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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절망 영애들의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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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3.05.13 13:48
최근연재일 :
2023.05.13 14:2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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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923

작성
23.05.1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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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첫 번째 절망

DUMMY

양 끝단에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지붕의 무게를 견디는 커다란 회장.

대략 300평은 됨직한 넓이이다.


물론 단순히 넓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고풍스럽게 꾸며진 실내는 그에 어울리는 세간들이 여기저기 조화롭게 배치되어있다.

특히 천장에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압권이다.


이런 것과는 연이 없는 평민들에겐 필시 꿈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겠지.


그러한 생각을 하며 그녀는 밝은 회장으로 들어섰다.


밝은 실내엔 여러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이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다만 그 숫자가 다른 때와는 제법 남다르다. 평소라면 초대받지도 못할 남작가의 말단마저도 있다.


꾸며진 회장의 수준으로 본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심하면 의아한 나머지 무심코 관리자에게 따져 물을 것도 같다.


그만큼 이질적인 광경. 그렇지만 오늘은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나라의 경사―― 왕세자와 공작가의 영애가 정식으로 혼약을 발표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사스러운 날이었기에 저들이 초청받을 수 있었고, 미리 각지에서 먼 걸음을 달려와 이 자리를 달구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세대 자신들을 이끌 왕세자와 영애를 축하하기 위해.

주제에 맞는 그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리 믿고 있었다.


오늘, 이 연회는 파티이며, 이 파티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고.

에스코트가 없는 건 조금 불만이지만 그도 바쁘겠거니,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확고한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공처럼 등장한 왕세자에 의해······


“세레나 티어 포센시아!! 가증스러운 너와의 약혼을 파기한다!”


경사스러운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선언이다.


차라리 저 왕세자가 가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이 자리와는 동떨어진 대사였다.


하지만 중앙 계단 위에 선 왕세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고하고 우아한 기품을 뽐냈다.


저건 하루 이틀만으로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세자는 진짜 그 본인이다.


꿈도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왕세자는 분명한 의지를 담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인의 약혼녀인 그녀를. 적의가 가득 품은 눈으로.


이런 상황에 당황하는 것은 세레나 티어 포센시아―― 오직 그녀만이었다.


다른 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동요하는 기척도 없다. 오히려 왕세자에게 동조하여 경멸과 차가운 시선만을 보내왔다.


그랬다.

이 모든 건 철저히 준비된 계획.

많은 하객을 증인으로 내세움과 동시에 도망칠 수 없는 수렁을 만든 것이었다.


세레나도 뒤늦게 이를 알긴 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혼란한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사태는 그녀가 손을 쓸 방도도 없이 커져만 갔다.


“성녀를 향한 도를 넘은 괴롭힘과 학우에게 마저 신분을 악용한 협박 등, 끝없는 시기와 질투로 네가 벌인 모든 일의 정황은 여기에 있다!”


성서라도 되는 양, 왕세자는 손에 든 종이 다발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자랑스레 머리 위로 들었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신분이 낮은 자들은 차마 대놓고 입을 놀리지는 못했지만, 뒤로는 자신도 당했다며 쑥덕거렸다.


제법 신분이 되는 자들에게는 이마저도 없었다.

보란 듯이 자신 또한 당했노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녀의 아군은······ 아무도 없었다.


사방에 적뿐인 상황에 세레나는 한탄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며, 제대로 조사를 한 건 맞냐고.

아무리 선행을 별로 하지 않았다지만, 이렇게까지 고립될 수 있느냐며 자조적이기까지 했다.


그 억울한 마음을 담아 세레나는 항소했다.


――아니,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직전에 그만뒀다.


그녀는 질린 것이었다.

탐욕으로 없던 일을 지어내는 저들도, 성녀에게 빠져 눈이 흐려진 약혼자에게도.


그렇게 세레나가 입을 다물자 인정했다고 거하게 착각한 왕세자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봤다.


“귀족의―― 아니, 크라이스 왕국 전체를 욕보인 세레나 티어 포센시아! 그 죄를 엄히 다스려 너의 신분을 박탈한다!”


그의 선언에 하객들은 환호했다.

정의가 구현된 듯 열렬하기 그지없다.


공작가에 속한 그녀의 신분을 박탈하는 건 명백히 왕세자의 권한을 넘었음에도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왕의 칙명서도 없는 저런 발언은 도리어 반역죄에 해당하건만.


정말 누구 하나 뒷일에 대한 걱정은 없다.

왕세자의 독단일 가능성이 다분한 이 상황에서도 아부하기에만 급급하다.


미쳤다.

광기도 이런 광기가 따로 없다.


그리 결론을 내린 세레나는 재판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광대로서 어울려 줄 마음 따윈 조금도 없었으니 말이다.


신분의 박탈?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었다.

정나미는 다 떨어졌다. 설령 신분이 박탈되지 않더라도 그녀는 제 발로 나갈 셈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성녀를 괴롭힌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


신분이 추락할 만큼의 짓은 한 적이 없지만, 패배한 자는 패배한 자답게 조용히 꼬리를 말고 물러나기로 했다.

그렇게 평민이 되어 멍청한 이 나라가 앞으로 어찌 굴러갈지, 그 꼬락서니를 즐겁게 구경하기로 세레나는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그 작은 바람조차도 세상은―― 왕세자는 들어주지 않았다.


왕세자가 턱짓으로 지시를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두 기사가 돌아서려는 세레나의 양팔을 붙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거칠 게 세레나를 밀어붙이더니 바닥으로 넘어뜨리고는 밧줄을 꺼내 그녀의 팔을 꽁꽁 묶었다.


어찌나 세게 묶었던지, 세레나의 뽀얀 살갗은 피가 통하지 않아 새빨개졌다가 점차 창백하게 변해갔다.


밧줄이라도 좋았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딱히 쓸 용도조차 마땅히 떠오르지 않을 투박한 밧줄은 가시가 돋은 듯 거칠다.

거기에 찔린 세레나의 어여쁜 팔에선 땀이 나오듯 작게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점차 밧줄을 적히기 시작했고, 그러지 못한 것들은 뭉쳤다가 이윽고 그녀의 손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경악스러웠던 세레나는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고개만을 들어 올렸다.


왕세자는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입가엔 꼴사납게 엎드린 세레나의 처지가 만족스러운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세레나의 눈앞까지 당도한 왕세자는 입을 열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뭐가 끝나지 않은 것이냐고 세레나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은 없었다.

왕세자는 본인이야말로 광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나 싶을 과장 된 동작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세레나 티어 포센시아―― 아니. 불가촉천민, 세레나의 형벌을 발표하지.”


평민도 아니라고? 그런데다가 형벌?


어느 것 하나 공식적인 문서가 전혀 없음에도 정말 잘도 떠들었다.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원 학생의 신분이다. 제일 낮은 남작 위는커녕 아무런 작위도 없다.

정계의 막대한 영향이나 권한 따윈 전무. 그저 우연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인 게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심판할 권한은 결단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왕세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당초 세레나의 신분을 박탈할 권한부터가 그에게 없었는데, 심판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무리 학원이라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들만 모인 특수한 상황이라지만, 너무나도 상식을 벗어났다.


짓누르고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저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현 사태의 이상함쯤은.

그런데도 불경하게 공작가의 영애를 포박하는 등, 제아무리 왕세자의 명에 따랐을 뿐이라도 이후 처분을 면치 못할 짓을 하고 있다.


세레나는 그것이 이해가 안 됐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기사들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약속받은 것인가.


무수히 떠오르는 의문의 바다에서 혼란스럽던 세레나.

그녀의 눈에 저 멀리, 왕세자가 내려온 계단 근처에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는 바로 성녀.

문헌에서 나오는 천사의 고리처럼 밝게 윤이 나는 금발이 특징적인 성녀는, 죄책감과도 닮은 감정을 품은 채 서 있었다.


힘겹게 자신을 쳐다보는 성녀와 눈을 마주친 세레나는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


“네년! 창녀같이 몸뚱이를 굴려 그 뜻을 이루니 만족하더냐!!”

“저, 저는······”

“닥쳐라! 어딜 천민 주제에 저질스러운 언행으로 성녀를 모욕하느냐!”


처량하게 몸을 바들바들 떠는 성녀를 가리듯 앞을 막아선 왕세자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올려다보는 세레나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직 네 처지를 모르는 모양인데, 슬슬 깨닫는 게 어떠한가?”


세레나는 고통에 인상을 쓰면서도 대답했다.


“전하야말로······. 이러한 폭거가 용납되리라 여기십니까?”

“폭거? 이 연회장에 몰래 침입한 천민을 붙잡았을 뿐이다. 왕세자임에도 신하를 위해 이 몸을 바친 거룩한 행동이 폭거라고? 과연 천민답게 눈도 흐리구나.”

“정신을 차리세요, 전하. 저 여자는 이 나라에 해악일 뿐입니다. 여기저기 온갖 아첨을 떠는 그 저열한 의도가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폐하께 상고하여 바로 잡으십시오.”

“아~ 그렇군. 왜 네가 아직도 그리 당당하나 싶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군.”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중얼거린 왕세자는 즐거운 미소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향하자 성녀를 보호하듯 곁에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왔는데, 그 남자는 바로 세레나의 소꿉친구 중 한 명인 후작가의 자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자란 그는 세레나를 벌레 보듯 싸늘하게 힐끔 쳐다보고는, 즉시 왕세자에게 양피지 한 장을 건네줬다.


물러나는 그를 뒤로하고 왕세자는 살짝 몸을 수그렸다.

덕분에 머리가 밟혀있는 세레나는 더욱 고통스러워 신음을 흘렸지만, 왕세자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천천히 돌돌 말린 양피지를 풀었다.


“넌 작금의 사태가 나의 독단이라 생각한 모양이더군.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왕세자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랬다면 진작에 네 녀석을 벌했겠지. ――아아. 그게 아니군. 천민인 너는 배움이 짧으니 충분히 착각할 수 있겠어.”


다분히 놀리는 의도가 가득한 말에 여기저기 비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왕세자 또한 이에 동참하듯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이만하면 배움이 짧은 천민인데다, 죄까지 범한 너라도 알 거다. 제대로 허가가 있었다는 소리지.”


무슨 의미인지 세레나는 진작에 눈치를 챘었다.

너무나도 믿기지 않아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왕세자는 딱 이때만 소꿉친구에 어울리게, 그런 세레나의 감정을 읽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잔혹한 현실을 들이댔다.


“너도 두 눈이 멀쩡히 달려있다면 보라. 이 칙명서를!”


칙명서.

말 그대로 왕의 어명이 담긴 서신이었다.


왕세자가 펼쳐 보인 양피지에는 보란 듯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옥쇄가 찍혀있었다.


옥쇄는 국가의 상징이자 권위다.

위조 자체도 쉽지 않거니와 만약 위조한들 금방 발각되어 왕세자라도 처형의 대상이 된다.


틀림없이 저 양피지는 진품.


그리고 그곳에는 이리 적혀있었다.


――성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포센시아 공작가의 영애, 세레나 티어 포센시아에 대한 모든 처분은 왕세자, 레오노반 닐 크라이스에게 일임한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내용이 담긴 그 밑엔 크라이스 왕의 성명과 함께 왕가의 낙인이 찍혀있다.


힘겹게 눈가를 돌려 겨우 양피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세레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녀가 놀라고 경악한 건 자신에 대한 처분 때문이 아니었다.


“반······, 날 그렇게나 죽이고 싶었던 거야?”


사실 세레나는 이러한 처사를 받았어도 왕세자―― 반을 조금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이후 폐하에게 크게 문책당하여 사죄하러 올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이번 사태로 정치적으로 위치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최대한 왕세자의 지위를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보좌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건 보기 좋은 허상에 불과했다.


――믿었던 소꿉친구이자,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을 배신하고 버렸다.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 세레나는 자신을 포기했다.


이 상황을 역전하거나 정면으로 타개할 방도 등등, 무수히도 많은 방법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을 놓았다.


그렇게 꺼져가는 의식 속, 애칭으로 불린 게 불쾌하다는 듯 냉소적인 반의 모습을 끝으로 세레나는 깊은 심연 속에 잠이 들었다.


이것이 세레나 티어 포센시아라 불린 악역 영애의 첫 번째 절망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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