 새겨넣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기에. 백연의 일검에 담긴 고민과 의념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했다.


앞서 간 이의 길을 훔쳐보고, 흉내내는 것이 전부인 사람.


그러나 청율은 그것에 좌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백연의 모든 무공과 비급을 파고들었고, 해석했으며 의념을 따라가고자 노력했다. 소년의 흔적만이나마 좇을 수 있게.


청율은 그리 간극에 닿았고, 백연의 무공에 닿았다.


그리고 지금.


“시주의 검은 제 외공을 뚫지 못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시겠습니까.”


정중히 물어오는 각정을 향해 청율이 미소를 지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는 못 이기는다는 것을.”


단순히 각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선에서 쟁쟁한 이들을 넘어서기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백연의 곁에서 더 강대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신강에서 백연이 돌아온 이후부터 줄곧 파고들고 해석하고 있었다. 모든 구결과 의념은 선명히 머릿속에 새겨진지 오래. 그것을 감당하기에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잠깐은 손에 쥘 수 있을것 같군요.”

“아미타불. 시주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각정이 말하며 손을 말아쥔다. 그와 함께 강렬한 기파가 청율을 짓누를 듯 퍼져나왔다. 그것을 응시하며 청율이 검을 비스듬히 뻗어냈다.


‘수기를 역(逆)으로. 화기의 회전과 충돌을 시켜.’


머릿속에 박아넣듯 새긴 구절들.


-갈라진 모든 기운은 임독맥을 따라 한갈래로 합쳐든다. 앞으로 솟은 기운은 천돌혈(天突穴)을 통하고, 뒤로 솟은 기운은 옥침혈(玉枕穴)을 관통한다. 그리하여 상단전 백회혈(百會穴)에서 합일을 이룬다.


소년의 고민과 의념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면 된다.


청율 자신만의 일검을 엮어내지 못한다면 앞서가는 이의 등을 뒤따르면 된다.


‘벼락을.’


백연이 가고 있는 길은 결국 언제고 곤륜파의 검이 나아가야 할 지점이다. 청율 자신이 그 두번째 걸음을 내딛어도 괜찮겠지.


“흐읍!”


기합성과 함께 웅혼한 법력 기파가 터져나왔다. 길게 벌어진 간합 속에서 각정이 권법을 내질렀다. 닿지도 않을 거리건만, 휘어진 기파는 곧 하나의 거대한 포탄같은 경파가 되어 청율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백보신권(百步神拳)의 거대한 권격 경파가 청율을 짓이길듯 짓쳐왔다. 그 속도와 여파가 한없이 쾌속했다. 간극 속에서도 거침없다 느껴질 만큼.


찰나였다.


문득 청율의 검끝이 희게 물들었다.


몸에서 분분히 튀어오르는 기운의 여파로 인해 단정하게 묶여있던 머리칼이 꿈결처럼 흩어진다. 세맥을 가득 채우고 질주하는 기운은 더 이상 차갑고 뜨거운 수화(水火)의 기파가 아니었다.


작열하듯 달아오른 상단전이 한순간 자령안의 공능을 극도로 증폭시키고.


쩌저저저저정!


한줄기 벼락이 일었다. 단숨에 펼쳐진 용형보의 구결이 권격 경파를 반으로 갈라냈고, 어느 순간 청율이 서 있던 자리에서부터 각정의 코앞까지 시린 백색 뇌광(雷光)이 실타래마냥 분분히 흩어지고 있었다.


“아미타......!”


염불을 외며 몸을 뒤튼 각정의 어깨로 청율의 검이 희끗한 빛살을 일으키며 스치고.


직후.


파아악-!


벼락 줄기를 타고 붉은 핏물이 점점이 튀어올랐다.


작가의말

즐거운 명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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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만천(滿天)(3) +9 24.02.16 2,982 83 19쪽
188 만천(滿天)(2) +8 24.02.14 3,016 82 15쪽
187 만천(滿天) +6 24.02.13 3,016 78 15쪽
186 성장(13) +6 24.02.12 3,003 76 21쪽
» 성장(12) +6 24.02.10 3,140 78 21쪽
184 성장(11) +7 24.02.09 3,022 77 19쪽
183 성장(10) +6 24.02.08 2,985 79 15쪽
182 성장(9) +5 24.02.07 3,045 77 17쪽
181 성장(8) +7 24.02.06 3,136 77 16쪽
180 성장(7) +6 24.02.05 3,140 74 17쪽
179 성장(6) +6 24.02.03 3,251 77 16쪽
178 성장(5) +6 24.02.02 3,213 78 16쪽
177 성장(4) +4 24.02.01 3,309 76 15쪽
176 성장(3) +7 24.01.31 3,305 79 17쪽
175 성장(2) +4 24.01.30 3,234 80 17쪽
174 성장 +7 24.01.29 3,303 81 17쪽
173 음모(3) +5 24.01.27 3,344 85 18쪽
172 음모(2) +5 24.01.26 3,193 86 16쪽
171 음모 +6 24.01.25 3,263 84 15쪽
170 세월의 무학(3) +6 24.01.24 3,269 89 17쪽
169 세월의 무학(2) +6 24.01.23 3,268 82 20쪽
168 세월의 무학 +5 24.01.22 3,346 83 16쪽
167 운해비영(3) +6 24.01.20 3,412 81 15쪽
166 운해비영(2) +8 24.01.19 3,298 89 17쪽
165 운해비영 +7 24.01.18 3,253 83 15쪽
164 예선(9) +6 24.01.17 3,308 82 18쪽
163 예선(8) +7 24.01.16 3,161 82 19쪽
162 예선(7) +9 24.01.15 3,216 87 19쪽
161 예선(6) +6 24.01.13 3,357 9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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