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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바리의 서재입니다.

랜덤박스 크랙이 쏘아올린 공

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판타지

샘바리
그림/삽화
샘바리
작품등록일 :
2021.05.19 23:46
최근연재일 :
2021.06.20 23:41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1,900
추천수 :
380
글자수 :
185,128

작성
21.05.21 08:00
조회
726
추천
18
글자
11쪽

호베르토 카를로스 (2)

DUMMY

U리그 서울/경기 2권역 7라운드.


“정훈아, 오늘 왼쪽 윙백이다. 선발이니깐 준비해라.”


대학교 무대에서 첫 선발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건 선발로 뛰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어제 밤 느꼈던 짜릿한 왼발의 감각 때문이었다. 분명 내 킥은 평소와는 달랐다. 그대로 쭉 뻗어나가는 걸 넘어 뱀처럼 휘어들어가는 공을 떠올리니 믿기지 않았다. 탱탱볼을 찰 때도 그렇게 아름다운 궤적으로 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분명히. 카를로스였어.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 아니 근데 왜 한국에? 그것도 내 눈앞에?’


호베르투 카를로스. 올타임 레전드 레프트백. 월드컵 1회 우승, 코파 아메리카 2회 우승, 라리가 4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 축구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풀백이자 레알 마드리드 갈라티코 1기의 주역. 168cm의 다부진 체격과 폭발적인 스피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악마의 왼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가 분명 내 눈앞에 있었다.


“야 정훈아! 대답 크게 안하냐? 오늘 스리백이지만 최대한 공격적으로 올라가. 어차피 우리가 더 전력이 강하니깐, 수비적으로 물러설 필요가 전혀 없단 말이야.”

“아.. 네! 알겠습니다!”


이미 2권역 1등을 확정 지은 우리 학교의 마지막 조별 경기. 나를 비롯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건 버리는 경기구나, 주전들이 쉬어가는 라운드구나. 어차피 상대도 애매한 5위의 숭강대였기 때문에 감독님도 공격적으로 마음껏 해보라고 지시했다.


‘하 떨린다. 왼쪽은 그래도 아직 어색한데. 오버래핑 타이밍은 어떻게 맞추지? 현빈 선배만큼 90분 내내 빨리 뛸 체력이 될까?’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 괜히 축구화 끈을 풀었다, 묶었다 반복했다. 내 속도 모르고 호종이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야, 대학교 첫 어시스트는 무조건 나한테 해야 하니깐 아껴두는 거다. 알겠지?”


주전 스트라이커 호종이는 체력 안배 차원에서 교체 명단에 있었다. 부정확한 크로스도 어떻게든 머리를 들이밀어 골망을 흔들고, 조금 긴 패스도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어 슈팅을 해주던 호종이가 없다는 게 불안했다. 하지만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얼마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긴장하고 걱정하다 망칠 순 없었다.


삑!


예상외로 베스트 멤버가 나온 숭강대는 초반부터 거세게 압박을 시작했다. 4-1-4-1 포메이션이었지만 사실상 수비 라인을 하프라인까지 끌어올려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게다가 같은 학교 선배였던 김대호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중심을 잡아줬다.


“올려! 라인 올려! 오른쪽 빈다! 저 새끼가 구멍이야!”


한 학년 위였던 대호 선배는 내가 선발로 나온 걸 보고 보란듯이 내 쪽을 공략하자고 소리쳤다. 후배들을 부려먹고 괜한 일로 집합을 걸어 스트레스를 푸는 재수없는 선배였지만, 축구는 잘했다. 객관적으로. 거칠게 태클로 에이스를 걸어 넘어뜨리고, 몰래몰래 유니폼을 끌어당기며 더러운 플레이만큼은 국가대표급이었다.


빠르게 내 뒷공간으로 롱패스가 넘어왔다. 재빨리 몸을 돌려 뒤따라가려는데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준비된 공격 전술이었는지, 라이트윙은 공을 차기도 전에 벌써 달리고 있었다.


“백업! 백업!!”


센터백 강선이에게 허겁지겁 도움을 요청하며 냅다 달렸는데, 강선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어? 뭐지? 벌써?’


예전과 다른 폭발적인 스피드로 단숨에 공을 빼앗았다. 더 늦게, 더 멀리서 출발했지만 손쉽게 윙어를 제치고 어깨 싸움을 할 틈도 없이 여유롭게 공을 강선이에게 넘겨줬다.


스피드 싸움이 무서워 오버래핑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좋아! 커버 빨라! 천천히 풀어가자. 짧게 짧게 올라가.”


감독님은 중원에서 점유율을 높여가며 천천히 경기를 풀어가라고 지시했다. 나는 일단 나에게 공이 오면 침착하게 다시 중앙으로 리턴 패스를 주며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김대호를 중심으로 한 숭강대의 압박이 상당히 조직적이었다. 원톱으로 나선 종탁 선배는 뒷공간 침투보다는 제공권 싸움을 좋아하는 190cm의 장신 공격수라 공을 만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종탁 선배가 발이 느린 걸 알고, 자신있게 라인을 올려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고 있어. 게다가 대호 선배가 요리조리 패스길을 차단하면서 지저분하게 중원 싸움을 걸어오네. 측면으로 한 방에 전환해야 하는데..’


개인기로 수비수 두세명을 달고 뛰어줄 호종이가 없으니 섣불리 공격도 못하고 현제대는 답답하게 공만 돌리고 있었다. 무의미한 패스만 주고 받으니 지치는 건 우리였다.


“야, 거봐! 뭣도 없다니깐. 이호종 없으면 어차피 아무 것도 아니야.”


기세가 오른 대호 선배는 이대일 패스를 끊고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역습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앙이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안전하게 전달된 공은 강선이의 머리를 살짝 지나가는 로빙 패스로 빠르게 연결됐다.


‘아! 늦었다. 일대일이다.’


강선이는 빠져들어가는 상대 공격수의 옷자락을 잡으며 파울로 끊어보려 했지만, 이미 골키퍼를 향해 뛰어가는 공격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야 뛰어나와!”


골키퍼 병근이가 페널티라인 바깥까지 단숨에 뛰쳐나와 태클을 시도했지만, 간발의 차로 공격수의 발이 공에 더 가까웠다.


쿵!


골키퍼와 공격수가 강하게 충돌했고, 가속도가 붙은 공은 텅빈 골대로 빠르게 굴러들어갔다.


‘안 돼. 잡아야 해! 선제골 먹히면 무조건 걸어 잠글 거란 말이야.’


나는 온 힘을 다해 스프린트를 하며 뛰었다. 양팔을 휘두르며 측면에서 골대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들어갔고,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지만 힘들 겨를조차 없었다. 100m를 13초에 뛰는 그저그런 스피드의 내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공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골을 막았다.


“됐다! 잡았다!”


그저 막아야한다는 집념으로 무작정 뛰었는데 내 몸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골라인 근처에서 태클로 공을 걷어내고, 주변에선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건 분명 탄탄한 허벅지 힘을 자랑하는 카를로스의 속도였다. 100m를 10.9초에 주파하던 카를로스의 엄청난 스피드를 방금 내가 보여준 것이다.


‘역습이다. 종탁 선배는 지금 하프라인에 혼자다.’


역습에 나선 숭강대의 최후방 수비수도 하프라인을 넘어 우리 진영에 있었다. 모두가 선제골을 넣었다고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처 수비 가담을못한 채 멀뚱히 하프라인에 서 있는 스트라이커 종탁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뛰어!!!!!!!!”


도움닫기도 필요 없었다. 역대 최고 수준의 파워를 자랑하는 카를로스의 왼발이 있는 이상 그대로 내지르면 도달 가능한 거리였다. 멀리 정탁 선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대 골키퍼와 정탁 선배의 중간 텅 빈 공간을 향해 강하게 왼발 롱패스를 시도했다.


“되겠는데? 더! 더! 더! 뛰어!”


엄청난 롱패스에 감독님은 벌떡 일어나 정탁 선배에게 소리쳤다. 호종이에게 가려졌지만, 정탁 선배도 당당한 현제대의 제2옵션이었다. 일대일 찬스에서 침착하게 골키퍼를 제치고 낮고 빠른 슈팅으로 선제골을 뽑아냈다.


‘시즌 1호 어시스트 성공!’


꿈틀거리는 왼발 허벅지를 보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카를로스구나. 내 왼발은 지금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선제골을 뽑은 현제대는 여유롭게 공을 돌리며 리드를 지켜갔다. 나는 자신있게 오른쪽 윙어를 향해 정확한 롱패스를 뿌려주며 방향 전환으로 경기를 지배해나갔다.


“야! 오늘 미쳤는데? 정훈아, 나랑 할 때 좀 그렇게 크로스하지! 그랬으면 벌써 해트트릭이다!”


호종이는 나보다 더 기뻐하며 내 활약을 응원했고, 나는 더 자신 있게 오버래핑을 나가며 상대 측면을 공략했다. 절대 몸싸움에 지지 않으며 탱크처럼 측면을 부셔 나갔고, 2명이 붙으면 여지없이 빠르고 정확한 크로스로 정탁 선배의 머리를 노렸다.


무엇보다 80분이 지나갔지만, 두 다리가 하나도 무겁지 않은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누구보다 많이 오버래핑을 오가며 뛰었지만 몸은 가벼웠고, 오히려 느려진 상대방을 농락하기는 더 쉬웠다. 가랑이 사이로 공을 빼내 한 명을 제치고, 태클을 들어오는 상대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됐다! 주고 가!”


사이드라인에서 순식간에 개인기로 중앙까지 치고 들어온 나를 향해 이대일 패스를 하라고 벤치에서 소리쳤다.


‘어? 되겠는데?


하지만 속도가 붙은 나는 동료를 미끼 삼아 한명을 더 제쳐내고 주저없이 밀고 들어갔다.


“이 새끼가 어디서 드리블을 쳐!”


삐익!


대호 선배, 아니 김대호 이 인간은 분명 공이 아닌 내 발목을 향해 거친 태클을 걸어왔다.


“이게 어떻게 옐로 카드에요? 네? 발목 보고 들어갔잖아요. 아예 담그려고 한 거라고요!”

“죄송합니다. 네. 네. 조심할게요. 어? 쏘리!”


심판은 고작 경고를 주며 반칙을 선언했고, 골대에서 약 37m 거리에서 프리킥이 주어졌다. 옐로 카드 한 장과 바꾼 반칙치고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었다.


“저 새끼, 저게 제일 싫었어. 경기 끝나가는 마당에 아예 발목 보고 죽어라 들어오잖아. 청백전때도 저래서 내가 뛰기 싫었다니깐? 경고에 저 정도 거리 프리킥이면 아주 땡큐지 뭐.”


벤치에서 나보다 더 흥분한 호종이가 외쳤다.


“야! 정훈아, 김대호 얼굴 보고 그냥 후려!”


“내가 얻어낸 거니깐 내가 찰게. 다들 올라가.”


프리킥커라곤 한번도 해본적 없는 내가 이번에는 자신 있게 말했다.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 지네딘 지단, 후안 베론. 레전드 스타들 사이에서도 중장거리 프리킥은 도맡아 온 카를로스. 역대급 UFO 프리킥의 주인공 카를로스가 바로 나 권정훈 그 자체니깐.


총총총,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크게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왼발 아웃사이드로 강하게 공 오른쪽 부분을 때렸다. 의외로 허벅지나 발목엔 크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왼발 스윙은 그저 공을 가볍게 밀어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발등이 스친 공은 어마무시한 파워로 쏜살같이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아니 그대로 꽂혔다. 골포스트를 맞고 골라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을 골키퍼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2대 0 현제대 승.

1골 1도움.

U리그 첫 선발 출전에 카를로스, 아니 권정훈은 난생 처음 주목을 받았다. 이게 바로 MOM 기념 사진 촬영인가? 눈물이 펑펑 흐르는 탓에 사진은 우스꽝스러움 그 자체였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첫 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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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포기하지 않는 노력도 재능이다. 21.06.20 158 4 16쪽
29 한국 대표팀 주장이 J리그2로 이적한다고? 21.06.19 184 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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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카카 (3) 21.06.15 223 4 14쪽
24 카카 (2) 21.06.14 231 8 16쪽
23 카카 (1) 21.06.13 248 5 17쪽
22 왜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니? +4 21.06.12 299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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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안드레아 피를로 (4) +2 21.06.06 353 12 15쪽
15 안드레아 피를로 (3) +2 21.06.05 355 13 16쪽
14 안드레아 피를로 (2) +2 21.06.03 384 12 14쪽
13 안드레아 피를로 (1) +2 21.06.02 387 17 11쪽
12 아르헨 로벤 (4) 21.06.01 386 15 13쪽
11 아르헨 로벤 (3) 21.05.30 382 13 14쪽
10 아르헨 로벤 (2) 21.05.29 366 12 13쪽
9 아르헨 로벤 (1) 21.05.27 416 1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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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파비오 칸나바로 (4) 21.05.25 440 1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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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비오 칸나바로 (2) 21.05.23 502 13 10쪽
4 파비오 칸나바로 (1) 21.05.22 653 16 13쪽
» 호베르토 카를로스 (2) 21.05.21 727 1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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