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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6회차 음악천재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어디서본듯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2.03.18 15:00
최근연재일 :
2022.04.1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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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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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5화

DUMMY

‘라흐마니노프는 이놈 전문분야일 텐데.’


아버지한테 물어보면 될 거를 왜 들고 온 거지?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안현수가 말을 더듬었다.


“나,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너 아침에 카레 먹었지.”

“어? 어떻게 알았어?”

“입술에 묻었네. 거기 말고. 조금 더 위쪽.”


안현수가 입술을 오물거린다. 선유희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더니 말했다.


“선생님들 오시면 깍듯이 인사하고. 너희들 알지? 류진, 류민 피아니스트는 세계적인 거장들한테 후원도 받았던 분들이야. 이번 기회에 얼굴도장 잘 찍어놓으면 나중에 유학 갈 때 수월해질 수 있어.”


명품백을 바라보는 눈빛.

꿀이 떨어지는 시선이 4명의 학생들에게 달라붙는다.


‘자기 편이다 이 말이군.’


이런 류의 인간군상은 욕망이 뚜렷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스타일. 이 자리를 통해 이사장 딸이 우리를 확실하게 밀어주기로 한 것이 분명해졌다.


‘은화재단 쪽도 한 번 기웃거려 봐야겠는데.’


서연예고는 딱 1년만 다니고 자퇴를 할 곳이다. 그 후에는 해외의 거장을 만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돈이 엄청나게 들 것이 예상되는 만큼, 스폰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데에 수잔 도움을 받기는 좀 그렇고...’

‘유학은 내 돈 안 쓰고, 남의 돈으로 다녀와야지.’


비트코인이 각광을 받는 시기는 2009년. 그 시기가 딱 1년 남은 지금, 미국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월가의 모럴해저드로 인한 대공황이 벌어지는 중이야.’


전 세계가 요동을 치는 시점에서, 가난한 유학생이 설 자리는 없다. 집안 자산을 까먹지 않으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번 류씨 자매와의 만남은 훗날 팬시한 유학생활을 위한 단초가 될 수 있을 터.


“그나저나 얘네들은 왜 이렇게 안 와?”


정각을 앞둔 시간.

불만스럽게 손목시계를 쳐다보던 선유희는 툴툴거렸다.


벌컥.


두 여성이 때맞춰 문을 열고 들어온다.


넉넉한 풍채를 가진 류진.

그에 비해 전체적으로 얄쌍하다는 느낌을 주는 류민.


류진이 넉살 좋게 웃었다. 깔깔거리는 음성과 함께 손사레가 쳐진다.


“미안미안. 우리가 너무 늦었죠? 한국은 오랜만이라 서울 교통체증을 생각 못 했네요.”


그녀는 과장되게 사과를 하더니


“지우야~”


내게 달려왔다. 180에 가까운 키가 매섭게 다가온다.


“자, 잠깐...!”


그러곤 나를 껴안는 류진이었다. 나도 덩치가 큰 편인데, 이 여자는 웬만한 남성보다 거대하다. 엄마 그리즐리 베어를 보는 느낌이랄까.


“쪼꼬말 때 보고 이제야 보네. 누나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

“으픕.”

“요요, 귀염둥이. 우리 사실 네 공연 보러 갔었다? 바빠 보여서 아는 척 안 했는데. 입학식 때 날라다니더라 너~ 어유 귀여워!”


양 볼살을 손으로 짜부시키던 류민은 내게 기습적인 볼 뽀뽀를 가했다. 난데없는 습격에 내가 황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순간, 류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타겟을 찾아 떠난 그리즐리 베어는 안현수를 번쩍 들듯이 껴안았다.


“엌.”

“...지우야. 혹시 나도.”

“어. 각오해.”

“엄마야!”


이어지는 베어 허그와 볼 뽀뽀. 그걸 보던 동생 류민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언니가 좀 벅차죠? 외국물을 잘못 들어서 그래. 그만해! 같이 다니기 쪽팔려.”

“넌 내가 쪽팔리니?”


언제나 사이좋은 모습이었다. 자질구레한 인사치레가 있었고, 류 자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곡 후보 2개씩 보내준 건 잘 받아봤어요. 다행히 우리가 안 쳐본 건 없더라고.”

“쇼팽, 리스트, 라벨, 라흐마니노프... 낭만이 가득하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파이널 무대 진출자.

류진과 류민.


쇼팽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그들답게 곡 후보군들은 쇼팽의 곡들에 치우쳐져 있었다.


“발라드, 왈츠, 소나타... 연의? 곽연의 맞죠?”

“네.”

“연의 학생만 에튀드를 골랐네? 이유가 뭐예요.”


곽연의가 고른 것은 쇼팽의 겨울바람이었다.

실기시험 때 쳤던 에튀드.


곽연의는 슬쩍 눈을 내게로 맞추며 말했다.


“조금 더 잘 쳐보고 싶어서요.”

“그래도 이런 기회에 에튀드는 좀 그렇다. 에튀드는 노동이에요. 노동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건데 굳이 우리한테 배울 필요는 없지.”

“그래도 이걸로 하면 안 될까요?”


곽연의의 눈이 내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노골적인 시선이다. 이전 생에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맞선 때 보았던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경영인이었다면 지금은...


‘사회성이 부족한, 양반댁 규수에 가깝지.’


류민이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다.


“음. 미안한데, 그건 안 되겠어요. 연의 학생 할아버님한테 들은 당부가 있었거든. 쇼팽 발라드로 갈게요. 연습은 해왔죠?”

“...네.”

“그럼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하죠. 들어가기 앞서서, 누구한테 배울 건지 골라줘요.”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레슨을 받을 곡과 선생을 미리 합의해놓는 것이 아닌.


“하나, 둘, 셋 하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거예요. 알겠죠?”

“네!”


현장에서 학생들의 선택에 맡기는 것. 물론 각 선생당 2명씩 배정되는지라 최종적인 선택은 류진과 류민에게 달려있긴 하다.


천천히 걷던 류민이 내 앞에 멈추었다. 그녀는 내 귀에 얼굴을 바짝 댄 채 속삭였다.


“지우 넌 꼭 나 선택해라?”

“...네?”

“뭐야! 너 진짜 이러기야!”


두근두근 예고 라이프의 시작.


일방적인 러브콜이 내게 쏟아졌다.




=




“지우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결론적으로 내가 선택한 인물은 류민이었다. 동생인 류민은 콩쿠르에서 성적이 더 좋았을뿐더러 내가 선택한 라흐마니노프에 조금 더 전문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패자가 말이 많네”

“이거 부정행위야. 나 용납 못 해.”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한때. no.1 - no.6


이 모음곡은 여행길에서 지갑을 도둑맞은 라흐마니노프가 생존을 위해 써 내려간 곡집이었다.


그중 4번은 특유의 극적인 분위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빠르게 내달리는 왼손.

무수히 많은 당김음은 청중을 긴장 속에 몰아넣으며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곡은 신용불량이 극에 달했던 예술가가 돈이 궁하면 얼마나 초인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곡이다,]


안현수와 나는 이 곡을 선정했다.


나는 계속해서 품고 있던 의문을 그에게 표했다.


“왜 라흐마니노프 골랐어?”

“재밌어 보여서.”

“...재밌어 보여서?”

“어. 저번에 다른 피아니스트 리사이틀 보러 갔었거든. 엄청 멋지더라. 나도 그렇게 치고 싶어. 지우 너는 왜?”


악흥의 한때 4번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리사이틀에서 애용하는 곡이다. 뛰어난 연주 효과를 보일 수 있는 곡. 효과적인 분위기 환기를 위해서 이 곡만 한 곡은 없다.


나는 다카무라 콩쿠르에 악흥의 한때를 들고 갈 예정이다.


First stage. Second stage. Third stage. Final.

4개의 단계로 이루어진 대장정.


Second stage는 대중의 관심이 몰리기 시작하는 때다. 미디어는 예선에 통과한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누가 스타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늠하고, 띄워준다. 나는 그 하이에나들에게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어차피 등수싸움인데 심사위원 마음에 들면 그만인 거 아니냐고.


만만의 콩떡이다. 미디어의 관심과 객석 반응은 심사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콩쿠르도 무대공연이야. 객석에서 느껴지는 호응도에 따라 곡을 듣는 심사위원들의 태도도 달라져.’

‘그리고 국제 콩쿠르는... 동양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누구의 제자인가.

국적이 어디인가.

인종이 무엇인가.

미디어의 관심을 얼마만큼 받고 있는가.


권위는 공정을 대표하지 않는다. 권위는 권력 그 자체일 뿐이다. 인종과 국적, 사익 등으로 얽힌 체계 안에서 동양인인 내가 살아남으려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해야 한다.


“나는 콩쿠르 때문에.”

“월드뮤직 콩쿠르 나가?”

“아니. 다카무라 국제 콩쿠르.”

“...벌써 국제 콩쿠르 준비하는구나. 대단하다.”

“너는 콩쿠르 안 나갈 거야?”

“어. 나는 그냥 즐기고 싶어. 다른 사람이 등수 매겨봤자 내가 하는 음악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가치가 매겨지잖아. 콩쿠르 입상하면 네 음악 듣는 사람도 많아질 거고. 최대한 많은 사람한테 음악 들려주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긴 한데, 어차피 즐기다 보면 사람들도 알아줄 거라 생각해서.”


안현수는 벌어진 앞니를 보이며 수줍게 웃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만.’


순수한 낙관에 가깝다. 좋은 재능과 좋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집안에 돈이 없거나, 재능이 부족한 이들은 어떻게든 국제 콩쿠르 입상을 위해 사활을 건다.


그것만이 그가 연주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 간판 하나가 훗날 교육자로서 밥을 빌어먹고 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안현수를 흘겼다. 안현수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는 나보고 무식하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나는 상관없는 걸 어떡해.”


그가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감춘다. 꼼지락 거리는 손.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


그 일련의 과정들은 무언가,

내게 어떤 울림 같은 것을 주었다.


‘...언제부터였지. 내가 이렇게 1위에 목매달려고 했던 게.’


“...”

“그, 그렇다고 콩쿠르 나가는 게 나쁘다는 건 아냐. 당연히 의미 있는 일이지. 사람들이 주목해야 연주도 할 수도 있고, 특히 클래식 쪽은...”

“알아. 좋은 말 같아서. 어차피 즐기다 보면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는 그 말.”


내가 음악을 하게 된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지.


나는 군면제를 국제 콩쿠르에 나가는 표면적인 명분으로 잡았지만, 확인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음악을 하기보단


‘성공하는 것.’


빠르게 자리를 잡고자 하는 욕망.


삶이 반복되다 보니 가끔 단기적 목표에 사로잡혀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그럼 현수 학생부터 시작하죠.”


그때였다. 동생과 실랑이를 벌이던 류진이 뾰루퉁하게 말했다.


“반가워요. 반말해도 되죠?”

“네, 네!”

“현수 네가 니콜라이 선생님 아들이였구나? 아유- 귀여워라.”

“...감사합니다. 헤헤.”


단상 위로 올라간 안현수는 의자를 높게 조절했다.


‘한 번뿐인 삶.’


유한한 삶이 주는 의미.


나는 안현수의 호흡과 손짓을 눈에 담고자 했다. 부드러운 물결처럼 솟아오르는 팔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린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강렬한 fff포르티시시모.


아.


지갑을 도둑맞은 라흐마니노프의 분노가 기함을 토했다.




=




‘장관이군.’


두 소년이 콩쿠르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나눈다. 한 소년은 순수를 간직한 채 타인의 시선 따위 고려하지 않고 본인의 음악을 해나갈 것이라 천명했고, 지극히 현실에 찌든 눈매를 하고 있던 소년은 그가 보인 순수에 감화된다.


이 얼마나 멋진 청춘들이란 말인가.


헌팅캡을 푹 눌러 쓴 중년 남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는 보석들이 많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김정훈.


‘연주 실력도 저 마음과 같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올해 8월에 있을 시향 공연의 협연 연주자를 구하고자 이 자리에 왔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내 귀를 즐겁게 하는군.'


그 후보를 발견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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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5 22.03.26 3,561 85 10쪽
9 9화 +3 22.03.25 3,518 91 14쪽
8 8화 +6 22.03.24 3,663 91 13쪽
7 7화 +7 22.03.23 3,893 98 13쪽
6 6화 +2 22.03.22 3,999 90 12쪽
5 5화 +3 22.03.21 4,253 90 11쪽
4 4화 +7 22.03.20 4,554 9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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