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부. 여리(黎利)가 황제로 즉위하다
여리(黎利)는 1428년 3월 15일 동경(東京 : 하노이)에서 국호를 다시 대월[大越, 다이비엣(Đại Việt)]이라 정하고 후 여왕조[後 黎王朝)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논공을 행하여, 정가(鄭可 1403~1451), 정렬(丁列 ?~1471), 완치(阮廌 1380~1442), 여은(黎銀) ?~1437), 여찰(黎察 ?~1437), 진원한(陳元扞 ?~1429), 범문교(范文巧 ?~1430) 7인은 홍비(紅緋)를 입을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명나라는 교지(交阯)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를 철폐하고 여리(黎利)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했다.
1428년, 한 번 매국노는 또 한 번 매국을 바랐다. 양여홀(梁汝笏), 두유충(杜維忠), 진봉(陳封) 등이 무리를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했다. 명나라로 사람을 보내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의 서신이 태원진(太原鎭 : 태원성 태원시)의 상장(上將) 황원의(黃原懿)에 의해 중도에서 탈취되었고, 여리는 서신을 보낸 자를 죽인 뒤 그 일을 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공모자 중 한 사람이 여리에게 밀고했다. 그가 서술한 내용과 서신의 내용이 일치하자 여리가 조서를 내려 양여홀(梁汝笏), 두유충(杜維忠), 진봉(陳封) 등을 주살했다.
어느 날, 여리가 환검호변(還劍湖邊) 정자에서 깜박 졸았는데 금빛 거북이 나타났다. 스스로를 용왕의 사자라 밝힌 거북은 평화가 찾아왔으니 앞서 용왕께서 주셨던 보검을 돌려주도록 계시했고, 그는 호수 한복판에서 가까운 작은 섬에 그 보검을 묻었다.
완치(阮廌)
대우[大虞 다이응우(Đại Ngu)]는 다시 대월(大越)으로 새롭게 재건됐고, 완치(阮廌)는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승상에 오른 이후 대월의 여러 가지 제도들을 정비했지만, 권력다툼에 밀려 야인으로 전락하고 시골로 돌아가서 글을 쓰면서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1442년 7월, 여리가 죽고 여 태종(黎太宗) 여원룡(黎元龍 1423~1442, 재위 1433~1442)이 지령현(至靈縣 : 海興省 芝靈縣, 하노이와 하이퐁 중산 지역, 강북)에서 군사를 사열했다. 당시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 지령현에 머물던 완치(阮廌)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 완치(阮廌)를 모시고 있던 그의 젊은 첩을 데려가 자신을 시봉하게 했다. 여원룡(黎元龍)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정현(嘉定縣 : 지령현 강건너 남안)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죽었다.
조정에서는 완치가 왕을 시해했다고 여겨 완치를 체포한 뒤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그가 죽은 후 바로 누명을 벗고 사면되었고, 그의 삶은 한 영웅의 초상으로 아직도 민중의 가슴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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