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레트류 님의 서재입니다.

10월 1일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중·단편

레트류
작품등록일 :
2020.10.11 14:23
최근연재일 :
2020.10.15 22:26
연재수 :
3 회
조회수 :
96
추천수 :
0
글자수 :
6,171

작성
20.10.11 14:24
조회
75
추천
0
글자
5쪽

9월 30일

DUMMY

날이 밝았다.


눈을 뜬 장소는 숲 속.

붕대로 동여맨 온몸을 부여안고,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붙들기 위해 잠시 잠을 청했던 그 장소 그대로.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또한,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100명이 넘는 마왕 토벌대가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 내에 그렇게 전멸할 줄은 알지 못했고.

어느새 세 명밖에 남지 않은 토벌대가 한 명으로 줄어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 명조차,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라질 것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한 명이라도, 다른 이들과는 반대되게 임무를 포기한 채 도망갈 수는 없었다.

희망을 품었던 시절에 세운 덧없는 약속 때문인지. 복수심에 타오르는 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죽음을 맞든 편할 수 없다는 체념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곧 부러질 것 같이 덜렁거리는 목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해, 너덜거리는 몸을 일으킨다.

무던히도 끝자락을 태워가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한다.


햇빛 새어오는 보랏빛 안개 낀 숲 사이.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발 디딜 틈 없이 풀과 줄기 무성한 숲을 천천히 걸어나가면.

마왕이 사는 성이 나올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의 해골이 그녀가 받아야 할 업보처럼 쌓여있는, 황금빛 궁전이 나올 것이다.

모두의 목적지였으나, 결국 나만의 종착지로만 남을 곳.

결국 목표에는 도달했으나, 목적은 이루지 못한 불완전한 실패만이 남을 곳.

옮기는 걸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닌, 도살당하기 위한 것. 이 절그럭거리는 몸으로는, 그 하찮은 몸짓마저도 버거운 것.

죽은 이들이 내 꼴사나운 모습을 본다면. 먼저 사명을 위해 죽어간 동료가 내 어리석은 모습을 본다면.

누군가는 나를 조롱할 것이고, 누군가는 나를 책망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게 심심한 위로를 건넬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비웃음이나 원망조차 좋다.

차라리 누군가가 이 걸음을 멈춰준다면.


산 너머에서 떠오른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멍청히 서 있을 시간.

절뚝거리는 다리를 비틀어 끌며, 궁전의 길고 높은 계단을 오른다.

전부 금과 은을 섞어 만들어 사치스럽게 보였을 계단은, 수많은 자의 피가 눌어붙어 혐오스러운 색을 띠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지팡이 끝으로 계단을 찍어 그 자국을 긁어내지만. 나 혼자로는 턱도 없는 일.

그래서, 그저 올랐다.

누군가의 몸뚱이에서, 혹은 눈에서 흘러 나왔을 길고 넓게 이어지는 핏자국을 지나쳐.

분명 제각기 개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다 똑같은 뼈가 되어버린 무더기를 지나쳐.

투쟁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부러지고 갈라진 채 풍화된 갑주와 무기를 지나쳐.


"잘 왔다!"


고장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다리.

불어터진 풍선처럼 끊임없이 요동치는 심장.

남은 생명을 부지하겠다고 거친 들숨을 내쉬며 다물어지지 않는 입.

그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순간 끌어모은 것은, 아이의 것처럼 천진한 목소리.

힘겹게 고개를 들어 마주한 것은 마왕 에를마르.

성인보다는 아이의 체형에 가까운 마왕은, 유치한 옷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색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저 까만 흰자위와 피색 눈동자에 묻어나오는 잔인함이, 저놈이 악마가 맞다는 것을 증명할 뿐.

침이 질질 흘러나오는 입가에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저런 놈 하나 쓰러트리지 못해서, 세상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인가.


"여기까지 왔다니, 용하다.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지!"


자비도 깊은 마왕이올시고.

쓸모없어진 다리 대신 나를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를 내던진다.

그 여파로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이제는 그 무엇도 상관없다.

자랑스럽다는 듯 위엄 없는 외침을 내뱉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마왕.

그 빌어먹을 마왕을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새긴다.

내 옷 앞섬 안에 손을 넣는다.


"나는, 마왕 토벌대의 4분대 대장. 엔빌 나르타즈."


꺼낸 것은 품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단검 하나.

모든 짐을 버리고 도망갈 때도. 동료를 버리고 도망칠 때도 놓치지 않았던 삶의 끝자락 하나.

모두가 사라져 세상에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들을 마주할 마지막 약속으로 남겨놓았던, 어설픈 도피 하나.


"네놈 마왕, 에를마르 다크포스 모가지를 따러 오셨다."


그 덧없는 것을 꺼내, 놈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번쩍이는 것은, 섬광.

내리깔리는 것은, 어둠.


태양은 하늘의 중천에 찬란히 떠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저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10월 1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 9월 28일 20.10.15 8 0 5쪽
2 9월 29일 20.10.13 13 0 5쪽
» 9월 30일 20.10.11 75 0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