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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자취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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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자취
작품등록일 :
2020.09.17 21:35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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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3,737

작성
20.09.2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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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정거장 일과

DUMMY

유아.


다 내던지고 포기한 내 앞에 돌연 나타나 나를 구해준 인공지능이다.


나로서는 유아가 초면이지만, 유아는 아빠에게 내 얘기를 종종 들었는지(쓸데없는 것까지) 나를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


우주라는 낯선 환경의 탓인가, 외로운 나에게 허물없이 대해주는 유아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에 내가 무너질 것 같을 때에는 유아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말투는 조금 틱틱거리긴 해도, 좋은 녀석이다.




한국 정거장에 체류한지 벌써 3일이 지났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편하긴한데 뭔가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진공팩에 포장되어 맛없어 보이지만 오묘하게 맛있는 아침을 먹는다.


사방이 온종일 시꺼먼 곳에서 아침이라고 하기에도 웃기지만, 유아가 자신한테 내장되어 있는 시계로 지구 시간으로 8시가 되면 선내에 알람을 울린다.


한 번은 지구에서도 아침 8시에는 안 일어났는데 왜 굳이 그렇게 일찍 깨우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이런 극한 상황에서야말로 생활패턴을 잘 지켜야한다느니 어쩌니하며 소리를 꽥꽥 질러대더라.


유아 말도 일리가 있지만, 사실 이렇게 일찍 깨우는 건 단지 자기가 심심해서이다.


유아는 스스로 시스템을 종료할 수 없다.


즉, 누군가 수동으로 전원을 꺼줘야 유아가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유아가 있던 연구실에 비해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유아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USB를 꽂아 넣은 시점에서 이미 끝인 것이다.


어차피 유아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잠을 자든 안 자든 피곤함 같은 건 없겠지만, 의식이 있는 이상 심심한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아무튼 강제기상 후 아침을 먹고 나면,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최교수님의 통신을 기다린다.


최교수님과의 통신이 하루 일과 중에서 그나마 가장 유의미한 일이다.


통신을 통해 그날 있었던 지구의 주요 뉴스를 전해 듣는다.


지구는 지금, 역대 어느 재난영화보다 재밌는 상황이라고 최교수님은 말했다.


극비였을 터인 지구 종말론은 블랙홀이 터지고 하루 만에 전세계에 퍼졌으며, 덕분에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대형 SNS 플랫폼들이 엄청난 트래픽을 견디지 못하고 서버가 줄줄이 터졌다고 한다.


종말론 게이트가 터지자, 전세계 교회와 성당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세계산업에 스톱이 걸렸다.


다행히 아직 무정부상태까지는 가지 않아서 범죄가 판을 치지는 않지만, 누군가 아주 살짝만 건드려도 모두가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곧 모두가 죽는다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원래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어 신우야, 재밌는 거 찾았다!


“응? 뭐가 또 있어?”


-응, 여기 생활동으로 와봐!


천장에서부터 유아의 들뜬 소리가 선내에 울려퍼졌다.


유아는 이렇게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로 무언가를 찾아내고는 한다.


선내의 데이터로 저장되어 있는 모든 것은 지구최강 인공지능 유아가 전부 파악하고 있지만, 물리적인 형태의 물체들은 유아가 알지 못한다.


때문에 설치된 카메라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혼자 보물찾기를 하는 것이다.


유영하기 위해 벽면을 짚으며 느릿느릿 생활동으로 향했다.


왠지 이곳에서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진다.


빠르게 유영하다가 어디 부딪혀서 뭘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정거장에 구멍이 뚫릴까봐 무척 불안해진다.


생활동에 다다르자, 유아가 들뜬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빨리 와, 빨리! 저기 박태진이라는 사람 자리로 가봐 얼른!


“남의 사생활 터는 건 취미가 아닌데···”


-거기 살짝 열린 서랍 있지? 그거 열어봐!


·········


“이, 이게 뭐야!”


-아하하! 너가 좋아할 거 같아서, 고맙지?


서랍문을 연 그곳에는 ‘빨간 책’이 수줍게 놓여 있었다.


이걸 도대체 카메라로 어떻게 찾은 거야?!


“야! 이런 거 피, 필요 없어!”


-흐응~


“로봇이 맨날 사람 놀려먹기나 하고! 어휴.”


나는 서랍문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일단 책의 위치는···. 기억해 놓았다.


-헹, 재미없네.



유아와 시시한 농담을 하고 나면, 나는 양진수라는 사람의 자리로 간다.


그 사람이 남긴 책으로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는 거다.


어제 읽다 만 부분을 펼쳤다.


우주이기 때문에 무게는 없지만, 그 두께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내가 집고 있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현대물리학 책이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 초월세계의 증명’


제목부터 내 지능 수준으로는 절대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지금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아빠가 그렇게 경고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빠를 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호기롭게 책을 폈지만 역시···


“우와··· 이거 한글 맞냐?”


-그니까 그냥 내가 가르쳐주겠다니까? 어차피 네 수준으로는 절대 이해 못해, 풉풉.


“시끄러! 설명도 못하는 주제에!”


-내가 설명을 못하는 게 아니라, 너가 멍청해서 이해 못하는 거거든!!


나 역시 처음에는 책 같은 지루한 것 말고, 지구 제일 천재에게 1대1 과외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녀석한테 교육 프로그램은 깔려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니까 양자는 관측당하기 전까지는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 수도 있다니까?!’


‘그니까 그게 뭔 소리냐니까?!’


이 녀석은 사람에게 어렵고 복잡한 이론은 가르쳐주지 못한다.


유아는 양자역학 같은 복잡한 이론을 직접 이해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써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아한테는 과학적 이론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는 그냥 사과인 것과 같이 그저 상식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전교 1등이 반 꼴찌에게 미적분에 대해 설명하며 ‘왜 이해 못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나를 이해시켜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주 비행사의 책장에는 물리학의 기초를 쉽게 풀어놓은 책 같은 건 없다.


그냥 내용을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으면서, 모르는 기초 상식 같은 건 유아에게 물어봐가며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유아는 옆에서


-지구에서 가장 유능한 지식의 보고를 옆에 두고 뭐하는 거야, 흥.


라며 투덜대지만.



이렇게 작은 뇌를 혹사시키고 있으면, 최교수님에게서의 통신이 들어온다.


-야, 최교수 왔어.


“앗싸.”


최교수님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통신을 하고 있으면 목소리에서부터 그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그래서 좀 무섭기는 하지만, 재밌는 사람이다.


‘여, 신우. 안 죽고 잘 살아 있네?’


“무슨 인사말이 그래요, 교수님.”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유아도 진짜 사람을 갖다 넣은 것처럼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역시 고향에서 들려오는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오늘은 별일 없어요?”


‘별일 없고 말고. 요즘엔 대낮에 전라로 나다니다가 잡혀 가는 건 별일도 아니지!’


그리고 통신선 너머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끔 이 교수가 그냥 태평한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교수님! 최교수님! 학회에서 전화요! 빨리요!’


최교수님의 것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통신선에 작게 파고들었다.


‘아 진짜, 유능한 조교님이 알아서 처리해 줘!’


귀찮다는 듯이 받아 치는 최교수.


‘아니 이걸 제가 어떻게 처리하냐구요!! 빨리 와요!!’


권조교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휴, 늙은이들 상대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조교에게 실망했다. 신우야, 내일도 살아있어라~’


-우와, 저 여자 진짜 이상한 거 같애. 그치 신우야?


“하하...”


‘아, 아. 안녕하세요, 신우군. 오랜만이네요.’


“아, 조교형!”


‘오늘 컨디션은 좀 어떤가요? 식량이랑 물은 충분한가요?’


“네, 컨디션은 그냥저냥이고, 안 우울하니까 걱정마요.”


‘다행이네요. 그보다 지금부터 2시간 40분 정도 뒤에 위성 잔해가 그쪽을 스쳐갈 거예요.’


“위성 잔해요?”


‘네. 삼일 전 블랙홀 사태 때문에 지상의 잔해가 대기권 밖으로 튕겨져 나왔는데, 그게 지구 주위를 떠돌다가 한 시간 전 즈음에 중국 위성이랑 부딪혔나 봐요.’


“그래서 그 잔해가 이쪽으로 오는 건가요? 그거 큰일 아니에요?”


-호들갑 떨지마, 바보야.


‘하하, 일단 잔해가 그쪽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는 한데, 부딪힐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마요.’


“아 그렇구나..”


권조교형은 최교수님이 부리는 사역··· 아니, 유능한 조수다.


조교형은 사람이 참 좋아서, 대화하는 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온화한 말투, 한창 동생인 나에게 존댓말을 써주는 배려를 보면, 최교수님의 성격과는 극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도대체 어쩌다 이 형이 최교수님의 조교로 들어가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서 형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태평한 성격과 입담을 가진 최교수님과 대화하는 것도 즐겁지만, 조교형과 대화하는 것에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조교형은 중저음의 달달한 목소리에 안정된 말의 템포 등,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모든 요소들을 갖고 있다.


최교수님과 조교형과 번갈아 대화하면 단짠단짠의 맛을 느끼는 것 같달까.


조교형은 보통 내 건강, 컨디션 등을 체크하며, 가끔 유아에게 정거장의 상태를 묻고 체크한다.


최교수님과 조교형은 일단 아빠에게 날 도와주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당장 뭔가 할 것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자살을 기도하게 하지 않기 위해 매일 통신을 하며 건강을 신경 써주는 것 같다.


이유가 어찌됐든, 어떤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직접 대화를 해준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럼 내일 이 시간 때 즈음에 또 연락할게요.’



지구와의 통신이 끝나면, 잠깐 쉬다가 다시 책을 집는다.


점심은 보통 먹지 않는다.


지구에서의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생활패턴 운운하던 유아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고 하지 않는다.


역시 아침 알람은 그냥 자기가 심심하니까 맞추는 게 분명하다.


점심을 재끼면 그만큼 식량도 아끼고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일과만 보면 밥만 먹고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재미없는 물리학 공부를 위한 집중력이 이런 삭막한 공간에서 그리 오래 갈 리 없다.


공부가 질리면 유아랑 끝말잇기나 자석판 체스, 초성 게임 같은 걸 한다.


물론 내가 이기는 종목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 출출해지면 저녁을 대충 먹고 지구가 보이는 쪽으로 가 앉는다.


누군가가 남겨둔 클래식 선집을 들으며 지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자리에 든다.


조금은 특별하지만, 별로 특별하지 않은 정거장에서의 하루이다.


언제까지 이런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하루를 버틴다.


아빠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한 건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위해서 내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리라,


라고 되뇌이며 나는 우주에서의 네 번째 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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