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21 18:10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1,829,245
추천수 :
36,080
글자수 :
2,707,079

작성
24.01.16 18:10
조회
3,161
추천
82
글자
19쪽

예선(8)

DUMMY

※※※



“이제 보여?”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도현을 향해 백연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사형의 얼굴에 새겨진 표정이 다채로웠다. 무언가 느낀게 있었는지.


“......응. 보인다.”


끄덕이는 모습이 여전히 전투의 감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했다. 백연은 가만히 웃었다.


경기를 보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현이 온전히 창명류수검의 감각을 일깨웠다는 사실을.


본래부터 지독하게 연습해댔던 도현이다. 그렇게 허구한날 그와 유성에게 두들겨 맞으며 감각을 다듬어놨는데, 이제 와서 저정도 공격 하나 못막고 패배할리가 없었다. 창명류수검의 기본은 공세를 파악하는 감각.


도현은 이미 수많은 수련을 통해 그것을 가지고 있었고 사용했을 뿐이었다.


한번 깨달았으니 이제는 쉬이 잊혀지지 않을 터.


만족스러운 경기였다. 내용 면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이젠 확실히 반응이 오네.’


백연이 객석을 가늠했다. 개막전의 소홍. 그리고 이어진 단휘와 도현의 연속된 대진.


처음 소홍의 경기 직후엔 당황이 깃들었던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이제 옅은 환호마저 느껴졌다. 단휘와 도현은 전혀 상반된 경기를 보였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확실히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것이 아니었다. 오늘 곤륜파에 배정된 것은 네번의 대진.


그리고 그 마지막이 남아있었다.


“설향 사저.”


백연이 말하자 설향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길다란 흑발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투명한 시선이 언제나와 같았다.


그녀의 상대가 약하지 않다고 들었다. 백연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은 설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은 이미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뇌룡이 보고 있어.”

“......아.”


설향이 작게 입을 벌렸다. 백연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 시선을 던진 그녀의 눈매가 좁혀졌다.


저편 멀리, 객석에 앉은 무인이 보인다.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흑발이 여기서 보아도 눈에 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음에도 그 존재감이 선명한 악예린.


“보여주고 와.”

“응.”


설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부 쏟아붓고 올게.”



※※※



날이 기울었다. 서편을 가득 물들인 햇살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무연봉의 위로는 환한 등불이 줄줄이 매달렸다.


대낮처럼 환했다. 밤이 찾아오고 있음에도 그 열기는 사그라들줄 몰랐다. 하루 종일 이어진 예선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무당산에서 밤을 지새게 될 줄이야.”

“비무제전 기간동안은 이런 일이 꽤 있을건 예상했지 않소?”

“첫날부터 이럴줄은 몰랐네.”


평범한 이들의 대화가 아니었다. 거대한 표국과 상단들. 여전히 무연봉 위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객석에 앉아 있었다.


본래라면 이미 잠자리를 찾아 무당산 아랫자락으로 내려갔을 사람들이다. 허나 그들은 시간이 늦었음에도 객석에 굳건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언제라고 했는지 아나?”

“이 다다음인가 다음인가 모르겠소.”

“형산파 송엽과의 대진인가. 이번에는 어쩔련지.”


이유는 한가지였다. 곤륜파의 대진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건 꼭 보고 가야하네. 곤륜의 힘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알아야 해.”

“거참. 앞에 세 번 봤으면 충분한거 아니오?”

“움직이는 돈이 돈이니만큼 신중해야지.”


그랬다. 단순히 경기 몇번을 보고 움직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로 새로운 상행길을 만들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돈은 어마어마했다. 평소 오가던 길부터 취급하는 물건까지 모조리 수정하고 새로 장부를 짜는 대작업.


쉬이 취급할 것이 아닌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비무제전에 와 동향을 확인하고 즉시 움직이는 이들은 이미 발이 지극히 빠른 사람들이었다.


“한번만 더......아니, 맘 같아서는 암화의 경기까지 확인하고 싶네만.”

“그건 굳이 볼 것이 있소?”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걸 함부로 믿지 말게.”


중얼거린 노(老) 상인 상관책이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다 이윽고 덧붙였다.


“물론 이미 앞선 세 사람의 대진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지만 말일세.”


아직,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가 적어도 오늘의 마지막 대진까지 보기 위해 기다린 이유가 그것이었다. 형산파 송엽과, 곤륜파 설향이라는 무인의 경기.


송엽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유망한 무인이었다. 형산파의 기재로 나이는 어리지만 크게 기대를 받고 있는 소년이다. 그 성정이 조금 오만한 것이 흠이라곤 했으나 이미 운무십삼검(雲霧十三劍)의 초식을 일깨웠다고 만방에 소문이 자자했다.


혹자는 지금보다 어릴적의 검룡과 비교하기도 한다고.


상관책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검룡은 천외천의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검룡을 언급시킬 만큼 나름의 재능이 있다는 것은 사실.


당장의 무공 성취도 상당할 터였다. 이번이 첫번째 비무제전 참가지만, 이미 그 전에 몇차례 호남 등지의 대회에서 빼어난 실력으로 우승한 일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송엽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


허나.


오늘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날이었다. 상관책은 가끔 그런 날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상황과 상식을 부정하고, 느낌을 따라야 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가 평생 지녀온 상인의 직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비정한 업계에서 살아남게 해준 직감.


그리고 그 직감은 지금 분명, 곤륜파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허.”


갑자기 상관책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왜 웃고 그러시오? 무섭게.”

“아닐세. 그냥 즐거워져서 말이야.”

“즐거울게 따로 있소. 난 피곤하구만.”

“안 즐거운가?”


상관책이 손을 펼쳤다. 이렇게 앉아 곤륜파의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이 상황.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오른다. 그저 새로운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보게. 정파 무림의 중심에 마지막으로 변화가 있었던 때가 언제인지 아나?”

“모르오.”

“모산파가 구파의 일좌에 올랐을때네. 그게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때야.”


급격하게 강성해진 모산파가 구파일방의 자리에 들어서고, 지금 무림의 질서가 확립되었다. 그 뒤로 수많은 크고 작은 문파와 가문들이 융성해졌다 쇠락하기를 반복했으나 중심을 지키고 선 힘은 굳건했다.


“난 또 뭐라고. 이제 예선 첫날이오. 그리 흥분하는건 비무제전이 끝나고 해도 충분하지 않겠소? 성적을 잘 냈던 중소문파가 지금까지 한두개도 아니고, 본선에 가보면 또 다를텐데.”

“그래도 무언가 다르네. 많이 달라.”


상관책이 중얼거렸다. 그가 주름진 손을 비볐다.


“과거에 육파일방의 일좌에 올랐었던 문파라고 들었네. 어쩌면, 우리는 잠들었던 거룡이 다시금 깨어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지도 몰라.”

“꿈이 참으로 크시오. 왜, 용을 깨우는 것에 일조하게?”

“그리 되면 참으로 즐겁겠지.”


상관책이 웃었다. 알 수 없는 기대감과 희열이 차올랐다. 마치 아주 거대한 판돈을 건 도박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우선은 준비해놓게. 마지막 경기 결과에 상관 없이 곤륜파의 장문인을 적어도 한번은 뵈어야 해.”

“이미 아까 해놨소.”

“우선적으로 빠르게 제공할 수 있는 물류 목록은 뽑아놨나? 당장 보는 손해는 해동(海東)쪽과의 교류에서 나오는 이득으로 무마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게.”

“거 상단 살림 거덜내겠소이다.”

“판돈은 걸때는 과감하게 거는 것이네.”


손을 모은 상관책이 경기장에 눈을 고정했다. 마침 경기가 끝나고 저편 아래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도 화사한 연홍빛 무복과 백청색 장포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경기인 모양이었다. 경기장 밑에서 움직이는 긴 흑발의 여인이 보였다.


천천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떨림에 상관책이 주름진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여줄련지. 기대를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



송엽은 자신감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그것이 지나쳐 다른 이들을 깔아볼 정도로.


“형산파의 송엽입니다.”

“곤륜파의 설향이라고 합니다.”


경기장 위에서 서로 예를 갖추고 통성명하는 지금도 그랬다. 송엽은 언제나처럼 상대방을 쉽게 가늠했다. 그가 함부로 평하지 않는 것은 같은 배분 내에서는 칠룡밖에 없었다.


‘꽤 예쁘군.’


송엽이 생각했다.


눈앞의 여인의 외양에 대한 평이었다.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많았으나 같은 삼대 제자의 배분이다.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새하얀 얼굴과 더불어 길게 늘어진 흑발이 인상적이었다. 내리누른 듯한 수수함이었으나 그 외양은 예쁘다 평할만 했다.


‘얼굴은 조심해야겠어.’


만일 검을 펼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손해였다. 그는 여인의 얼굴에 검흔을 남긴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그 상대의 미모가 뛰어날 경우에는 더욱 더.


이미 진다는 가능성은 송엽의 머리속에 없었다. 앞에 벌어진 곤륜파의 경기들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다른 무인들이 너무 약했다고 생각했다.


곤륜파가 저력이 있다고는 하나, 벌써 이 나이에 검룡과 비견되는 자신에 비할바는 아닐 것이다. 혹여나 암화가 상대라면 모를까.


‘암화와도 붙어보고 싶은데.’


갑자기 튀어나와 명성을 드높이는 그 소년이 송엽은 그다지 탐탁치 않았다. 본래 자신의 이름이 한창 높아질 시기였건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이번 비무제전을 그의 이름을 드높이는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우승을 노려보고, 그것이 안되더라도 최소한 칠룡중에 하나를 꺾는 것을 목표로. 그 과정에서 암화를 눌러줄 수 있다면 더 좋았다.


“한수 부탁드리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수(先手)는 양보하겠습니다.”


송엽이 말했다. 그에 설향의 눈썹이 살풋 꿈틀거렸다. 그러나 송엽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대회인건 알고 계시지요?”

“예. 아리따우신 분께 먼저 검을 휘두르는 것은 마음이 좋지 못해서 그럽니다.”

“......”


설향이 눈을 깜빡였다. 무표정에 가까운 그녀를 보며 송엽은 검을 빼들었다. 역시 검을 쳐서 경기장 바깥으로 떨구는 것이 무난하겠지. 목덜미에 칼을 붙이거나 하는 것은 너무 위협적이다.


송엽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설향이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문득 송엽은 상대방의 눈이 약간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느꼈다. 착각인지.


“그럼 받아가겠습니다.”

“예. 얼마든ㅈ......”


쿠웅.


그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동시에 여상히 서 있던 설향의 신형이 섬전처럼 가속했다. 그녀의 뒤편으로 붉은 선율이 잔영처럼 흩어졌다.


콰앙!


송엽이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그의 코앞에 진각을 박아넣은 설향의 눈가를 타고는 흐르는 듯한 자색 광채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눈을 부릅뜬 송엽이 반사적으로 방어초를 펼치려는 순간.


화아아악!


한자락의 화려한 불꽃이 경기장의 허공에 피어올랐다. 시야를 가르며 쇄도하는 붉은 줄기를 인지한 송엽이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쩌엉!


‘무슨 힘이!’


송엽이 속으로 경악성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꽃잎같은 불꽃이 시야 전체를 휘감았다. 초격에 이은 삼연격.


콰앙! 쾅! 콰앙!


한번 한번의 검격이 모조리 빠르고 강렬했다. 비정상적인 속도와 힘이었다. 눈앞의 가녀린 여인에게서 나올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삼연격을 막아낸 송엽은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허나 공격은 끊어지지 않았다. 삼연격에 이어지는 검로가 화려했다. 찰나지간 그의 코앞의 허공에 수십번 이어지는 검격이 지극히 쾌속했다. 대기를 그어낸 열기가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 직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선수가 후하시네요. 대체 몇초식이나 주시려고.”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설향의 어투가 빈정거리는 듯하다는 사실은 송엽의 머리에 닿을 틈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에 수십의 검로를 새긴 설향이 진각을 내려찍는 것과 동시에 불꽃의 검로가 일제히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화아아아악!


대기를 잠식한 적화검류의 검로가, 하나하나 제각기 화화(火花)가 되어 피어난다. 수십장의 화염으로 자아낸 꽃잎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송엽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죽는다.’


공격에 묻어있는 진득한 살기. 그 어느때보다도 선명한 살기를 눈앞에서 마주한 송엽은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설향은 진심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막아야......!’


송엽이 황급히 몸을 뒤틀었다.


그의 검끝이 바르르 떨리며 운무십삼검의 초식을 토해냈다. 형산파의 기재라는 소문답게 반응이 나쁘다 말할 수 없었다.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검초를 엮어내는 모습이 그랬다.


옅은 안개같은 기파가 허공을 진하게 물들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검격이 불꽃을 어떻게든 막아내고자 겹겹이 이어졌다.


그러나.


‘부족해!’


송엽은 검을 펼치면서도 깨닫고 있었다. 이대로는 저 검격에 난자당하고 만다. 이를 악문 그가 방어초를 펼치며 그대로 후퇴 보법을 밟았다.


파바바박!


직후였다. 송엽이 간신히 피한 자리를 휘몰아치는 불꽃이 휩쓸었다.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린 탓에 바닥을 한바퀴 구른 송엽이었으나, 자세를 가다듬을 여유도 없었다.


휘릭-


불꽃과 안개를 풀어헤치며 전진하는 여인의 신형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등 뒤로 나풀거리는 흑발이 마치 악귀나찰의 흑포와 같아 보였다. 머리칼 사이로 분분히 흩어지는 불티가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그와 함께 자색 안광이 흐르는 눈이 섬뜩했다. 기파를 줄줄 흘리며 다가오는 속도가 지나치게 쾌속했다.


쩌엉!


검격을 간신히 비껴 막은 송엽이 터져나오는 기침을 삼켰다. 검에 실린 힘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분명히 그가 용력은 더 뛰어날 것임에도.


그때 재차 대기를 가르는 설향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검신에서 불꽃이 터지듯 뿜어져 나오며 공중에 잔영을 새겼다. 급격하게 가속한 검신이 삽시간에 그의 코앞으로 짓쳐왔다.


이를 악문 송엽이 검을 억지로 자신과 설향의 검 사이에 끼워넣었다. 찰나지간 검신에 막대한 힘이 전해지고.


콰아아앙!


그의 신형이 날듯이 뒤로 떠밀렸다. 바닥을 두바퀴나 구른 그가 그대로 땅을 박찼다.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부러 밀려나며 위험을 회피한 것이었다.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이었다.


공세 전환이 필요했다. 이제 더 이상 선수니 뭐니 하는 말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몰아치는 불꽃의 폭풍을 어떻게든 끊어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송엽의 마음에 깃들었다.


마구잡이로 설향에게 내뻗는 검격. 허나 그럼에도 운무십삼검 초식의 형(形)과 구결이 깃들어 있었다. 소년의 오성이 받쳐주는 탓이었다.


단 두걸음을 확보한 것으로 공세를 만들었다. 쇄도하는 검격이 유령같은 운무를 휘감고 설향의 허리를 양단할 듯한 횡격을 자아냈다.


그 순간.


송엽은 눈앞의 검이 일순 분열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설향이 뻗어낸 검끝이 바르르 떨리며 흩어졌다. 삽시간에 아홉번 허공을 그어내는 연격.


직후 설향의 검끝에서, 아홉겹 불꽃의 꽃잎이 피어났다. 설향의 옅은 음성과 함께였다.


“화화구벽(火花九壁).”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불꽃의 벽이 운무십삼검의 초식을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불살랐다. 뻗어나가는 여파조차 아홉겹 방벽을 뚫어내지 못하고 소멸했다. 동시에 불꽃의 벽 너머에서 짓쳐오는 검격이 강렬했다.


쩡! 쩌엉!


두차례의 검격이 뒤따르고. 한자루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직후 불꽃을 휘감은 설향의 검이 섬뜩한 살기를 싣고 송엽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파아아앙!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열기가 후끈하게 코앞을 물들였다. 그의 눈앞에서 멈춘 설향의 검을 보며 송엽이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설향이었다.


“패배를 인정하거나, 전투 불능, 또는 사망에 이를때까지 경기는 이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직 안 끝났......”

“졌, 졌습니다. 졌어요!”


소년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그것을 귀에 담으며 설향이 천천히 검끝을 내렸다.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가 주변을 살폈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묘한 침묵이 내려앉은 객석도.


그때였다.


[형산파 송엽 대 곤륜파 설향의 대전은, 설향의 승리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직후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객석에 앉은 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 사이에서 암화와 불꽃을 언급하는 음성들이 잔뜩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설향이 미소를 지었다.


한편.


“인상적이군.”


객석에서의 대화였다. 자리에 앉은 당소하가 피곤한 기색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여전히 팽악과 함께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옆에 다른 사람도 함께 앉아 있었다.


“검이 더 날카로워졌네. 내가 봐줄때는 저정도는 아니었어.”

“......너랑 백연이 함께 괴물들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만.”


당소하의 말에 유성이 웃었다. 한편 그 옆에 앉아있던 팽악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당소하.”

“왜.”

“내가 내기는 이겼다. 전승이잖나.”

“젠장.”


당소하가 손을 튕기자 은자가 허공을 날아 팽악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숨을 내쉰 당소하가 경기장을 응시했다. 천천히 걸어내려가는 설향의 등을 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하필 마지막에 불꽃을 보여주다니. 일부러 저렇게 한건가 궁금한데.”

“아닐거야. 백연은 항상 최선을 다하는걸 좋아하니까.”

“뭐,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는 성공적이다.”


당소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회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였다. 곤륜파의 전승은 그 자체로도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전개 과정이 더욱 인상깊게 뇌리에 남았다. 소홍의 헌위를 상대로 한 놀라운 승리로 시작해, 압도적인 단휘의 쾌검을 보여주고, 한없이 깔끔한 방어의 도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을 불꽃, 적화검류로 장식했다.


처음 암화라는 별호가 생긴 계기와 곤륜파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과정을 생각하면 묘한 일이었다. 비록 근래 보았던 백연은 불꽃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으나, 세간에서는 여전히 암화를 상징하는 것은 불꽃이었으니까.


아직까지도 들떠있는 객석의 목소리들을 듣던 당소하가 피식 웃었다.


“곤륜파의 이름......이번 주 내내 예선을 불태울 화제가 되겠군.”


아직 백연은 검식 한자락 펼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암화(暗火)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0 만천(滿天)(4) +7 24.02.17 3,074 86 19쪽
189 만천(滿天)(3) +9 24.02.16 2,982 83 19쪽
188 만천(滿天)(2) +8 24.02.14 3,016 82 15쪽
187 만천(滿天) +6 24.02.13 3,016 78 15쪽
186 성장(13) +6 24.02.12 3,004 76 21쪽
185 성장(12) +6 24.02.10 3,140 78 21쪽
184 성장(11) +7 24.02.09 3,023 77 19쪽
183 성장(10) +6 24.02.08 2,985 79 15쪽
182 성장(9) +5 24.02.07 3,045 77 17쪽
181 성장(8) +7 24.02.06 3,136 77 16쪽
180 성장(7) +6 24.02.05 3,140 74 17쪽
179 성장(6) +6 24.02.03 3,251 77 16쪽
178 성장(5) +6 24.02.02 3,213 78 16쪽
177 성장(4) +4 24.02.01 3,309 76 15쪽
176 성장(3) +7 24.01.31 3,305 79 17쪽
175 성장(2) +4 24.01.30 3,235 80 17쪽
174 성장 +7 24.01.29 3,303 81 17쪽
173 음모(3) +5 24.01.27 3,344 85 18쪽
172 음모(2) +5 24.01.26 3,193 86 16쪽
171 음모 +6 24.01.25 3,263 84 15쪽
170 세월의 무학(3) +6 24.01.24 3,269 89 17쪽
169 세월의 무학(2) +6 24.01.23 3,268 82 20쪽
168 세월의 무학 +5 24.01.22 3,346 83 16쪽
167 운해비영(3) +6 24.01.20 3,412 81 15쪽
166 운해비영(2) +8 24.01.19 3,298 89 17쪽
165 운해비영 +7 24.01.18 3,253 83 15쪽
164 예선(9) +6 24.01.17 3,308 82 18쪽
» 예선(8) +7 24.01.16 3,162 82 19쪽
162 예선(7) +9 24.01.15 3,216 87 19쪽
161 예선(6) +6 24.01.13 3,357 90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