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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님의 서재입니다.

배반의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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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케이투
작품등록일 :
2019.12.26 14:55
최근연재일 :
2020.01.20 12:00
연재수 :
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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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02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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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479

작성
19.12.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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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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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글자
20쪽

1장. 이주자들 (2)

DUMMY

3.

케이는 우주선의 문을 지나 탑승구로 나가 짧은 통로를 걸은 뒤

에어 록을 지나 셔틀로 들어갔다. 인공 중력이 사라져 몸이 붕 떠올랐다.

작은 셔틀에는 중력자 발생 장치가 없었다.

케이는 벽과 의자를 번갈아 짚으며 왕복선 안으로 들어갔다.

버스처럼 좁은 공간에 좌우 3열로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케이는 작은 창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진초록 행성이 보였다. ‘뉴 파라다이스’였다.

대륙 일부와 넓은 바다가 어두운 초록색과 검은 파란색을 띠며 무겁게 앉아 있었다.

‘뉴 파라다이스’에는 A와 B, 두 개의 대륙이 있지만

A대륙은 바다에 얕게 잠겨 있어 인간은 B대륙에 거주하고 있었다.

B대륙의 남반부에는 구름이 몰려 있고 북반부의 왼쪽도 구름이 열 지어 있었다.

구름 행렬은 지구와 비슷했으나 대륙이 자아내는 어두운 초록의 색감이

이곳에 거대한 비밀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케이는 알 수 없는 위압감 속에 '뉴 파라다이스'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행성 ‘뉴 파라다이스’는 거의 수직으로 서있었다.

그래서 적도 부근은 항성의 빛이 폭사되어 기온이

언제나 50도 이상이며 계절은 거의 없다.

지구보다 조금 큰 크기에 중력도 조금 강하지만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불편하지 않다.

대기 중 산소 비율이 지구보다 조금 높은 것 외에는

거의 동일한 대기 성분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항성과 위성이 각각 두 개라는 점이었다.


행성 파라다이스는 그중 작은 항성 H49를 1.3AU의 거리에서 돌고 있었다.

큰 항성 H50은 작은 항성보다 2배 컸지만 거리는

거의 0.1광년이나 떨어져 있어 행성에 주는 영향은 적었다.

행성의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는 지구와 비슷했다.

몇 종류의 무해한 바이러스가 바닷속에서 발견되었고

‘큰 이끼’라는 한 종의 식물체 외에는 조금이라도 발달한 생명체는 없었다.

아직 발견 안 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걸 막기 위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지정된 수원의 물만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 이주하는 지구인들에게

귀찮다면 귀찮은 점이었다.


정신없이 밖을 보고 있는 케이 옆에 젊고 건장한 백인이 앉았다.

백인은 자신을 폴이라 했다.


“입수가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난 서핑을 한 번 해볼 테야.”


폴은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며 태평양에서 서핑 했던 추억을 늘어놓았다.

스포츠광이라는 폴은 ‘뉴 파라다이스’에서는

마음 편히 스포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단언했다.


“지구에서는 난 대부분 백수였지. 직장은 딱 3년 다녔어.

인공지능이 내 자리를 차지한 후 서핑으로 시간을 때웠고,

농구로 땀을 뺐어.

하지만 직업 없이 스포츠로만 시간을 보내는 건 별로 즐겁지 않은 일이야.

한순간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으니까. 이젠 다시 즐겁게 스포츠를 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 나는 ‘뉴 파라다이스’로 내려가

이 행성에서 살았던 원주민을 찾을 거야.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걸로 유명해지고 돈도 벌어놔야 해.

어차피 여기에도 인공지능이 몰려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외계인은 멸망했다고 하지 않나.

10만 년 전에 자기들끼리 일으킨 전쟁으로 다 죽었다고.”


“아냐, 문명을 가졌다는 종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리는 없어.

어딘가 숨어 있어. 나는 물에 잠겨있다는 A대륙이 수상쩍어.

얕은 곳은 무릎 정도의 깊이라는 데

그런 곳이라면 충분히 은신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폴은 자신감을 드러내며 팔을 뻗어 창밖의 바다를 가리켰다.

케이가 농담 삼아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원주민이 아니라 괴물이 있다고 하던데.”


“아, 그 괴담. 그건 그냥 괴담 아냐?

처음 딛는 땅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두려움이 만든 얘기지.”


‘뉴 파라다이스’에 존재했다는 문명의 잔재는

이주하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원천이었다.

열 번의 행성 탐사를 거쳐 정부와 과학자들은

‘뉴 파라다이스’에 있던 문명과 원주민들은 완전히 절멸했다고 발표했지만,

살아남은 원주민이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는 괴담이

지구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정부연합은 그런 괴담을 단호히 부정했다.


인공지능 네트워크 ‘퀸’도 정부 편에 섰다.

‘퀸’은 10만 년 전에 ‘뉴 파라다이스’에서 발생했던 광대한 지각변동과

기후 변화, 그리고 방사능 오염으로

고등 생명체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제로로 봤다.


대중은 정부보다 ‘퀸’을 더 신뢰했다.

‘퀸’의 계산이 없었더라면 중력의 중첩으로

뒤틀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퀸’이 없었더라면 뒤틀린 공간끼리 겹치는 점을 통해

공간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퀸’이 없었더라면 홍수와 가뭄으로 점철된 이상기후 하에

120억이나 되는 인간이 먹을 식량을 생산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퀸’이 아니었더라면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생계수단인

기초 소득을 개인별로 정확히 산출하고 분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퀸’이 주인이 사라진 ‘뉴 파라다이스’에 새로운 생명의 씨를 뿌리고

문명을 세울 기회라 말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잃고 기초 소득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은

서둘러 공간을 넘을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우주선 제작과 관련된 대기업에 전례 없는 호황이 시작되었다.


케이와 폴은 ‘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출발을 기다렸지만

셔틀은 움직이지 않았다.

셔틀은 지구에서 보내온 설비, 자동차, 의약품, 종자, 건축자재, 기호품 등

온갖 잡다한 물건을 싣는 데 다시 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뉴 파라다이스’의 어두운 부분으로 내려갔다.



4.

케이가 ‘뉴 파라다이스’의 뉴욕 공항에 발을 디딘 것은 늦은 밤이었다.

지구보다 더 짙은 어둠속에서 두 개의 위성이 동쪽 끝과 하늘 중앙에 떠있었다.

동쪽 끝에 있는 위성은 달의1/3 정도, 하늘 중앙의 위성은

달의 반 정도 크기로 알려졌지만, 거리 차이로 인해 눈에 잡히는 크기는

둘 다 달의 반 정도였다.

사람들의 눈은 윗부분 1/4 정도가 떨어져 나간 하늘 중앙의 위성에 고정되었다.


“소문의 주인공이군!”


폴이 중앙의 위성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폴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10만 년 전에 이 행성의 원주민이 위성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아마 지들끼리 전쟁을 하다가 저렇게 날려버렸을 거라는 거야.

그 조각이 여기로 떨어져 지진이 일어나고,

기후변화가 생기고 핵시설이 파괴돼 방사능에 덮여

생명체가 깡그리 죽었을 확률이 99.9%라고 '퀸'이 분석했지.”


케이도 그런 기사를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케이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지름이 2천km나 되는 위성의 일부를 파괴할 정도의 무기가 무엇인지

‘퀸’이 말하지 않아서였다.


“그들이 정말 그랬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했을까?”


케이의 혼잣말에 폴이 얼굴을 돌려 케이를 보았다.


“절망 때문이지 않았을까? 어차피 죽을 것,

같이 죽자는 가미카제 정신 말이야!”


셔틀에서 내린 100명의 경비대원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뉴욕 파라다이스 공항을 2열로 가로질렀다.

밤이지만 셔틀로부터 하역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곳곳에 켜진 조명이 길을 밝혔지만,

빛이 약해지는 곳에서는 바로 어둠이 시작되었다.

‘뉴 파라다이스’에서 어둠은 빌딩과 사람과 상점들로

가득 찬 도시의 불빛이 밤을 지배하는 지구와는

확실히 다른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케이는‘뉴 파라다이스’의 밤이 더 어두운 것이 찢겨나간 위성이

반사하는 빛이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지 건물 앞에서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원들은 인솔자의 구령에 따라 버스 앞에 섰다.

찌그러진 달과 깊은 어둠속에서 경비대원 사이에는 다시 긴장이 흘렀다.

대원들은 인솔자의 명령에 따라 3대의 버스에 분산해 올랐다.

어둠속에서 또 다른 셔틀이 착륙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걸어왔던 쪽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보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컴퓨터로 운전되는 자율운전 차가 아니었다.

버스마다 운전사가 있었다. 대원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구에서는 사라진 직업이 여기에는 있다는 사실에

이제 모두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모두가 웃음을 머금고 우주를 건너온 자신들의 선택이 맞았다는데

안도하기 시작했다.


버스는 잘 포장된 왕복 2차선 도로를 빠르고 시원하게 달렸다.

오른쪽에 도시의 불빛이 있었다.

그곳이 이 행성의 수도, ‘뉴욕 파라다이스’ 같았다.

불빛은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대원들은 도시의 불빛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직업을 갖고, 살아갈 일을 생각했다.

그러다 대원들은 풀어지는 몸에 곧 잠이 들었다.


대략 두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잠을 깨 버스를 내렸다.

군부대 분위기가 물씬한 1층짜리 슬래브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카키색 군복 차림의 키 큰 백인 여자와 남자가

유일한 2층 건물 앞에서 그들을 맞았다.

대원들은 백인 여자가 지시하는 대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입구에서 유동식 식사와 물이 든 상자와 일상용품이 든 작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지구에서 가져온 인당 3kg으로 제한된 개인 물품도 찾을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2층 침대가 늘어서 있었다.

케이는 아래층 침대 하나를 잡아 짐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처럼 물을 마시고 죽 같은 유동식을 먹었다.

그리고 샤워장으로 가 샤워를 하고 백인 여자의 지시에 따라

수면제와 회복에 필요하다는 몇 가지 약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5.

앤은 이른 아침에 ‘뉴욕 파라다이스’공항에 내렸다.

아침 햇살은 지구보다 따사로웠고 공기는 청명했다.

앤은 두 개의 해가 뜬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나는 지구의 해처럼 동전보다 조금 더 컸지만

다른 하나는 밝게 작열하는 점으로 보였다.

앤은 낯선 하늘 풍경에 자신이 다른 행성에 왔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공항은 지구의 여느 공항과 다르지 않게 엉성함과 분주함이 섞여 있었다.

앤과 일반 이주자들은 가축 몰리듯 공항 안으로 들어가 신원을 확인하고,

지구에서 이송된 은행 자료에 따라 직불 카드를 받은 후,

개인 휴대품이 담긴 3㎏ 짜리 가방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공항 밖으로 나와 이주민 지원센터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잘 뚫린 길을 달리는 동안 앤과 사람들은

나무 하나 없는 검푸르고 굴곡진 들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큰 이끼’들판에는 새나 나비 같은 어떤 생명의 징조도 없었다.

햇빛과 바람 아래서 어두운 녹색만이 무거운 정적 속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불길함과 이질감이 버스 엔진 소리를 제치고 사람들에게 감겨들었다.

버스 속의 사람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적을 거부하듯 눈을 감았고 곧 잠들었다.

버스가 ‘뉴욕 파라다이스’에 들어설 때까지 아무도 눈을 뜨지 않았다.


‘뉴욕 파라다이스’는 18세기 유럽의 어느 도시 같았다.

철골 콘크리트의 현대식 건물들이 서 있던 홍보용 사진과는 달리

바둑판 형태로 정돈된 길을 따라

5층 이하의 거대한 석조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뉴욕 파라다이스’의 거리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앤과 사람들은

두 개의 항성과 장대하고 엄숙한 돌벽의 질감에 위축되며

이방인으로서의 호기심과 외로움을 짙게 느껴야만 했다.


앤이 탄 버스가 장식 없는 돌로 마감한 긴 석조 건물 앞에 섰다.

석조 건물의 높은 문 옆에는 '이주민 지원센터'라는 간판이 위엄 있게 걸려있었다.

이주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넓은 로비로 들어가 접수처 앞에서 줄지어 섰다.

앤은 신원을 등록하고 열 개의 침대가 놓인 큰 방으로 안내되어

침대 하나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이주자들에게 파우치에 든 유동식이 제공되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나자 창의 커튼이 내려지고

앤과 이주자들은 반강제적으로 수면에 들어갔다.


앤이 잠을 깬 것은 늦은 오후였다.

지원센터 직원의 안내로 가벼운 샤워를 하고

이번에는 1층에 있는 넓은 식당에서 유동식을 먹었다.

그리고 간단한 건강 진단을 받고나서야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앤은 직원이 안내해준 공용 전화기로 가

언니가 보내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언니의 목소리대신 결번 안내가 나왔다.

앤은 당황했다. 직원에게 전화번호를 문의했지만 결번을 확인받았을 뿐이었다.

언니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앤은 다음 날 아침까지 잠을 잤다.

유동식에 수면 성분이 들어있는 모양인지 의식 불명 상태와 비슷한 수면이었다.

그 덕에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 의자에 앉았을 때, 머리는 맑고 몸은 가뿐했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아침 식사는 콘티넨탈 블랙퍼스트로 간단했지만

앤과 이주자들은 5년 만에 처음 먹어보는 빵과 차였다.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가 사람들 사이에서 물결처럼 지나갔다.

식당에는 곧 활기가 찼고 시끌벅적하기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자 직업 상담이 시작되었다.

기술이 있거나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주민 센터를 떠났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개인별로 심층 상담에 들어갔다.

앤도 그중 한명이었다.


앤은 무뚝뚝한 동남 아시아계 중년 여자 상담사와 마주 앉았다.

앤은 언니가 동영상에 실어 보낸 주소를 상담사에게 내밀었다.

영상 속의 주소를 본 상담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주소는 없는 주소예요. ‘뉴욕 파라다이스’에는 문화가(街)가 없어요.”


“뭐라고요? 이건 귀환한 우주선을 통해 전달받은 거예요.

어떻게 없는 주소를 메일과 영상에 넣을 수 있죠?”


상담사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요.

‘프린세스’ 아, 여기의 인공지능 말이에요.

그 ‘프린세스’가 검열하는 과정에서 변형이 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공간을 넘으면서 저장된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에요.”


망연자실해 하는 앤이 보기가 안됐든지

상담사는 컴퓨터에서 언니 이름을 검색했다.


“언니가 왔다는 시기의 입국자 명단에는 언니 이름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정보가 없어요.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죠. 일단 사망자 명단에는 없으니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일반 이주자들은 여기서 나가면 모든 게 자유에요.

기록이 남기 힘들죠.

우선 파라넷의 사람 찾기 난에 등록해 놓으세요.

지구를 먼저 떠난 친구나 친척을 만나는데 효과가 좋다고들 해요.”


언니 얘기를 마친 상담사는 앤을 걱정스레 보았다.


“언니는 나중에라도 찾으면 되지만,

먼저 본인 걱정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구에서의 직업이?”


“역사 교사요. 문화센터에서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중세사를 강의했어요.”


상담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흘렀다.


“여기는 그런 지적 여유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죠.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글쎄요, 언니는 이곳에 인공지능도 없고 로봇도 없다고 했어요.

인간이 모든 걸 다 한다고 해서 여기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 했어요.”


상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로봇은 없다 해도 교사 자리는

먼저 이주한 사람들로 완전히 차 있답니다.

이번 주 만해도 만 명의 사람들이 여기로 왔잖아요?

원하는 자리가 날 때까지 앤 양 같은 분들에게는 일단 경비대 일이 있어요.

개척지 농장을 습격하는 먼스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직업이죠.”


“먼스터요? 습격요?”


앤은 화들짝 놀랐다. 괴물의 습격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예, 먼스터가 있어요. 개척 마을을 습격해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죠.

하지만 결국 우리가 이길 거예요.”


상담사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띠었다.


“먼스터라면 어떤 먼스터죠? 지구에서는 왜 그걸 모르고 있죠?”


“별거 아닌 거예요. 그냥 몸으로 달려드는 짐승 같은 거죠.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렇게 정착하지 못했을 거예요.

지구에는 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가 하면,

글쎄요, 공간을 넘어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기는 어렵겠죠.

우리 같은 비전문가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개척자니까 인디언과 싸웠던 필그림처럼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먼스터와 싸워야 하는 수밖에요.”


앤은 우주선을 탔던 사람 대부분이 경비대원 표식을 달았고,

셔틀에도 우선적으로 탑승하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 보니 그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경비대원이란 결국은 군인과 같은 일이군요,

그런 일은 나에게는 안 어울릴 것 같아요.”


상담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럼, 농장에서나 공장에서 작업자로 일해야 하는데

‘뉴 파라다이스’는 아직 그렇게 공장이 많이 들어서지 않았답니다.

빈자리가 생길 때까지는 자유직업으로 그때그때 나오는

임시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어요.”


상담사는 위압적으로 말하며 이주민지원센터에는

사흘만 머물 수 있다는 규칙을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앤 양은 내일 오후에는 여기를 나가야 합니다.”


상담사는 앤에게 현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듯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앤 양같이 젊은 여성들은 힘든 일을 하지 않고 편한 일만 찾으려 하죠.

그러다 유흥가로 빠지는 사례들이 많아요.

그 끝은 안 좋아요. 모든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고 이 행성에 와

지구에서보다 비참한 처지가 되는 거죠.

일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일단 채석장이라도 가세요.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여자가 할 수 일도 있어요.”


앤은 잠시 고민했지만 곧 머리를 흔들었다.


“난 ‘뉴욕 파라다이스’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언니가 걱정돼요. 언니는 분명 여기에 있을 거예요.”


상담사가 한숨을 내쉬며 자유업 구직자로 등록하겠다고 했다.

앤의 상담은 그렇게 끝났다.


앤은 스마트폰을 샀다.

파라넷에 자신의 이름과 프로필을 등록하고 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스마트폰 가격은 지구의 세 배나 되었다.

지구로부터 수입하기 때문이라는 직원의 설명에도 쉽게 납득 되지 않았다.

이제 앤의 카드 잔액이 천 달러가 남지 않게 되었다.

지구에서 저축하고 있던 돈 중 대부분은

신체검사 등 우주선을 타기 전 준비 과정과 탑승료에 보태고

그나마 남아있던 돈이 또 줄어든 것이다.

상담사의 말처럼 언니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시간이 남자 앤은 지원센터를 나와 ‘뉴욕 파라다이스’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18세기풍의 건물들 사이에 22세기의 최첨단 차들이 달리는 모습이 어색했다.

거리의 전면을 장악한 상점에는 종업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종업원 있었다.

로봇이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이 일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지구보다는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을 구한다는 말은 없었다.

앤은 자신이 늦게 왔음을 깨달았다. 언니의 소식을 기다리지 않고

개척자 정신으로 먼저 우주선을 탔어야 했다.

상담사의 말처럼 이제는 개척 마을의 농부나 경비대원 자리 외에는

자리가 없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앤이 힘없이 이주자 지원센터로 돌아오는 중,

길을 잘못 들어 건물의 뒷길로 들어갔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얼굴이 화상으로 엉겨 붙은 노숙자들이

뒷골목 여기저기서 웅크리고 있었다. 앤은 서둘러 뒷길을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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