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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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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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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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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449

작성
13.03.2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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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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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외전- 크리스티나 브리트니

DUMMY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다. 낡은 기억이라 온전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묘한 두근거림과 설렘이다. 참을 수 없는 욕망만이 가득한 지금과 비교하면 참으로 풋풋한 기억이었다.

어릴 적엔 아버지를 따라 왕궁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그 때 왕궁을 놀러 가는 것은 어린아이에겐 그저 아버지와의 외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열세 살 즈음으로 기억한다. 당시 어린 나는 드넓은 왕궁 안에서 길을 잃었었다.

반짝거리는 호수에 마음을 빼앗겼던 게 문제였다. 얌전히 아버지가 볼 일을 보고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주위로부터 극찬을 받아온 기억력이라 너무 과신했다.

"뭐가 이렇게 넓어!"

도저히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찾아가려 할수록 처음 보는 괴상한 곳들만 나올 뿐이다.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당황해서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길이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평민들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그 정도는 영민한 머리로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침 앞에 키 큰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거기. 너."

사내가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고작해야 자신보다 너덧 살 많은 소년일 뿐이었다. 아마 키가 워낙 커서 어른일 줄 착각했나보다. 어쨌든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예복이나 갑옷을 입지 않으면서 혼자 다니는 경우는 대부분 평민이라고 했으니 그도 마찬가지겠지.

"너. 평민이지?"

나는 그에게 말을 걸면서 그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짧게 자른 갈색머리와 똑 부러지게 생긴 외모가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리는지. 아름답다는 표현이 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다소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아무리 성년 전에는 직분이 없다 해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어. 나이도 어린 게 예의를 모르는구나."

정말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정말 몇 번을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그동안 공주마냥 떠받들어졌긴 해도 그가 한 말은 고작 그게 전부였는데. 나는 치미는 호기심에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대답했다.

"난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브리트니. 넌 이름이 뭐야?"

"슈아죌 실러. 브리트니 가문이군. 어쨌든 반말하지 마. 언제 봤다고."

"응. 얘, 내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국왕폐하가 계신 곳으로 좀 데려다 줘."

"거절한다. 내가 왜?"

"곤경에 처한 레이디잖아. 좀 도와줘."

그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곤 레이디? 너 같은 꼬마가? 라고 비웃은 뒤 이마를 붙잡고 남은 웃음을 뱉어냈다. 웃는 모습이 눈부시다. 처음으로 물건이 아닌 사람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갖고 싶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반드시 그를 가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날 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거절이란 걸 당했다. 자작가는 안 된다고, 너는 공작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그게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아무리 떼를 쓰고 고집을 부려도 소용없었다. 나는 시위를 시작했다. 춤, 교양, 역사, 경제, 정치 등 배우던 모든 학문을 거부하고 침실에 몸져누웠다. 식사도 하지 않았다. 가족모임에도 불참했다. 고작 열세 살짜리의 파격적인 시위였다. 내가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독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결국 아버지의 백기를 받아냈다. 단, 백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시집은 안 된다, 그를 데릴사위로 들이고 넌 공작위를 받아라. 그리고 혼인은 지금 당장이 아닌 5년 후에 한다. 아마도 당신은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호감이니 오 년 안으로 싹 가실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난 다시 학學을 시작했다. 지자로서는 최고의 명예라는 에스탄시아의 화관을 17살 때 수여받았다. 최연소 수여자를 4년이나 앞당긴 기록이었다. 일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들었다. 천재, 로미니의 복, 브리트니 가문의 희망. 좋다. 다 좋다. 하지만 그런 건 어차피 뒷전이었다. 내 머릿속 한편엔 언제나처럼 누군가의 얼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나고 오 년 후, 나는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당시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시더니 결국 체념한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다음날.

"합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사석이다. 말은 편히 해라."

"예, 아버지. 공작가 기사단 개편 문제로 바쁘신 줄로 아는데, 무슨 일로ㅡ"

"아무래도 실러 자작가와의 혼인은 안 될 것 같다."

승낙 하루 만에 뒤집혀 버린 결정에 나는 곧장 반박을 했다.

"안된다고요? 고작 하루 만에 약속을 번복하실 생각이신가요?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내 말 좀 듣거라, 티나. 이건 내 의지가 아니란다. 네가 혼인을 하고 싶다는 그 실러 가에서 거절한 것이야."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직은 혼인을 논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더구나. 내년에 있을 승급심사 준비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데릴사위라는 조건 때문인 것도 같은데……."

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렸다. 데릴사위라는 조건은 아버지로서도 배수진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조건이다. 첫 번째 혼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원한다고 해서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후에 난 어떻게든 그와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사교계에도 나오는 법이 없었고 개인적인 파티와 연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식은 훈련 중이다, 훈련을 하고 있다, 훈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위였다. 답답했다. 그는 나에게 너무 멀리 떨어진 별이었다. 아름답지만 결코 손에 닿지 않는.

그렇게 속앓이를 하던 도중, 슈아죌이 작위기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덩달아 최연소 액시디움 기사로 뽑혔다는 소식도 함께. 마치 부군이 성공한 마냥 기뻤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 역시 그는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속 시녀로부터 "아가씨 쉘던 도련님의 멘토가 결정되었대요, 액시디움 나이트 슈아죌경이라고 하십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고 확신했다.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안녕하세요. 브리트니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해요. 전 브리트니가의 장녀 크리스티나 브리트니라고 해요."

"슈아죌. 액시디움 나이트입니다."

그의 음성을 듣기만 해도 심장이 쿵쿵 뛴다. 나는 그의 앞에서 6년 동안 다듬고 갈고닦은 예절과 아름다움을 한껏 선보였다. 그 역시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쉽게도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난 육년간을 기다려왔는데.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어린 나이에 성취가 대단하시다면서요? '폰'의 작위까지 받으신 걸 보니 정말인가 봐요. 천재라는 소문도 있고."

"과대평가된 실력입니다. 바로 수업 지도에 들어가겠습니다. 쉘던 공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격이 급하시네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쉘던은 지금 개인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를 쉘던에게 안내했다. 6년 만에 만나는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들이 무색할 만치 광채가 났다. 그 이마에, 콧대에, 눈망울에, 입술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다. 그가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아 허벅지에 힘을 꽉 주어야 했다.

"여기에요. 쉘던, 스승님이 오셨어.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그는 무표정하게 쉘던을 훑어보았다. 마치 기수가 말을 고르는 모양으로.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에게 검을 쥐게 했다.

"갈 길이 멀군. 왼손으로 힐트의 아래쪽을 잡고 손가락 두 마디 위에 오른손으로 쥐어라. 그 자세에서 팔을 곧게 펴고 머리 위까지 검을 들었다 명치까지 내려친다. 오늘 목표는 백 번이다."

"예, 예?"

쉘던은 당혹감에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건 슈아죌이 그 날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이후, 그는 한 마디 말도 내뱉지 않은 채 쉘던의 자세만 교정해 줄 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옆에 있었다. 훈련이 끝나면 한 마디 말이라도 섞을 기회가 오겠지, 혹은 끝나고 차라도 한 번 마실 기회가 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그러나 날 보는 그의 반응은 냉담에 가까운 무관심이었다. 그의 눈은 오직 쉘던에게로 향하고 있었으며 그의 몸은 오직 쉘던의 자세를 교정해 주기 위해 움직였다. 나는 반나절 동안 보릿자루가 되었다.

사흘이 지났다. 이틀 전 슈아죌은 '레이디께서 계시면 쉘던이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라는 말로 나를 쫓아냈다. 무시했다. 무시하고 매 수업 때마다 쉘던이 걱정된다는 핑계로 그를 찾았다. 그가 날 밀어낼 때의 속상함 보다 그의 얼굴을 볼 때의 행복감이 더 컸기 때문에. 하지만 그를 찾아갈 때마다 느껴지는 건 실망, 속상함, 그리고 미련이었고 남은 것은 집착이었다.

"오늘은 어떠세요? 잠시 제 처소에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시는 것이."

노골적인 유혹이다. 나는 내 자존심마저 모두 집어던지고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멍청히 기다리는 것도 지겨웠다.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제 용무는 오직 이곳에 있습니다."

완벽한 거절이다. 울화가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아쉽군요. 경과는 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었는데. 혹,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 해석이 안 됩니다. 만약 한 명의 귀족으로써 라면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출중한 지략과 미모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써 라면 대답이 불가합니다. 저는 이미 약혼자가 있습니다."

쿵! 뇌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 그리고 분노. 약혼자가 있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화가 났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은 붙잡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지도 모르는 여자와 약혼을 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그가 나에게 눈곱만큼의 감정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처량하게 홀로 눈물짓거나 질질 짜는 행동 따윈 하기 싫었다. 어떻게든 그를 가지고 말리라, 가지고 말 거다. 라는 생각에 언론을 내 편으로 만들고, 세력을 키우고, 입지를 세우는 일에 주력했다.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그를 취할 수 있도록.



왕궁 내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왕비 궁에 버금가는 궁전이다. 확실히 그 외부도, 내부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이곳은 궁전 로비오 안드레아. 말 그대로 안드레아 공주의 궁전이었다.

오늘은 안드레아 공주의 17번째 생일을 맞아 연회가 열리는 날이다. 여식들끼리의 연회를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 덕에, 이곳은 금남의 구역이 되어 버렸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연회는 아니었다. 연회는 모름지기 화려해야 하고 이름 높은 귀족들이나 학자들이 많을수록 좋다는 주의였다. 그래야 연회의 질이 높아지니까. 이런 건 말 그대로 재미없는 애들 생일파티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슈아죌의 약혼녀라는 여자를 보기 위해서다. 공작가와 연계된 언론으로부터 그녀가 이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를 만나, 당신이 가지려는 남자가 얼마나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람인지를 알려줄 작정이다.

나는 목에, 어깨에, 허리에, 다리에 힘을 주고 걸었다. 날 위한 연회는 아니지만, 어떤 연회장에서도 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기에. 연회장에 도착했다. 넓은 홀 안은 먼저 도착한 여식들로 북적거렸다. 회장의 중앙으로 걸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진다. 예고하지 않았던 공녀의 등장에 놀란 것이리라. 나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공주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차렸다.

"안드레아 공주님을 뵈어요."

"아, 어서 와요. 크리스티나. 연회에서 뵙는 건 오랜만이군요?"

그거야 네가 나가는 연회와 내가 나가는 연회는 격이 달랐으니까. 17살의 풋내기 공주는 생각 외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그리 달갑지 않다. 왕위 계승권은 눈곱만큼도 없고 능력도, 배경도 없이 그저 연회와 축제만 좋아하는 철부지다. 가까이 해서 남을 것이 없는. 그녀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연회장 전반을 훑어보았다. 에아렌, 에아렌이라고 했다.

"어머, 브리트니양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왜 이리 늦었어요?"

"오랜만이에요. 브리트니님ㅡ"

씨알만한 친목을 자랑하려는 여식들이 과실에 꼬이는 날파리들 마냥 귀찮게 들러붙었다. 난 힘겹게 그녀들을 향해 웃음을 지어주며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찾았다. 에아렌 베르망두아.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가냘파 보이는 얼굴 덕분에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틀림없다. 정보원에서 보내준 초상화와 똑같았다. 난 재빨리 그녀에 대한 정보를 더듬었다.

에아렌 베르망두아. 18세. 베르망두아 자작가의 무남독녀로 할 줄 아는 것 없음. 능력 없음. 내세울 만한 공적 역시 없음. 하찮다. 다만 예의와 범절이 흠잡을 곳 없이 바르다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약혼에 얽힌 비화다. 실러 자작과 베르망두아 자작은 액시디움 기사단 시절 동료로 우애가 돈독했다. 그러던 작년, 술자리 중에 술김에 서로의 자녀를 혼인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가문에서 보낸 중매에게 실러 가문은 정략혼을 하지 않는다, 어쩐다, 답해놓고 뻔뻔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리 말을 하지 말던가. 실러 자작과 베르망두아 자작에 대한 원망은 오롯하게 에아렌 베르망두아에게 옮겨졌다.

에아렌의 주변에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 북적거렸다. 요새 뜨거운 감자가 그녀와 슈아죌의 약혼 사실이었으니 당연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 중 전도유망하고 인물이 뛰어난 액시디움 나이트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귀족가의 여식들에게 액시디움 나이트와의 혼인은 하나의 로망스였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한 여자만을 지키는 기사. 얼마나 매력적인 사실인가. 현재 미혼의 액시디움 나이트의 수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고, 그 중 가장 화젯거리가 바로 슈아죌이었다.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에아렌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녀 또한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틀림없다. 비웃음이 저절로 났다. 그래 봐야 그의 조건, 그의 능력을 보고 만족하는 것이리라. 누구나 그렇듯.

질투심이 불같이 솟았다. 내 것이어야 하는데, 내가 가져야 하는데. 마치 내 소유를 빼앗긴 마냥 분노가 일었다. 그녀보다 못났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외모, 능력, 가문, 그 무엇으로 보나 그녀보다 앞선다. 허나 내게는 없는 것이 그녀에겐 있다. 그녀가 밉다.

차라리 이 모든 것과 바꾸어서라도 그를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말없이 그녀를 향해 걸었다. 앞길을 막고 있던 무리들이 사르륵 갈라지며 몇 걸음 후 에아렌의 앞에 도착했다. 에아렌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여유롭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브리트니 영애. 에아렌 베르망두아라고 합니다. 자자한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로미니의 복이에요."

"예, 뭐."

잠재되어 있던 불만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기본적인 예의도 완전히 무시한 화법에 그녀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스스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몹시도 천진난만한 미소를. 나는 휙 등을 돌렸다. 어느 정도 말문을 틀 작정이었으나, 이대로 그녀와 대화하다간 일에 초를 칠 기세다. 후를 기약하기로 했다.

왈츠 '붉은 꽃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춤을 추는 일반 파티와 달리, 영애들의 파티는 담화와 음주가 주를 이룬다. 잘 보여야 하는 사내들의 공백. 영애들은 이 자리에서 만큼은 제 주량만큼이나 양껏 와인이나 코냑을 음미한다. 회장이 경쾌한 왈츠의 리듬과 왁자한 이야기소리로 가득 차고, 알싸하게 자극적이면서도 향긋한 술 향기에 절여진다. 벌써 몇몇 여식들은 술에 취해 발그레하고 홍조를 띈 것도 보인다.

나는 손에 들린 명주, '티아라 포 카발리에'를 흔들었다. 맑은 유리병 속에 찰랑거리는 자줏빛 액체에 내 얼굴이 비친다. 완연히 독을 품고 있다. 탄생과 동시에 신에게 하사받은 독기毒氣다. 이유 모르게 서글퍼진다.

어둠이 해를 완전히 잡아먹을 때까지 연회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영애들은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나도 그들 속에 섞였다. 내 필요에의 관계나, 날 필요로 하는 영애들은 물리지 않았다. 그들을 모두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동시에 신경은 항상 에아렌 베르망두아를 향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모자라면 협박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에아렌이 '어지러워서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위층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주변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그녀를 독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는 재빨리 주변의 무리에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따랐다.

호 모양의 테라스에는 허리까지 오는 간격 넓은 철창이 쳐져 있었고 그 너머론 왕궁의 박달나무숲과 달빛 잠긴 호수가 그대로 보였다. 지금의 기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들 속에 마치 자기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에아렌이 있었다. 테라스에 손을 짚고 위험해 보이는 발밑 공간과 십 센티미터 가량 떨어져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별빛이 참 예쁩니다. 크리스티나님께선 이 별빛을 구경하러 나오셨나요? 아니면 저처럼 밤바람을 쐬러 나오셨나요?"

그녀는 사근사근 얘기했다. 그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내 기분은 정확히 그녀와 정 반대였다.

"나이도 직위도 내가 손 위인 것 같으니 말을 편하게 할게. 그래도 괜찮겠지?"

"예. 그리하세요."

망설임은 없었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슈아죌 님을 포기해."

"예? 그게 무슨……."

에아렌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지었다.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그녀에게 할 발자국 더 다가갔다.

"베르망두아 양이 슈아죌님의 약혼녀라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그게 부친들의 술자리에서, 술김에 정해진 혼이라는 것도."

"그걸 어떻게……."

궁금하겠지. 본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포기해. 포기하는 게 베르망두아양에게도, 아니 에아렌에게도 슈아죌님께도 좋아. 결혼은 그렇게 쉽사리 결정해도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만한 나이잖아? 난 슈아죌님을 좋아해. 사랑해. 에아렌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있다면 이해하리라 믿어. 그러니까 베르망두아 자작께 가서 얘기해. 나 이 혼인 못하겠다고."

그녀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 특유의 미소도 사라진 채 눈만 끔뻑거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이걸 어째, 하고 중얼거렸다. 생각했던 대로 유약한 성격이다. 어쩌면, 잘만 구슬리면. 쉽게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죄송합니다, 크리스티나님. 전 이 혼인… 파하고 싶지 않아요."

"왜…지?"

언제나 그렇든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에아렌은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뒤, 엄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물었다. 굼뜬 행동이 참 답답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왜 포기하기 싫다는 거야? 아 물론 이해는 해. 유명하고 멋진 기사와의 혼인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으니 좋을 수도 있어. 하지만, 에아렌. 너는 그분과 어울리지 않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혼인은 널 불행하게ㅡ"

"좋아합니다."

"…뭐?"

"전 슈아죌님을 좋아합니다. 슈아죌님이 좋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순간 나는 그녀의 뺨을 휘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뭐? 좋아해? 아버지의 능력을 제하면 내세울 것도 없는 게, 주제도 모르고.

"좋아한다면, 더욱 포기해. 그게 그 분을 위한 일이야. 난, 그 분께 날개를 달아드릴 수 있어. 내 지위. 내 가문. 내 지혜. 내 모든 걸 동원해서 그분의 앞길을 닦고 등을 밀어드릴 거야. 그러니 네가ㅡ"

"죄송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짝!

치미는 분기를 결국 붙잡지 못하고 기어코 손이 나갔다. 손이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뺨을 휘갈겼다. 에아렌은 그렁하게 눈물을 매단 채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의 칠 년. 내가 칠년 가까이 기다려온 상대를. 칠 년을 기다려온 만남을 이렇게 막아서고 비참히 만드는 그녀가 밉다. 용서할 수 없다.

"감히… 조용히 우리 선에서 끝내려고 했어. 그렇게 계속 고집 부리고서 후환이 두렵지 않아? 너 때문에 네 아버지와 네 가문이 몰락하는 꼴을 꼭 봐야겠어?"

뚝. 뚝.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뺨은 눈에 띠게 붉게 부어올라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손이 다시 얼얼해진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이다음은… 협박이 될 거야. 그 분을 포기해. 제발. 난 내가 가지고 싶은 건 절대.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제발, 이쯤에서 그녀가 말귀를 알아들었으면 했다. 더 이상 얼굴 붉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입에 욕을 담으며 그녀의 뺨을 올려붙일 기세로 팔을 들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을 치다.

테라스 끝에 걸친 그녀의 몸이 위태롭다. 그 때, 시간이 일순 멈춘 듯하더니, 그녀의 몸이 잠시 허공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내 지상으로 낙하한다. 기력을 잃고 떨어지는 꽃잎처럼.

쿵!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혼미해져오는 정신을 붙들고 테라스의 안전 철창과 바닥 사이의 이격, 즉 그녀가 떨어진 틈새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내 시선의 끝에는 에아렌이 처참하게 꺾여 있었다. 못다 핀 그녀의 주변으로 붉은 수액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자리에 슈아죌이 있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폐부를 찌를 것처럼 찌르고 들어오자, 나는 엉겁결에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모든 게 틀어졌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감찰부에서 조사를 나오는 것이나 살인자라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 따윈 모두 상관없다. 굳이 아버지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여태 쌓아둔 힘으로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슈아죌이 나를 살인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 사고 이후, 그는 브리트니 공작가로의 발걸음은 완전히 끊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다, 그건 사고였다는 주장은 그에게 오직 핑계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나지만, 지금은 정말 울 수만 있다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게. 모두가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여왔는데.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건 세상에 없다고 자부하는데, 왜 당신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원망이 발끝부터 심장까지 차오른다. 머리는 여전히 차갑다. 나는 여전히 그를 원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취할 것이다.

손에 쥔 투명한 약병을 응시했다. 금지된 미혼약. 대신관조차도 타락시킨다는 저주받은 최음제. 왕국에서 공개적으로 사용을 금지한 물건이다. 그러나 주저 없이 품 쏙에 찔러 넣었다. 이젠 돌아갈 길도 없다.



작가의말

 

며칠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즐감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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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전상의 아픔은 혀끝에 맴돌고 13.05.08 752 9 1쪽
73 전상의 아픔은 혀끝에 맴돌고 +1 13.05.08 744 7 1쪽
72 전상의 아픔은 혀끝에 맴돌고 +6 13.04.19 634 14 1쪽
71 전상의 아픔은 혀끝에 맴돌고 +3 13.04.15 572 16 1쪽
70 전상의 아픔은 혀끝에 맴돌고 +4 13.04.12 641 14 1쪽
69 연적 +7 13.04.09 670 15 1쪽
68 연적 +4 13.04.07 678 16 1쪽
67 연적 +5 13.04.05 621 14 1쪽
66 연적 +5 13.04.03 754 13 1쪽
65 연적 +5 13.03.29 749 10 1쪽
64 연적 +2 13.03.28 627 12 1쪽
63 연적 +4 13.03.27 626 15 1쪽
62 연적 13.03.27 633 11 1쪽
61 연적 +4 13.03.26 640 12 1쪽
60 연적 +3 13.03.23 684 14 1쪽
» 외전- 크리스티나 브리트니 +5 13.03.20 823 11 24쪽
58 나아가다 +2 13.03.20 569 10 1쪽
57 나아가다 +4 13.03.19 624 13 1쪽
56 나아가다 +2 13.03.19 662 11 1쪽
55 나아가다 +3 13.03.17 689 18 1쪽
54 나아가다 +1 13.03.17 676 9 1쪽
53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3 13.03.16 720 14 1쪽
52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3 13.03.16 613 12 1쪽
51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1 13.03.16 656 9 1쪽
50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4 13.03.15 726 12 1쪽
49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3 13.03.15 720 8 1쪽
48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13.03.15 665 10 1쪽
47 목각인형과 함께 춤을 +2 13.03.14 701 10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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