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냐메 단편집

웹소설 > 일반연재 > 중·단편, 일반소설

냐메
작품등록일 :
2020.12.29 23:49
최근연재일 :
2022.01.04 12:01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4,260
추천수 :
363
글자수 :
156,067

작성
21.01.10 13:27
조회
111
추천
16
글자
20쪽

그리고 그녀의 악의가 심판을 내리리라et lmalitia eius loquetur iudicium

DUMMY

1.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단순히 밉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요.

몸서리치게, 또한 몇 번을 죽여서도 부족할 만큼 밉습니다.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 일생동안 전례 없는 증오를 지금 품고 있습니다.

손이 있다면 머리를 집어 뜯고, 발이 있다면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달리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허리라도 세울 수 있다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벽에 머리를 처박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너무도 죽고 싶습니다.

도무지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단지 그 남자가 너무 미워서,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증오하고 있을 뿐입니다.


푸른 하늘 아래서의 마지막 기억은 그 남자가 세 살 먹은 제 딸의 머리를 벽돌로 내리쳤을 때가 전부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현실이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이상한 자세로 널브러진 딸아이를 보고나선 무서워졌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사람은 상상조차 못한 재앙을 당하고 나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되고 마는 걸까요?

저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답니다.

그 남자가 눈에 더러운 욕정을 품고 제 목을 조르려고 다가오는 것에조차.


결국 저는 화창한 봄날, 딸아이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던 중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요? 남편은 아직 해외 출장 중이라 우리들의 소식을 모르나봅니다.

이사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웃들과도 별로 친하질 않으니 그들은 우리가 사라진 것을 모를 거예요.


지금 저는 손발이 없습니다.

첫날부터 그 남자가 제 손목과 발목을 자른 모양이에요.

그리고 절단 부를 조잡하게 처리해놨습니다. 한 달 정도는 지났을 테지만 아직도 아픔이 사라지질 않네요.

어두워서 잘은 안보여도 표면이 곪아가고 있는 건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견딜만해요.

아픔엔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그날 저는 제 몸에 생긴 이상을 눈치 채고 비명을 질러버렸어요.

남자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녹이 쓴 가위로 제 혀를 잘라버렸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 이야기는 거짓말이었어요.

혀가 잘린 정도로는 죽지 않더군요.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루에도 수백 번 씩 생각합니다.

아프기만 엄청 아프고 피가 목으로 흘러 들어와서 불쾌한 끈적임을 나흘 넘게 겪어야 했어요.

이어서 남자는 제가 소리를 지르지 않을 때까지 쇠 지렛대로 제 등을 가격했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으득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린걸 보면 아마 제 등뼈는 가루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증거로 저는 허리를 비틀거나 몸을 가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개를 위로 한 채 천장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며칠이나 저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었거든요.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정도는 괜찮았습니다.

그 뒤에 더욱 큰 비극이 일어났으니까요. 바보 같은 저는 어째서인지 그때까지도 딸아이의 머리가 날아가던 그 기억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딸아이가 어딘가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있잖아요?

사람의 기억이란 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은 가능한 마음속에 묻어두려는 성질을 가진 것 같습니다.

저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그 남자는 저에게 그 사실을 대뇌이게 만들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을 쯤, 저는 배가 고파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마저도 삼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거미가 가장 먹을 만하다는 건 의외였습니다.

남자는 이런 상태가 되고만 저를 가엾게 여겼던 것인지 생고기를 접시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것은 햄을 썰어 낸 것 같은 모양의 슬라이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저는 문뜩 깨달고 말았습니다.

아아, 한순간이나마 그 고기가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해버린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그건, 슬라이스로 잘린 붉은 기가 감도는 그 고기는··· 다름 아닌 제 딸인 티나의 허벅지 살이었던 겁니다.


남자는 절규하는 나를 보며 킥킥 웃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요.

그는 어둠 저 너머에서 역겨운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더 끔찍한 일이 있습니다.

결국 제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그 고기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맛있었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비참합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더 이상 희망이란 걸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느낀 혼란은 이제 많이 납득이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라는 쓸모없는 물음보단 ‘언제 죽을 수 있는 걸까?’ 하는 체념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저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시간을 되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한번만 더 딸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습니다.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그 고기 사건 이후로 저는 그 어떤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뱃속이 문드러지고 피를 토할지언정 다신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죽음만을 희망합니다.

살아있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 매우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다루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일평생에 걸쳐서 천천히 이룩해가는 자연의 섭리일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칭찬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너무 경솔한 짓을 해버렸습니다.

그걸 어린 나이에 깨닫고 자랑 하듯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뽐냈으니 금방 소모되어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순식간에 평범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는 한참동안이나 그것에 대해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꿈만 같이 느껴질 정도로요.

그런데, 그것이 지금 돌아온 것 같습니다.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습니다.


어릴 때엔 단순히 거기에 밀어 넣는 바람은 물건을 꺾어 달라거나 뒤집어 달라 던지 그런 사소한 것들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제가 바람에 담고 있는 것은 미움입니다.

극도의 증오입니다.

저는 한 개인에게 이토록 흉포한 감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랍습니다.

그래요,

미워요.

이것은 저주입니다.

행복을 부정당했습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습니다.

제가 그를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증오합니다.

격노합니다.

저는 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불행해지길 바랍니다.


아아, 그림자가··· 어린 시절에만 보이던 그 친구가 나타났어요.

안녕, 반가워.

이런 꼴이라서 미안하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

향신료도, 장난감도 없단다.

남은 건 죽어가는 이 몸뚱이 뿐이란다.

그래도 받아주겠니?

허물어가는 이 생명···.

그래,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이제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기대할게.

그럼, 나도 이제 저 너머로···.


아아, 여보··· 티나···.



2.

“또 미친놈들이 한바탕 저지른 모양이네요, 릭.”


핀셋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조각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던 형사 릭은 껄렁한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니퍼, 범죄 심리학자가 현장에는 또 무슨 일인가?”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또 뭘 기념품 삼아서 슬쩍 하려고?”

“킥킥, 결국 재판에 재출 했잖아요?”

“난 자네가 감옥에 들어갈 일을 만드는 머저리들보단 자기 머릿속을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조언은 고맙네요. 수용은 안하겠지만.”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는 않지, 릭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니퍼는 능글맞게 웃었다.


“가학성 변태, 극도의 보레어필리아가 반사회적 성격장애랑 결합되면 이런 일이 생기죠.”

“이건 사람이 아니야.”

“인정하기 싫은 건가요?”

“아니.”


릭은 증거체취용 테이프를 주머니에 꺼내어 바닥에 떨어진 알루미늄 캔의 표면에 붙였다.

그리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이런 짓을 할 수 없어. 아니, 해선 안 돼. 적어도 인간이라면.”


릭이 형사가 되어 과학 수사과로 배치된 지 올해로 3년, 그는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평소 무뚝뚝하고 과묵했지만 사실 릭은 여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였던 것이다.


“항상 생각하는 일이지만 릭은 이 일이 안 어울려요. 슬슬 가정이나 꾸리고 느긋하게 살지 그래요?”


제니퍼의 말은 결코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미얀마 불법 입국자들을 대상으로 의료실험을 감행했던 그 미치광이 의사 기억나요?”

“그래.”

“열일곱에 자기 가족을 몰살시키곤 인터넷에 사진을 올린 미친 꼬맹이는요?”

“어떻게 잊겠나.”

“거기다 이번 쓰레기까지··· 이제 슬슬 그만둘 때가 온 거에요. 세상엔 모르는 편이 좋은 일도 있다는 거죠. 릭은 경찰일로 벌어먹기엔 너무 좋은 남자에요.”

“난 아직 꼬리를 내릴 수 없어.”

“답답한 사람. 당신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선 뭔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이봐요. 제대로 듣고 있어요?”

“아니.”


릭은 제니퍼 J 데커스티스란 이름을 가진 이 젊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프로파일러, 범죄 심리학을 전공한 제니퍼의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법칙 같은 걸로 규정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리 잔혹한 범죄를 봐도 단순한 하나의 사건 통계로 봐라볼 뿐이다.

릭은 그것이 싫었다.

범죄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 그것은 우리의 선량한 이웃이 될 수도, 지구 건너편의 아이들에게도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소중한 가족이 잔혹한 올가미에 걸려들 수도 있다.


사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희생자는 항상 늘어만 간다.


“릭, 석연찮은 게 있단 건 알아요. 하지만 상부에선 이 일에 대해서 더 신경 쓰지 말라고 못을 박아뒀잖아요?”

“난 납득할 수 없네.”

“그래도요. 우리 팀은 이미 해체됐고 권한도 없어요. 이제 와서 당신 혼자 뭘 할 수 있단 거죠?”

“뭐든 좋아. 내가 나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네네, 슈퍼 히어로 나셨어요.”

“날 놀리러 온 건가?”

“네 ···가 아니라, 왠지 릭을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요. 게리 씨가 위로 좀 해주라고 연락했어요. 그··· 있죠? 게리 씨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멋진 아가씨가 나서줘야지, 이거 말인가?”

“네. 그거요. 어, 이제야 웃네요?”

“자네가 멋진 아가씨가 아니란 게 제일 웃겼어.”

“너무 하시네.”

“그래. 자네가 빈손으로 여기까지 왔을 린 없을 테고··· 무얼 가지고 왔지, 멋진 아가씨?”

“그런 식으로 넘어가시긴··· 좋아요. 제가 힘을 좀 썼죠. 대신 이 내용을 보고서로 쓰거나 하진 말아주세요.”

“왜지?”

“···정말 쓸려고요? 그만두세요. 분명히 웃음거리만 될 테니까.”


제니퍼는 자신의 핸드백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들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에밀리아 델리옷은··· 음, 처참하게 학대당했어요.”

“조금 더 직설적인 단어는 사전에 없나? 양팔을 자르고 다리를 분지르고 척추마저 박살내고 방치한 게 고작 학대······.”

“릭은 너무 감정적이에요. 어쨌든 들어봐요. 그녀를 구금한 범인은 딕 머레이라는 마약 중독자였어요. 재미있네요. 이 사람 대학까지 졸업한데다 고교 시절에는 풋볼 스타였어요. 그러다가 선생을 강간하려고 시도하다 발각 되서 매장 당했고··· 아, 성추행 기록만 해도 두 번이네요.”

“잡힌 게 그 정도니 아마 저지른 건 더 많겠지.”

“그렇겠죠. 딕은 주로 클럽에서 마약 판매책으로 활동했어요. 경제학도인걸 어필해서 갱단에 들어간 모양이더군요. 요즘은 쓰레기 짓에도 학벌이 중요한가?”

“풋볼 스타에 경제학··· 연관성이라도 있나?”

“글쎄요. 근육바보 취급도, 샌님 취급도 마음에 안 들었나보죠. 사실은 둘 다 애매한 입지였죠. 아유, 자꾸 말시키지 말아요. 어쨌든 의지 박약자였던 딕은 금세 마약에 빠져들었고 상품을 빼돌렸으니 갱단에도 쫒기는 신세가 되었어요. 뭐··· 그 사정이야 우리가 알 필요는 없고. 그러던 중에 에밀리아 모녀를 본 모양이에요. 그리고 공원에서 당시 세 살이었던 티나 델리옷의 머리를 벽돌로 가격··· 으, 이건 좀 그렇네요.”

“이미 아는 사실이야. 그 다음은?”

“아··· 음, 좋아요. 나머진 다 넘어가도록 하죠. 에밀리아 델리옷은 범행 이후 23일 동안 생존하다 쇄약으로 사망했어요. 그리고 딕은 도주했죠. 우리들이 바보처럼 사건을 조사하고 있을 때엔 이미 국경까지 가버린 다음이었어요. 하지만··· 그 다음은······.”


제니퍼는 한 장의 사진을 릭에게 내밀었다.


“딕은 즉사했어요. 검시 보고서엔 뭔가에 눌려죽었다고 되어있더군요. 그런데 그 뭔가가 뭔지 모른데요. 알 수가 없다고 해요. 비유를 하자면··· 쓰레기 폐기장에 있는 압축기 있죠? 그 기계로 압착시킨 것 같았데요.”

“농담하는 건가? 딕의 시체가 발견된 건 도로변이었을 텐데?”

“그러니까요.”

“갑자기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프래셔가 내려와서 자동차와 함께 범인을 깔아뭉개 죽였다···라.”

“사진처럼 아주 눌러버렸죠. 만에 하나 조작일 가능성이 있어서 DNA감식을 해보니 결국 딕 본인인 게 확인됐어요. 제가 아는 물리학자의 말로는 튼튼한 자동차를 저 정도로 작살내려면 적어도 300톤 이상의 힘이 순간적으로 가해져야 한다더군요.”

“더 납득할 수가 없군.”

“그쵸? 상부에선 이걸 또 미공개 파일로 분류해버렸어요.”

“어떻게 가져왔나?”

“그야 뻔하죠. 제 아름다운 미모로 매수를··· 죄송해요. 사실은 이 프로젝트를 다루는 게 제 친척이거든요.”

“거 잘됐군. 51구역은 실존하나?”

“···릭, 재미없거든요? 아무리 저라도 열람할 수 있는 자료는 한정되어 있어요. 그리고 51구역 같은 건 없어요. 멍청한 음모론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죠.”

“그래서 결국 자네 이야기론··· 범인은 죽어버렸다, 그거로군.”

“네, 초자연적인 뭔가에 의해서.”

“뭐라고 생각하나? 외계인?”

“재미없다니까요. 대답은 ‘모른다.’에요. 이걸 무슨 수로 알아요?”

“기가 막히구만.”

“기가 막히죠.”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차라리 그 놈이 국경을 넘어갔다는 전개가 났겠어.”

“음··· 제가 제 아버지 이야기를 했던가요?”

“존 박사 말인가?”

“네. 그 분은 지금도 죽은 인간의 뇌파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 연구 중이세요.”

“그게 이 이야기와 무슨 연관이 있지?”

“에밀리아의 사망 추정시각 말이에요. 분명 검시보고서엔 16시에서 18시 사이라고 했었죠?”

“그렇지.”

“딕이 눌려죽은 시간을 잘 보세요.”

“···16시 42분이군. 국경 인근의 감시 카메라 기록이 남아있군.”

“우연치곤 신기하지 않아요?”

“우연이야.”

“글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자넨 학자가 아니었나? 이성을 중시하는···.”

“그냥 가설이에요.”

“어디 들어나 보지.”

“저희 아버지 이론으론··· 사념이라던가 동양적인 개념이 포함된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정신이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죠.”

“초능력 같군.”

“정확해요. 재미있는 건 에밀리아 델리옷은 유년시절에 대중매체에 초능력자라고 소개된 적도 있죠. 상자 안에 넣어둔 스푼이 휘어지거나 찢어진 종이를 원래대로 돌려놓거나··· 그런 마술 같은 일들을 했었죠.”

“재미있는 이야기구만.”

“뒤는 더 재미있어요. 에밀리아는 열 살이 된 생일날 자신의 초능력이 사기이며 단순한 마술이라고 밝혔어요. 기자회견에서 참 떠들썩했죠. 초능력자라고 자신의 딸을 광고하던 아버지는 아주 입에 거품을 물었거든요.”

“사기였나?”

“모르죠. 본인이 그렇게 말한 이상 지금에 와서 달리 확인할 길은 없어요.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죠. 에밀리아는 자신이 벌였던 일들을 몽땅 마술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트릭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했거든요. 뭐··· 마술사가 자기 밥줄을 가르쳐줄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좀 미심쩍어요.”

“혹은 진짜 초능력자였다거나?”

“그럴지도 모르죠. 아버지는 당시의 에밀리아가 초능력자였던 건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열 살이 되면서 갑자기 그런 능력을 잃어버린 것뿐이라고.”

“초능력이란 게 갑자기 사라지나?”

“평범해지고 싶어 했나 봐요. 어쩌면 갑자기 생긴 능력이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진 않겠죠.”

“흠, 그래서 존 박사님 소견으론 어떤가? 그 이상한 이론으론?”

“글쎄요. 아버지가 워낙 괴짜라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으셨지만.”

“뭐라고 하시던가?”

“에밀리아가 죽기 전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그러니까··· 자신의 딸은 죽어버리고 몸은 엉망진창이 되 버렸어요. 인생과 행복을 마냥 빼앗겨버렸죠. 릭이 에밀리아라면 딕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처 죽여도 모자를 놈이지. 용서할 수 없어.”

“그렇죠? 아마 에밀리아는 죽기 직전까지 딕을 저주했을 거예요.”

“···아니, 잠깐··· 뭐라고? 저주?”

“그래요, 저주.”

“진지하게 말하는 건가?”

“저도 모르겠어요. 이미 상식을 초월한 일이 벌어졌는데 믿을 수 없다느니 할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에밀리아가 죽은 시각에 딕은 가공할 압력에 눌려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에밀리아가 자신있어하던 초능력은 물체를 일그러뜨리거나 하는 거였어요. 위에서 아래로 눌러 뭉개듯 말이죠. 이게 당시의 사진이에요. 상자 안에 들어있던 사과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렸어요. 마술이라면 당최 무슨 트릭을 썼을지 감도 안 잡혀요. ···있죠, 릭? 만일 에밀리아가 정말 초능력자였고 모종의 이유로 지금까지 그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쳐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 그 능력을 되찾은 거예요. 무리는 아니에요. 기록에 따르면 에밀리아는 수십 킬로나 떨어진 곳의 물체를 움직였다는 일화도 있었으니까요. 생각해봐요. 에밀리아는 고작 열 살이 되기도 전에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저희 아버지는 그 정신적인 에너지는 죽기 직전에 이르러선 수백, 수천 배의 힘을 낼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만일 이십년이나 억눌려왔던 에밀리아의 힘이 사념이란 특수한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한다면···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 복수할만한 동기가 충분하다면···.”

“···흠.”


릭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느닷없이 동화 속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는 다신 이런 일에 연류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 나도 동감이야.”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죠?”

“그래.”

“그럼 이제 무리하지나 말라고요.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맥주라도 하나 들고 야구 재방송이나 봐요.”


갈게요, 제니퍼는 평소처럼 가볍게 웃더니 닉의 어깨를 툭하고 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릭은 복잡한 얼굴로 묵묵히 사건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 바닥에는 핏덩이가 눌러 붙어있어, 바로 피의자인 에밀리아 델리옷의 피였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 정말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을 간절히 바랐을까?

저주, 릭은 그 단어가 쉽게 잊혀 지지가 않았다.

누군가를 해할 정도의 악의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

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선 어떤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필요할까?

릭은 제니퍼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릭은 다시금 제니퍼가 가져온 서류를 훑어보았다.

사진 속의 여인은 해맑게 웃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안겨있었다.

릭은 그녀가 분명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냐메 단편집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목성의 노래, 그리고 또 다시···. +15 20.12.30 529 0 -
21 더 로크The Rukh +1 22.01.04 94 0 8쪽
20 사냥찬가 +1 21.04.27 113 5 15쪽
19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1 21.04.10 110 4 20쪽
18 헥센냥크트 +5 21.04.09 332 12 15쪽
17 몽환소녀 21.04.07 103 5 11쪽
16 마법소녀 프리즘 스칼렛 +5 21.02.26 141 9 48쪽
15 악향The Evil Odour +3 21.01.15 173 14 16쪽
14 불쾌한 골짜기를 넘어서Beyond The Uncanny Valley(下) +3 21.01.14 93 12 14쪽
13 불쾌한 골짜기를 넘어서Beyond The Uncanny Valley(上) 21.01.14 82 13 16쪽
» 그리고 그녀의 악의가 심판을 내리리라et lmalitia eius loquetur iudicium +3 21.01.10 112 16 20쪽
11 루나시 오브 런던Lunacy of London +2 21.01.08 143 13 8쪽
10 이모키드 아티스트Emokid Artist(下) +2 21.01.07 91 11 17쪽
9 이모키드 아티스트Emokid Artist(上) 21.01.07 100 7 15쪽
8 로크The Rukh +2 21.01.06 102 15 7쪽
7 윌 오 위스프Will o' wisp +1 21.01.06 131 16 15쪽
6 빈센트 로지의 사례Example of Vincent Lodge 21.01.05 124 17 16쪽
5 생존 주의Survivalism +2 21.01.01 199 24 24쪽
4 밤에 피는 꽃 +5 20.12.30 325 22 18쪽
3 목성의 노래(下) +15 20.12.30 485 60 11쪽
2 목성의 노래(中) +3 20.12.30 369 39 13쪽
1 목성의 노래(上) +7 20.12.30 793 49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