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8부. 변계량(卞季良)-집현전 설치
왕이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1420년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궁궐 안 : 경복궁 수정전(景福宮 修政殿) - 근정전 서쪽, 경회루 남쪽에 위치
1420년 3월 16일(갑신), 집현전의 인원수를 정하고 관원을 임명했다.
유관‧변계량을 대제학에, 탁신(卓愼)‧이수(李隨)를 제학에, 신장(申檣)‧김자(金赭)를 직제학에, 어변갑(魚變甲)‧김상직(金尙直)을 응교(應敎)에, 설순(偰循)‧유상지(兪尙智)를 교리(校理)에, 유효통(兪孝通)‧안지(安止)를 수찬(修撰)에, 김돈(金墩)‧최만리(崔萬理)를 박사(博士)에 임명했다.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했다.
동시대에 세자를 함께 가르치고 집현전 설립 때 제학이었던 이수(李隨 1374~1430년 4월17일)가 먼저 졸했다.
1430년 4월 23일(계사),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죽었다. 밀양부(密陽府) 사람 변옥란(玉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살에 고시대귀(古詩對句)를 외고 6살에 비로소 글귀를 지었다.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의 문인이었다. 14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살에 생원 시험에 합격했으며, 1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 주부(典校主簿)에 보직(補職)되어 여러 번 옮겨 사헌시사(司憲侍史)가 되고, 성균 악정(成均樂正)을 지나 직예문관(直藝文館)‧사재 소감 겸 예문 응교(司宰少監兼藝文應敎)‧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을 지냈다. 1407년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의 제1등으로 뽑혀서 특별히 예조 우참의에 임명되고, 1409년에 예문관 제학에 승진했다.
1417년에 예문 대제학에 임명되고 1418년에 예조판서로 옮겼다가 이내 의정부 참찬으로 옮겼다. 그 다음 해 1419년에 왜놈들이 우리나라 남쪽 변경을 침략하여 죽이고 약탈함이 많았는데, 이방원이 그의 말을 취하여 정벌(征伐)하기로 했다. 1426년에 판우군 도총제 부사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2살이었다.
부고를 듣자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고 부의와 관(棺)을 하사하며, 동궁도 부의로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을 내리었다. 변계량이 문형(文衡 대제학)을 거의 20년 동안이나 맡아서 대국을 섬기고 이웃 나라를 교제하는 사명(詞命)이 그 손에서 많이 나왔고,
시험을 주장하여 선비를 뽑는 데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하여, 전조(前朝)의 함부로 부정(不正)하게 하던 습관을 다 고쳤으며, 일을 의논하고 의문을 해결하는 데에 이따금 다른 사람의 상상 밖에 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文)을 맡은 대신으로서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며, 하늘에 절하는 일까지 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식자들이 조롱했다.
처음에 철원 부사 권총(權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버리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었다가 죽고, 또 이촌(李村)의 딸에게 장가들어 몇 달 만에 버리고, 또 도총제 박언충(朴彦忠)의 딸에게 장가드니, 아내가 있으면서 다른 아내에게 장가들었다는 일로서 유사들의 탄핵하는 바가 되었다. 마침내 아들이 없고, 비첩(婢妾)의 아들이 있으니, 이름이 영수(英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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