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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835_thekhan_0 1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과학자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뉴탈로스
작품등록일 :
2023.02.14 23:00
최근연재일 :
2023.02.16 23:34
연재수 :
4 회
조회수 :
137
추천수 :
2
글자수 :
31,888

작성
23.02.1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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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멸망한 세계의 과학자 - 001

DUMMY

“소장님?”

“······.”

“소장님, 바쁘십니까?”

“···아, 뭔데 또?”


연구실에서 한참 연구에 몰두하던 나는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짜증을 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작은 화면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지적인 외모에 안경을 쓴, 실험복의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조수였다가 이제는 이 연구소의 부소장이 된 아끼는 동생, 권영진이다.


“뭐야? 또 실험체 44호가 말썽을 일으켰냐?”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현철이 그놈이 또 찾아왔어?”

“아, 그게 아니라······.”



권영진은 내 짜증스런 반응에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화상전화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연구 중엔 안 받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아, 아니, 그렇긴 하지만······.”


권영진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쭈뼜거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

“뭐? 누군데?”

“···‘로키’에요.”

“······!”


권영진의 대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로키’, 이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다.


현 헌터협회 협회장, 앤드루 나카하라.


과연, 권영진이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난 연구 도중엔 누구한테서 연락이 오는 안 받는 편이다. 상대가 장관이나 대통령급이어도 말이다. 나에겐 그럴 만한 자격도, 힘도 있으니까,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세계의 1인자인 ‘로키’라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최소한 응대는 해 줘야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권영진에게 화상통화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화면 너머로 고개를 숙이는 권영진의 모습이 보이고, 장면이 전환되더니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검은 스포츠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 ‘로키’ 앤드루 나카하라가 날 응시하며 씩 웃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닥터? 얼굴 보기가 참 힘드네?]


앤드루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 웃음이 호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하품을 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귀하신 분이 굳이 제 얼굴을 봐서 뭐 하시게요?”

[얼마 전에 오 과장이 그러던데, 자네 요즘도 바쁜가봐? 균열전쟁도 이제 끝났는데 왜 허구한날 연구소에 처박혀 있는 건가?]


여기서 말하는 오 과장이란 바로 오현철, 나와 친분이 있는 협회 직원의 이름이다. 얼마 전부터 그 녀석이 자꾸 날 불러내려 하기에 계속 거절하던 참이다. 그 뒤에는 이 양반, 앤드루의 사주가 있었음이 너무 뻔했으니까.


“과학자가 연구를 하는 데 뭐 이상할 거라도 있습니까?”

[···하하.]

“그러는 회장님이야말로 왜 굳이 저를 찾으시는데요?”


이건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앤드루의 말대로, 인류를 괴롭혀 온 ‘균열’의 위협도 이제 사라졌다. 소위 말하는 ‘균열전쟁’이 마침내 종결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내가 더 이상 ‘헌터’로서 활동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1년 전, 나는 헌터 자격을 반납하고 본업인 마도과학자로 돌아왔다. 이제 균열의 위협도 없겠다, 맘 편히 연구에 매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헌터 협회는 균열전쟁 종결 이후로도 자꾸 사람을 보내 나를 소환하려 했고, 그럴 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오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오라’라고? 하하. 참 자네다워?]

“뭐, 딱히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만?”

[하하, 직접 가고 싶었다만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이렇게 화상으로 만나게 된 건 좀 양해해주게.]

“하하하······.”


앤드루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잡소리는 집어 치우시고.”

[어허?]

“이 불쌍한 닥터한테 아직도 시킬 일이 남았습니까? 빙빙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빨리 본론만 말씀하시죠?”

[···하, 하하하하!]


내 말에 앤드루는 잠시 흠칫하더니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혼자서 한참 웃어 제끼더니 특유의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좋아. 나도 바라는 바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앤드루는 입을 좌우로 쪼개며 실실 웃었다. 저리니까 농담이 아니라 무슨 야쿠자 두목 같다. 하긴, 이 양반이 그동안 해온 짓거리를 생각하면 감히 야쿠자 따위는 비빌 수도 없지. 아무튼 그렇게 품위 없는 웃음을 흘리던 앤드루는 날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닥터, 예전에 내가 부탁했던 그 기술, 우리한테 넘길 생각 없나?]


아하, 그거였나. 그가 말하는 ‘기술’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듣자마자 대충 감이 왔지만 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엥, 기술이라뇨? 대체 무슨······.”

[쇼하지 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괴수의 세포를 이용한 생체병기 제작기술 말이야!]

“아, 난 또 뭐라고.”


말했듯이 난 전직 헌터이기 전에 마도과학자다. 인류의 신학문인 ‘마도과학’을 독립된 학문으로서 정립시킨 게 바로 나다. 그리고 나는 헌터시절 마도과학을 이용해 동료들을 도와주었다.


헌터들의 신체를 강화해 줄 약물을 만들거나, 몬스터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어 쥐어 주거나, 아니면 기계 병기를 만들어 같이 싸우게 하거나 했다.


그러던 중 균열전쟁 말엽에 새로 개발한 것이 바로 괴수의 세포를 이용한 생체병기였다. 괴수란 균열전쟁 말엽에 출현한 특수한 몬스터들로, 일반 몬스터보다 큰 덩치에, 높은 지능을 가진 강한 몬스터들이다. 이 녀석들은 상위 헌터들도 방심할 수 없는 위험한 상대였고, 한때 인류 최대의 위협이었다. 그렇기에 그 괴수들의 세포를 복제해 동급의 괴물을 만들어 대적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나는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그 기술을 완성하기 직전까지 갔었지만, 결국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 전에 균열전쟁이 끝나 버렸으니까. 잘된 일이지.


헌데, 앤드루는 어째서인지 이제 필요 없어진 그 기술을 완성해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다.


“그 기술이 이제와서 왜 필요하신데요?”

[그건 자네가 알 바 아니라고 했을 텐데? 돈이라면 원하는 만큼······.]

“죄송하지만, 돈이라면 이미 분에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거든요?”

[···뭣?]

“어떤 곳에서 보상금을 두둑하게 줬거든요.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죠.”

[······.]


내가 빈정거리듯이 대꾸하자, 앤드루의 표정이 굳어졌다. 15년간 헌터로서 활동한 데다, 종전 후 협회에서 준 보상금까지 받아 챙긴 나는 지금 돈이 아쉬운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단 연구소까지 떡하니 세워 두고 있는 거지. 게다가 굳이 이 양반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돈을 벌 방법은 차고 넘친다. 그런 나를 돈으로 유혹하려 하다니 로키도 한물갔네.


[대체 그 기술을 넘기는 데 주저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가 자네에게 무슨 위해라도 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날 노려보던 앤드루가 입을 열자, 나는 웃으며 답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솔직히 위해를 가한다 해도 막아낼 자신도 있고 말이죠.”

[자네, 정말······.]

“다만, 이상하잖아요. 그 기술이 어디에 쓰일지 여쭤볼 때마다 항상 말을 돌리시던데요. 왜 그런 겁니까?”

[······.]

“봐요, 또 대답 못하시죠? 그럼 뭔가 구린 데가 있다는 건데, 저는 제 기술이 구린 일에 쓰이길 원치 않습니다.”

[흥, 잘도 지껄이는군······.]


내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앤드루는 짧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평소의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슬슬 말해줄 때도 된 것 같군.]

“뭘 말입니까?”

[우리에게 그 기술이 왜 필요······.]


쾅!


“···응?”

[···뭔가?]


앤드루가 말하던 도중, 갑자기 큰 소리와 함께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고, 나는 물론 앤드루도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소리를 낸 범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저씨······.”

“아니, 너······.”

“미안해, 히히!”


연구실 안으로 떼굴떼굴 굴러온 공을 들어 올리며 웃는 소녀, 이 연구소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인 ‘특수 실험체’, 엘리였다.


“···엘리, 연구실 근처에서 공놀이 하지 말랬지?”

“헤헤, 미안!”


엘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갈색 머리카락에 먼지가 붙은 걸 보니 필시, 지하창고도 다녀왔나 보다. 하여간 못 말리는 녀석이다.


[갑지기 뭔가?]


이쪽의 상황을 모르는 앤드루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후 엘리에게 다가갔다.


“엘리, 잠깐 이리 와 봐!”

“···으응?”


나는 양손으로 엘리의 허리를 잡은 다음, 위로 들어 올리고는 앤드루가 대기하고 있는 화면 앞으로 갖다 댔다. 그러자 앤드루가 불쾌한 듯 더욱 눈살을 찌푸렸고, 나는 그의 표정을 감상하며 말했다.


“자! 인사하세요. 우리 연구소의 마스코트, 엘리 양이에요!”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뭐야? 이 아저씨, 누구?”


엘리는 화면 속의 앤드루를 바라보며 큰 눈을 깜빡거렸고, 앤드루는 예상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엘리를 밖으로 내보낸 후, 앤드루에게 말했다.


“자아, 잘 보셨죠? 균열전쟁은 끝났다고요? 그 대악마 바알도 이렇게 평범한 소녀로서 잘 크고 있거든요!”

[···내 앞에서 그걸 들먹이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인가?]


앤드루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날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렇다. 특수 실험체인 엘리의 정체는 인류의 주적이자 균열사태의 원흉이었던 대악마 바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바알이 빙의했던 육체다. 바알에게 완전히 잠식당해 악마화한 상태였던 엘리는 1년 전, 헌터들의 협공에 제압당한 후 포획되었었다.


헌터협회는 혹시 모를 악마의 재림을 막기 위해 엘리를 불태워 없애려 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악마화한 인간을 평범한 인간으로 돌릴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참 뜬금없었지만,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는 과학자였고, 타오르는 실험정신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엘리를 몰래 빼돌린 후 연구실에서 ‘인간화 수술’을 실시했다.


몸에 가득한 사악한 마나를 모두 추출해 마나 코어를 정화하고, 악마화하며 생성된 뿔과 날개를 적출한 다음, 파괴된 신체 일부를 인공 근육과 장기로 대체하는 수술이었다.


당연히 앤드루를 포함, 협회 사람들 대다수는 나의 이러한 조치에 크게 반발했고, 이것 때문에 난 협회와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었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던, 위험천만한 조치였지만 결과는 대성공. 악마에게 잠식당했던 엘리는 다시 평범한 소녀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연구소에서 잘만 크고 있다. 비록 기억은 잃어버린 상태지만.


그렇게 어찌어찌 무마되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로키 이 양반이 날 고깝게 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인가 싶다.


[하여간, 정말이지 못 말리는 놈이야. 네놈은.]

“하하, 화나셨어요?”


앤드루의 말투가 살짝 격해졌다. 역시 엘리와 대면시킨 건 좀 무리수였나. 하지만 뭐 어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앤드루의 똥 씹은 얼굴을 감상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역시 네놈은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없겠군. 내 생각이 맞았어.]

“얼씨구, 다짜고짜 뭔 소립니까?”

[···김신! 왜 우리가 네놈의 생체병기 제작 기술을 원했는지 아나?]


앤드루가 피식 웃더니 시가에 불을 붙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놈이 물었었지? 균열전쟁도 끝났는데, 왜 생체병기가 필요하냐고 말이야. 하지만, 끝났기에 필요한 거야.]

“···뭐라고요?”

[대격변 이후 15년간, 헌터들은 인류의 영웅이자 동시에 지배계급이었어. 균열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킨다는 훌륭한 명분이 있었으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

“······.”

[그런데 이제, 균열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그런 명분을 내세우기 어려워졌단 말이야. 그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겠어?]

“···하하하.”


나는 앤드루의 말을 끊으며, 나 역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화면 너머의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헌터 중심의 사회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필요했고, 그 대안이 내가 만든 생체병기들이다. 이런 거네?”

[핵심만 짚어내는 걸 보니 머리가 좋긴 한가 보군.]

“하하하, 이보세요, 회장님······.”


나는 순식간에 다 태운 담배를 연구실 바닥으로 던져 버리고, 앤드루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제정신입니까?”

[크흐흐, 미치광이 과학자한테서 그런 소릴 다 듣게 되는군.]


웃기고 있네. 누가 누구더러 미친놈이라는 거야? 전부터 막 나가는 작자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헌데, 아무래도 자네는 우리한테 협력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더군. 그래서 그만 손절해야겠어.]

“하, 손절이요?”


앤드루가 말하는 ‘손절’이 단순히 인연을 끊는 것을 뜻할 리는 없다. 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랑 손절하면 원하시던 기술은 영원히 못 얻을 거고, 그러면 계획이 틀어질 텐데?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아니, 상관없네. 사실 그 기술은 이미 얻었거든.]

“하하, 농담이 지나치시네?”


나는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이 양반이 어디서 약을 팔아?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은 현재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철저하다. 어지간해서는 뚫릴 일이 없고, 설사 뚫리더라도 내가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앤드루가 나도 모르게 내 기술을 빼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으흠, 프로젝트 ‘레비아탄’이라. 이름 한번 잘 지었네.]

“···뭣?”


나는 앤드루의 말에 깜짝 놀라 화면을 응시했다. 앤드루는 어느새 꺼낸 종이 한 장을 훑어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프로젝트 레비아탄. 내가 명명한 괴수형 생체병기 개발 계획의 이름이다. 저걸 아는 사람은 연구소 관계자뿐인데, 어떻게?


[방금 쭉 훑어봤는데, 역시나 놀라워. 다른 건 둘째치고 자네가 마도과학의 1인자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경악하며 화면을 쳐다보는 나를 향해, 앤드루는 피식 웃으며 다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우리가 이걸 어떻게 얻었는지 알려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을 거 같네.]

“···뭐야?”

[사실 협회에서는 이미 예전에 자네를 처리하기로 결정이 났어. 오늘 연락한 건 자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지.]

“뭐가 어째?”

[헌데 그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네? 예상했던 바지만, 좀 안타까워. 그럼 잘 가라고!]

“어이, 대체 무슨······!”


콰쾅!


“······!”


앤드루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구소 밖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리!”


나는 재빨리 연구소 AI인 ‘마리’를 호출했다. 마리는 연구소 전체의 시스템을 총괄하고 있다. 내 외침에 허공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고, 연구소 근처에 거대한 마나 반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SSS급 헌터로 추정됩니다.]

“···뭐야?”


마리가 화면을 띄워 연구소의 전경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구소 위로 온 몸을 마나로 휘감은 한 여자의 신형이 보였다. 휘날리는 금발에 기계처럼 차가운 표정의 여인,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엘레나?”


엘레나 크로포드. ‘메테오’라는 이명을 지닌 미국의 SSS급 헌터로, 협회의 대표적인 사냥개 중 하나다. 저 여자가 왔다는 건 협회가 아주 작정했다는 뜻이다. 진짜로 해보자 이거지?


[연구소 북쪽에서 추가적인 마나 반응이 있습니다.]

“···뭐?”


헌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리가 이어서 연구소 북쪽의 전경을 보여줬고, 화면 안에는 각자의 능력으로 연구소를 유린하는 두 개의 신형이 보였다.


“나카오랑······. 슈? 하, 이것들이 진짜······!”


마찬가지로 SSS급 헌터인 나카오 쥬타로와 슈 리아오팅이다. 과거, 세계 최강의 헌터가 누구였는가를 논할 때, 한 번쯤은 이름이 언급되었던,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아무래도 협회 놈들이 갈 때까지 간 모양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는 이를 갈며 마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리! 연구소 전체에 비상 걸고, 수호결계 전개해!”


나로선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내 연구소는 마도과학의 정수 그 자체다. 내가 직접 설계한 수호결계는 SSS급 헌터의 공격이라도 잠시 저지할 수 있는 내구력이 있고, 연구소 내에는 그들을 상대할만한 병기들도 얼마든지 있다. 협회가 그동안 날 함부로 못 건드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마디 저놈들은 벌집을 잘못 건드린 셈이다. 그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마리?”


그러나 내 지시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들려와야 할 마리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내가 시스템을 점검해 보려는 순간······.


탕!


“······!”


나는 뒤에서 들린 총성과 함께, 등과 복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풀썩 쓰러졌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나에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당황스러우십니까? 소장님?”


한 남자가 한손에 피스톨을 든 채,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놀랍게도 권영진이었다.


“여, 영진이 너, 설마······.”

“소장님! 아니, 형님! 형님은 참 미련하십니다!”


경악하며 그를 올려다보는 나를 향해, 권영진은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당히 굽히시면 될 걸, 왜 그리 뻣뻣하십니까? 그러다가 본인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을 안 해 보셨습니까?”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탕!


애써 몸을 일으키려던 나를 향해, 권영진이 피스톨을 발포했다. 가슴에 탄환이 박혀 쓰러지던 나를 향해, 놈은 피스톨의 남은 탄환 4발을 전부 박아 넣었다.


온몸에서 피를 쏟으며,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는 나에게, 권영진이 말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쏜 탄환에는 형님이 만드신 ‘커즈 바이러스’가 들어있습니다. 즉, 형님이 몸에 이식하신 재생세포는 무용지물이라는 거지요.”

“너, 너 진짜······.”


그런 것까지 준비했다면, 이놈은 이 모든 걸 사전에 계획했다는 뜻이 된다. 나는 그 순간에도 납득하지 못했다. 이 녀석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동생처럼 여겼던, 내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는 녀석이······.


앤드루가 어떻게 내 기술을 빼돌렸는지, 연구소의 경비 시스템이 왜 갑자기 먹통이 된 건지는 전부 권영진이 개입했다면 설명이 된다.


하지만, 대체 왜?


“여, 영진이 너 이 새끼······.”


나는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모든 힘을 쥐어짜 놈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대, 대체······. 네가 왜······?”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시다니, 실망스럽군요.”


권영진은 피식 웃으며 탄환이 떨어진 피스톨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바로 등을 돌려 연구실을 나가면서 말했다.


“김신 연구소는 오늘로 폐쇄입니다.”

“···뭐야?”

“균열전쟁의 영웅, ‘더 닥터’ 김신은 연구에만 몰두하다 정신이 나가 통제할 수 없는 괴물들을 탄생시켰고, 그 때문에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주 그럴듯한 결말이지요.”

“기, 기다려!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하려는······!”


콰쾅!


놈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난데없는 화염이 연구실에서 솟아났다. 밖에서도 굉음과 함께 연구원들의 비명이 들렸다. 협회의 사냥개들이 본격적인 살육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연구실이 불탄다. 더불어 그동안 애써 만들어낸 연구자료들도 나 자신과 함께 불타고 있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내가 떠올린 것은 허무함이 아닌 ‘슬픔’이었다.


15년 간 마도과학이라는 한 길만 파오면서, 친구도 연인도 없던 나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준 사람. 단순히 동료를 넘어 동반자로 생각했던 권영진의 배신.


나는 마지막까지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놈이 내게 왜 이러는지를.


그리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 내 슬픔과 의혹은 자연스레 분노로 바뀌었다.


“궈, 권영진······!”


만약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절대 그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이번 생을 마도과학을 위해 살았다면, 다음 생은 그놈을 파멸시키기 위해 살아 주리라!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온몸을 휘감는 작열통(灼熱痛) 속에서 증오를 불태웠고, 그런 나에게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엘리?


작은 소녀의 신형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한 직후,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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