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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대게 님의 서재입니다.

알바생이 연출을 너무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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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박달대게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6.27 10:50
연재수 :
4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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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37
추천수 :
1,777
글자수 :
262,578

작성
24.05.11 10:50
조회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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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글자
12쪽

8화. 연출부 대타 (7)

DUMMY

“모르겠습니다.”


침이 바짝 마른다.

명배우 신애리가 일개 연출부 아르바이트생인 나에게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쓴 12 씬의 대사’가 어떻냐고 물었다.


솔직히 별로다.

만나자마자 상대방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을 쏟아내는 캐릭터? 비호감이잖아. 상대의 아픔을 찔러서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는 대사는 저질이라 생각한다. 이 말을 했다가는 감독의 능력을 흉보는 것 같고.

그렇다고 얼렁뚱땅 ‘괜찮은 것 같은데요?’라며 넘어갔다가는, 대놓고 이 대사를 싫어하는 배우들에게 진짜냐며 비난받을 것 같고.

확실한 건, 나는 감독과 배우 사이에 편 가르기를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맑고 순수한, 적당히 멍청한 느낌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배우님들 파이팅!”

“일한 씨. 관객으로서 생각해 봐요. 그 장면이 재미있어요? 서로를 공격하는 강도가 너무 세지 않아요?”


엄마가 물어봤다면 솔직하게 답했겠지만,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하는 일터에서 감정을 다 드러낼 수 없다. 신애리의 질문에 난감해하는 사이에 제시카가 손을 들었다.


“언니, 대사를 내레이션으로 바꾸자고 하면 안 될까요? 우리 영화는 중간중간 내레이션이 많이 등장하니까, 속으로 상대를 비난하는 거예요. 직접 상대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독한 말도 순하게 전달될 거예요. 사실 속으로는 별말 다 하잖아요. 응?”


괜찮은 방법 같지 않냐며 웃는 제시카를 보며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글쎄요. 내레이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덤덤한 표정 위로 시꺼먼 속내의 말이 흘러나온다는 건데···. 그럼 뭔가, 캐릭터가 비열해 보이잖아요.

저는 반대합니다. 속마음 들키지 않게 웃으며 복도에 누가 있나 망을 봤다. 아무도 없네.

제시카는 시나리오를 펼쳤다. 대사마다 색깔 팬으로 메모를 해놔서 너덜너덜해진 페이지가 보였다.


“언니, 그러면 대사를 부드럽게 변경해 달라고 할까요? 비속어를 줄이는 거예요.”


이 또한 썩 좋은 생각 같지 않다.

결국, 상대방을 비방하는 내용일 텐데, 친절한 험담이란 게 있을까? 오히려 상대를 비꼬는 것처럼 보여서 관객을 불쾌하게 만들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적극적으로 신애리에게 질문하는 제시카를 봤다. 두식이 형이 알려준 이미지랑 다르다. 신애리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연기를 못할 거라더니.

아닌데요? 신애리에게 뭐라도 더 배우려고 최선을 다하며 달라붙는데요.


‘혹시?’


랄랄라 엔터테인먼트 매니저가 거짓말한 게 아닐까? 연기에 진심인 제시카는 분명히 열심히 할 테니까, 이런 열정을 신애리가 알아보고 도와주면 연기력이 좋아질 테니까. 연기력이 좋아지면 제시카가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제시카랑 신애리를 붙여 놓으면 시너지가 날까 봐, 그게 싫어서 떨어트리려고 한 거야?’


맞네. 맞아. 그거네.

제시카 잘 되는 꼴 보기 싫어서 ‘제시카가 신애리를 무서워한다.’이런 말을 퍼트렸나 보다. 루머는 거리감을 만들기에 좋지. 근데 랄랄라 엔터 멍청이들아, 제시카 눈을 봐라. 신애리를 존경하잖아.

내가 알아볼 정도면 신애리는 진작에 눈치챘겠지.


“언니 생각은 어때요?”

“시카야- 시나리오 일부를 내레이션으로 변경하거나, 대사를 수정하는 건 감독의 영역이야. 배우가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돼. 너 지금 매우 무례한 말을 했어.”

“정말요?”


제시카는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끔뻑였다.


“선 넘지 마.”

“몰랐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배우가 해야 할 일은, 이 재미없는 대사를 어떻게 해야 맛깔나게 살려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거야.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 이유지.”

“재미··· 재미······. 어떡하죠. 제가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요?”

“입금됐으면 군말 없이 해내야죠. 시카님.”


이게 프로구나, 보여주듯이 신애리는 얄짤없다.

리허설까지 십오 분 정도 남았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연기를 만들어 낼지 모르지만, 신애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본다.

중얼중얼 거리며 대사를 이렇게 저렇게 변형해가며 뱉는데 잘 안되는지 입술을 삐쭉댔다.


“언니, 아까요-.”

“응?”

“언니 차에 가고 나서 감독님이 따로 지도해 주셨어요.”

“그래? 그걸 왜 이제 말해?”


기대에 찬 눈으로 신애리가 웃는다.


“어떻게 하래? 알려줘. 너한테 맞춰서 내가 대사 칠게.”


밝아진 목소리에 제시카도 신이 났는지, 힘차게 시나리오 위에 흘겨 쓴 글씨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딱 봐도 제시카의 글씨와 섞이지 않는 낯선 필체다.


“감독님이 적어 주셨는데요. 이 부분에서 눈을 크게 뜨고, 이 대사할 때 뒤돌아보고 여기서는 어깨를 한번 움찔하라고 했어요.”

“뭐?”

“하나하나 다 잡아주셔서 이대로 외우면 될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준비한 연기와 붙지 않아서 어려워요.”


진지하게 말하는 제시카를 보고 신애리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혀를 날름 내밀어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아랫입술을 잘근 씹는다. 불쾌한 기분을 짧고 굵게 드러냈다.


“시카야-.”

“네, 언니.”

“감독님 말 무시해.”

“네?”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준비한 연기를 해.”


신애리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그런 거 일일이 받아주지 마.”

“제가 감히 어떻게 감독님의······.”

“우리가 연출 영역을 존중하는 것처럼, 감독도 연기 영역을 존중해 줘야지.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는 로봇이 아니야.”

“.......”

“아니라고!”


단박에 분위기가 제압됐다. 제시카는 입을 꾹 다물고 신애리 앞에서 눈꼬리를 내렸다.


“제시카를 젠희로 캐스팅했으면, 제시카가 소화할 젠희를 기대해야지.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젠희대로 너보고 움직이라고 했다고? 이건 감독이 선을 넘었는데?”


신애리의 목소리가 크다.

감독 험담하는 소리가 회의실을 넘어서 복도까지 들리지는 않았을까? 놀라서 밖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세트장에 있느라 복도가 한산하다. 나는 신애리를 흘겨봤다.

이렇게 버럭 지르려고 망을 보라고 한 겁니까! 쫄리잖아요. 쉿쉿쉿!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건만, 신애리는 나를 보지 않는다.


“박한 감독님······. 연출이 뭔지 모르시나?”


노골적으로 이름까지 말한다.

나는 문에 바짝 붙었다. 아무도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시카야, 너 오기 전에 7씬을 촬영했어. 감독님이 나한테 천상의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표정을 지으라 더니······. 젠장.”


젠장?

난 또 복도를 봤다. 거친 말이 나올 때마다 누가 들을까, 심장이 오그라든다.


“너튜브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런 가수의 분위기를 내주세요.’라는 거야. 공연 자료를 보여주면서 비슷하게 따라 해달래. 내가 그 사람을 재연하려고 캐스팅됐어?”

“.........”

“그 가수가 <개천에 뜨는 별>의 신나라야? 아니잖아. 근데 왜 그 사람을 모방해야 하는 거지? 감독의 머릿속에 신애리가 만들 신나라가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까 혼란스럽더라.”

“제발···. 요!”


참다 참다 나지막이 소리 냈다.


“신애리 님. 목소리가 너무 커요.”


누가 들을까 봐, 겁이 납니다.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차라리 들었으면 좋겠네요. 감독님-.”


보란 듯이 신애리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감독의 역할은 배우가 연기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겁니다. 감정이 도달해야 하는 위치를 정하고, 그곳에 가기 쉽게 도와주는 걸 연출력이라고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어어어어어? 목소리가 더 커진다.

이러다 진짜 누가 듣겠다!

쉿쉿쉿! 제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왜 저래, 정말!


“감독은 움직임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움직임이 나오도록 감정을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눈을 크게 뜨고, 여기서 뒤돌아라? 그건 카메라 무빙과 합을 맞출 때 하는 겁니다. 기술적인 문제가 없다면 앵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해주세요.”

“쉿쉿쉿!”


숨을 크게 뱉은 신애리가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안 들려요. 세트장이 얼마나 시끄러운데요. 속이 답답해서 한번 질러봤네요. 그리고 들으면 또 어때요. 이렇게 한번 부딪혀서 풀고 가는 거죠.”

“정말요?”

“네, 절대 안 들려요.”


다행이다. 그것도 모르고 긴장했네.

어? 이거다!

번뜩 12 씬이 이렇게 흘러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방금 웃었죠?”

“네?”

“일한 씨, 왜 웃었어요?”


아차, 나도 모르게 표정이 바뀌었었나 보다. 이걸 또 신애리가 놓치지 않고 봤다.


“무슨 생각 했어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데? 방금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봤는데?”

“아니······. 그냥 이 상황이 12 씬과 닮았다···. 뭐 그런 생각을···. 아닙니다.”

“정말?”


신애리가 벌떡 일어나 나를 잡아당겼다.


“앉아서 말해봐요. 뭔데, 이 무거운 상황에서 웃음이 난 거예요?”


이럴 때 무전기가 울리면서 나를 여기서 빼내 주면 좋겠는데···. 조용하다.


“일한 씨. 우리 영화는 청춘 드라마예요. 전체적으로 밝음이 깔려 있어야 하죠. 싸우는 순간에도 피식-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일한 씨처럼요.”


둘이 빤히 나를 본다.


“12 씬과 지금이 어떻게 닮았어요?”

“그게···.”


어설픈 대답으로 또 다른 질문이 꼬리 물면 대화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한 방에 내 생각을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쉽게 끝난다. 오랜만에 언어영역 1등급을 지켜온 실력을 발휘해야겠다.

해보자!

시나리오에서 12 씬의 역할은 갈등의 유발이다. 이때의 사건이 결말에 어떠한 영향을 줬는가 생각하자. 그리고 방금 내가 신애리를 보고 웃었던 이유를 합치면?


“신애리 님이 감독님이랑 멀리 떨어진 이곳. 회의실에서 감독님 들으라고 소리쳤잖아요. 험담 같지만, 영화 잘 되라고 한 말이었어요.”

“그랬죠.”

“감독님이 들으면 싫어할까 봐, 숨어서 말하면서도 옳다고 생각하니까 목소리를 막 높였어요. 그 와중에 여기는 세트장과 멀어서 괜찮다 안심을 하더니, 또 저 보고는 누가 오는지 망을 보라고 했죠. 엉망진창인 게 웃겼어요.”


신애리의 눈빛이 변했다. 진지해졌다.


“신애리 님이 감독님과 갈등을 유발하려는 건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영화를 더 잘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려는 거죠.”

“.......”

“거침없이 지르는 것 같지만, 은근히 주변을 다 배려하고 있어요. 신나라랑 젠희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더니 재밌더라고요.”


종일 게임만 하는 애를 혼내는 부모는 입이 거칠잖아요. 나가 죽어라, 그러다 척추 수술 한번 받아봐야 후회하지. 시력 나빠지면 평생 고생이다.

그 말끝에 제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욕 듣는 자식도 부모의 진심을 알기에 크게 타격받지 않는다.

그 느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알잖아요. 적용하면 어때요? 신애리랑 눈빛이 통했다.


“그렇네요. 신나라와 젠희는 듀엣이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다투는 거야. 이것만 고쳐주면 좋겠어,라는 마음을 거칠게 표현한 거라면? 귀여울 수도....?”


듣고 있던 제시카가 끄덕였다.


“우리 팀도 연습생 때 그랬어요. 쟤랑 같이하고 싶은데, 쟤가 가진 저 못된 성격 때문에 욕 들을까 봐 또 같이하기 싫고. 싸우면 미안하고 그러다가 변하지 않는 것 보면 화가 나고···. 그랬었죠.”

“괜찮네.”

“상대를 변화시키고 싶은 간절함 만큼. 말이 거칠게 나갈 거 같아요.”

“맞아. 알 것 같아.”


신애리가 나를 보고 웃는다.


“일한 씨 덕분에 12 씬의 어느 부분에 힘을 줘야 할지 알 거 같아요. 디렉팅 좋네.”


신애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잡았다.


“또 한 건 했네요.”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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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화. 연출부 대타 (8) +4 24.05.12 1,504 4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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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화. 연출부 대타 (6) +2 24.05.10 1,598 4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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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연출부 대타 (4) +1 24.05.08 1,705 43 12쪽
4 4화. 연출부 대타 (3) +2 24.05.08 1,735 49 13쪽
3 3화. 연출부 대타 (2) +1 24.05.08 1,786 4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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