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효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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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보낸 이메일을 읽었다.
이복여동생의 처참한 죽음으로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큰아이가 보낸 이메일을 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정신적으로 내게 완전한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이 지옥 같은 삶을 유지해야 할 한 가닥 이유마저 사라졌다.
항상 혼란하던 내 머릿속이 이젠 깨끗이 정리되며 홀가분해졌다.
왈칵 울음이라도 터져 나올 거 같았는데...
그렇게 눈물을 한가득 흘리며 슬프고 괴로워할 줄 알았는데...
지금 이순간 내 눈에선 한 방울의 눈물도 안 흘러나왔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고 마음의 각오를 충분히 하고 또 하고 또또 하고 또또또 하고 있었거든.
그 덕분인가?
오히려 더 안심되고 담담한 가운데 차분한 마음마저 든다.
이미 오래전 내가 아내와 두 아이에게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제대로 된 아빠 노릇을 할 수 없는 여건 임을 충분히 확인한 이후, 쓸데없는 희망이나 욕심 따윈 모두 비우고 내버렸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좋다.
그저 내 아내와 나의 두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에서의 윤택하고 안전한 삶이 계속될 수만 있다면 난 그저 그걸로 만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하는 내가 미친 걸지도 모른다.
그 원장은 아내와 젊은 나이에 사별한 후 그동안 쭉 홀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시집 장가까지 모두 보내놓고 혼자 살아왔다던가?
그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던 아내의 인생을 내가 다 망가트려 놨다.
기러기 부부는 절대로 싫다며 안 가겠다는 아내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아이들과 함께 떠나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남편과 두 아이밖엔 모르던 내 아내가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오죽 한계까지 부딪혔으면, 재취 자리도 마다하지 않게 됐을까?
그저 이 모든 게 전부 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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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같은 회사 선후배 사이였던 아내와 나 우리의 결혼 이후 지금 이렇게 망가져 버린 나의 삶은, 제 주제를 몰랐던 나의 과욕이 만든 어찌 보면 당연히 예고된 참사였다.
원래대로라면 출신학교로든 내가 가진 다른 어떤 스팩으로든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던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운 좋게 입사했던 내가 주제를 알고 조심 또 조심했어야 한다.
차라리 처음부터 내 헛된 과욕임을 순순히 인정하고 내 분수에 맞게 살았어야 했는데, 내 것이 될 수 없던 것이 운이 좋아 잠시 내 것이 되었던 그 순간 이후, 딱 거기서 내 과한 욕심들을 멈추지 못했다.
잘못된 과욕을 가졌던 나를 이용해 쓰다 버리려는 속셈인 줄 알면서도 나는 라인을 타는 위험한 도박을 했다.
왜냐면, 그때의 나는 내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아내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이미 무리한 조기유학을 보낸 상태였고 돈이 계속해서 필요했었다.
처음엔 대기업 연봉과 퇴근 이후의 배달 알바나 대리운전 정도로 어떻게든 감당이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계속 불어나는 아이들 유학과 생활비용을 감당하기가 벅찼던 나는 결국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을 했다.
아무것 가진 게 없는 내가 남보다 더 빠른 출세와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선 당연히 감내해야 할 리스크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라인이 내게 내민 손을 잡았고, 나는 승진을 위해서라면 뭐든 가리지 않는, 내가 잡은 라인의 더러운 앞잡이요 밀정이었고 추악한 배신자였다.
나의 부족한 학벌과 스팩, 제 실력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욕심을 가졌고, 출세를 위해서 온갖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던 게 나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았든 몰랐든, 내 손을 직간접으로 거쳐서 수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피해당하거나 직접 피를 봐야 했다.
나는 내 라인의 명령이라면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물불 안 가리는 쓰레기이자 한 마리의 개였다.
위에서 똥구멍을 핥으라고 지시해도, 상대가 누구든 1초도 망설임 없이 명령을 따라, 아니 명령보다도 더 열심히 그 똥구멍이 헐 때까지 핥아 대던 개새끼였다.
얼마나 잘 핥고 넙죽 엎드려 기었으면, 용도가 다할 즈음마다 이미 몇 번은 일찍 버려졌어야 할 내가 오히려 동기 중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과장과 차장 진급까지 했을까?
하지만, 실력도 없고 근본도 없는 내가 가진 출신성분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고, 결국은 차장까지가 내 한계이자 그 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라인 상부의 배임과 횡령 등의 중대한 범죄까지도 내가 책임을 떠안았다.
왜냐면 라인에서 내게 그 보상금으로, 그룹 내 최고위급이 퇴직할 때나 받을까 싶은 30억이란 거액을 제시했으니까.
보상금을 받고 그 범죄의 책임을 대신 떠안아 달라는 라인의 요청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나 역시도 내가 이제 용도 폐기 대상이 되었다는 걸 충분히 인지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이 제시한 보상금 30억을 받고 회사를 그만두려 했었다.
보상금을 받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캐나다로 넘어가서 세탁소라도 차린 후 남은 인생은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그들과의 약속을 꿋꿋이 지켰다.
따르던 라인 최상부가 저지른 배임 횡령 건을 대신해 떠안으면서, 한동안 구치소 생활도 감수해야 했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몇 번의 재판을 거친 후, 결국 배임 횡령의 벌금 9억 원에다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받아 풀려나오며 한순간에 전과자까지 됐다.
그렇게 라인 생활을 정리하며 보상금 30억을 받아든 순간, 더는 한국에서의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저 빨리 한국을 떠나 가족이 기다리는 캐나다로 갈 생각만 앞섰다.
급하게 전셋집을 뺏고 부동 자산을 비롯해 당장 현금화 가능한 모든 것을 처분했다.
그렇게 모은 돈 35억을 라인 생활 중에 친분을 쌓게 된 외환거래 업자에게 맡겨 해외로 밀반출을 시도했는데, 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다.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가진 돈 전부를 잃었음에도 무너질 정신적 여유조차 없었다.
아내와 두 아이의 생활비나 학비를 벌려면 내가 무너져서는 안 되니까.
35억을 가지고 캐나다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선뜻 허락했던 큰아이의 학교는 사립학교라 학비가 많이 들어갔고, 가진 돈을 모두 사기당한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채에 손을 대서 입학금을 보냈다.
아이가 실망하는 게 두려웠던 나는 절대로 손대서는 안 되는 사채를 손댄 대가를 그 이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끝이 없이 불어나기만 하는 원금과 이자.
전과자라 재취업은 불가능했고, 음식 배달일, 심야 편의점이나 대리운전, 주유소나 건설 현장과 이삿짐 배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악착같이 몸을 갈아 넣으며 일하고 또 일하며 돈을 벌었다.
꼬박꼬박 사채 이자를 갚는데 원금은 계속 늘어나는 이상한 셈법.
점점 애들 엄마에게 보낼 수 있는 액수가 줄어들었고 언제든 내 맘속으로 ‘이젠 모든 게 끝이다’라는 한계만 선언할 수 있다면, 이 고된 삶을 포기하고 전부 내려놓을 수 있었을 텐데.
아이들과 아내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 그거 한 가닥이 내 지옥 같은 삶을 억지로 유지하게 해 왔는데...
아주 후련하게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젠 나도 홀가분하게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최근 1년여 동안 절실히 체감하고 느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내겐 너무나 고통인데, 아내와 두 아이를 책임지지 못한 미안함에 죽을 마음조차도 함부로 가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내와 두 아이가 살아갈 또 다른 방법이 생겼다니, 가족을 내버리고 나 혼자 도망가는 거 같아서, 감히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차마 생각도 실행도 하지 못했던 걸 이제는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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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두 아이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와 축복을 남기고 싶었지만, 아직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이라 아빠의 선택을 이해 못 하고 혹시라도 어긋날까 봐 아내에게만 짧은 인사를 남기기로 했다.
정성껏 이메일을 쓴 후, 오래도록 연락하지 않았던 아내의 개인 이메일 계정에 예약 전송을 했다.
남긴 내용은 그냥 간단했다.
결혼 기간 내내 아내에게 힘든 고생만 시켜서 미안했다는 사과.
내겐 과분한 축복이었던 두 아이를 낳아줘서 고맙다는 감사.
재혼 소식은 들었고 두 아이를 잘 키워달라는 부탁.
나는 이제 마음 편히 다른 곳으로 가지만, 내가 어느 세상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반드시 당신과 아이들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될 테니, 앞으로의 당신은 아이들과 함께 그저 밝게 웃으며 행복하게만 살아달라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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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제처럼 고시원 쪽방으로 퇴근해서 한숨 자고 일어나 내일 결행해도 되는데, 구차하게 하루 더 살아서 무엇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만 싶었다.
내가 탄 버스는 점점 한강과 가까워지고 있었고, 나는 서둘러서 내가 아는 모든 소중한 사람들에게 짤막한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예약 전송했다.
내가 아는 모두에게 이메일을 써 놓고 나니 어느새 다음 정거장이 한강 다리를 도보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였다.
내릴 준비를 하려고 하차할 뒷문으로 가서 섰는데, 버스 뒷문 가까운 의자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는 이제 막 이십 대 초반쯤 됐을까 싶은 한 여성 승객의 얼굴을 보게 됐다.
홍 씨 형님의 핸드폰에서 본 뉴스 속보.
비참하게 죽은 나의 배다른 여동생이 아마 저 사람과 비슷한 또래일 거 같았다.
버스는 정차했고 열린 뒷문으로 정류장에 내렸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한강 다리로 향하는 길.
아마도 오늘이 예정된 날이었나 보다.
어떻게 10여 년 넘게 소식을 모르던 이복여동생의 죽음과 아내의 재혼 소식을 함께 접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다리 위로 향하는 길은 멀었고, 멍하니 걸어가면서 예전의 일들을 떠올려 본다.
후~우!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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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공예 예술가였던 아버지와 중학교 교사인 엄마, 그리고 나까지 셋이 함께 살던 그때.
한때 내게도 아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매일 웃으며 즐거움과 행복함만 누리던 시절이었는데, 불행히도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왜냐면, 내게 정확히 그 행복의 반대 개념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충격적이고도 놀랄만한 사건이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내 열두 살의 생일 다음 날이었다.
학교를 다녀오니 부모님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봤던 웃음기 하나 없는 차분한 아버지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나를 소파에 앉힌 아버지와 엄마.
처음엔 내게 결혼한 부부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함께 살다가 이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차분히 설명하셨다.
그리고, 아주 잔인하게도 두 분 모두, 내게 두 분 중 누굴 선택하고 따라가서 같이 살고 싶냐고 물었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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