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효과 (1) [수정]
* * *
#2024년 가을,
경기도에 있는 한 온라인 쇼핑몰 물류창고 일각.
오후부터 밤 9시까지 자전거 음식 배달일을 마치고 저녁밥 먹을 새도 없이 곧장 물류창고로 출근했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근무해야 할 심야조 근무 인원들을 위해 식당에 미리 준비된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다들 입구를 나서자마자 자동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지만,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재작년부터 담배도 끊었다.
물론, 누군가 먼저 권하면 한 번은 됐다고 사양하다가, 재차 권하면 못 이기는 척 감사하다면서 받아 피운다.
“지훈씨! 이리 와, 담배 한 대 태우자!”
담배를 태우러 가던 여러 명 중, 심야작업 조장인 빨간 모자 홍 씨 형님이 나를 불렀다.
가구 할인판매점 사업을 하다가 화재로 모든 걸 잃었다는 형님으로 내가 이곳에서 일하러 오기 전부터 있던 터줏대감이다.
심야 작업조의 실세인데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다.
“괜찮습니다, 형님.”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대 태워요. 이리 와. 나 두 번째 권했다.”
두 번은 권해야 마지 못 해 받아든다는 걸 아는 홍 씨 형님의 말에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하며 담배를 받는다.
“번번이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형님.”
“죄송하고 고맙긴 뭘...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아내랑 아이들 타지로 보내놓고 기러기 아빠로 살다가 이혼당한 거 하며, 사기 맞아 모든 거 다 날리고 바닥 끝까지 추락한 거까지, 지훈씨는 그냥 딱 내 모습 그대로다. 시발~, 에이. 좆같은 세상.”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자 불을 붙여주는 홍시 형님.
“자! 이거도 마셔.”
캔커피를 하나 내게 건네는 홍 씨 형님.
편의점의 고급 커피인 스타벅스 유리병 커피인데, 심지어 따듯하기까지 하다.
“웬 거에요? 이건 비싼 건데.”
“흐흐, 이거 저쪽 보안실의 그 키 크고 예쁜 아가씨 알지? 그 아가씨가 지훈씨한테 전해 달라더라. 덕분에 나도 하나 얻었다.”
물류창고 보안실에서 근무하는 사설 경비업체 직원 중, 몇 안 되는 여성 경비인력인데, 얼핏 듣기로 특전사 출신이라고 했다.
얼마 전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꽤 잘 대해준다.
연애할 시간과 돈 그리고 마음의 여유도 없는 나.
하루하루 이 지옥 같은 삶을 버리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로, 그저 죽지 못해서 사는 내겐 그 사람이 몹시 부담스럽다.
넘어갈 생각이 없는데 괜히 도끼질하며 헛수고할 그녀에게 매우 미안해서다.
“전해주란다고 덥석 받으면 어떡해요?”
“웬만하면 못 이기는 척 받아, 그냥. 이 추운 날에 따듯한 커피라떼 하나가 뭔 중죄라고?”
홍씨 형님의 넉살맞은 드립에 나지막이 한숨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어 빨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마치 큰 죄라도 짓는 양,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커피 병을 땄다.
이런 고급스러운 병 커피 못 마셔본 지 너무 오래되어 언제 마지막으로 마셔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이고~! 이런 개 쓰레기 같은 놈을 봤나? 어디 사람을 죽여, 그것도 이렇게 끔찍하게? 개 씨발 놈의 새끼.”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보던 홍 씨 형님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욕설을 뱉었다.
무슨 일이지?
“네? 뭘 보셨는데요?”
“한국계 싱가포르 사업가가 목이 잘려 죽었어, 중국인 남편한테. 에구. 이 미친 짱개 놈 나이 차이가 두 배가 넘는데, 자기 막내딸보다도 더 어릴 나이의 여자를 이슬람 테러리스트처럼 참수를 했다잖아. 에휴, 끔찍하고 재수 없네. 시벌놈.”
한국계 싱가포르 사업가라는 것.
중국인 남편에게 살해당했다니 여성.
나이 차이가 두 배가 넘는다는 것.
모두 다 내가 아는 사람의 정보와 일치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전신으로 소름이 쫙 돋아 흘렀다.
“형님, 핸드폰 잠시만요.”
홍씨 형님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빌려서 폰 화면의 속보 뉴스 자막을 읽었다.
〖...다음 뉴스는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엽기적 살인 범죄 소식입니다...현지 시간으로 어제 늦은 저녁 8시경 싱가포르 경찰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LMVH와, 헤르메수, 꾸찌, 다올 등에 악어가죽을 공급하는 테너리 기업 홍랑 인터내셔널의 대주주 에밀리 한(21세, 한국명 한 지수)을 폭행 살해한 혐의로 남편 정쩌둥(郑泽东)(53세, 중국계 폭력집단 두목)를 긴급 체포했습니다. 남편 천궈푸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자 에밀리 한 씨의 시신은 어제 저녁 가사 도우미에 의해 그녀의 자택 침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피해자 에밀리 한 씨의 시신은 전신에 백여 곳이 넘는 검붉은 피멍과 흉기에 찔리고 베인 자국이 있었습니다. 결정적 사인은 과다 출혈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는 싱가포르 경찰의 발표가 있었으며...〗
우~우~웩.
우~~웨~엑.
뉴스를 읽다 말고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구토를 십여 차례가 넘도록 반복했다.
먹었던 모든 걸 모조리 토해내고 물까지 토해내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어서 헛구역질만 반복했다.
그 때문에 뱃가죽과 복부 근육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구토가 끝난 후 마치 내 머리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처럼 잠시 몇 분 동안의 기억을 잃었다.
분명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고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 했었던 거 같은데, 뭐라 말했는지 누가 나를 부축하고 잡아준 건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다.
그저 조금 전 식사했던 음식물을 모두 토해냈다는 거만 기억나고, 정신이 들어온 순간부터는 내가 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것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하니 앞만 보며 그 자리 땅바닥에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었다.
뉴스 속보가 내게 준 충격은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한다는 걸 알게 됐던 내 어린 시절 인생 최악의 고통을 가뿐히 넘어설만큼 최악이었다.
그렇게 내 이복여동생이 처참하게 죽었다.
* * *
어떻게 물류창고를 나와서 버스 종점 인근의 정류장까지 그 길고 어두운 국도 옆 먼 거리를 혼자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는데, 내 눈앞으로 버스가 서더니 문이 열렸다.
“또 첫차를 타시네? 오늘도 밤새 야간근무했나 봐요?”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된 버스 기사님이 오늘도 반갑다고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몽롱한 상태의 나는 기사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네...네...”
먼저 내게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넨 버스 기사님께 고개 숙여 답례 인사했다.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친절히 웃으면서 대하고 싶은 분인데, 뉴스 속보를 통해 싱가포르에 사는 내 이복여동생의 처참한 죽음을 접하고 그 충격이 너무나 컸다.
게다가, 모든 희망을 잃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나는 웃음이라는 사치를 잃은 지 이미 오래다.
마땅히 덧붙여 할 말이 없기도 해서 그냥 조용히 텅 빈 버스의 맨 뒷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옛날엔 몰랐는데, 빈 버스 뒷자리의 소음과 덜컹거리는 충격이 좋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온종일 이것저것 기계처럼 일만 하는 내가 아직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어두운 국도 위로 버스가 힘차게 출발한다.
시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버스가 속력을 내기 시작할 때쯤 창틀과 창문이 서로 맞부딪치며 부르르 떨리는 소음이 난다.
지금 온몸을 뚜드려 맞은 듯 전신이 아프고 극도로 피곤하지만, 지금 잠들면 못 일어날 거 같아서 핸드폰을 켰다.
액정 이곳저곳이 금이 가고 깨졌지만, 약간의 색 번짐 현상 외에는 별다른 이상은 없다.
이복여동생의 죽음은 너무나 심한 충격이었지만, 지금의 이 극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이메일을 살핀다.
거기엔 아이들과 오래전부터 가끔 소식을 주고받은 이메일이 가득히 있다.
오늘의 내 삶을 유지시켜줬고, 내일의 내 삶을 유지하게 해줄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
혹시나 오늘 내가 겪은 이 끔찍한 충격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줄, 내 아이들로부터 이메일이 오지는 않았을까 해서 이메일함을 살펴본다.
온종일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채무를 갚느라 바쁘기도 하고 시차 때문에 같은 시간대에 함께 깨어있지도 않다 보니, 톡이나 전화같은 실시간 연락보다는 언제든 내가 편하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메일을 더 선호한다.
새로 온 이메일을 빠르게 살핀다.
구청과 각 단체에 신청했던 생활지원금 관련 소식은 없는지를 살폈으나 아무런 회신 메일이 없다.
돈을 빌려 썼던 사채업체 담당자가 보낸 욕설 섞인 채무독촉 이메일 외에는 온통 잡스러운 도박이나 광고 스팸메일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 표시가 있는 중요 이메일 보관함을 보는데, 거기에 아직 읽지 않은 메일이 존재한다는 숫자 ‘1’ 표시가 떠 있다.
순간적으로 지독한 반가움에 내 심장이 쿵쾅거리며 격하게 뛰었다.
이복여동생의 참혹한 죽음이 남긴 충격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의 그 소름 끼치고 구토만 나오던 끔찍한 상황에서 좀 많이 회복된 느낌이다.
이번에도 큰아이가 제 엄마 몰래 보낸 이메일일 거 같다.
아내와 작은 아이는 벌써 수년 전부터 완전히 연락이 끊겼지만, 큰아이와는 아직도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나마 지난해 연말에 큰아이가 보냈던 이메일 마지막이었고, 이후로는 바쁜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중요 이메일 보관함을 클릭해서 새 편지를 읽는다.
내용은 이러했다.
⌜아빠, 미안해.
엄마가 그 치과 원장님하고 결혼한대.
그 아저씨는 아빠보다도 훨씬 더 늙고 못생겼고, 언젠가 아빠랑 우리 모두 같이 살아야 하니까 난 절대로 안 된다고 그동안 엄마한테 계속 화냈었어.
하지만 이번에는 계속 안 된다고 엄마를 설득하고 반대할 수가 없었어.
왜냐면, 몇 달 전부터 아빠가 보내주던 돈이 끊겨서, 이젠 엄마 혼자 마트에 나가 버는 돈만으로는 우리들의 학비랑 집세하고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대.
돈 많은 부자 원장님이니까 엄마가 그 아저씨랑 결혼하고 우리도 그 집에 들어가서 함께 살든지, 아니면 우리는 여기 생활 정리하고 다시 귀국해서 서울로 돌아가야 한대.
아빠! 근데 난 서울보다 여기 사는 게 훨씬 더 좋아.
여기에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나 이젠 영어도 아주 잘해.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나중에 내 꿈을 이루려면 서울이 아니라 이곳에 계속 남아서 공부해야 하거든.
물론, 그렇다고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다는 건 절대로 아니야.
나는 아빠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번엔 어쩔 수가 없었어.
정말 너무나 미안해 아빠.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빠도 힘들 거 같아서 전부 다 말하진 못하겠어.
근데, 나 조금 전에도 너무 화가 나서 엄마하고 싸웠어.
왜냐면, 엄마는 이제 우리가 아빠랑 다시는 함께 살 수 없을 거래.
그리고 엄마가 다음부턴 그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잖아.
아빠! 제발 빨리 돈 많이 벌어서 꼭 우리 만나러 여기로 와.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또 연락할게, 아빠 사랑해,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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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에밀리의 죽음을 묘사한 부분 일부 수정했습니다.(4/26)
-살인범의 이름 수정(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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