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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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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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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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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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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6주간의 신병교육을 마친 카투사 훈련병들이 군용열차 객실에 부동자세로 앉아있다. 신병훈련이 류지호로서는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것들이기에.

야간행군 만큼은 조금 힘들었달 까....

류지호는 나름 운동으로 단련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완전군장 야간행군은 체력의 완전 밑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정말 힘든 순간이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과 난관 앞에서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라고 좋은 말을 갖다 붙인다.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면 욕부터 나오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니던가.

막상 해내고 나면 보람이 있다느니 어쩌느니.

다 개소리다.

고통 참는다고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류지호가 지난 6주간의 신병훈련 기간을 돌아보고 있을 때.


저벅저벅.


베레모를 쓴 대령이 객차 안으로 들어왔다.


“이 열차를 타는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앞으로 군생활에 이상을 없을 거다.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건승해라.”

“감사합니다!”


대령이 짧게 훈시를 하고 사라지자, 군용열차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60명의 카투사 교육생을 태운 군용열차가 의정부에 도착했다.

류지호와 동기들은 논산훈련소를 출발해 캠프 잭슨(Camp Jackson)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3주간 카투사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를 배치받게 된다.

류지호가 대한민국에서 카투사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을 즈음.

안개 도시, 서부의 파리 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선 국제영화제가 막 개막했다.

인기 있는 관광지이자 미국 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는 할리우드의 상업주의에 대안적인 영화들이 주로 주목을 받았다.

인권, 저항정신, 독립영화로 대표되는 뉴욕영화계 못지않게 비상업적이고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영화를 선호했다.

단편영화 감독들에게는 내쉬빌 영화제와 함께 중요한 영화제로 손꼽힌다.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단편입상 작품이 아카데미 단편영화제 심사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중요한 영화제에 류지호의 <Life Goes On>이 출품됐다.

<Life Goes On>은 영화제 기간 동안 재팬타운에 위치한 AMT가부키 극장에서 총 5회에 걸쳐 상영될 예정이다.

영화제 브로슈어에 소개된 영화 소개는 극찬일색이다.


- 단편으로 펼쳐진 최고의 퍼포먼스.

- 40분간 펼쳐지는 싱글쇼트의 환상적인 묘기.


비평가들의 호평이 영화제 소식지에 실렸다.


-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영리함.

- 우리 모두의 태도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

-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사회. 이 영화가 미국의 모습이다.


찬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다. 진짜를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훑고 쓴 가짜, 판타지.

-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위선자의 시선.


흑인 인권운동가들이 류지호의 단편영화를 공격했다.

거기에 영화도 보지 않은 갱스터 래퍼들이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배부른 블랙코리안의 자기 위안.


실제로는 욕설을 섞어 마스터베이션이라고 인터뷰했지만, 언론에는 순화해서 나갔다.


- 백인에게 아부한 걸로 만족하고 살아라. 절대 흑인들에게 공감과 설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공공연하게 감독을 찾아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갱스터 래퍼도 있었다.

히스패닉 같은 소수인종들은 도리어 좋아했다.

자신들을 착하게 묘사했다고.

한국 교민들 역시 불만을 드러냈다.


“분위기도 어수선한데 왜 흑인들을 자극하는지 원.”

“그러게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건데 말이야.”

“유학 왔으면 조용히 공부나 하고 돌아갈 것이지....”


다양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반응들.

류지호가 원했던 논쟁과 이슈몰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조건 흑인을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보장을 사회에 요구하라고 선동하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서 인종 간 감정적인 대응보다 서로 가지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시작해보자고 말했다.

그런 메시지에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현란한 테크닉을 얹었다.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시작된 <Life Goes On>과 관련한 논쟁이 할리우드로 옮겨 붙었다.

그런데 금방 수그러들었다.

로드니 킹 사건 재판을 앞두고 여러 잡음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니 킨 사건 재판은 이미 2월 5일에 열려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심원 전원이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인해 재판이 연기된 상황.

이에 흑인단체의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게다가 미국 국민 대다수의 관심은 온통 2월부터 시작된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를 가리는 예비경선에 가 있었다.

흑인사회는 로드니 킹 재판에 온 관심을 집중하고, 백인들은 경제불황과 물가불안을 해결해 줄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에 주의를 집중했다.

류지호의 기대와 다르게 <Life Goes On>의 파급력은 영화제에 한정되고 말았다.

다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영화제 단편부문 최고상인 골든게이트 단편영화상(GoldenGate Short Film Awards)에 <Life Goes On>이 선정되었다.

동성애와 AIDS문제를 따뜻하게 그린 단편영화 <Dead Boys>와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과반수의 심사위원들이 <Life Goes On>의 손을 들어줬다.

때마침 영화제에 참석한 스파크 리 감독이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류지호를 지지해주기도 했다.


-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피부색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는 흑인지도자들의 말을 인용해 훈수를 두려는 행동도, 흑인들에게 충고하려는 건방짐이 없었다.


과격흑인인권 단체 역시 말을 보탰다.


- 게토를 다룬 영화 가운데 폭력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을 난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불공평한 세상에 대하여 차별 받는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분노를 폭발시키면서도 사람들의 질서 있는 폭력묘사가 인상적이다. 내 말이 이상한가? 영화를 보길 바란다. 질서 있는 폭력을 보게 될 것이다.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았다.


- 증오와 복수가 난무하는 게토에서 우리 아이들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어른 세대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타 인종사람들에게 욕하고 비난할 수 있지만, 그들도 우리에게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헤비 엠 앤 더 보이즈(Heavy M & The Boyz)가 <Life Goes On>을 보고 언론에 한 말이다.

힙합 커뮤니티 이슈와 인종차별 등의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힙합뮤지션이다.

음악 자체가 긍정적이고 희망차고, 기부나 봉사 등의 선한 행동을 하는 비교적 착한(?) 래퍼에 속한다.

이들이 <Life Goes On>을 어떻게 봤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류지호의 사람 누군가 헤비 엠 엔 더 보이즈가 발언을 하도록 작업을 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

<Life Goes On>은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단편부문 최고상 수상에 이어서 시애틀 국제영화제 극영화 단편부분에서도 연이어 수상했다.

로컬 영화제이며 비경쟁부문으로 열리는 로체스터 단편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Life Goes On>만 수상 소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류지호가 오리지널 각본을 쓰고 촬영까지 했던 <재단사>가 내쉬빌 영화제 단편영화 경쟁부분에 올랐다.

쉘라가 각색하고 더스틴 린이 연출한 <재단사>는 비록 수상의 영광은 안지는 못했지만 평단에 주목을 끌었다.

류지호의 바람과 달리 <Life Goes On>은 로드니 킹 사건으로 들끓고 있는 여론에 경종을 울리지 못했다.

LA연방법원 앞과 경찰서 앞에서 흑인들의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몇몇 언론의 보도태도 역시 심상치 않았다.


❉ ❉ ❉


캠프 잭슨 KTA 3주차.

카투사 특수 보직을 뽑기 위해 선발담당자들이 훈련소를 찾아와 홍보를 했다.

류지호 기수는 전투병, 군종병, 통역병, 상급휘관의 운전병, 비서, CP TANGO 지휘소근무, KTA조교 등 보직을 면접선발로 뽑았다.

류지호는 어학 점수가 최상위권이고 유학생이라서 어학병, 행정병, 보급병으로 선발될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암튼 면접선발을 위해 훈련소를 방문한 담당 한국군 지원반장들이 순서대로 각 부대에서 만든 영상을 보여주거나, 부대와 해당 보직에 대한 소개를 짧게 했다.

류지호는 내심 행정병이나 태권도병을 기대했다.

헌데, 면접선발을 위해 방문한 국군 지원반장 부사관 중에 AFKN에 나온 이가 있었다.

AFKN에서는 행정병도 뽑았지만, 규모가 작다보니 카투사를 잘 뽑지 않는다.

운이 좋게도 이번에 티오가 난 모양이다.

160명 동기생 중에 연극영화과 전공자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은 UCLA TV·영화과 전공이 아니다.

혹시나 영화전공 동기생에게 기회를 넘기게 될까 싶어 진지한 태도로 인터뷰에 임했다.


“UCLA TV·영화 전공은 3학년부터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1학년부터 단편영화를 여러 편 작업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웨딩비디오 촬영을 해왔던 것도 어필했다.

반드시 AFKN으로 배치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력을 밝혔다.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Life Goes On>으로 수상했죠? 시애틀에서 수상했네요?”

“.......?”


논산훈련소부터 두 달 조금 넘게 외부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류지호다.

당연히 수상 소식을 알 리 없다.


“입대 전 단편영화 수상 경력이 화려하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160명의 훈련병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 터.

면접을 보는 내내 면접관이 자신에 대해 이미 알만큼 알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투사라고 해서 사병의 뒷조사를 했을 리도 없고.


‘당연한 것인가....?’


데본과 도널드 모두 미군 장교출신인 동시에 정보기관 출신이다.

군대에 인맥이 없을 수가 없다.

류지호를 아끼는 이들도 하나같이 대단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고.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래안전에는 군경을 비롯해 안기부 출신까지 영입했다.

신효정 변호사는 류지호에 관한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이 류지호를 위해 손을 쓴다면 없던 보직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류지호는 시청각장비 운용병으로 AFKN 배치가 결정됐다.

요구하는 스펙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굳이 인맥을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선발될 만했다.

암튼 외부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던 류지호는 자신의 영화가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AFKN에서 카투사를 뽑기 위해 나온 미군무원으로부터 들었다.


일명 용투사.

주한 미군 사령부, 한미연합군사령부, 유엔사령부 등 주요 미군 지휘부가 모여 있는 용산 게리슨(Yongsan Garrison).

용투사는 630에이커의 드넓은 부지에 자리하고 있는 용산 게리슨에서 근무하는 카투사를 일컫는다.

류지호는 바로 그 용산 게리슨에서 28개월을 지내게 됐다.


✻ ✻ ✻


류민상 부부는 2개월 반 만에 큰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정신없이 준비를 마치고, 류지호 가족들이 의정부로 향했다.

캠프 잭슨 카투사 후반기 교육 수료식이 끝이 나고 가족들이 드디어 류지호와 만날 수 있었다.

심영숙이 얼굴이 반쪽 만해 진 아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호야, 우리 아들! 어디 보자. 힘들었니? 얼굴이 핼쑥해졌잖아.”

“좀 탔어요.”

“아냐. 자꾸 움직이지 말고, 가만 있어봐. 엄마가 좀 보게.”


류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건강하시죠?”

“좋다. 검게 탄 게 보기 좋아. 아픈 데는 없어?”

“좋아 보이기는요? 우리 아들, 핼쑥해진 거 안 보여요?”


류지호는 부모님이 자신의 외모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친 데는 없고?”

“예.”

“무릎도 상하고, 발에 물집도 잡히고 한다던데... 괜찮아?”

“카투사는 미군이 보급 받는 걸 사용해서 괜찮아요.”


거짓말이다.

캠프 잭슨에서 미군 보급품을 지급받기 전까지 훈련소에서 질 낮은 한국군 보급품으로 생활했다.


“그래도 힘들었을 텐데, 잘 이겨낸 것 같아 아빠는 안심이다.”

“제가 태권도를 몇 년을 했는데요. 군대 훈련쯤은 거뜬했어요.”

“아빠도 옛날에 다 경험했다. 허세부릴 거 없어.”

“허세 아니에요.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몸이 얼마나 좋아졌는데요.”

“말라 보이는데 몸이 좋아졌다니....?”

“원래 지호는 조금 마른 편이었어, 여보.”


심영숙이 남편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하하하.


류지호의 입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군복을 입고 있으면 뭔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다.

미국 유학생활 중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가족을 만나는 것과 후반기 교육까지 마치고 첫 면회를 하는 것과 감정이 꽤 달랐다.

류아라가 부모님들과 대화가 끝난 걸 확인하자마다 달려들었다.


“큰오빠~”

“아이쿠! 우리 공주님!”


류지호가 여동생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아들, 자대는 어디로 배치됐어?”

“용산으로 가게 되었어요.”

“행정병이야? 아니면 혹시 태권도병?”

“아쉽지만 둘 다 아니에요.”


류아라가 끼어들었다.


“큰오빠는 태권도 3단이잖아?”

“아라야, 큰오빠가 군대에서도 비디오 찍게 생겼다.”

“큰오빠는 만날 비디오만 찍어. 오빠도 연기하면 안 돼?”


류지호가 여동생에게 뽀뽀를 퍼부었다.

국민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큰오빠의 스킨십을 거부하는 류아라다.


“뽀뽀. 싫어! 나 이제 어린애 아니란 말이얏!”

“서서 이러지 말고. 저쪽 잔디로 가요.”


면회시간이 2시간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류지호 가족들이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싸온 음식을 부지런히 입안에 욱여넣는 류지호에게 부모님은 끊임없이 카투사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류지호는 순대를 비롯해 한식으로만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2시간의 면회시간이 후딱 지나가벼렸다.


“주말 마다 외박을 나갈 수 있대요. 나중에 자주 집에 온다고 구박만 하지 마세요.”


이때만 해도 가족들은 군대에 간 류지호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암튼 후반기 교육까지 수료한 카투사들이 각자의 자대로 흩어졌다.

카투사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보직이 정해지지 않아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재수가 없어서 전투병으로 가게 되면 카투사 시험을 본 이유가 없으니까.

시청각운용병으로 정해지고 근무지도 용산으로 확정이 되고 나서야 류지호는 안심할 수 있었다.

불확실성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용투사가 되면서 군생활 28개월 기간의 계획을 좀 더 명확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용산미군기지로 자대배치를 받을 후 약 일주일간 적응기간을 가졌다.

용산기지 내 제1통신여단 본부 산하 AFKN에 배속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많은 카투사들이 통신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막상 부대에 가보니 시청각운용병은 류지호가 유일했다.

통신여단에 배속된 카투사들은 AFKN TV, FM 및 AM 라디오 전송시설을 운영 및 유지하는 임무를 주로 지원했다.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스튜디오로 배속된 것은 류지호가 유일했다.


‘사고만 안치면 전역할 때까지 꿀 빨겠어.’


자대 배치를 받은 후로 맞이한 첫 번째 외박.

20개가 넘는 게이트 가운데 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영민 과장과 함께 류지호가 나래안전시스템으로 이동했다.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4.29 LA폭동이 발생하기 나흘 전 시점이다.

서울과 LA의 시차는 대략 17시간.

류지호는 LA 한인타운에 자리 잡은 Pinkerton Corp. 지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제 4일 남았네요.”


다음 주 수요일, 로드니 킹 사건의 평결이 나온다.

그에 맞춰 흑인단체들의 시위가 더욱 과격해지고 있었다.


“유죄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 유무죄의 판단은 배심원단이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구성된 배심원단은 열두 명 중에 열 명이 백인, 한명이 아시아인, 한명만이 라티노입니다. 배심원단에서 어떤 판단이 나올지, 매우 걱정이 됩니다.

“아니, 어떻게 배심원단에 흑인이 한 명도 포함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 검찰 측 배심원 선정 전략에 문제가 있지 않나 추측합니다.

“담당 검사가 흑인이라면서요?”

- 그렇습니다. 현재 분위기가 묘합니다. 아무래도 보스가 누차 강조한 것처럼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인타운 반응은 어때요?”

- 설마 하는 쪽과 혹시나 하는 쪽으로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류지호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머나먼 이역 땅에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동포들 사이에서 서로 이해관계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고 단계 매뉴얼대로 준비해주세요. Pinkerton Corp. 대원들에게 이번 일이 끝나면 보너스 듬뿍 안겨준다고 하고. 모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지휘부가 잘 컨트롤해 주세요.”

- 예. 보스!”


사실 류지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뿐.

몇 달 전부터 자연재해, 블랙아웃, 테러나 폭동 시 대처 매뉴얼을 마련해 한인자율방범대를 교육시켜왔다.

그것으로 역부족인 것이 사실.


“데본.....”


류지호의 목소리가 더욱 진중해 졌다.


- 말씀하십시오.

“나는 2년 간 영외에서 영리활동을 할 수 없는 군인 신분입니다. 이미 이사회의장도 모두 내려놓았고, 지분만 소유하고 있는 셈이죠. 올 해 내가 Garam Invest에서 배당 받게 될 금액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 최대 800만 달러까지 배당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뉴욕의 매튜와 의논해서 Garam Invest의 이름으로 LA지역의 저소득층 교육장학재단을 설립한다고 대대적으로 언론 플레이 좀 하세요. 내가 2년 간 배당 받게 될 금액을 전액 넣겠습니다.”

- ....음.

“어차피 배당을 받게 되면 군인 신분 상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세금만 뜯기게 될 겁니다.”

- 1,500만 달러 전부를 말입니까?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 LA 정가를 뒤흔들고, 빈민가에 충격을 줄 수 있지 않겠어요?”

- 진심이십니까? 혹시....

“일단 당장은 충격요법을 쓰고, 실제 재단 설립은 전문가들로 TF를 꾸려서 준비를 해야겠죠.”

- LA지역의 모든 빈민가를 대상으로 합니까?

“인종과 상관없이. 백인이든 아시아인이든 히스패닉이든 흑인이든!”

- ....음.

“매튜 선에서 버거우면 캐서린 파커에게 문의하라고 하세요. 그녀는 자선재단을 운영해 본 풍부한 경험이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일단 뉴욕과 통화를 해보겠습니다.


데본 테럴과 통화를 마친 류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1시간가량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장문식이 입을 열었다.


“류 감독....?”

“왜요?”

“첫 외박 나와서 업무만 볼 거야? 인천 안 내려가 봐도 돼?”

“특별한 일만 없으면 매주 외박 나올 수 있어요. 인천 집에는 다음 주에 내려가야겠네요.”

“미국에서 전쟁이라도 난데?”

“전쟁은 아닌데.... 곧 난리가 날 것 같아요.”


류지호는 부대로 복귀하기 전까지 나래안전시스템 사무실를 떠나지 않았다.

LA, 뉴욕과의 의견조율에 매달렸다.

점심까지 거르고 로드니 킹 재판 이후에 있을 일들을 점검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LA는 광역권 인구를 모두 합하면 600만 명이 넘게 사는 거대 도시다.

인종구성은 백인과 흑인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아시아계가 소수민족으로 끼어있는 형태로 얼핏 생각할 수 있다.

실상은 크게 달랐다.

이미 지역의 인종구성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히스패닉이다.

백인은 37% 정도, 흑인이 14%, 아시아계가 10%를 조금 넘었다.

나머지가 히스패닉계가 차지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LA.

이 도시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 비율이 아니다.

인종 비율에서 50% 넘게 차지하는 흑인과 히스패닉 인구 절반 이상이 하층민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문제다.

단순히 저소득층이서가 아니다.

정부 보조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부쉬 정부가 들어선 후 복지정책이 점점 축소됐다.

당연히 흑인 빈민의 생계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89년부터 이어지는 미국 전역의 불황과 기업의 연쇄 도산,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으로 치솟은 유가 폭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도시 빈민의 삶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LA지역에서 살고 있는 100만 명에 가까운 하층민들이 당장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할 정도다.

가족 중의 여성을 매춘으로 내몰고, 어린 아이들이 마약을 팔고, 청소년들이 강·절도질을 하고, 작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갱단끼리 총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궁지로 몰렸다.

국가나 주 정부에서 몇 십억 달러를 조성해 저소득층 지역을 재개발하거나, 30만 개 이상의 저소득층 일자리라도 만들지 않는 이상 결국 빈민가 주민들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자,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난 슈퍼맨이 아니잖아.”


슈퍼맨도 이런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정 문제와 가난은 슈퍼 히어로도 손 쓸 도리가 없기에.

게다가 한국에도 불쌍한 이웃이 차고 넘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류지호가 온 정신을 파는 것도 과한 것이다.

현재까지 류지호가 해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남은 것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류지호는 안달복달 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 ❉ ❉


AFKN에서 근무하는 것이 류지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용산 본부는 주로 미국 LA에 위치한 AFRTS에서 위성으로 송출하는 신호를 받아 국내 14개 지역방송국으로 송출한다.

따라서 류지호는 매일 미국의 주요 실시간 뉴스를 볼 수가 있었다.

4월 29일을 하루 앞 둔 날.

Garam Invest가 LA지역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총 1,500만 달러 규모의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매튜 그레이엄이 직접 LA로 날아와 시장과 함께 시청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했다.

백만 달러의 기부나 자선재단 설립도 큰 뉴스가 된다.

그 몇 배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재단이 설립된다고 하니 전국 톱뉴스를 장식할 수밖에.

그것도 로드니 킹 재판을 앞두고 시끌시끌한 시점에 흑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가정을 위한 대규모 장학금이 조성된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대서특필될 수밖에 없었다.

LA 시정을 장악하고 있는 흑인정치인들이 생색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고.


- 한국인 오너 지호 류가 현재 한국에서 군복무 중이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예.”

- 사우스센트럴 LA 지역을 중심으로 콤프턴 외곽 지역에 청소년 센터를 설립해 운용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Garam Invest 대주주 지호 류는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어린이들 상당수가 때때로 하루 한 끼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작년부터 해당 지역에 어린이 돌봄 시설을 개설해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 장학재단도 그 같은 활동과 관계가 있습니까?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LA 지역의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는 누구라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린이 돌봄 시설, 청소년 센터, 장학재단뿐만 아니라, 저소득층 밀집지역의 고용창출을 위한 사업도 발굴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 미스터 류가 사우스센트럴LA 지역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뭡니까?

“그 역시 한국에서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고, 저소득 가정의 실상을 매우 잘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Garam Invest의 발표는 LA 정치인 사이에서 크게 환영 받았다.

반면에 빈민가 일반 주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시민권자도 아닌 외국인이 얻을 것 하나 없는 동네에 그 같은 호의를 베풀 리가 없으니까.

연방법원 앞과 경찰서에서 시위를 벌이는 흑인단체 사람들은 여전히 로드니 킹 판결에만 관심을 둘 뿐.

류지호의 자선재단 설립과 빈민가 지원은 남의 일로 치부했다.


“사고를 치려면 언질이라도 주고 쳤어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기자들과 LA 시민들의 문의로 업무가 마비 될 지경입니다.”


매튜 그레이엄과 시장의 Garam Invest 저소득층 장학재단 설립 기자회견을 마치자, 각종 언론사에서 웨스트우드 GARAM ventures와 한인타운의 Pinkerton Corp. LA지사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파라맥스 LA, 트라이-스텔라 TV까지 하루 종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작가의말

행복하고 보람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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