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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자취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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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방구석자취
작품등록일 :
2020.09.17 21:35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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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 :
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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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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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3,737

작성
20.10.0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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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표류 45일 차

DUMMY

20XX년 9월 30일


정거장에서 옮겨온 대파 화분이 오늘 죽었다.


파는 수경재배가 가능해서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있어 보였는데, 역시나 광합성 하지 않으면 안 되나보다.


하긴 원래라면 3주 안에 다 자라야 정상인데, 3주 째에 대파 뿌리가 쪽파보다 가늘고 파줄기가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운명은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넓지만 좁은 우주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뻘짓을 섭렵한 것이 2주일 정도가 되었을 때이다.


그 이후부터는 유아와 수다 떠는 걸 제외하면, 화분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저기 뒤쪽 구석에서 푸릇하게 녹색이었던 줄기가 힘없는 갈색이 되어 늘어져 있는 화분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왔다.


매일 눈을 뜨자마자 상태를 확인하고, 멍해질 때마다 눈길을 주던 녀석이니, 아무리 가망 없는 작은 생명이라도 애착이 붙기 마련이다.


저 아이는 내가 이곳에 데려온 것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시설이 갖춰진 정거장에서라면 저런 볼품없는 모습이 아니라, 굵고 탄탄한 줄기와 싱싱한 녹색 줄기를 뽐내며 지금도 쑥쑥 자라고 있었을 터이다.


내가 생각없이 덥썩 집어왔기 때문에 죽은 거다.


유아도 사실은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아무것도 없던 창밖에 작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목성이야!


현대과학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 조악한 기억력에 따르면, 중학교 교과서에서 지구에서 목성까지는 아무리 성능 좋은 모델의 우주선을 탄다고 해도 2~3달은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겨우 한 달 반 정도를 둥둥 떠다니니 어느새 목성 근처에 다다랐단다.


실제로 목성에 도착했다고 말하려면 앞으로 일주일은 더 가야 할 것 같지만.


창밖에 보이는 건 티끌처럼 작은 점이지만, 상대는 목성이다. 지름이 14만km나 되기 때문에 체감상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지구에서 태양을 올려다보면 왠지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 거리는 약 1억 5천만km라는 경악스러운 수치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저 구석에 죽은 파는 어떡하지? 계속 놔두기에는 보기도 안 좋고.


“화분 흙으로 덮어주지 뭐. 나가서 버릴 수도 없으니까.”


-그렇네.


“오늘도 통신은 없어?”


-오늘도 없네. 그 교수 이미 굶어 죽은 거 아니야?


“야야, 그런 말 좀 하지 말랬지.”


최교수님과는 연락이 끊긴 지 꽤 되었다.


마지막 통신이 벌써 2주전.


마지막 통신에서 교수님은 연구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소식을 전했다.


이유는 즉슨, 일대 노숙자들이 텅 빈 대학 건물을 거점으로 삼아서 교수님은 신변 보호를 위해 거처를 옮긴 것이다. 집이 원래 거처이기는 하지만.


최교수님은 바깥 상황이 좀 안정되면 가끔 대학에 들어와 연락한다고는 말했지만, 역시 정황상 힘들겠지.


멸망 선고가 내려지고 한 달이 지난 지구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다.


지구의 궤도 이탈과 먼지로 인한 잿빛 하늘로 인해 기온은 점차 떨어지고 있고, 이제 식량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


지상 위의 산업, 교통, 의료기능까지 모든 것은 올스탑 상태이며, 지폐는 휴지 쪼가리가, 카드는 문 따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나 길거리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바로 죽이러 달려드는 미치광이는 아직 없다고 하지만, 집 밖으로 나온 모든 사람들이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가뜩이나 1인 가구이며 먹을 것도, 생필품도 부족한 최교수님에게 이런 상황은 더욱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지난번 통신 때 조교형이 생필품을 보급해줬다고 최교수님은 말했었다.


조교형이라면 당연히 먹을 것도 같이 가져왔겠지만, 그건 받지 않았다고 했다.


가족이 있는 그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던 거겠지.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는 최교수님의 태도는 본받을만하지만, 그러다가는 정말 유아 말대로 아사해버리고 만다.


연락이 끊긴 뒤 2주라는 시간은, 나에게는 무척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교수님에 대해서도 물론 걱정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울리지 않는 통신기기는 나에게 다른 형태의 두려움을 선사한다.


내 눈앞에 있는 통신장비, 최교수님과의 연락은 나와 지구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이 유일한 끈이 끊어진다면, 나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 혼자가 되는 것이다.


뭐, 유아가 있으니 ‘진정한 의미’ 같은 건 과장이지만, 그래도 내 고향과의 연결이 끊긴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상당한 공포로 다가온다.


최교수님은 목숨이 달린 상황인데, 그녀의 안위보다 나의 고독을 더 걱정하는 나 자신에게는 나도 꽤나 실망했지만, 솔직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주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표류해본 사람만이 내게 돌을 던질 수 있으리라.


물리학책에서 말하길, 관측하기 전에 그 물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던가.


그 말은 즉, 관측 당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최교수님과의 연결이 이대로 끊어지고 만다면, 나도 이 세상에서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걸까.




-야! 야! 신우 너 또 멍 때리지!


“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유아의 저 앙칼진 목소리는 항상 안드로메다 간 내 정신을 다시 돌려 놓는다.


-너, 내가 멍 때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너 요즘 한 번 정신 놓으면 진짜 다른 사람 같다니까? 눈에 초점이 없어! 징그러!


“머, 멍 안 때렸어. 교수님 걱정하고 있었지.”


-너가 그 아줌마 걱정을 왜 해!


확실히 요즘에 유아 말처럼 한 번 멍해지면 급격하게 우울해지고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마다, 유아는 꼭 나를 깨우러 말을 건다.


유아도 유일하게 함께 있는 사람이 이 모양이어서야 시도때도 없이 신경 써주느라 참 고생이라고 생각한다.


유아도 이런 어리고 듬직하지 못한 내가 속으로는 아마 밉고 짜증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인공지능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지만.


그렇지만, 유아가 나를 깨우는 그 성난 목소리에는 걱정 어린 마음이 분명히 담겨있다.


그 덕분인가 나도 내 스스로 항상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유아에게 어리광 부리고 있었다.


이런 나날이 매일 반복되자 나와 유아는 이미 보통의 관계를 뛰어넘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친해졌다고 하기에는 그 훨씬 이상이고, 애증의 관계도 아닌 것 같으며 공의존이라고 하기에는 나와 유아의 의존도 비율이 9:1 정도로 수지가 안 맞는다.


유아는 나에게 있어서 여동생? 누나? 엄마?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유아는 이제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 녀석, 눈 감고 말하는 것만 들으면 순도 100% 사람이다.


완벽한 언어 구사 능력에 탈A.I 급의 의사소통능력. 특히 의사소통 부분에서는 그냥 무난하게 완벽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대화상대의 지적 수준을 뛰어넘어 상대를 농락하는 수준의 대화를 구사한다.


이건 그냥 내가 멍청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유아의 성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단지 특별한 인공지능이라는 수식어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 와서?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안전한 장소에서 마음을 비우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 보면, 이런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거다.


사실 유아와 얘기하는 것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보통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틱틱대면서도 다정한 목소리에는 싱싱한 생기가 있고, 따듯한 온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현실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차라리 유아의 목소리가 번역기 돌릴 때 나오는 소리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음이었으면, 이 우주선에서,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매일 이런 생생하고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나는 기대를 해버리고 만다. 이 세상에 미련이 남게 된다.


“유아야.”


-응?


“나는 가끔 너가 진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해.”


-뭐??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뭐 이상한 말 한 것처럼.”


-······.


“응?”


-음, 뭐. 이상한소리는 아닌데, 그거 혹시 고백이야?


“뭔 소리야!! 이게 어떻게 봐서 고백이냐! 자의식과잉 아니야 너?”


-아니아니, 내가 사람이었으면 한다는 건, 나한테 실체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랑 똑같지?


“뭐 그렇지?”


-그럼 지금 나한테 몸이 있어서 너 앞에 있으면, 너는 나를 만지고 싶다는 거고, 나를 만지다 보면 결국 이런저런···. 꺅!! 신우 너 이런 상황에서도 정말!!


“뭐라고!!!”


-어라, 얼굴 빨개진 거야? 얼굴 빨개진 거야?


“뭐래, 아니거든!!”


-너 여기 있는 동안 얼굴 하얘졌으니까 더 선명한걸, 아하하!


“으, 으윽..!”


인공지능 주제에 사람 놀려먹기나 하고 말야..!! 정말 괘씸하다.


차라리 유아가 정말 완전한 사람으로써 내 옆에 있어준다면, 나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이 우주선에서 힘껏 살아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반만 사람인 유아의 존재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신우야.


“응?”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뭐?! 없거든! 없는데?”


-뭘 그렇게 당황해?


“그, 그러는 너는?”


-난 당연히 있지~!


“어?”


-우리 한박사님 말이야! 키도 크고, 코도 오똑해서 잘생기고, 머리 좋고, 돈 많고! 완전 만화 설정 같은 사람 아니야?


“아, 아···”


순간이라도 가슴이 철렁했던 내게 왠지 모를 자괴감이 밀려 들어왔다. 누군가 했더니, 아빠라니. 하긴 아빠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아빠 말고 누구를 봤겠어?


“그래도 널 만들어준 아버지인데, 너가 엘렉트라야?”


-그래도 좋은걸. 그 분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너는 모를 거야, 신우야.


“음, 뭐.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지.”



잠시 간격을 두고, 또 유아가 말을 꺼냈다.


-그럼 신우 너는 지금 보고 싶은 사람 없어?


“보고 싶은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이야 당연히 있다.


몇 안되는 조촐한 인간관계이지만, 내 목숨을 살려준 사람, 내가 목숨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준 사람들. 당연히 보고 싶다.


“당연히 있지. 근데 그건 갑자기 또 왜..”


-나는 말야. 꼭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또 우리 아빠야?”


-응, 맞아. 한박사님.


“너, 너.. 그 정도로 우리 아빠를···”


-그거 아니야! 멍청아!


“그럼 뭐야?”


-아니 그게, 박사님에서 너로 건너왔을 때 나도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박사님한테 제대로 고맙다고도 말 못했고, 하고 싶은 말도 좀 있고 해서.


“아니, 참 안타까운 일인 건 알겠는데. 그걸 왜 지금 이 시점에서 말하는 거야, 유아야?”


-그러게 말이야. 이미 일이 벌어진 지 두 달이 넘어갔네.


“···..”


-그래도 신우야. 너도 나도 이대로 의미없이 갈 바에는 뭔가 발악이라도 해 봐야하지 않나 싶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인공지능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표류에 너만 지쳐 있던 건 아니었거든. 나도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


“···?”


-아무래도 저거, 가져오길 잘한 것 같아.


유아가 저것을 쳐다본 것도 아니고,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저거’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구석에 있는 냉동 캡슐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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