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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집사 님의 서재입니다.

효종 동생의 동생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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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집사
작품등록일 :
2024.09.10 10:28
최근연재일 :
2024.09.16 22:19
연재수 :
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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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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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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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복수의 시작점

DUMMY

나흘을 더 걸었다.

대군은 내게 말을 한 필 내주었다.

아주 잠시 타봤지만, 말을 타 본 적이 없는 난 고작 1시간도 버티질 못했다.

허벅지를 벌린 채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야 하는 말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걷는 게 낫다 싶었다.


대군은 다시 내게 짐말로 사용하는 노새를 줬지만, 난 노새를 타는 것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종일 걷는 일도 이틀 정도를 계속하니 어느새 이력이 붙어서 그렇게까지 지치지는 않았다.

다른 사행단의 사람들도 눈에 띄게 안정감을 찾았는데, 의주를 지나 서북지역에 접어들며 야인들의 땅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난 주로 대군과 부사의 가마 사이에서 걸으며 양쪽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내 쪽에서 궁금한 일을 물었다.

내가 주력한 것은 조선의 사정과 정황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겪는 조선은 그저 참담했다.

대체 역사 소설을 꽤 읽었지만, 이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가장 놀란 건 내가 떨어진 지금, 효종 즉위년의 조선이 이미 전쟁이 끝난 지 12년이나 지난 뒤였다는 거였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거치고 소현세자가 인조를 대신해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죽고 둘째 동생인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은 것이 효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대군과의 대화로 몰랐던 사실을 몇 가지나 알게 됐는데, 우선 정묘호란이 병자호란보다 10년 정도나 먼저 일어난 일이었다는 거였고 두 번째는 말한 것처럼 병자호란이 끝난 지도 벌써 12년이나 지났다는 거였다.


10년은 긴 세월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실제로 겪는 조선은 전쟁의 상흔을 조금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의주를 지나 역참이 있는 도시인 철산과 정주를 지나왔지만, 마을이 있는 곳이 외려 더 비참했다.


소설에서 마주하게 되는 화려한 궁중의 요리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대군과 정 2품의 대감이 포함된 사행단이었는데도, 모든 것이 초라했다.

초원이나 사막의 유목민들처럼 37명의 사람들이 여러 마리의 말과 노새 수레 5대를 끌고 하루 종일 걷는 것이 일정의 전부였다.


식사도 잠자리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역청 객청의 잠자리는 좀 나았지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견뎌야 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아침은 보통 잡곡을 섞은 죽에 간장을 먹었고, 저녁도 밥과 말린 나물을 불려 무친 것에 육포나 말린 생선을 넣고 끓인 멀건 국이 다였다.

특별히 대군과 부사, 서장관과 나의 상엔 소금에 절인 젓갈이나 생선구이 같은 일품 반찬이 번갈아 올랐지만 사실 종일 걸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정도로 배고프지 않았다면 난 아마 절대로 숟가락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재현아. 사흘 뒤면 평양 감영에 도착한다. 평양에선 기대해도 되겠지?”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재료가 부실해서 그랬지, 요리 재료만 확실하면 확실하게 한국의 맛을 보여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난 철산 감영의 객관에서 약속했던 한국의 음식을 선보이지 못했다.

무엇을 만들어 내려고 해도 재료도 양념도 있는 게 없었다.

고춧가루나 고추장도 없었고, 간장도 익숙한 진간장이 아니라 소금처럼 쓴 조선간장이었다.

그나마 감칠맛이 살아있는 대군용 젓갈을 이용해서 뭘 만들어보려고 레시피를 검색해볼까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엄동설한이었다.


내가 요리사도 아니고 모든 것이 부족한 조선의 겨울에서 먹을만한 걸 만들어낼 수 없었다.


대군은 물론이고 비장들이나 하인들마저도 뒷머리를 긁적이는 내게 긴 아쉬움을 토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화를 내진 않았다.


재료가 없어 뭘 만들지 못하겠다는 내 변명이 이해되기도 한 데다 무엇을 만들어줄 것이냐는 대군의 질문에 내가 보여준 음식 사진에 모두 군침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매번 식사 때마다 사진을 찍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2년이나 쓴 내 핸드폰엔 치킨이나 피자, 파전이나 족발 등 그동안 먹었던 메뉴의 사진이 많았고 대군과 부사, 서장관은 사진의 정묘함과 생동감에 그야말로 홀딱 빠지고 말았다.


“이 음식은 무엇이냐? 온갖 화려한 색상이 화려해보이는데 보기만해도 군침이 도는 구나.”

“피자라는 음식입니다. 밀가루로 아래 판을 만들고 그 위를 고기와 햄, 치즈와 토마토소스를 올려 오븐에서 구운 것입니다.”

“네가 말한 것들 중에서 고기 빼고서는 아무 것도 모르겠구나.”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난 일부러 현대의 단어를 내가 알고 있는 조선 단어로 바꿔 부르지 않았다. 내가 이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주입시키는 일도 필요했고, 그 단어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 역시 조선의 사정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가루는 밀이라는 식물의 낱알을 빻아서 만든 가루입니다. 빵이나 부침개 같은 걸 만드는 식물인데, 빻으면 하얗고 아주 작은 분말이 됩니다.”

“자가! 밀가루는 진말(眞末 조선시대 밀가루를 부르던 말)인 듯 합니다.”

“그래? 그 귀한 진말을 이렇게나 많이 쓴다는 말이냐?”


대군과 부사의 눈이 그윽해졌다.

두 사람은 귀한 진가루를 대량으로 쓴 피자를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고위 귀족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토마토 소스나 햄은 조선에 없었지만, 치즈는 조선에도 있었다. 조선에서 치즈는 수유(酥油)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치즈 역시 밀가루와 마찬가지로 매우 비싼 고급 식재료였다.


대군과 사행단은 시간이 갈수록 내가 들려주는 한국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는데, 그건 내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네 생각으로는 네가 살다온 세상이 이름은 다르지만, 세상의 모양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아니냐?”

“네. 며칠 형님과 사행단의 다른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확신했습니다. 중국과 일본도 그렇고 나라 이름은 다르지만, 부사께서 말씀하신 섬라나 대월국이라는 나라는 제가 알고 있는 태국이나 베트남이 분명합니다.”


난 가던 길을 멈추고 내가 알고 있는 대강의 세계지도를 그렸다.

한반도의 크기가 매우 작고, 중국과 몽골, 인도와 러시아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까지 총망라한 내가 그린 지도에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네 말대로라면 이 태평양이라는 큰 바다를 건너면 청나라 땅덩이보다 더 큰 땅덩이가 몇 개나 있다는 소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특히 배를 잘 만들기만 한다면 베트남이나 태국 같은 곳은 농사에 아주 유리하고 좋은 작물들도 많으니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형님도 그러셨지 않습니까? 청나라 사람들이 군사력이 강하지만 수군은 조선이 최고라고요. 그러면 바다를 통해 그 나라들과 무역을 하면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극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희망에 불타올랐던 대군과 부사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왜 그러십니까?”

“이 공의 말은 옳으나, 청 조정의 허락 없이는 무역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부탁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청은 조선의 부탁을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네? 왜 그런 것인지요?”

“그것이······.”


속이 터졌다.

조선이 미운 털이 박힌 이유는 조선이 이미 망해버리고 없는 명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시대의 패자가 된 청이라는 나라를 오랑캐 취급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조 정권 자체가 제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해준 은혜)을 져버리고 두 길 보기를 선택한 광해군의 몰염치를 반정의 큰 명분으로 삼아서 숭명배청(崇明排淸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함)을 버릴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형님.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응?”

“형님 말은 그런 것 아닙니까? 내게 잘해줬던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지금 혼약한 무서운 부인을 무시하고 천대해서, 그 부인의 뒷배가 강한 친정가문의 미움을 사서 하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딴은 그렇구나.”

“혼약했으면 책임져야 하는 게 당연하질 않습니까? 첫사랑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어색했던 부부도 한쪽에서 마음을 쏟으면 없던 정도 솟아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 공. 그 무서운 새부인은 이유야 어찌 됐든 내 가족과 친인들을 모두 죽였소. 친인을 죽인 불공대천의 원수와 어찌 한 하늘을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오?”


한명윤 비장이 거의 처음으로 대군과 부사, 서장관과 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놓고 싫은 기색의 독기가 풀풀 날리는 거지는 동냥 대신 밥그릇이 깨지고 만다.


“복수를 하려 해도 복수할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잘 보이는 것이 당연하질 않습니까? 외교는 의전과 마음을 사는 일이 전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는 아이에겐 매 대신 떡을 주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그 말이 있느냐?”

“네?”

“방금 네가 한 말 말이다. 우는 아이에겐 떡을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에겐 매를 더 쳐야 한다는 말 말이다. 그건 우리 조선에도 있는 말이다.”

“그렇군요. 조선과 한국은 정말 많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연결된 부분이 있네요. 하긴 저도 머리만 기르고 그 이상한 머리 장식과 모자를 쓰면 좀 덩치 큰 조선인 같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아. 형님. 그런데 왜 조선인들은 머리에 그리 큰 공을 들이는 것입니까?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내내 내게 호의를 보이던 대군이나 부사가 나를 상놈처럼 쳐다보며 되물었다.


“머리카락은 부모가 물려주신 것이다.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의 근본인 게야.”

“네?”

“한국에서는 그런 도리가 없다는 게냐?”

“그것이 아니라, 머리를 깎는 것과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 해서요. 오히려 긴 머리카락은 감기 어려워서 이가 생기게 하니 그것이 몸을 더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손톱이나 발톱은요? 부사 대감, 그 수염도 다듬으신 것 아닙니까?”


청나라와의 복수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가치관의 충돌로 이어졌다.

대군을 비롯한 부사와 서장관은 내가 던진 효와 머리카락이 상관업삳는 말에 몹시 혼란을 느꼈지만, 난 내가 조선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아이템 하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형님, 잠시 손을 좀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손은 왜?”


역시는 역시였다.

손톱을 다듬은 흔적이 있었지만, 가위나 칼로 마무리를 한 듯 삐뚤빼뚤 잘린 모양이 단정하질 못했다.


난 잠시 일행을 멈추고, 캐리어에서 손톱깎이를 찾아서 꺼내왔다.


“그것이 무엇이냐?”

“손톱을 정리하는 도구입니다. 금방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 잠깐 손을 이 쪽으로 펴보십시오.”


내가 대군의 손톱을 깎아주는 퍼포먼스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1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난 대군의 열 손가락을 모두 깎아줬는데, 대군은 가지런하게 변한 자신의 손톱을 몇번이나 들여다보며 정말이지 놀랐다.


“대단하구나. 한국은 이런 곳에까지 기술을 쓰는 구나. 역시 대단해.”

“형님, 급하지 않으면 해가 좋을 때 모두의 손톱을 깎고 가는 건 어떨까요? 금방 끝낼 수 있는데요. 손톱에 때가 끼면 불결하기도 할뿐더러 병에도 쉽게 걸릴 수 있거든요.”

“그래? 하긴 이 정도로 빠르고 간편하게 소제(掃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할 수 있다면 잠시 길을 멈췄다 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난 대군을 시작으로 부사와 서장관, 비장들과 의원, 하인들까지 모두의 손톱을 깎아줬다.

놀랍게도 대군과 부사 대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의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들이 있었다. 손톱을 깎는 건 쉬운 일도 아니었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정말 신기하구나. 이렇게나 좋고 편리한 물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질 못하였다.”

“형님. 이것으로 시작하시죠.”

“응?”

“청과의 문제 말입니다. 청나라 황궁에도 손톱을 관리하는 건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이건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물건도 아니니 조선에서 이 물건을 만들어 황실에 진상하면서 관계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금을 좀 대어 주십시오.”

“자금? 돈 말이냐?”

“네. 형님께 의지하려 사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빌어먹는 사람이 되긴 싫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물품을 만들어서 팔아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을 만들려고 합니다.”

“돈을 어디다 쓰러고?”

“전 하늘의 뜻을 받아 형님 전하의 복수를 도울 것입니다. 뜻을 모으려면 힘이 필요하고 힘과 세를 만드는 데는 돈이 최고입니다. 전 돈을 벌어 사람들을 구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복수의 시작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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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의 시작점 24.09.13 100 9 13쪽
4 입대 +1 24.09.12 108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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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만남. 24.09.10 187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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