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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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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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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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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2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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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재판

DUMMY

115화 재판



문지기 가더가 마왕성을 떠난 지 수 개월이 지났다.

마왕성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일 같이 싸움하고 싶어 안달 난 싸움꾼의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여인의 침대 곁에 앉아서 얌전히 책을 읽었다.

문장의 예술성을 탐독할 줄 알게 되었고, 책의 장을 넘기는 소리를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어느덧 막 해가 밝은 창밖과 책 넘어가는 소리가 조화롭게 어울렸다.

책의 내용이 반 정도 남았을 즈음, 책을 읽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


“캣니스. 일어났어?”


얼마 전부터 일상처럼 반복해온 인사였다.

항상 캣니스가 눈을 뜨는 곳에는 그가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캣니스는 하품하여 졸음을 몰아냈다.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요? 문지기님.”

“대머리는 준비 끝났어.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책 덮는 소리와 함께 의자를 뒤로 밀었다.

가더는 여전히 아침 숙녀에게 해로운 미모를 뽐냈다.

딱히 뽐낸 건 아니지만, 다른 이가 그렇게 느끼면 해로운 거다.

얼굴이 붉어진 캣니스가 가더의 미모에 적응할 날이 오기나 할까 의심스러운 아침이었다.


“저 문지기님.”

“응? 왜 불러?”


평소처럼 나가려던 동행자를 붙잡았다.

캣니스는 뭐라 말하기 전에 어수선한 눈곱과 머리카락을 정돈하였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항상 감사해요, 문지기님.”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에 가더도 미소 지었다.


“나야말로 캣니스.”


서로를 위해주는 정 많은 아침 시간.

정말로 서로에게 과분한 동행자였다.



*****



“-라고 생각한 게 아침이었는데요.”


캣니스는 잔뜩 볼을 부풀렸다.

정원 의자에 앉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옆에 가고일 석상 하나 두고 불만을 털어놨다.

가늘게 뜬 두 눈은 질투심으로 얼룩졌다.


“뭔가 첫 만남 때와 많이 달라졌어요.”


꽤 거리 있는 곳에서 왕국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가더를 보았다.

왕국에서 유명한 베르길드 중 최고 실력자이니, 기사들이 가지는 호의를 이해한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캣니스는 눈매를 사납게 떴다.

평소였다면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동행자를 좋게 보았겠지만. 이번만큼은 곱게 보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까칠했는데요.”


오늘따라 가더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아는 동행자는 타인에게 까칠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각하지도 못한 외모를 뽐내며, 평소 어울리지도 않던 기사들과 서슴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글쎄요 딱히 제 동료들에게 외모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데요?”

“하는 거예요. 하는 거라고요. 저게 과시하는 거지 아니면 뭐겠어요?


딱히 과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얼굴로 웃으니 과시하는 거다.

그리 판단한 캣니스의 양쪽 볼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풀어갔다.


“너무 달라붙지 말라고요···!”


캣니스는 여기사가 접촉할 때마다 경악했다.

겉으로는 털털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더와 몸을 닿을 때마다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는 게 가증스러웠다.

심지어 그런 대화가 들킬 때 얼굴 붉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못난 감정이 쑥쑥 자랐다.


“캣니스?”


하지만 제 표정을 살피고 다가오는 가더에게 금방 마음이 풀리는 캣니스였다.

그의 배려를 이용해서 넓은 품까지 빼앗는 독점욕까지 드러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가더는 모르지만, 지금 캣니스는 여기사들에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캣니스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기사들은 생각만큼 음험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점이다.

질투심에 눈먼 캣니스와 다른 눈빛. 그에 비해 여기사들은 방금보다 더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수치심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뒤늦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으로 고개 들지 못하였다.

다만 가더의 품에서 고개 들지 못해 봤자 더 부끄러운 광경이 될 뿐이었다.

의도치 않게 가더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모양새가 되었는데. 가더는 그런 어리광을 조용히 받아주었다.


“문지기님···.”

“응?”

“왜 갑자기 저분들에게 잘해주세요?”


캣니스는 가더를 올려다봤다.

이 말과 행동에 질투심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다른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얼마 전의 일은 문지기님이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 일이 신경 쓰여서 하는 일이라면 무리하지 마세요.”


현재 베르길드가 처한 상황에 가더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자신들의 일로 신경 쓰이게 한 건 아닐지 기분을 살폈다.


“내가 무리를? 그런 거 아니야.”


다행히 가더가 캣니스의 걱정을 일축했다.

걱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최근에 조언 들은 게 있어서 시험해보는 중이야.”

“···‘그 남자가 여인들에게 사랑받는 법?’”


아침에도 얼핏 보았던 책의 제목이었다.

제목만 보면 교양서적 같지만, 여성에게 둘러싸인 남성이 묘사된 삽화가 신경 쓰였다.


“잠깐만요.”


캣니스는 책을 받아서 펼쳤다.

이내 빠르게 훑어보고는 책을 닫았다.


“이, 이, 이, 이게 뭔가요···.”


새빨간 사과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카락과 손을 사용했다.

아주 잠깐 책을 펼쳐봤을 뿐인데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이 책에 관해 논하는 일조차 죄스러워서 목소리는 콩알만큼 작아졌다.


“나한테 이걸 사용해 보라고 하더라고.”

“대체 누가요!”

“···누구더라. 너구리 딸의 친구가 그랬어.”

“그때, 술자리에서였군요.”


캣니스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흘러갔던 기억이 안 좋은 감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라군의 주도하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셨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구했는데 아무런 축하도 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며 강행한 자리였다.

당연히 은밀하게 진행되는 만큼. 장소는 모험가 길드가 아닌 술자리 참여자 중 한 명이 운영하는 가게로 정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고깝게 본 이들이 난입하여 금방 해산했다.

그 잠깐 사이에 가더는 다른 인연과 만난 모양이다.


“라나 님의 친구분께서 이 책을 주었다고요?”

“응. 이대로 행동하면 네가 좋아할 거라고 했어.”

“제가 좋아해요? 이런 징그러운 행동을요?”

“이런 걸 싫어할 여자는 없다던데?”


캣니스는 탄식했다.

동행자의 순수함에 감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사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 동행자를 이용한 라나의 친구에게, 작은 조심성을 길러줄 필요를 느꼈다.


“여신님. 책의 무서움을 모르는 불쌍한 양에게, 백과사전에 발등 찍히는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캣니스?”


조금 전 기도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가더.

캣니스는 작은 저주를 시치미 떼고 그에게 웃어주었다.


“혹시 이것 말고 술자리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건 없죠?”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저주를 얼버무리기 위한 대화였다.

그런데 가더로부터 뭐 잘못됐냐는 순진무구한 표정이 돌아왔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상당히 허를 찔렸다.


“···더 있나 보네요.”

“응. 꽤 많아.”

“예를 들면 무엇이 있나요?”


생각보다 가더는 더 순수했다.

스펀지 같다고 해야 할까.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헛소리들까지 진심으로 따른 행동이 많았다.


“그러니까 문지기님이 들은 말 중에는, 쓸데없이 무게 잡기.”

“응. 가벼운 남자는 쉽게 질린대.”

“말수는 최소한 적게 하기.”

“말 많은 남자도 쉽게 질린다더라.”

“반려의 말을 존중하고 따르며 복종하기.”

“그렇게 해야 함께 오래 산댔어.”

“이것 말고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렇게 많다니. 대체 이 말을 언제부터 시행한 거예요?”

“응? 몰라. 아마 처음 술을 마셨을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


이쯤 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캣니스는 술꾼들에게 가더를 던져주었던 날을 후회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가 술꾼들의 사상에 물들게 한 데 죄책감을 느꼈다.


“어쩐지 너무 참고 있던 거 같더니요···.”


이따금 보여주는 가더의 행동.

무언가 관심이 있는 걸 발견하다가도 캣니스를 우선했다.

그게 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지기님. 저를 위해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문지기님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은걸요.”


캣니스는 술꾼들에게도 작은 저주를 퍼부었다.

정면에서 가더를 마주하였다.


“문지기님. 여기서 더 제게 뭘 해주려고 하지 마세요. 그랬다가 저는 정말로 어떻게 빚을 갚아야 할지 감당 못 할 거예요.”


이미 그에게서 분에 넘칠 정도의 선물을 받았음을 설명했다.

마왕성에서 외로이 죽어가던 목숨이 구해지고, 그가 자신에게 준 믿음은 평생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처음 말했던 대로 그가 센츄어리 대륙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다.


“물론 제가 잔소리쟁이에, 제대로 해낸 일도 얼마 없지만요···.”


생각만큼 이곳에서의 삶이 수월하지 않지만, 그건 자신의 문제로만 남으면 됐다.

가더만큼은 행복과 여유를 놓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한다면 자신도 노력하는 보람이 있었으니까.


“응? 아니야. 지금도 생각보다 재밌어. 할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는걸.”


다행히 기분 좋은 말이 돌아왔다.


“싸울 필요 없이 재밌는 게 이렇게나 많아.”


가더는 말했다.

마왕성에서 그는 항상 외톨이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늘을 날아다니는 와이번을 세는 게 전부였다.


“간혹 짜증 나는 애들도 있는데 싫지는 않아. 나는 네가 선물한 삶이 생각보다 즐거워.”


한때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위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오매불망 기다리곤 하였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재밌는 일이 가득하다.

하염없이 용사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땅바닥에 새긴 작대기에 목맬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흥밋거리가 사방에서 찾아왔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하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냥 네가 즐거워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던 붉은 눈동자가 캣니스 코앞까지 다가왔다.


“네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즐거워.”


얼굴을 다 덮는 손바닥이 볼을 감쌌다.

한겨울의 바깥인데도 따뜻한 온기가 물감처럼 번졌다.

캣니스는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조금 전 말을 곱씹다가 서서히 눈동자를 크게 떴다.

입술이 파르르 떨고, 안쪽으로 말아 넣었다가 내밀기를 반복하였다.


“이것도 그분들이 알려준 방식인가요?”

“응? 아니? 무슨 문제 있어?”

“아니요. 문지기님의 생각이라면 저도 좋아요···.”


더 이상 눈을 마주 보지 못하였다. 가더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은 까닭이었다.

가더는 손만큼이나 품속도 굉장히 따뜻했다.

어느 정도로 따뜻하냐면, 한겨울 산속에서 조난해도 살이 맞닿아 있으면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침부터 너무 달콤해~”


저 멀리서 여기사들이 꿀이라도 먹은 표정으로 속닥대었다.

세상 누구도 강제로 그들을 떨어트려 놓을 수 없을 듯하였다.

그러나 모두에게 안타깝게도 멀리서 지켜보는 이는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얼씨구. 사람 섭섭하게. 이러다 내가 가는 줄도 모르겠어?”


들려온 목소리에 캣니스는 황급히 떨어졌다.

얼굴을 부채질하며 빠르게 열을 식혔다.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미소 지었다.

철판이 두꺼운 건지 아니면 회복이 빠른 건지. 누구보다 신실한 표정으로 자일리를 바라봤다.


“떠나는 건 난데. 왜 너는 이 녀석과 더 감동적인 무언가를 하고 있냐고.”


자일리는 투정했다.

지금 다들 밖으로 나와 있는 이유는 재판에 참석하기 위함도 있지만, 먼저 떠나는 자일리를 배웅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본인은 여러 생각이 교차한 채로 짐을 다 싸고 나왔는데,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나이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무관심.


“내가 참아야지···.”


그래도 떠나는 순간까지 안 좋은 인상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서러움을 참아냈다.


“거기 너, 잘 들어! 나 없는 동안에 캣니스 울리거나 하면 가만 안 둔다? 멍청이.”


그러면 좋게 말할 법도 한데, 아쉬운 마음에 한 소리 하였다.

이러한 점은 마지막까지 자일리다웠다.


“캣니스를 울리거나 그러지 말라고 멍청아!”


한번 말하면 될 것을 두 번 말했다.

그 나름 감정이 복받쳐서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감동적인 이별을 바라기에는 상대가 좋지 못했다.

책의 내용을 금지당한 가더는 평상시의 성격이었다.

그런 그에게 배려를 바라서는 안 됐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리 사라져 꼬맹이.”

“이, 이런 인정머리 없는 놈 같으니!”


진심 담긴 이별의 말이 가슴 깊이 사무친다. 너는 헤어질 때까지도 그러냐고 크게 토라졌다.

이 때문에 뒤늦게 나온 세올이 도련님의 기분을 풀어주느라 아주 난리였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소란스러운 아이였다.


“하. 됐다 됐어! 그보다 대머리는 어딨어?”


가까스로 분노를 삼킨 자일리가 말했다.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길드장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아. 브레드 님은 어젯밤에 라나 님이 데려가고 돌아오지 않았어요.”


캣니스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전날 밤, 욕탕에서 씻고 나와서 일 층 복도를 거닐던 때였다.

어쩐지 찬바람이 느껴져 로비로 갔더니 브레드가 라군의 딸 라나와 대화하고 있었다.


“뭔가 급한 일인 거 같았어요.”


굉장히 곤란해 보이는 브레드였다.

저택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눈물 흘리는 라나도 있었다.

차마 그들의 분위기가 심각하여 직접 나서지 못했는데, 얼마 안 가서 라나가 브레드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면 무슨 일인지 물으려 했는데 아직 안 돌아왔네요.”


그때 라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캣니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금 등급 모험가가 두 명이니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는데, 뒤늦게 무슨 험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 다행일세. 아직 늦지 않았군.”


그때였다.

호랑이 말하기 무섭게 들어온다고. 브레드가 정원 문을 열며 나타났다.

다행히 어젯밤의 일이 잘 해결됐는지 얼굴이 밝았다.

캣니스는 인파 속의 자신들을 찾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브레드 님-!”

“이런! 벌써 다들 모여있었군!”


아직 움직이기로 한 시간이 남아있어서 지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인 만큼 살짝 토라진 사람은 있었다.


“뭐야. 대머리 왜 이제 와?”


자일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떠나는 자리에 얼굴만 보고 헤어질 거였냐며 불만을 표했다.

그의 기분을 풀어주느라 또 여력을 소모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도련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왕실 마차 못지않게 화려한 마차가 정문 앞에서 기다렸다.

자일리는 재촉하는 세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 절대로. 절대로 날 잊으면 안 된다?”


미련을 담아 말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의 나날 동안 꽤 정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불과 몇 개월짜리인 인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자일리는 이 시간을 어느 때보다 소중히 여겼다.


“나 정말로 엄청나게 성장해서 너희와 다시 만날 거야. 그때가 되면 말뿐이 아닌 천재 마법사가 될 거라고. 그러니까 나 아닌 마법사를 절대 집어넣지 마. 저번에도 스승님과 함께했을 때 솔직히 많이 기분 나빴어.”


눈가가 붉어져서 서운했던 말을 전부 털어냈다.

당장 눈물을 쏟아낼 거 같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그 모습을 보던 브레드와 캣니스가 다가갔다. 마차 앞에 선 그를 꼭 껴안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군,”

“그러게요. 아이처럼 떼쓰던 게 어제 같은데요.”

“뭐, 뭐야! 너희들! 나를 애 취급하지 마!”


자일리가 이런 행동이 낯간지러운지 반발했다.

그들은 웃으며 자일리의 흐트러진 몸을 정돈해주었다.


“자네라면 당당히 졸업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네.”


마지막으로 브레드가 자일리의 넥타이를 고쳐주며 말했다.


“이건 내 선물일세.”

“선물?”


브레드는 손바닥만 한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자 도저히 멋지다고 할 수 없는 나무 조각품이 있었다.

조각품은 뭉툭하고 오돌토돌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본 자일리의 표정은 여러 감정으로 찡그려졌다.


“이곳의 모든 인연이 그대를 지탱하고 있음을 잊지 말게.”


한두 방울 흐르는 눈물이 작은 상자 안으로 떨어졌다.

분명 형편없는 예술성이었지만, 이건 분명히 작은 골렘 마밍을 본떠 만든 조각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함을 잃지 마세요. 옳다고 생각한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캣니스는 눈물 흘리는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정화의 힘을 사용하여 몸에 남아있는 불순한 기운도 정화했다.

당분간은 악몽도, 근육통도, 감기도 그를 괴롭힐 수 없다.


“자일리 님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랄게요.”


셀레브리디 교단의 축복문이 담긴 인사.

자일리는 옷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저를 응원해 주는 동료의 성원에 힘입어 바짝 정신 차렸다.


“고마워. 반드시 너희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남자가 될게.”

“내가 알려준 근육 트레이닝을 잊지 말게나.”

“그래. 반드시 강한 남자가 돼서 돌아올 거라고!”


자일리는 신세를 진 이들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근육 트레이닝이든 마법 트레이닝이든, 전부 완벽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이별에 슬퍼하던 남자아이는 이곳에 없었다.

당당히 이별을 받아들인 모험가가 베르길드를 등졌다.


“그런데 너는 뭐. 할 말 없어?”


하지만 역시 이대로 떠나기는 아쉽다.

아직도 이별의 말을 하지 않은 한 사람을 겨냥했다.


“잘 가든가.”

“그래. 내가 너에게 뭘 바라겠냐. 멍청이.”


자일리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이게 또 왜 시비지?’라는 가더의 눈빛을 무시하였다.

곧바로 세올과 함께 앱솔루트로 떠날 마차에 올랐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들었던 장소와 사람들을 보았다.


“언젠가 앱솔루트 왕국에 오게 되면 톨스 백작가를 찾아와! 귀족의 손님이 되면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왕국에 오게 될 경우, 귀족의 손님이 될 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도 자신의 손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했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모험가 자일리는 떠난다. 다시 귀족 자제로 돌아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인연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베르 길드로 돌아오겠다는 자신과 그들을 믿었다.


“출발합니다!”


마부의 호령과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역시, 끝까지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잘 있어! 오 년 뒤에 보자! 반드시 너에게 뒤처지지 않는 남자가 될 거니까 두고 봐! 멍청이!”

“여러분! 감사했습니다! 왕국에 찾아오면 제 동생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세올과 자일리가 아쉬운 마음을 담아 소리쳤다.

몸은 떠나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까지고 그들 곁에 남을 듯하였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거리를 빠져나갔다.

마차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이윽고 마차의 모습이 사라졌다.

줄곧 흔들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아쉬운 마음을 가진 건 떠난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이들도 아쉬운 마음으로 빈 도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 차례군.”


브레드의 말에 캣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마음이 재회의 기쁨이 됨을 알기에, 곱게 접어 마음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로 즐거웠어요.”


자일리와의 재회를 기약하고 그동안 정이 들었던 저택을 바라봤다.

좋은 추억과 나쁜 추억이 동시에 쌓여있는 애증의 저택을 뒤로 했다.


“그날 일만 아니었어도 더 좋게 떠날 수 있었을 텐데요.”


호문쿨루스만 아니었다면 더 좋은 기분을 남기고 떠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크나큰 상처가 남았으니, 감내하고 나아가야만 했다.


“이만 가도록 하지.”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기다리고 있던 기사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출발하겠습니다.”


오늘 모험가 자일리가 사라지듯 모험가 캣니스를 잠시 접어둘 시간이었다.

한 번 감았던 눈을 지그시 닫고 다시 뜨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공개 재판이 이뤄질 왕성의 한 공간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신전의 대신관과 재판관 그리고 왕족과 시민들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더러운 마족! 사형해라! 사형해라!”


들어서자마자 비난받았다.

왕실에서 공표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많은 자들이 소리쳤다.

악의가 사방에서 솟아났다.

그러나 악의 못지않은 선의를 품은 이들도 있음을 그들은 알았다.


“사형해라! 사형해라!”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안내받았다.

가더도 시큰둥한 얼굴로 법정의 중앙으로 옮겨갔다.

이윽고 세 사람은 법정의 한가운데에 섰다.

재판의 책임자가 의사봉을 세 번 두들겼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묻겠소. 피고는 본인의 죄를 인지하고 있소?”


재판관의 말과 함께 정적이 감돌았다.

엄중함과 공평함을 중시하는 재판관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네, 물론입니다.”


캣니스는 그 공정함에 힘입었다.

여태까지 닫아두었던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빌려서 저의 죄를 고하겠습니다.”


얼굴을 가리던 흰색 망토를 뒤로 젖혔다.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된 모습과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마족의 뿔도 송곳니도 비늘도 사라진 인간의 얼굴.

감았던 눈을 뜨자, 칙칙했던 회색 눈동자에 푸른 이채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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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작가의 tmi: 가람왕국의 재판은 21세기 지구의 재판과 조금 다르다. 무죄 입증을 피고인 스스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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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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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외전 다섯 번째 용사6 24.03.20 7 0 21쪽
174 외전 다섯 번째 용사5 24.03.18 7 0 20쪽
173 외전 다섯 번째 용사4 24.03.15 10 0 19쪽
172 외전 다섯 번째 용사3 24.03.13 9 0 18쪽
171 외전 다섯 번째 용사2 24.03.13 7 0 14쪽
170 외전 다섯 번째 용사1 24.03.08 9 0 13쪽
169 146화 십강 사무엘 24.03.06 7 0 25쪽
168 145화 십강 사무엘 24.03.04 8 0 17쪽
167 144화 십강 사무엘 24.03.01 10 0 20쪽
166 143화 십강 사무엘 24.02.28 13 0 12쪽
165 142화 십강[十强] 24.02.26 11 1 14쪽
164 141화 십강[十强] 24.02.23 10 0 21쪽
163 140화 십강[十强] 24.02.21 9 0 15쪽
162 139화 십강[十强] 24.02.19 8 0 17쪽
161 138화 십강[十强] 24.02.16 11 0 20쪽
160 137화 십강[十强] 24.02.14 8 0 15쪽
159 136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2.12 8 0 15쪽
158 135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2.05 11 0 18쪽
157 134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2.02 12 0 27쪽
156 133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31 10 0 21쪽
155 132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9 7 0 15쪽
154 131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6 7 0 15쪽
153 130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2 10 0 14쪽
152 129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19 10 0 13쪽
151 128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7 9 0 11쪽
150 127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10 0 13쪽
149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6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6 0 14쪽
147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7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0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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