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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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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5.20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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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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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17화 재판

DUMMY

117화 <재판>



“캣니스는 어떤가?”

“아직 안에 있어.”

“이거 참. 상당히 오래 걸리는군.”


왕실에서 제공한 손님방 중 하나.

브레드는 불통한 얼굴인 가더 옆에 기대어 섰다.

벌써 며칠째 방 앞을 지키고 있는 가더를 곁눈질했다.


“미안하네. 제대로 처신하지 못해서 이런 일까지 하게 만들었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번 일에 대해 사과했다.

재판에서 브레드가 한 일이라곤 그들을 믿는 마음뿐이었다.

일전에 그들을 길드원으로 끌어들일 때 조건으로 내밀었던 방패막이 제안.

그 약속 또한 지키지 못했음에 자책하였다.


“정말로 면목이 없네. 완전히 길드장 실격일세. 만약 그대들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내 곁을 떠나도 되네.”


아픈 소리를 내뱉으며 쓴 숨을 들이 삼켰다.

그래도 여전히 가더는 문 앞을 지키며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나름 브레드가 진심을 담은 말인데 무신경한 반응을 보인다.

이를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반응이라고 여긴 브레드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이런 무능한 사람이 길드장이니 실망했겠군. 이런 나 때문에 여사제가 다쳤으니 기분이 복잡할···”

“시끄러워. 대머리.”


여태껏 망부석처럼 앉아있던 가더가 입을 열었다.

브레드를 보는 눈동자에 불쾌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멸시 혹은 어두운 감정을 억제하느라 찡그린 미간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캣니스가 준비한 일인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잠깐 누워있는 일 가지고 소란 떨지 마.”


평소보다 날카로운 반응.

내뱉는 말과 다르게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본인은 모르는 낌새였다.


“이런 식으로 우는소리 할 거면 티미 옆에서나 떠들어. 네 이야기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여전히 브레드에게 까칠한 남자였다.

그래도 브레드가 그의 대답을 모욕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으음. 그녀이기에 믿는다는 건가···.”


동료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재난에 맞서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같은 동료를 믿고 지지해주고 등을 받쳐주는 것.

그러한 믿음이 부족하기에 자신은 괴로워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브레드는 생각했다.


“어머. 너희 아직도 있었구나?”


그때였다.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남성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미스릴 모험가 게이로드가 갈색 머리가 식은땀에 젖은 채 나타났다.


“들어와. 그녀는 방금 치료가 끝나고 잠들었으니 난폭하게 굴 생각 하지 말고.”


허락과 함께 곧장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더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만을 기다리며 사흘이 넘게 자리를 지킨 것이다.

그에 반해 브레드는 여전히 문 하나를 두고 섰다.


“너는 들어오지 않는 거니?”

“무사하다면 됐네.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말일세.”


의아하게 여겼던 게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대치하나 싶더니 문을 닫고 브레드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래. 상당히 책임감이 두터운 남자구나. 그런 점은 마음에 들어.”


노골적인 시선으로 브레드의 몸을 훑었다.


“그런데 혹시 술 좀 하는 편일까?”

“제법 하는 편이라 자부한다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네. 이 기분으로는 뭘 먹어도 쓴맛밖에 나지 않을 듯하니.”

“죄책감이라는 향신료가 그런 법이지. 나도 웃으면서 마시자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한 번 더 생각해 봐.”


브레드는 게이로드를 바라봤다.

이번 성녀 호위 역을 맡은 모험가 게이로드.

쌍둥이인 게르드와 함께 데뷔하여 미스릴의 자리를 꿰찬 모험가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상위호환 격인 모험가였는데. 그도 지금은 지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저 이 밤을 보내기 위해서 위스키 한 잔이 필요해서 말이야. 그리고 이건 나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말이야.”


게이로드가 윙크했다.

그만큼 신성력 발작을 일으키는 캣니스를 치료하는 일은 고되었다.

이 일을 끝마쳐서 함께 즐거워하며 축배를 들자는 게 아니라, 깊은 잠을 자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자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유라면 내 기꺼이 은인과 어울리지.”

“은인이라니. 그런 거창한 호칭은 필요 없어.”


오늘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정한 두 사람이 움직였다.

성녀와 캣니스의 곁은 게르드와 가더가 지키고 있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이제 가람 왕국에 남게 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캣니스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예정이었다.



*****



“이곳은···?”


재판장에서 의식을 잃고 보인 건 희한한 광경이었다.

희한했기에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금방 깨달았다.


“비현실적인 공간이네요.”


발아래에 놓인 수많은 별 무리. 고개 들면 보이는 별 달린 샹들리에. 본인을 인지한 순간부터 멀쩡히 보이는 익숙한 손과 발이 있었다.

캣니스는 별하늘을 닮은 풍경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곳이 현실이 아님은 인지하고 있었다.


“정말 재밌는 꿈이네요.”


캣니스는 조심히 발을 들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데도 떨어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제대로 지면이 있는 것처럼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떠도는 별 무리가 움직임을 따라서 이동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와중. 문득 이대로 걷기만 해서는 끝이 없음을 알았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걸까요?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하늘에서 떨어져 따라오는 별 무리에게 물으니, 별 무리가 후다닥 도망쳤다.

언젠가 돌봐왔던 어린 생명을 떠올리게 하여 웃음 짓게 하였다.


“만약 일이 정말 그렇게 됐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가까이 오세요.”


도망간 별을 달래서 다시 곁을 함께했다.

그렇게 또 한참 걷건 걸음을 잠시 멈춰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여전히 별이 달린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 있었다.

맨 처음 자리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은 건지, 허무맹랑한 상황에 놓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멈춰서서는 안 되겠죠.”


이쯤 되니 승리욕이 솟은 캣니스였다.

정면을 향하고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이 은하수에 끝이 없다고는 해도, 이대로 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가까이 오세요. 이번에는 한 번 달려볼게요.”


만져지지도 않는 별 무리를 끌어안고 한껏 달렸다.

숨이 턱 막힐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향하다가 이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안 되겠어요. 그냥 걷도록 해요.”


가쁜 숨을 내쉬면서 웃었다.

굳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머리 위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꿈에서 자력으로 깨어날 방법은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곤 해도 걷는 발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이쪽으로 가요. 어쩌면 방향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요.”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성격이 이래서이다.

불합리함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훗날에 세월이 흐르면 바뀔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것이 자신이 사는 방식이었다.

일단 밀어붙이고. 그래도 안 되면 더 밀어붙여야 기분이 풀렸다.


“음. 안 되겠어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어요.”


드디어 사방을 달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포기를 선언했다.

한껏 뛰어다니느라 지친 숨을 골랐다. 아쉬운 마음이 잔뜩 담긴 미소로 옆을 돌아봤다.


“어떤가요? 저는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혹시 별님은 느낀 게 있나요?”


어쩐지 더 수가 불어난 별 알갱이가 코앞까지 달라붙었다.

아주 작은 반딧불이들처럼 별 알갱이에게 파묻힌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군요. 별님도 딱히 느끼는 바가 없나 보네요.”


대답이 돌아오진 않지만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어쩐지 기분이 초연해져서 머리 위 샹들리에를 빤히 바라봤다.

당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더 뭘 하려고 해도 지금은 휴식할 시간임을 인지하고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지도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른 그때였다.


“별님들?”


주위를 감싸던 따뜻한 빛이 사라졌다.

하늘 위에서 짤랑짤랑 유리 공예가 부딪치는 소리가 반복됐다.


“저건···.”


캣니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한쪽 시야에서 이상 징후를 보았다.

별이 수 놓은 은하수를 하나하나 먹어 치우며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어둠.

그것은 어둠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어둠이 별하늘을 빠르게 지우며 다가왔다.


“저건 대체 뭔가요!”


캣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판단은 빨랐고, 곧장 어둠을 등지고 달렸다.


“별님들 이리로!”


저것에 닿아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말했다.

가쁜 숨이 턱 막힐 때까지 발을 움직였다.

달리는 동아넹도 머리 위의 샹들리에가 쉬지 않고 흔들렸다.


짤랑짤랑. 짤랑짤랑. 짤랑짤랑-


샹들리에에 달린 별들이 부딪치며 소리 낸다.

그 소리 속에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아.”


과연 잘 도망치고 있는 걸까, 뒤돌아본 그때였다.

어둠이 등 돌리기 전에 보았던 거리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거리감을 인지하기 몇 초도 채 되지 않아서. 사방은 새까매졌다.

어둠의 뱃속에 들어온 것처럼 적막함이 찾아왔다.


짤랑짤랑. 짤랑짤랑. 짤랑짤랑. 짤랑짤랑-


어둠 속에 샹들리에만이 남아 소리 냈다.

함께 있던 별 무리도, 걸음을 내딛던 은하수도, 별하늘도 전부 어둠에 가려졌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없었다.

끝이 없는 어둠과 소음 속에서 몸을 긴장할 뿐이었다.

뚝.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을 올려봤다.

줄곧 떠 있던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 떨어졌다.



*****



-싫어요. 싫어요··· 선생님 제발요···


“여기는.”


캣니스는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샹들리에가 떨어지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선 다행인 점은 몸 어디도 다치지 않았다.

또 다행도 불행도 아닌 어중간한 점은, 지금 보이는 광경이 완전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꾸나.


거대한 몸집. 인자한 말투. 익숙한 존재.

지금 펼쳐지는 광경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두렵지는 않지만 달갑지 않은 캣니스의 옛 모습이었다.


-아악. 아아악. 제발··· 제발 죽여줘···!


이곳은 수행자의 은신처 중 한 공간이었다.

수행자 중에서도 특별한 수행자들을 위해 은신처에 마련해 둔 고문실 중 한 곳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살려줘!


캣니스는 얼굴을 굳힌 채 과거의 기억을 마주했다.

이곳에는 알렉산드로스가 들어간 문 하나를 둔 채, 온갖 감정으로 벌벌 떠는 소녀가 있었다.


-선생님 그 사람은요···?


소녀는 문 밖으로 나온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러나 지금도, 과거에도 사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성실히 참회했다.


그리 말하며 들이미는 머리의 표정은 참으로 끔찍했다.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지만 눈매와 입매만큼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우욱. 욱.


소녀는 참회했다는 말에 기쁜 표정을 보였다가, 금방 창백해졌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 찧으며 구역질했다.

이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죽은 이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또한 마지막도 아니었다.


-자. 캣니스야. 아직 너는 선택할 수 있단다. 이 간악한 사교도의 참회를 도와줄 테냐?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시체의 얼굴.

그 외에도 방 밖으로 내몰려진 시체는 여러 구였다.


-아악! 아악! 아아아아악-!


또한 시체는 더 늘어난다.

문 너머 방에서 고성과 비명이 이어졌다.


-자. 어서 대답하려무나. 여신님이 이 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둘 테냐.


이제 소녀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다시 한번 살아있는 죄인이 끌려 나오며 기회가 주어졌다.

소녀에게는 멸악의 기회가, 죄인에게는 자비로운 죽음이라는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도 소녀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답도 없자, 알렉산드로스가 일어섰다.

거대한 손이 죄인의 얼굴을 붙잡더니 방 안으로 끌고갔다.


“그러지 마세요···.”


지켜보던 캣니스가 말했다.

지금 소녀는 안심했다.

이번 질문도 무사히 넘어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기절할 정도로 무서웠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제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캣니스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소녀는 가만히 기다리기를 원했다.

그러면 훌륭한 선생님들과 제자분들이 죄인의 참회를 도와줄 것이다.

아무리 죄인들이 저주와 욕설을 퍼부어도 소용없음을 알기에, 이대로만 버티면 된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살려줘···.


분명 처음에는 그러했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저주가 아닌 부탁을 듣자,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움직였다.


-할게요···. 제가 하겠어요.


처음으로 소녀가 돌아선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겁에 질린 남성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바닥에 팽개쳐진 남성 앞에 무릎 꿇으며 양손을 모았다.

드디어 소녀는 죄인을 위해 기도하였다.


-부디··· 회개하시어··· 여신님의 보금자리로 가주세요···.


캣니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때 죄인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여전히 죄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곧, 빛이 그를 감싸고 사라졌다.

드디어 알렉산드로스가 데려온 소녀가 할 일을 끝냈다.


“잘했어요.”


-잘했구나 캣니스야.


존경하는 선생님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문 너머로 들어갔다.

아직 제자리에 남은 소녀는 누군가 입었던 헌 옷을 끌어안았다.

이내 문 너머의 방 안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태까지 들려온 목소리와 달랐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소녀는 닫힌 문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영원히 칭송할 듯하던 감사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다들 수고했어.


문이 열리고, 소녀가 기다리던 그들이 나왔다.

유일한 여성인 마르티가 선두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여러 수하도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나온 건 소녀에게 그리운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산 사람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죽은 사람도 행복에 겨워 미소 짓고 있었다.

모두가 살아서 들어왔지만, 누군가는 여신의 곁에 임했다.


-이만 가자꾸나.


선생님이 내민 손을 빤히 쳐다보던 소녀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이런 과거의 기억을 지켜본 캣니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여 눈을 오래 감았다가 떴다.


“다음은 여긴가요.”


상황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또 다른 풍경이 보였다.


-너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문 하나를 두고 벌벌 떨던 소녀는 많이 자랐다.

외형적으로는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내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더 이상 죄인의 참회를 돕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선생님이 보면 칭찬해주었겠지만, 문제는 소녀의 곁에는 더 이상 선생님이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그냥 엄마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훌륭하게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제 몫을 다하였다.

선생님의 곁에서 멀어지면서 새로운 동료를 사귀었다.

그 동료란 용사였다. 소녀는 용사의 일행이 되었다.

그렇지만 용사가 되어서도 역할을 잊지 않았다.

악마를 숭배하고 제물을 바친 사교도들. 꾸준히 그들의 회개를 도와주었다.


-캣니스··· 너는 정말로 구제 불능이구나.


할 일을 했다. 옳은 일을 했다.

그렇게 여겼지만,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사제님. 아직도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겁니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과거.

캣니스는 스스로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떨리는 숨결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과거와 현실을 분간하려 정신 차렸다.

하지만 이 영문 모를 환영은 더욱 숨통을 조일 모양이었다.


-네가 칼을 죽였어!


붉은 머리 성기사.

잔뜩 독이 오른 눈빛으로 지금의 목을 졸랐다.

이미 다 끝난 일이었다. 성기사의 참회로 일은 마무리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목이 졸리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시달렸다.


-네가 내 남편을 죽였어.


“윽···!”


분명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남자의 시체를 끌어안은 여인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버티기 힘들었다.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마음 한구석이 혼란스러웠다.


-괴물! 당장 이곳에서 사라져!

-내 아들을 돌려내!


“그만···.”


-괴물이 어디를 돌아다녀!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어!


“그만 하세요···.”


-처형해야 해! 저 사제의 탈을 쓴 괴물을 처형해!

-누가 저 괴물을 죽여줘!


“그만하시라고요!”


결국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소리쳤다.

여태껏 참았던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귀를 막았다.

이대로 캣니스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어둠이 무엇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지 모르지만 어울리지 않을 셈이었다.


-언니. 우리랑 소꿉놀이 하자.


그러나 그 일도 불가능했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에 천천히 팔을 내렸다.

감았던 눈을 뜨자 환영이 보였다.

너무나도 그리운 아이들.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랑스럽고도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언니. 정말 예뻐. 나도 언니처럼 예뻐질 수 있을까?

-네, 물론이죠. 아기님은 왕자님도 첫눈에 반할 만큼 예뻐질 거랍니다.

-누나. 누나. 나는 기사가 될 거야. 기사가 돼서 누나 같은 공주님을 지켜줄 거라고.

-저는 공주가 아니라 셀레브리디 님의 작은 종이에요. 그래도 멋진 기사님이 되어 지켜줄 날을 기다릴게요.

-언니 언니. 나는 말이야···

-누나. 나는···


“더 못하겠어요···.”


아름답던 과거의 장면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장면은 다시 현실에서 볼 수 없다.

깊은 슬픔으로 마음이 사무치자, 여신의 창이 된 이후 처음으로 우는 소리 냈다.


“더 못하겠어요. 셀레브리디 님···.”


지금껏 참아왔던 감정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열한 번째 창 시절에도, 용사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소리다.

재판장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버텨내리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견디지 못하고 침몰하고 있었다.


-너, 네가 이번에 새로 생긴 날개라고···?

-네. 열한 번째 창인 캣니스라고 해요.


이미 정신이 한계에 몰렸는데도, 환영은 계속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자신과 꼭 닮은 금색 머리, 제 푸른 눈동자보다 노란색이 짙은 녹색 눈동자.

아주 오래전 신전의 지하 감금실에서 어느 여신의 날개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이건 너무···


이제야 캣니스는 왜 자신이 아쿠아를 어려워하는지를 기억해냈다.

왜 그녀의 곁에서는 입을 열기 망설여지는지 알았다.


-···역겨워.


성녀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가 그리 말했다.

지하 감금실에서 벌어진 행위를 그리 평가하고는 자신을 주시하였다.


-징그러워···.


캣니스는 우는소리 하던 것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때는 이해하지 못한 말이라서 그래서였을까.

좋지 못한 첫 만남만 기억하고 무슨 대화 했는지 까먹었던 그녀에게, 잔인한 대화를 일깨워줬다.


“이제 됐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는 몰랐던 말의 뜻을, 이제는 알 거 같았다.

조금 전까지 환영에 괴로워서 흐르던 눈물이 서서히 메말랐다.


“이제 충분해요···.”


지금 자신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일어날 상황에 기뻐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아파하지 마.


온갖 환영을 겪은 뒤에야 공간이 깨지기 시작했다.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는 풍경. 그 너머로 한 사람이 보였다.

금발의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언젠가 유적지 속 환영에서 보았던 소녀였다.


-그리고 마족을 너무 믿지 마.


그러나 그 소녀가 아니다. 소녀의 껍데기를 한 다른 이임을 알 수 있었다.

이내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풍경이 엿보였다.

깨져가는 풍경, 다시 보이는 별바다, 그 안에서 서성이는 한 사람.

미약하게 붉은색이 도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었다.


-하얀 사···!


무언가 초조한 듯이 손톱을 물어뜯던 여성이 화들짝 놀라며, 깨져가는 풍경에 닿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을 일은 없었다.


“일어났어?”


캣니스는 꿈에서 깼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세차게 뛰었다.

조금씩 돌아오는 정신으로 평가하기로는 아주 지독하게 힘든 시간이었다.

침대 옆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

대충 해가 떠 있는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니 아침이었다.

그러나 이 아침이 재판장에 있던 이후로 몇 번째 아침인지는 알 수 없다.

세상을 인지하는 감각이 정상적이지 않아 혼란스러운 그때, 시야 안으로 물컵이 다가왔다.


“마셔.”

“문지기님···.”


오래 잠을 잔 탓에 목이 가라앉았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낯선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지만 동행자는 내색하지 않았다. 얌전히 침대맡에 기대어 물을 마시게 했다.


“브레드 님, 아쿠아 님, 그리고 미스릴 모험가 형제분들···.”


어느 정도 현실에 익숙해지자 다른 얼굴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이번 일로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역시, 지금 그들에게 제일 먼저 할 말은 이거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여러분.”


너무나 괴롭고 긴 꿈에서 깨어나 그리운 이들과 마주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그녀를 껴안았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이번 주 포함 다음 주까지만 연재가 더딜 예정입니다. 이후에는 전체적인 점검과 달려가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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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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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8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7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7 0 13쪽
169 146화 십강 사무엘 24.03.06 6 0 25쪽
168 145화 십강 사무엘 24.03.04 8 0 17쪽
167 144화 십강 사무엘 24.03.01 9 0 20쪽
166 143화 십강 사무엘 24.02.28 13 0 12쪽
165 142화 십강[十强] 24.02.26 10 1 14쪽
164 141화 십강[十强] 24.02.23 10 0 21쪽
163 140화 십강[十强] 24.02.21 9 0 15쪽
162 139화 십강[十强] 24.02.19 8 0 17쪽
161 138화 십강[十强] 24.02.16 11 0 20쪽
160 137화 십강[十强] 24.02.14 8 0 15쪽
159 136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2.12 8 0 15쪽
158 135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2.05 11 0 18쪽
157 134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2.02 12 0 27쪽
156 133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31 10 0 21쪽
155 132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9 7 0 15쪽
154 131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6 7 0 15쪽
153 130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2 10 0 14쪽
152 129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19 10 0 13쪽
151 128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7 9 0 11쪽
150 127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9 0 13쪽
149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6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6 0 14쪽
147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7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9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7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8 0 14쪽
143 120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7 6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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