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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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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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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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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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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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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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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5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35화


“납치라니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어요?”


진짜 납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43호는 늦지 않게 대답했다. 자신이 시우에게 쓸모가 있다는 걸 계속 어필해야 했다. 아무거나 해서도 안 됐고, 아무것도 못해서도 안 됐다. 이 동앗줄이 제대로 된 줄인지 천천히 검증해야 했고, 천천히가 안 된다면 최소한 확실히 검증해야 했다.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쫓기는 중이다.”


“쫓기는 중이요?”


A급 헌터를 쫓아? 초인에게 맞으면 얼마나 아플지 궁금하기라도 했나?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이다.


...S급 헌터의 생일날 생일빵이라며 얼굴에 케이크를 집어 던지지 않았던 이상, 쫓길 일은 없을 거 같은데.


“말하자면 길다. 누명을 썼어.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누명이면 도망치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43호는 살인 누명이라는 말에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죄수를 몇이나 공격하고 죽였다. 직접 죽인 녀석은 많지 않지만, 모든 공격은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행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도 죽였다. 그가 먼저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를 죽인 건 43호 자신이었다.


“시우 헌터님은 A급이잖아요. 돈으로 찍어 누르지도 못할 거고, 힘으로 찍어 누르지도 못할 거고, 사사건건 달라붙어서 불편하게 굴지도 못할 텐데. 만약에 유죄 나와도,”


그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미르한은 10여전 선례를 만들었다. 변호사시험에 몇 번이고 나온 판례였다. 헌터의 활동에 관한 특별법.


이런저런 조항 다 밀어 놓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헌터는 내란음모를 제외한 모든 형사적 소송 절차에 보석금을 요청할 수 있었다.


사형, 징역, 금고, 자격상실/자격정지, 벌금, 구류, 과료, 몰수까지. 한국의 모든 형사적 처벌 중, 벌금 이상의 형벌이 나왔을 때는 벌금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물론 벌금의 액수는 법원에서 헌터들에게 괘씸한 마음을 담아 빈정거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소액이었다.


“누명이면 증거도 없다는 거 아니에요?”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거 보니까 진짜 태어난 지 네 달 된 클론이 맞기는 하네. 그 두 달 동안 조리돌림 엄청 당할거야. 온갖 잡스러운, 자칭 언론이라는 것들이 아주 씹고 뜯고 지랄을 할 거다.”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지는지, 시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누가 목숨 걸고 던전에 들어가서 쳐맞아 가면서 마수들이 못 기어나오게 막고 있는데, 증거도 없으면서 그딴 소리나 늘어놔...하여간 그 꼬라지 보기 싫어. 그냥 버틸래.”


“숙이고 들어가기 싫다는 뜻이세요?”


43호는 알면서도 물었다.

시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지는 거 같잖아. 자존심 부린다고 해도 좋아.”


자존심으로 하는 일이라고.


“좋아요. 그런데 왜 제가 필요한지 정도는 말해 주시면,”


“말 놔.”


“네?”


“그 얼굴로 존댓말하니까 도저히 적응이 안 돼. 편하게 말해 줘.”


시우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극존칭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43호는 눈을 한두 번 깜빡이고, 반쯤 부동자세를 취하던 몸을 여유 있게 벽에 기댔다.


“시우. 그럼 내가 왜 필요한지 말해줘. 어디 던전 들어가서 버틸 거면 혼자서 버티는 게 났지 않아? 이런 말하지는 뭐하지만, 나 이제 C급이야. 시우한테는 그냥 짐일 텐데.”


“말하자면 긴데, 헌터관리지원실을 압박할 카드가 있어야 돼. 맨날 칼질이나 해 대는 우리가 뭔 끈이 있어서 법무부나 사법부하고 협상하고 형량 조절하겠어? 헌터관리지원실 통해서 하는 거지.”


43호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내리치며 생각했다.


헌터관리지원실은 헌터, 그 중에서 주전력인 고위 헌터의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주려 존재하는 기관이었다.


즉, 원래라면 이런 누명 드라마는 헌터관리지원실이 허락해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이유는 뭔가 거래를 했거나 빛을 졌기 때문인데,


‘우리 훈련할 때 썼던 죄수들.’


강한 헌터 한 명을 풀어주는 건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16년 전부터 세상을 구하는 건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한 초인의 힘이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때마다 나라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의 피해가 일어난다. 바다 건너 옆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해(라고 쓰고 무력을 기반으로 한 당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헌터들을 통제하려 했다.


고위 헌터가 아주 사소한 죄라고 지었다면, 그들의 가족들까지 감옥에 쳐넣었다. 힘이 있는 만큼 더 강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탱크와 돈과 우스깡스러운 사회주의를 앞세워 쌓아올린 권력이 힘 좀 센 인간 몇몇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안 그래도 넓은 나라, 게이트 브레이크가 쉴 세 없이 터졌다. 그 전에 던전의 보스를 잡아 게이트를 닫아야 할 헌터들은 전부 감옥에 있었다. 헌터들 대신 게이트에 투입한 특수부대원들은 던전의 마력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게이트 안에서 튀어나온 강한 마수들은 가는 길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약한 마수들은 도시의 그림자 안에서 번식하며 머릿수를 늘렸다.


결국, 자국 영토에 핵미사일을 떨어트리는 초강수까지 두어야 했다.


파괴된 도시들과 방사능 오염 지역을 정화시키는 데에 드는 추정 예산안에는 0이 전화번호보다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천문학에서나 나올 것 같은 숫자였다.


정부는 긴축 재정을 선포하고, 사회복지와 연금을 줄여야 했다. 술과 담배, 명품과 자동차 같은 기호, 사치품에 고가의 특별세도 물려야 했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의로 체계는 붕괴했고,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과로로 죽어갔다.


관이 부족해서 시신들을 자루에 담아야 했고, 나중에는 단체로 화장한 뒤 비닐봉투에 담아 가져가야 했다.


물론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행복이었다.


가족과 친지의 시신조차 건지지 못한 사람들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지지율과 인민들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뒤로 당은 고위 헌터들을 전부 입당시키고 권력을 나누어주었다. 던전 진압을 위해, 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안 되는 것도 되는 것으로 변했다.


이 일은 새 시대의 새 위협과 새 권력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로 각국 정치인들의 마음속에 남았다.


‘강한 헌터들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하지만, 국민들이 큰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전력에서 아주 중요하지는 않은 E, D급 하위권 헌터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처벌하고 뉴스거리로 삼지. 봐라, 헌터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간다. 이렇게 보여주는 거야. 자존심 죽여 가며 애써 모은 헌터 죄수들을 헌터관리지원실에서 이유도 안 밝히고 뺏어갔으니 화가 날 만도 해.’


43호는 찌푸린 미간을 피고 유쾌하게 탄성했다.


‘이거 우리 때문이잖아.’


물론 시우에게 굳이 밝힐 마음은 없었다.


“알았어. 나를 도피 중에 헌터지원관리실과 협상할 카드로 쓰겠다면, 좋아. 그런데 도피 계획은 있어? 어디 섬 같은 데라도 틀어박혀 있을 거야? 아니면...”


“계획이야 있지. 이럴 때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별장들이랑 안전 가옥도 많아. 그런데 한 번 또 다른 던전에 들어가야 돼.”


“던전은 왜? 아니 그보다 이렇게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 있어?”


“게이트-광산 몰라? 우리 블루문 길드가 게이트-광산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데? 하나당 월수입이 몇 조 단위야. 아무튼 거기 한 번 들어갔다 와야 돼.”


시우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43호는 그 웃음 안에 뭔가 어색함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매일 같은 얼굴을 한 형제자매들을 보고 살면서, 그들의 성격과 감정을 구분했다. 미묘한 얼굴 근육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아무튼이라 하지 말자.”


43호는 시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눈이 마주쳤다.


43호는 침묵을 어색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시우는 침묵을 어색해하는 성격이었다.


먼저 백기를 든 건 시우였다. 강대한 A급 헌터는 허리춤의 갑옷 사이로 손을 넣어 옆구리에 끼고 다닐 만한 클러치 백 하나를 집어들었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클러치에는 파충류 가죽 같은 비늘무늬 질감이 선명했다.


“이거, 뭘로 만든 거 같아? 어디에 쓰는 거 같아? 나 처음 봤을 때 어딘가 짐이 단촐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다지 큰 던전도 아니라는 이 개미굴, 클론들은 모두 50리터급 등산가방을 매고 왔다. 하지만 시우는 가방은커녕 물병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강인한 상급 헌터라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뭐 도마뱀이나 악어 가죽인 거 같은데?”


시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바위비늘용 가죽이야. S급 헌터 박은성이 게이트-광산에서 잡은 걸, S급 헌터 라지아하고 독일에서 초청해온 S급 제작계 헌터가 협업해서 만든 거야. 이 가방 하나가 삼천억이 넘거든? 왜 그런지 알아?”


“모, 몰라. 아무리 드래곤 가죽이라고 그렇게 비쌀 수가...”


43호는 거대개미에게 물어뜯긴 표정으로 클러치 백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헌터 업계가 인플레이션이 심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비쌀 줄은 몰랐다.


‘삼천억이면...진짜 어지간한 빌딩보다 비싸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다지 멋진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안에 수납공간이 8천 리터쯤 돼. 보여줄까?”


순간 달라져버린 단위에 43호는 눈을 깜빡였다.


‘8천 리터면...우리 가방 하나가 50리터니까. 우리 가방 스무 개가 천 리터. 우리 가방 160개?’


“설마 그 가방에 아공간 마법 같은 거라도 걸려 있는 거에요?”


시우는 가방 안에서 1.5리터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수병이 가방보다 확실히 컸다.


“맞아. 아공간 마법 걸려 있어. 드래곤이 얼마나 강한지는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아무나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지. 그 가죽을 가공해서 쓸 수는 있는 형태로 바꾸는 것도 아무 제작계 헌터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라지아 님 정도나 되니까 그 고역스럽게 단단한 바위비늘용 가죽을 가공한 거야. 그리고 아공간 마법을 이렇게 영구적으로 새기는 건 라지아 님이 초청했다는 독일 장인분밖에 못 해. 그분도 혼자서는 못 해서 라지아 님이랑 같이 한 거야.”


“그 정도면 확실히 가격이 어마어마하기는 하겠네요. 그런데 꼭 드래곤 가죽을 써야 돼요?”


“용종 가죽이 아니면 아공간 마법을 버티지 못해. 용종이라도 웜이나 와이번이나 드래이크나 린트부름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어. 진룡이나 고룡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일단 드래곤이어야 해.”


“그래서 처음에 그 가방은 왜?”


시우는 아,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이 가방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돈이 별로 없었어.”


“A급 헌터잖아? 왜?”


43호는 말을 놓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다른 장비 몇 개 맞추고 나니까 수천억 들어온 통장이 텅텅 비더라고. 무형검이 그렇게 비쌀 줄은 몰랐어. 아무튼, 그래서 가방 사전예약 예약금을 못 넣을 뻔했어.”


“그래서?”


43호는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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