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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unii 님의 서재입니다.

물약으로 천하무적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JJunii
작품등록일 :
2020.05.11 21:44
최근연재일 :
2020.06.14 01:22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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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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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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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22)

DUMMY

“이봐,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그게 최선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여기서 더 무리하다가는 너마저도 빠져나갈 수 없게 돼. 그리고 어차피 네 마법으로 바뀔 만한 상황도 아니고. 그래서 말인데, 도망치면서 이걸 좀 가져다 녀석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듣기 싫어요!”

진이 타이르듯 말을 덧붙였지만 라르가가 버럭 소리를 질러 다시 말을 끊었다.

“실망이에요. 진.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를 말하는 거죠? 난 포기하지 않아요. 하는 데까지 해볼 거라고요. 도망가려거든 당신이나 혼자 도망치세요!”

라르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봐, 라르가! 아직 말 안 끝났어!”

진이 라르가의 뒤에 대고 소리쳤지만 라르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젠장, 말을 좀 끝까지 들으라고. 도망가면서 녀석들 한 가운데에 이걸 떨어뜨려 달라고 하려 했더니.”

진이 손에 든 부작용 물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음이 안가지만 그래도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의지해 볼 만한 건 이 물약뿐인 것이다.

“시엘, 몸을 숨겨요. 난 라르가를 쫓아가야겠···.”

진이 시엘을 돌아보다가 말을 멈췄다. 시엘은 멍하게 라르가가 날아간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엘? 괜찮아요, 시엘?”

“아, 진? 방금 들었나요? 라르가 아가씨가 하는 말. 아가씨가 절 보며··· 친구라고···.”

“들었어요. 그보다 시엘, 일단 안전한 곳에 숨어있어요. 난 라르가를 쫓아가야 하니.”

“아, 나도 같이 갈게요.”

“네? 당신이 따라와서 뭘 어쩌려고.”

“아가씨를 혼자 보낼 수 없어요. 어차피 당신은 길도 잘 모르잖아요. 내가 안내할게요. 따라와요.”

시엘이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진은 말리려고 하다가 그냥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숨어 있는다고 해서 안전한 상황은 아니다.

방책에 가까워질수록 상황이 긴박하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나 부상자를 업고 뛰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외침을 통해 진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방책의 일부가 무너졌던 것이다. 간혹 덩치가 크고 힘센 마물들이 접근해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마법사가 없다보니 그걸 제때 저지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마물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한 육체 능력을 가졌다. 이제껏 용병들이 훨씬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로 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들이 방책을 두고 농성하는 아군에게 들이 받아준 덕이 컸다. 그러니 이제 방책이 무너져 전면전 상황이 되어버린 이상 용병들은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전장에 가까워진 듯하자 진이 시엘에게 소리쳤다.

“높은 곳, 여기서 가장 높은 곳으로 안내해 줘요!”

주변의 분위기에 점차 질려가고 있던 시엘이 뒤늦게 진의 외침을 듣고는 근처의 종탑으로 진을 안내했다.

왠지 진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진은 곧 그곳이 아까 꼭대기에서 사람 그림자를 봤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종탑 안에 들어가자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 네놈들이 어떻게 여길!”

얼마 전에 마을에서 본 적이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방계 사내였다. 부상을 다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아, 우린 저 위에 좀 올라가 보려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진은 그렇게 말하고 사내를 지나쳐 가려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뒤돌아보았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인데···.’

마침 사내는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멍해 보이는 그 표정 또한 진에게 익숙했다.

“당신, 혹시···.”

“진, 뭐하고 있어요? 안 올라가요?”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시엘이 채근했다.

“아, 올라가야죠.”

진은 미심쩍은 듯 사내를 한 번 더 돌아보았지만 이내 사다리를 타고 종탑 위로 올라갔다.

종탑 위에 올라온 진은 곧 건물 안에서 본 사내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게 되었다.

“끔찍해요.”

시엘이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종탑 위에서는 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처절한 전장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시엘의 말 대로 참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이 예상했던 것에 비한다면 그래도 양호한 상황이었다. 아직 마을에 파고든 적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고, 용병들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긴 했지만 그들을 확실히 막아내고 있었다.

진이 안도감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시엘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건 대체 뭐죠?”

진은 시엘이 가리킨 곳을 보곤 잠시 멍해졌다. 저게 대체 뭐지?

무너진 방책 한편에 격렬하게 회전하는 검은 소용돌이 같은 게 보이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는 사방으로 뭔가를 튕겨내고 있었는데, 좀 더 정신을 집중한 진은 그 튕겨져 나가는 것이 마물, 혹은 한 때 마물이라 불렸던 것들의 파편임을 알 수 있었다.

“뭐, 뭐지 저건?”

그때 무너진 방책 앞으로 엄청난 불길이 솟아올랐다. 화염장벽 마법이다.

“라르가!”

진이 고개를 들어 주변 허공을 살폈다. 곧 방책 위에 선 라르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르가는 방책 앞을 바라보며, 아니 거기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엄청난 불길로 방책 주변이 밝아지자 진은 알 수 있었다. 무너진 방책 앞에 긴 창을 든 한 사람이 서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진은 그 정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천명이었다. 방금 전 마물들을 때려잡고 있던 그 검은 소용돌이가 바로 천명이었던 것이다.

“일인전승이라더니, 정말 엄청나잖아?”

진이 감탄하고 있을 때 라르가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깐만, 라르가!”

진이 고함을 쳤지만 거리가 멀어 라르가에게 들리지 않았다. 라르가는 방책 내부로 파고든 마물들과 싸우는 아군을 도와 마법을 펼쳤다.

여기저기에서 라르가를 반기는 환성이 터져 나왔고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진은 애가 타 있었다.

“그래 봐야 라르가도 사람이야.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당장 화염장벽이 사라지자 마물들이 다시 쏟아져 들어왔다. 천명이 다시 압도적인 무위로 길목을 가로막았지만 그렇다 해도 마물들의 상당수는 천명을 무시한 채 그 곁을 지나 마을로 뛰어들었다.

라르가의 도움으로 한숨 돌린 용병들은 이제 어느 정도 진형을 잡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 일대 용병들 상당수가 아래에 내려와 있다 보니 목책 위의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목책을 지키는 용병들은 벽을 기어 올라오는 마물들에게 돌을 던지고 창을 휘둘렀지만 사람이 적다보니 놓지는 녀석들이 생겼고, 아예 도약이 좋은 녀석들은 목책 아래에 쌓인 동료의 시체를 밟고 단번에 목책 위로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목책 위에서도 아래쪽과 다를 것 없이 용병들과 마물들 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방책 아래처럼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기 어려웠던 터라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라르가가 방책 위로 날아올라 지원했지만 커버할 범위가 너무 넓어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시엘이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게 해야죠.”

“어떻게요?”

“어떻게든요.”

진은 중얼거렸다. 자신이 하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라르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라르가가 있는 곳은 가장 치열하게 마물들과 용병들이 싸우고 있는 방책 위였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물과 용병들간의 격전지를 여러번 지나야만 했다.

‘목숨을 걸어야겠군.’

진은 시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엘, 당신은 여기서 꼼작도 하지 말고 있어요.”

“당신 뭘 하려고요?”

진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던 것인지 시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은 마법을 쓸 생각이었다. 지금 저 난장판을 뚫고 라르가에게 다가갈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지나친 마법공백으로 인해 한 번 마나의 균형이 깨어진 진에게는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왜곡된 마나의 흐름이 고착화 되어버리면 자칫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 마나의 불균형으로 인해 육체의 불균형이 초래되어 불구나 백치가 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음, 잘 되겠지. 뭐.”

하지만 어차피 별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비행마법을 시전했다.

부웅.

부작용이 생기기 전 최대한 멀리 날아갈 생각으로 진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곧 그게 실수임을 깨달았다. 날아오르는 즉시 머리가 핑 돌며 몸이 제어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은 날아오른 순간의 추진력만을 몸에 갖고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속도로 날다가 어딘가 부딪히면 반드시 사망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이 향하는 곳은 하필 난전이 벌어지고 있던 적진 한가운데였다.

“뭐야, 저건!”

“조, 조심해!”

주변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진은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전력을 다해 다시 방향을 틀었다.

지잉.

눈앞이 한순간 하얘지며 이상한 이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갑자기 몸의 모든 감각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세상이 사라진 듯한, 아니 다른 세상에라도 온 듯한 느낌.

진은 자신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죽은 건가? 아니면 마나가 역전되어 미쳐버린 것인가?

진은 후자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환상이다. 진은 자신이 환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 환상은 입을 열어 말하기까지 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음에도 그 말에 진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두려움도.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녀가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을.

“진, 진! 괜찮아요? 진!”

그리고 세상이 되돌아왔다. 진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라, 라르가?”

“진, 정신이 들어요? 다행이다. 죽은 줄 알았다고요. 당신.”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이 정신을 잃은 채 이쪽으로 날아왔어요. 내가 받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 거라고요.”

진은 슬쩍 시선을 돌려 이곳이 라르가가 있던 목책임을 깨달았다. 어쨌든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제대로 방향을 잡아 날아온 듯했다.

“어쨌든 다행이군. 안 그래도 널 찾아온 거거든.”

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기절할 듯한 두통을 느끼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라르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이 몸으로 왜 여기까지 온 건데요? 뭘 어떻게 하려고요. 죽을뻔 하면서까지 또 도망치라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진은 잠시 고통을 삭이고는 되물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당신이 도망치라고 말하니까요.”

“그게 네겐 최선이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달라고.”

“당신은 당신이 죽는다 해도 아쉽지 않나요? 이 마을의, 아무 잘못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물들에게 살해된다 해도 상관없나요? 진, 당신이야 말로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리는 건데요?”

“젠장, 이봐 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도 난 포기한 게 아니야. 비웃을까봐 말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비웃어요? 뭘?”

라르가의 되물음에 진은 머뭇거렷다.

“난···, 설명할 수 없어. 못하겠어.”

“네?”

“이번엔 반드시 성공할 것 같았다고. 별로 근거 없는 생각이지만 그럴 것 같았어.”

“대체 뭘 말하는 거예요?”

“이거.”

진은 떨리는 손으로 옷을 펼쳐 안쪽 주머니를 가리켜 보았다.

라르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게 뭔지 깨닫고는 말했다.

“부작용 포션?”


***


“어렵군.”

목책 위에 남아 적들과 싸우던 티란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20년의 오랜 용병생활 중 한 손에 꼽을 만큼, 아니 가장 어렵다 말해도 좋을 만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아군을 독려해 줄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라르가와 천명이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숫자는 줄어든 것 같지 않았고 아군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은 이 상황을 뒤바꿀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기적에 가까운 뭔가가 일어난다면 모를 일이지만.

티란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자조했다. 기적을 바라다니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세상에 요행이란 없다는 것이 티란의 지론이 아니었던가? 기적이란 의미 그대로의 기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단지 상대의 능력이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나 기적이라는 말로 그 결과물을 깎아내리곤 하는 것이다.

촤악!

티란은 마주한 적을 베어버리다가 문득 시야 한곳을 스쳐가는 뭔가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었다. 누군가가 방책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티란은 의아해 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라르가가 하늘을 날아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라르가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라르가는 이제까지 버텨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다 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가?”

그리고 그 짧은 동요는 이런 전투중에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키에에!”

티란은 자신의 좌측에 마물이 나타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티란은 황급히 몸을 비틀어 마물의 발톱에 허리가 찢어지는 것을 간신히 피했지만 역수로 날아오는 녀석의 다음 공격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퍼억!

티란의 몸이 한참동안 허공을 날아 땅에 떨어졌다. 다행히 목책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티란은 순간 고통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캬악!”

티란을 공격한 마물이 곧바로 티란을 뒤쫓아 와 앞발을 치켜들었다.

티란은 간신히 칼을 들어 올렸지만 이런 어설픈 방어로 마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이런 곳에서 죽게 되는가?

티란은 오늘 처음으로 체념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화악!

그때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엄청나게 강렬한 빛이 마물들이 모여 있는 목책 바깥쪽에서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놀란 마물이 주춤거렸다. 티란은 그 순간 빈틈을 발견하고 곧바로 들고있던 칼을 마물에게 내질렀다.

“크에엑!”

가슴을 찔린 마물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바람에 티란은 검을 놓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녀석은 가슴에 칼을 꽃은 채 균형을 잃고 목책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후아, 운이 좋았군.”

티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구한 불빛의 정체를 알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티란은 기적을 목격했다.


***


“뭐, 뭐야, 저건!”

유하만은 눈앞의 마물의 머리를 쪼개놓고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방책 너머가 대낮처럼 밝아졌던 것이다.

주변에서 싸우던 용병들과 마물들 또한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징후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방책 안쪽에서 싸우던 그들로서는 바깥쪽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뭐야? 바깥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지?”

유하만의 곁에 있던 용병이 다시 중얼거렸다.

“뭐, 좋은 쪽이겠지.”

유하만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눈앞의 마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되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잖아?”


***


시엘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진과 라르가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몰랐다.

몰랐기에 단지 기원했을 뿐이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그리고 아군이 저 마물들을 어떻게든 모두 물리칠 수 있기를.

목책 너머로 엄청난 빛줄기가 치솟아 올랐을 때, 시엘은 문득 확신했다.

자신의 기원이 이루어 졌음을 말이다.


***


천명의 인생은 이제껏 천명의 생각대로 돌아갔던 적이 많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대부분의 생애 동안 그는 대게 운이 없었고 대게 손해를 보는 쪽이었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다. 천명은 정말 운수도 사납게 사지로 들어와 사람들의 선두에서 적들을 막아서게 되었다. 아무리 천명이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지만 순식간에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명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불운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천명은 사내다웠고, 대범했다. 천의문의 식솔들은 그것이 천의문 후계자로서 천형을 물려받은 자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천명은 초연했다.

눈앞에서 터진 엄청난 빛줄기를 보았을 때도 천명은 그저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자신의 무공이 여기에서 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


아네드 마을 바깥의 한 나지막한 동산 위에 한 무리의 무장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다렌 정규군 레드버드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유적을 지키다 뒤늦게 마을을 구하러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보이고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누군가가 질문했다.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저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


“부작용 물약··· 이군.”

목책 위에 반쯤 누워있던 진이 중얼거렸다. 작렬하는 섬광이 목책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기뻐해야 하는 건가?”

진은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분명 진이 원했던 바니까.

터져 나온 빛은 마물들을 없애고 있었다. 여기에서 없앤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빛에 닿은 마물들은 마치 누군가 그 존재를 지워 없애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기중으로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단지 마물들뿐이었다. 주변의 초목과 인간에게는 아무 해도 주지 않은 채 그 빛은 마물만을 제거했다.

물론 그 빛에 닿지 않은 마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녀석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서로 짓밟고 물어뜯으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승리했다.

“우와아!”

어디선가 환성이 터져 나왔다.

무엇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도 이제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그 환성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네드 시 전체가 그 기쁨의 환성으로 가득 찼다.

단지 진만이 그 환성에서 동떨어져 있을 뿐.

분명 지금 상황에서는 응당 기뻐하는 게 맞았다. 그들은 승리했고 살아남았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살아남은 동료들을 돌아보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진은 고개를 돌려 도망치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듯한 느낌을 느끼며, 진은 그들을 동정했다.


작가의말

비가 약간 내려서 선선한 저녁이네요.

부족한 글 모두 즐겁게 보셨다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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