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구채의 서재입니다.

헌터들의 정신의학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구채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4.21 10:49
최근연재일 :
2023.04.29 23:15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2,886
추천수 :
139
글자수 :
82,527

작성
23.04.29 23:15
조회
102
추천
5
글자
11쪽

실어증 윤서화 (1)

DUMMY

서대문구에 위치한 금성 길드의 사옥.

정확히는 그 뒤에 딸린 작은 주택, 윤서화의 집에서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쏴아아···

봄비치고는 두꺼웠다.

고래등 같은 우산 아래로, 금성의 부길드장이 애타게 문을 두드렸다.


쿵쿵!


“길드장 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번에는 정말 다를 겁니다.”


한참 동안 이어진 그의 설득 탓이었을까,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금성의 길드장 윤서화.

외모는 여전했지만, 칩거가 오래된 탓에 어딘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길드장이 반색하며 말했다.


“길드장 님, 평범한 상담가가 아닙니다. 치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각성 능력이 강화된 사람도 있다고 해요. 분명 길드장님의 문제도···”

“······”


윤서화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마른 손짓을 휘휘 저으며 그에게 축객령을 내릴 뿐.


“길드장 님···!”


윤서화는 고개를 저었다.

더는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미 십수 명의 의사, 상담가들이 이 저택을 스쳐 지나갔으니.

철저한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었다.


끼이이···

그때, 낯선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담장 문이 열렸다.

이윽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깟 상담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서화도 이제 깨달은 거지. 제대로 된 방법을 시도할 차례라는 걸.”


남자의 정체는 윤서화의 큰아버지, 은성 그룹의 부회장이었다.

윤서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정원을 향해 퉤 하고 침을 뱉을 뿐.


부회장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지? 정사장.”


부회장의 곁에는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벗겨진, 스템메디컬의 정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반질반질한 007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가 가방을 애정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


“물론입니다. 서화 아가씨, 제가 볼 때도 아가씨의 질환은 생활이 침체된 것에서 비롯한 전형적인 우울 증세예요. 우울증은 누구에게든 감기처럼 찾아올 수 있는 아주 흔한 질환이니까요. 하지만 이 라이시온만 있다면 아가씨께서도 금방···”


그의 말을 경청하던 윤서화가 미소를 지었다.

양손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저게 진짜···”


마침내 폭발한 부회장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부길드장이 그를 제지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부회장님.”


부회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와 윤서화를 쏘아붙였다.


“곤란? 1년 내내 집에 짱 박혀 게이트에 얼씬도 하지 않는 길드장이 곤란하진 않으시고? 명색이 대마법사께서 실어증에 걸려 주문하나 제대로 외지 못하는 꼬락서니가 곤란하지 않으면 대체 뭐가 곤란하단 말이야?”

“부회장님···”


실어증.

윤서화는 입을 열어도 단 한마디 뱉을 수 없는 그 괴로운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각성한 능력이 대마법사라는 것, 입으로 주문을 외워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한층 더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쏴아아···

그저 멍하니 쏟아지는 빗발을 응시할 뿐.


부스럭.

그때, 담장문으로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반질한 점퍼를 입은 백산 길드장 성민과, 흑색 레인 코트를 입은 원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성민이 부길드장에게 말했다.


“···동현아.”

“어서 와라, 성민아··· 여기는 우리 길드장 님.”


난데없는 손님에, 사이에 낀 부회장이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뭐야, 당신들은?”


그때였다.

현관 처마에 있던 윤서화가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성큼 걸어 나왔다.

부길드장 동현이 화들짝 놀라 우산을 씌워주었다.

신발조차 신지 않은 그녀였다.


저벅. 저벅.

마침내 원과 성민 앞에 다가온 그녀는 과장된 손짓으로 집 현관을 가리켰다.

들어오라는 제스쳐였다.


휙휙.

반면 큰아버지, 부회장을 향해서는 손을 내저어가며 얼른 꺼지라는 의사를 표했다.

부회장의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검어졌다.


탁!

부회장은 정사장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곤 강제로 부길드장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리곤 부길드장, 동현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잘 생각해. 이 기집애가 계속해서 이 모양 이 꼴이면··· 당신도 고달파질 테니까.”


부회장과 정사장은 그렇게 마당을 빠져나갔다.


윤서화는 그들의 뒷모습에 빼애 혀를 내밀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민과 원이 멋쩍게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




윤서화가 젖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부길드장 동현이 성민과 원을 안내했다.

거실 소파에 얹힌 봄철 습기와 함께,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성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미안하다. 다짜고짜 쳐들어오는 건 자주 있던 일인데, 아예 부회장이 직접 행차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저게 대체 뭐길래?”


성민이 부회장이 주고 간 007가방을 가리켰다.

동현이 가방을 가져와 열자, 팔랑거리는 종이 몇장과 함께 하얀 액상이 담긴 주사기 몇 개가 데구르르 안쪽을 굴렀다.


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전생에 헌터들을 망친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신경안정제야. 정확히는··· 약물 내성이 강한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몇 차례 개량된 물건이지.”

“저게 실어증에 도움이 된다고?”

“하아···”


동현은 지친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효과는 있어. 테스트 알약을 드셨을 때 잠깐이지만 말문이 트였었거든. 하지만 문제는 부작용이야. 그때도 구토를 하시곤 며칠간 음식엔 손도 못 대셨었어. 해서 안 먹겠다고 했는데도 저리 성화인 거지.”

“왜 저렇게까지 약물을 권하는 겁니까? 부회장이란 사람이 직접 나서면서까지요.”


이번에는 원이 질문했다.


신경안정제 라이시온.

전생에 그와 헌터들을 괴롭혔던 약물의 탄생 배경이 궁금했다.

동현이 신중하게 답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죠··· 라이시온은 은성화학과 스템메디칼이 공동 개발한 신경안정제거든요. 최근 보험사들의 내부 통계를 보면 헌터들의 정신질환 발병률이 급속도로 치솟고 있어요. 부회장은 이걸 아주 대단한 기회로 보고 있고요.”

“그 말은 윤서화 씨를···”


원의 말에, 동현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 광고로 써먹을 작정이에요. 한국의 두 번째 S급 헌터이자 금성의 길드장인 윤서화, 그녀가 1년간의 실어증을 떨쳐내고 전선으로 복귀했다. 이렇게 홍보를 하고 싶은 거죠.”


원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의 성민이 원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이 시기 즈음, 금성 길드장 윤서화의 자살이 대서특필되었으니까.

어쩌면···


‘그 죽음에 은성그룹과 라이시온이 연루돼 있었을 수도 있었겠어.’


동현이 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회장의 압벽과 별개로, 실제로 길드장님의 부재 탓에 금성 길드도 많이 어려워진 상황입니다. 금성은 A급 게이트 단독 입찰 권한이 있는 몇 안 되는 길드예요. 지금처럼 길드장님이 공략에 나설 수 없다면 앞으로 길드의 운명을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꼭···”


그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 탓에 말을 멈췄다.

그들에게는 어느새 금성의 길드장 윤서화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스륵.

그녀가 장을 넘기자, 글씨가 쓰여 있었다.


<소용없어요. 돌아가세요.>


“길드장님···!”


동현이 애타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화가 다음 장을 넘겼다.


<큰아버지가 꼴 보기 싫어 잠시 모셨을 뿐이에요. 저희 부길드장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빗길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떠나려 했다.

원의 말이 그녀를 붙잡았다.


“서화 씨의 의지지요? 말하지 않는 건.”


잠시 우뚝 멈춰선 그녀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새 페이지를 펼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나는 꾀병 같은 걸 부리는 게 아니니까. 괜한 기대를 품는 게 이제 지겨울 뿐이에요. 그만 나가세요.>


하지만 원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말이 있어요. 입은 있지만 할 말은 없다는 뜻이죠. 하지만 사실, 묵언(默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빙빙 돌리는 듯한 말에, 세 사람 모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원이 마저 말을 이었다.


“정신분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요. 실어증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그러니 서화 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서화 씨는 지금도 끊임없이 말을 내뱉는 중이니. 단지, 그 방법이 입을 다무는 것일 뿐이죠.”

“······!”


윤서화가 발끈하며, 원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혀에 힘을 주던 그녀는,


“Mens··· chen"


말했다.


“···!?”


화들짝 놀란 그녀가 입을 가렸다.

성민과 부길드장 동현 또한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1년간 굳게 닫혀 있던 서화의 입이 열렸으니.


그 의미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나라의 말인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이 물었다.


“···원래 독일어를 할 줄 아셨나요?”


동현이 대신 답했다.


“십 대 시절에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오신 걸로 압니다··· 저도 사용하시는 건 처음 보네요.”

“변화가 일어났다는 건 좋은 신호죠. 괜히 한국말이 아닌 독어가 튀어나온 건 아닐 겁니다.”


정신분석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연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잠시나마 말이 트인 것은 원의 말이 그녀의 무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튀어나온 말이 독일어인 데에도 숨겨진 이유가 있을 터였다.


원이 [증상탐지]를 발동했다.


띠링!


[타자의 욕망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어증(失語症)이 불안에 대한 무의식적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입술이 붉게 표시되었다.

윤서화 또한,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뒤바뀌어 있었다.


원이 물었다.

그는 차마 이어지지 못했던 서화의 지난 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화 씨가 직접 의사를 표해주세요. 지금처럼 무의식의 전략에 순응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그 원인을 직접 찾으러 나설 것인지.”


동현과 성민이 서화를 돌아보았다.

긴 속눈썹을 덮은 그녀는 잠시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그리곤,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오늘 처음으로 보는 선명한 눈자위였다.


끄덕.

그녀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이야······”


성민과 동현이 마른 탄성을 내질렀다.

철옹성 같던 그녀가 마음을 열었으니.


“그럼 자리를 마련해보죠.”


윤서화가 소파 위로 길게 드러누웠고, 원은 그녀의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겼다.


쏴아아···

창밖의 나무가 붓처럼 비바람에 휩쓸렸다.

똑딱 움직이는 초침 소리와 함께, 원이 입장 메시지를 띄웠다.


[탐사가 가능한 증상입니다]

[해당 증상의 심상던전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예.’


스륵.

서화의 속눈썹이 낙엽처럼 내려앉았고,


툭.

원 또한 고개를 떨구었다.


휘이이···

다시 적막에 휩싸인 거실.

남은 사람은 성민과 동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며 잠든 두 사람을 응시했다.

동현이 두 손을 모았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


말 없는 자들의 숨소리가 총성처럼 들려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헌터들의 정신의학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 공지입니다. +3 23.04.29 785 0 -
공지 [제목변경] '헌터들이 돌팔이 김씨를 원함'으로 제목이 변경될 예정입니다. +4 23.04.25 170 0 -
15 실어증 윤서화 (2) +2 23.04.29 128 7 15쪽
» 실어증 윤서화 (1) 23.04.29 103 5 11쪽
13 자기탐사 (2) +1 23.04.29 104 5 12쪽
12 자기탐사 (1) +2 23.04.29 145 9 12쪽
11 소리 과민증 류진석 (2) 23.04.28 154 7 12쪽
10 소리 과민증 류진석 (1) 23.04.27 157 9 13쪽
9 첨단공포증 차시명 (3) 23.04.27 163 11 12쪽
8 첨단 공포증 차시명 (2) 23.04.26 173 8 12쪽
7 첨단 공포증 차시명 (1) +3 23.04.25 181 8 12쪽
6 불면증 박길용 (2) 23.04.24 187 8 13쪽
5 불면증 박길용 (1) 23.04.23 197 10 13쪽
4 마비증 강혜원 (2) +2 23.04.22 217 12 12쪽
3 마비증 강혜원 (1) 23.04.21 215 13 11쪽
2 헌터 전문 분석가 김원 (2) 23.04.21 255 13 10쪽
1 헌터 전문 분석가 김원 (1) +1 23.04.21 454 1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