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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글렛 님의 서재입니다.

여행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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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글렛
작품등록일 :
2019.06.18 21:07
최근연재일 :
2019.09.1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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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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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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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글자수 :
246,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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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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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9화. 밝혀진 비밀

하와이에서 생긴 인연이 발전하기까지..




DUMMY

백화점 옥상 테라스. 도훈은 탕비실에서 꺼내 온 애플파이를 집어먹으며 그에게 할당 된 서류를 살펴봤다. 여차저차 한비서의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그가 배워야 할 것은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제 막 회사에 입사한 지 닷새가 지났을 뿐이었다. 어느 회사를 들어가든 첫 한 달은 실무보다는 교육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부부 동반 참석······?”


그는 지성의 스케줄 표를 체크하면서 눈에 띤 부분에 의구심이 들었다. 2주 뒤 예약된 <문성기업 론칭 심포지엄> 아래로 ‘대표님 부부 동반 참석’ 이라는 각주가 달려있었다. G랜드 그룹의 회장인 그녀의 부모님을 말하는 것일까. 혹은 오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 먹어?”


그의 등 뒤로 아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아형이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나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한비서님한테 물어봤어. 바람 쐬러 갔다 길래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아형이 자연스럽게 그가 가져온 애플파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옥상 테라스는 아형이 처음 그에게 알려준 곳이었다. 난간 가까이에 서면 서울 시내가 훤히 들여다보였고, 반대쪽에 있는 흡연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스트레스 받아? 요즘 뭘 자주 먹네?”


그가 마지막 남은 애플파이를 입 안에 넣자 그녀가 말했다.


“머리에 안 들어와서 미치겠어. 뭐가 이렇게 많고 어려운지······.”


“공부해야할게 많나 보네. 아참, 찬혁이 미술 수업도 괜찮을 것 같아.”


그는 아형에게 찬혁이 들을 만한 수업을 찾아봐 달라 부탁을 해 놓은 상태였다. 집까지 거리가 조금 있긴 했지만 셔틀버스를 운영한다기에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혁은 초등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방과 후 수업 외에는 다른 학원을 다니지 않고 있었다. 그는 찬혁이 다른 아이들과 알게 모르게 비교당할 까봐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괜찮네. 잘 챙겨줘. 부탁 좀 할게.”


“걱정 마. 완전 편애할거야 내가. 전에 봤었을 땐 갓난아기였는데 지금은 꽤 많이 컸겠지?”


“아니······ 반에서 제일 작아.”


“귀엽······겠네······.”


그가 싱겁게 웃으며 들고 있던 스케줄 표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오늘은 점심 다른 테이블에서 먹자. 다미 언니가 자꾸 오빠를 쳐다봐서 기분 나빠. 내가 찜했다고 말했는데도 안 통해.”


“나 오늘은 대표님이랑 먹기로 했는데?”


“헐······ 진짜?”


아형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최근 지성이 그에게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한비서를 제외한 다른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곧바로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마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묘하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 이야기처럼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근데 대표님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


“무슨 뜻이야?”


아형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얼음공주 같은 사람이잖아. 항상 무표정이고 사람 많은 곳엔 잘 나타나지도 않아. 백화점 둘러보는 것도 한 번 못 봤어. 나도 3년 근무하면서 마주친 적이 열 번도 안 될걸? 그리고 임원들이랑 가까운 직원들한테 반말하잖아. 우리한테는 말도 건 적 없고. 완전 싸가지 같아.”


그가 말없이 웃음을 흘렸다. 지성은 남들이 보기엔 비밀이 많고, 차가운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직원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여자인 자신을 깔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비서에게서 들었다.


“그 사람이 결혼한 게 더 신기해. 남편이랑 있을 때도 그러나?”


아형이 말끝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형을 쳐다봤다.


“결혼······? 그게 무슨 말이야?”


“몰랐어? 대표님 결혼했잖아. 약혼은 오래전에 했었고. 결혼한지는 몇 달 안됐는데.”


그의 얼굴 전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듯 일그러졌다. 결혼? 그렇다면 지금껏 유부녀를 만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지금껏 말을 안했는지, 결국 들키게 될 문제를 왜 숨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손에서 반지를 본 적도 없었고, 그녀가 그녀의 남편과 관계된 어떠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


지성은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실은 업무를 보는 척 하며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프랑스 철학자가 사랑에 관해 강의를 하는 동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사랑이 없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철학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노트에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그때 한비서가 노크를 했다. 그녀는 얼른 화면을 내리고 노트를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웠다.


“들어와.”


“성현그룹의 따님께서 내일 결혼식을 올리십니다. 화환 보낼까요?”


“성현그룹?”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성현그룹의 딸이라면 분명 해진의 내연녀였다.


“네 맞습니다.”


“결혼 상대가 누군데?”


“명인제약의 자제분입니다.”


어떻게 된 걸까. 기업 간의 정략결혼은 이 나라의 사회 풍토상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다만 성현그룹의 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해진은 그 여자와 꽤 오랫동안 만났다. 헤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피치 못할 비극이 또 벌어진 걸까.


“화환 보내. 축하 인사도 따로 보내고.”


해진과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기에,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또한 그녀가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해진과는 지난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긴 했으나 현실적으론 무리였다. 그녀는 부모의 예상되는 반발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참, 오늘은 임기사랑 호텔에서 먹을 거야.”


“그럼 임기사 호출하겠습니다.”


“자리에 없어?”


“옥상 테라스에 갔습니다.”


“설마 또 그 여자랑?”


그녀의 눈빛에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CCTV확인 결과, 맞는 것 같습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지 지금?”


그녀가 들고 있던 볼펜을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놨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를 뻔질나게 쫓아다니는 강아형이라는 여자였다. 그는 오래전에 알던 단순 친구라고 말했지만 몹시 까탈스러운 사이처럼 보였다.


“당장 불러.”


그녀의 질투에 휩싸인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지성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도훈이 입구 근처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운전석에서 내려 그녀가 탈 자리의 문을 열어주는 게 일반적인 순서였다. 그러나 무슨 일에선지 그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알 수 없는 변덕을 무시하며 직접 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업무시간엔 자리 지켜. 한비서 테스트도 겨우 통과했다면서? 김기사는 반나절도 채 안 걸렸어. 한가하게 옥상에서 노닥거릴 때가 아닐 텐데?”


그녀가 따지듯이 말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앞만 쳐다봤다. 그는 화난건지 심드렁한 건지 모를 표정만 짓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나한테 할 말 없어?”


그가 공격적인 말투로 쏘아댔다.


“지금 하고 있잖아. 자리 지키라고.”


“그거 말고. 나한테 거짓말 한 게 있을 텐데.”


“무슨 거짓말?”


“시치미 뚝 떼고 있을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잖아. 결국엔 들킬 걸 몰랐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아듣게 얘기해.”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도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녀의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결혼 했다고 하던데? 남편도 있고. 도대체 언제 얘기할 생각이셨죠?”


그녀는 일순간 멍해졌다. 두뇌가 정지한 듯 몸의 반응이 멈췄다.


“모르고······ 있었어?”


“당연히 몰랐지! 기가 막히네. 내가 유부녀랑 놀아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작정하고 숨기려 했던 거야?”


그가 소리치며 말했다. 잠시 멈춰있던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감쌌다.


“당신이 물어본 적 없으니까.”


“하! 그걸 꼭 물어봐야지 알려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결혼한 게 당신한테 문제가 돼?”


“문제?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네······”


그가 격하게 핸들을 흔들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가 좌우로 크게 들썩였다.


“진정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야.”


“뭐? 그럼 얼마나 더 있는 건데? 숨겨진 아이라도 있나? 아님 숨겨진 남자가 더 있는 건가?”


손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이내 그녀의 몸 전체로 퍼졌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갈 데가 있어. 서초동 저택으로 가. 내비에 저장 돼 있을 거야.”


“가긴 어딜 가려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조용히 해! 일단 내 말 들어.”


그녀가 소리 내어 말했다. 차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흥분한 상태였지만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까지 전달된 떨림을 가라앉히려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


도착한 곳은 조그만 마당이 있는 흰색 외벽의 2층 주택이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듯 공허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들어오라 손짓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외벽과 마찬가지로 하얀 석조로 인테리어가 된 공간이 나타났다. 일반 가정집처럼 소파와 가구, 전자제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성 외에 다른 잡동사니들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모델하우스의 모습과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거실 벽에 웨딩사진 액자 하나가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그녀와, 그가 처음보는 그녀의 남편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여기 내 신혼집이야. 천천히 둘러봐.”


“지금 여길 나보고 구경하라고? 적반하장도 유분수네.”


“내말대로 해!”


그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자 그녀가 곧바로 소리쳤다. 그는 화가 난 듯 입을 꼭 다물고 집안을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다. 집은 마치 오랫동안 출입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자리에 놓인 물건들은 전부 새것이었고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냄새마저도 새집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돌았다. 그는 안방과 다른 방들의 문을 열어젖혔다. 호텔에 막 입실했을 때와 같이 세팅된 침실, 서재가 나타났다. 분노로 차있던 그의 머릿속이 의구심으로 변모했다.


“사람 사는 곳 같지 않네.”


“맞아. 나도 몇 달 만에 처음 온 거야.”


“남편은?”


“따로 동거하는 여자가 있어. 어디 사는지는 나도 몰라.”


“이것만 봐선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녀가 웨딩사진이 걸린 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을 쳐다보며 해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해진. 세한유업의 장남이자 전무. 머잖아 세한유업의 회장 자리를 물려받을 거야.”


세한유업이라면 그도 잘 알고 있는 회사였다. 한국인이라면 모르기 힘든 유명한 식품 전문 대기업이었다. 그는 ‘설마’ 라는 가정을 하게 됐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얼개에 관한 예상이었다.


“정략결혼······ 그런 걸 말하는 거야?”


“그래. 말로만 듣던 쇼윈도 부부. 어때? 직접 보게 된 소감이?”


그는 잠시 생각했다. 쇼윈도 부부라 할지라도 어쨌든 결혼한 사이임에는 틀림없었다. 당장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니더라도 문제의 소지는 여전했다.


“그걸로 모든 게 설명이 된다는 거야? 난 아직도 문제가 많아 보여.”


“당신을 처음 만난 하와이에서의 3박 4일. 그때 난 신혼여행을 간 거였어.”


“뭐? 도대체······ 뭐야?”


“남편과 나는 결혼을 했지만 같이 산 적이 없어. 결혼을 하기 이전부터 남편은 만나는 여자가 있었거든. 남편이랑 한 공간에 있었던 적도 몇 번 안 돼. 당연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짓은 한 적도 없고.”


그는 왜인지 조금 뜨끔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신혼여행 가서도 곧바로 흩어졌어. 온종일 당신과 함께 보낸 거 보면 알겠지? 난······ 당신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 내가 결혼한 사실을 알지만, 내 상황을 이해하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그가 최태호를 사칭하면서 비롯된 오해에서 시작됐다. 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그녀의 웨딩사진을 쳐다봤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남편의 품에 안겨있었다. 남편의 표정 또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렵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결혼한 여자라서······ 나를 사랑할 수 없어진 거야?”


그는 수많은 생각으로 뒤틀려버린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그녀가 결혼을 한 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애초에 비현실적으로 다가온 만남에 엄청난 장애물이 더해진 격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 진리에 가까웠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보느냐, 감정에 호소하며 마음의 방향을 따라가느냐의 서로 다른 격차가 존재했다


“우리가······ 어떻게 될까?”


그는 그녀의 결혼 사실을 마주하면서부터 계속해서 맴도는 의문.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으로 생각이 집중됐다.


“난······ 당신이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놓치지 않을 거야.”


그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녀는 감정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그와 헤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부디 그의 마음 또한 같기를 바랐다.


“우리 둘 다, 어딘가 모가 나있네.”


그는 고민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떠한 형식의 구조가 짜인 이야기처럼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내딛는 인생이란 없었다. 화도 나고 이해도 할 수 없었지만 당장의 감정을 포기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도망치는 거라면 이골이 난 그였다.


“무슨······ 말이야?”


“끝이 안 좋을 걸 알면서도, 힘든 과정을 겪게 될 걸 알면서도 포기를 못하잖아.”


“찝찝해. 그런 대답.”


“너를 많이 사랑해. 그래서 네가 없는 내일을 상상할 수가 없어. 네가 없이 무너져 내릴 걸 알면서 놓치는 건 정말 어리석은 거니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진지한 분위기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현실적인 고민들로 이뤄진 가림 막을 걷어내며 이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사랑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 어수선한 상황들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결혼을 한 사실은 맞으니까······ 조금 섭섭하긴 하네.”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미안해······ 짐을 안겨서.”


그가 천천히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에 댔다. 그녀가 손수건을 잡은 그의 손등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내 정신이 흐릿한 듯 몸을 조금씩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파?”


“물 좀······ 갖다 줘.”


그녀가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곧바로 부엌으로 뛰어가서 유리잔에 생수를 담아왔다. 그녀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약통을 꺼냈다. 두 알을 입에 넣은 뒤 물과 함께 삼켰다.


“무슨 약이야? 어디가 아픈 건데?”


그가 조급해하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을 할 힘조차 잃은 듯 앞뒤로 휘청휘청 거렸다. 그는 그녀를 안아들고 소파로 데려가 눕혔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사실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더 있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약통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약통 겉면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영어로 무어라 쓰여 있었는데 처음 본 단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죽을······ 병은 아닌 거지?”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젠 어떤 상황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공황장애. 광장공포증. PTSD. 내가 가진 병명들이야. 되게 복잡하지?”


그는 약통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였던 그녀에게 정신적 질환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고 기피한다는 것이 일종의 암시였음을 깨달았다.


“어쩌다······ 생긴 건데?”


“나도 몰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는 일전에 그녀가 말한 자신의 어린 시절 겪은 일화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은 약과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상처와 고통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모난 사람이지?”


그녀가 말했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그녀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아니. 마냥 예뻐.”


그녀가 웃으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탁하나만 할게.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아줘. 당신마저 그러면 정말 괴롭고 힘들어.”


그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다신 안 그럴게.”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 지 알아?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약을 먹지 않아도 마냥 행복하고 좋아. 그게 다야.”


그는 말하는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그만큼이나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그녀도 깊고 진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대하고 싶어졌고, 동시에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이 참기 어려울 만큼 힘들게 다가왔다.


“말 안 해도 돼. 일단은 쉬어.”


“당신 기분 풀어주고 싶어서. 이젠 좀 풀렸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피식 웃으며 그의 목을 붙잡고 얼굴을 잡아당겼다. 꽤 긴 시간을 두고 그의 입술을 훔쳤다.


그녀는 30분 정도를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그는 그녀의 바로 옆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기 까지를 기다렸다.


“괜찮아?”


“응. 멀쩡해.”


그녀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목뒤에 살짝 키스를 했다.


“배고프지? 나갈까 이제?”


“아, 잠깐만.”


그는 일어서서 그녀의 웨딩사진 가까이 다가갔다. 벽에 걸린 웨딩사진을 떼어낸 뒤 뒤집어서 바닥에 놓았다.


“보기가 조금 그래서.”


“잘했어.”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쌌다.


“오늘따라 섹시해 보이네.”


그녀가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욕망에 찬 눈을 하고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말 하면 위험해.”


“또 나왔다. 그 변태 같은 눈빛.”


“나 아직 기분 안 풀렸는데.”


“정말? 어떻게 풀어주지?”


그녀가 입술을 그의 얼굴 언저리에서 닿을 듯 말 듯 흔들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두 남녀의 몸이 격렬하게 뒤엉켰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당겨 품에 안은 뒤 그녀가 누워있던 소파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의 몸에 애벌레처럼 매달린 채 소파 위로 던져졌다. 입고 있던 옷들이 해방되고 부드러운 감촉의 나체가 맞닿았다. 식욕을 잊어버린 몸들이 하나의 욕망으로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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