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랄프C의 서재입니다.

나인스카이즈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354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6 10:05
조회
505
추천
8
글자
9쪽

루프 오너

DUMMY

— 아저씨.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정의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전달된 때로부터 찰나의 순간이 흐른 것 같기도, 수 일, 아니 수 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영겁 같은 고요 속에서 자아를 잃어 버리기라도 한 듯, 한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거기에 반응하지도 못했다.


— 아저씨, 제 말 듣고 있어요?


또 단어가 전달된다. 통신은 류미정과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럼 꿈을 꾸고 있나 보다. 조금 전 어머니에 관한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연장인가. 이 소녀는 누군가. 디폴트 안에서도 꿈을 꾸는 것은 가능하구나.


「아저씨! 뭐예요, 진짜···.」


한울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 앞의 세상이 한울의 시선이 가는 반대방향으로 돌아갔다. 곧 시야에 한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꿈 치고는 너무 생생하지만, 역시 꿈이야. 이것 보라구.


예쁘장한 소녀였지만, 카툰 일러스트로 그려진 이미지일 뿐이었다. 디테일을 많이 생략하고 짧은 호흡으로 그려냈지만, 그만큼 어린 소녀의 이미지가 풋풋하게 잘 살아있었고, 회색 모노톤이지만 옅게 채색된 머리카락과 청바지는 수수해서 더욱 소녀다웠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계속 움직이며 말을 했다. 한울을 부르고 있었다.


아직도 초점이 맞지 않은 눈으로 한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디폴트의 어둠과 고요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투명하진 않지만 화사한 색조의 하늘, 유화 물감 색으로 물든 것 같은 공기, 강약이 조화롭게 채색된 거리와 건물들······. 그리고 수채화 카툰 소녀.


「여, 여기는 —.」


세상이 캔버스인양 그림질 해대는 또라이 아키텍트의 루프.


「아저씨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예요?」


「어··· 내가 왜?」


「그게······ 조금 전에 제가 뭘 여쭤보고 있었는데, 잘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멍해지셔서······.」


「멍해져? 내가?」


「네.」


「너랑 내가, 뭔가 얘기하고 있었다고?」


「네··· 제가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있었어요. 저 아시냐고···.」


「내가 널 어떻게···. 아니 가만, 너 혹시···.」


트럭과 정면충돌한 버스 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목이 부러져 있던 소녀. 입고 있는 옷이 비슷했다.


「맞아요 맞아요. 저 분명히 아저씨 봤거든요.」


「네가 어떻게···? 너는 그 사고난 버스에서···.」


「그게 저도 궁금해서요. 혹시 아저씬 아실려나 해서—.」


「뭘?」


「그때 저, 죽었던 거죠? 그렇죠?」



*



— 우리가 있던 루프의 오너가 죽은 것 같아.


류미정이 디폴트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프의 오너. 이 아이가 루프의 오너라면, 아이가 교통 사고로 죽자마자 오너가 사망한 그림질 루프가 사라지고 한울과 미정은 디폴트에 빠졌다······.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럼 내 눈 앞의 이 아이는 뭔가. 나는 어떻게 이 루프에 다시 들어와 있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죽었다니?」


한울은 일단 시침을 떼 보기로 했다. 루프 안의 스피릿이나 시뮬레이트에게는 마인드루프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을 포함, 각성을 유도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금기사항이다. 약간이라도 낌새를 채어 루프세계와 현실세계와의 괴리감을 깨닫게 되면, 브레인이나 AI 코어가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여 자기파괴적인 각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트는 자아가 없으므로 별 영향이 없지만, 문제는 시뮬레이트와 스피릿을 쉽사리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AI 스피릿처럼 인간 스피릿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에 출시되고 있는 신형 마인드루프의 시뮬레이트들은 대단히 정교하여 일반적인 루프 안의 일상에서는 고가의 AI 스피릿을 충분히 대체할 만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시뮬레이트든 스피릿이든 각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 대화는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이 루프의 오너 스피릿일지도 모른다.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제가 아저씨를 기억하는 건······ 버스 앞문 쪽에 쓰러져 있었을 때, 아저씨가 앞문 유리창을 통해 절 봤고, 앞문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다가······.」


그냥 쓰러져 있었던 게 아니지. 목과 허리가 처참하게 비틀려 있었고, 지금은 옅게만 채색된 너의 머리는 온통 검회색 피로 젖어 얼굴이 보이질 않았어.


「그때 웬 언니가 문짝을 부수고 들어왔어요.」


한울은 류미정이 맨손으로 버스 문짝을 뜯어내던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그 장면의 경악스러움이 한울의 표정을 잠깐 스쳐갔는지, 아이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기억나죠? 아저씨도 그 언니 본 거죠? 맞네 맞네. 나랑 거기 있었던 거.」


「으음.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서?」


「그 언니가 백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 검은색이고, 집게손가락처럼 뭔가가 길게 튀어나와 있고 손잡이가 있었어요 — 그걸 손에 쥐고 버스에서 다시 나갔어요. 그리고 쾅, 하는 소리가 난 것까지 기억이 나요.」


총을 꺼내든 것을 봤군. 류미정이 총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총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뭐였나요? 그 소리, 그 언니가 들고 있던 물건에서 난 소리였나요?」


「으음, 글쎄. 듣자하니 총 같은데. 그런 위험한 물건을 젊은 여자가 갖고 있을 리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 하자니 참 고역이었다. 용의자 심문을 하면서 모르는 체 하는 인간들을 수도 없이 다그쳐 보았으나, 자신이 직접 무언가에 대해 시침을 떼거나 모른 체 해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자식들도 잡아떼는 일이 쉽지는 않았었겠군.


「위험한 거예요? 그런 조그만 물건이 왜요?」


「당연하지. 총 몰라? 총 처음 봐?」 정말 총에 대해 모르는 걸까.


「음, 네. 생전 처음 봤어요.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도 처음 들었구요. 그것도 그, 총이란 물건에서 난 소리예요?」 한울로부터 모처럼 대답이 나오자 아이가 더욱 호기심을 내며 물었다. 계속 말해줘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총을 쐈다면, 거기서 난 소리겠지. 누군가 맞았다면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고. 소리도 소리지만 총에서 나오는 총알을 맞는 게 더 무서운 거야. 사람 몸을 뚫고 나가면서 장기를 다 찢어놓거든.」


그 사고를 보면 평화로워 보이는 이 루프도 꽤 흉흉해지고 있는 듯 하다. 루프 오너도 알아두고 경각심을 갖는 게 나쁠 건 없겠지.


한울의 설명이 거북했는지 아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진저리를 쳤다.


「제가 좀 귀가 예민해서— 소리가 남들보다 좀 더 크게 들려요. 그래서 더 무서웠던 것 같아요. 결국 그 언니가 총이란 물건을 사용한 거네요. 왜 그런 거예요? 그렇게 무시무시한 물건을 갖고.」


「······.」


「아저씨도 밖에 있었으니까, 봤을 거 아니예요.」


잘은 못 봤다. 트럭 운전사의 기습에 보기 좋게 나가떨어져 있었으니까.


「어, 잘 모르겠는데. 애시당초 난 그 버스 얘기부터 통 무슨 얘긴지······.」


「어? 아까는 사고난 버스에서 저를 봤다고 했잖아요.」 한울이 갑자기 말을 바꾸니 아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식은땀이 흐르는지 이마가 축축해졌다. 아이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한울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실망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역시, 꿈이었던 걸까요. 근데 너무 이상해요. 꿈에서 사고가 났고, 아저씨가 나왔고, 저는 죽었는데 깨어서 그 자리에 다시 와 보니 꿈에 나왔던 아저씨를 우연히도 만났구요. 아저씨는 저를 생전 처음 본다고 하셨다가, 다시 아는 척을 하셨다가, 이젠 또 버스 사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시니······. 아저씨는 지금 이 상황, 안 이상하세요?」


「가만, 생전 처음 봤다고 말했다고? 내가 너를? 언제?」


「네. 좀 전에 그렇게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멍해지셨죠. 이제 그것도 기억 안 나세요?」


기억이 안 나는 정도가 아니다.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비로소 현재의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내가 디폴트에서 이 루프로 돌아오기 전에 나와, 아니 이 몸과 얘기하고 있었던 거로군. 루프로 복귀하면서 운 좋게도 내 몸을 다시 쓰게 된 것이고. 즉, 한울의 스피릿이 루프로 복귀 전에 아이와 대화하고 있었던 것은 아이의 기억과 의식에서 재구성된 시뮬레이트라는 말이다. 또한 그 사실은 역시 이 아이가 이 루프의 오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누군가 한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귀에 익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뒤를 돌아보자, 류미정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싱긋 웃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2 22:07
    No. 1

    12화 떡밥리스트:

    18) 시연은, 자신의 루프에서 한울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계속 움직이며 말을 했다. 한울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울이 어떻게 됐죠?
    19) 한울은 총에 대해 아주 상세히 시연에게 설명해 줍니다. “소리도 소리지만 총에서 나오는 총알을 맞는 게 더 무서운 거야. 사람 몸을 뚫고 나가면서 장기를 다 찢어놓거든.”
    20) 시연은 큰 소리가 싫은가 봅니다. “제가 좀 귀가 예민해서, 소리가 남들보다 좀 더 크게 들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8.05.02 05:49
    No. 2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2 10:55
    No. 3

    항상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인스카이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 진입 +7 18.04.10 630 9 7쪽
4 왜 국민정신건강진흥원인가 +5 18.04.10 648 12 7쪽
3 임무 +4 18.04.09 697 12 8쪽
2 인터뷰 +5 18.04.09 861 13 10쪽
1 메모 +8 18.04.09 1,191 1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