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두 눈이 감겨지고 의식이 사라져가는 느낌. 끔찍한 비명소리조차 그리워지는 고요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그 섬뜩함을, 난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피를 너무 흘려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무시해버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커...'
'베르. 넌 할 수 있어. 생각하자 생각해!'
'아니야 씨x. 나 같은 겁쟁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포기하자. 저 글씨들은 헛것인 거야.'
나는 내게만 보이는 푸른 글씨를 부정했다.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자 푸른 글씨는 내게 말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후보자님을 위해 10초 동안 공기를 차단합니다.]
"컥. 허흡...."
"뭐야? 어디 아파?"
가까이 있던 바우가 물었다.
"아...딸꾹질이 나와서요. 이제 괜찮습니다."
"...그딴 걸로 오버하지 마."
10초가 지나자,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무래도 푸른 글씨는, 나를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 난, 꼼짝없이 한 번 더 죽는 건가....'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잠깐! 이런 건 어떨까?'
'그럼 여기선 이렇게? 아니야, 좀 더 호감도에 주목을 해보자.'
'그렇다면 이건? 음...이거보다 좋은 방법은 없나?'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무언가 번뜩 떠올랐고, 나는 그것을 다듬었다.
"그만. 여기서 좀 쉬다 가지."
쉬지 않고 걸어가던 중, 라이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내 생각도 끝이 낫다.
"그래. 좀 쉬다 가자."
일행들은 모두 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와 바우는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가 생각해 낸 거라곤, 믿기지 않는 거짓말이 각본이 되어서 펼쳐지는 연극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한다.
내게 스킬이라고 자리 잡은, 저 허접한 것들이 정말 사용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기에 난 모자란 바우에게 시험 삼아 사용해 보았다.
'겁주기 사용'
"바우. 우린 전부 죽게 될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이시죠?"
"사람들이 쉬는 곳으로 가면 말해줄 테니까, 지팡이로 쓸만한 가지 하나 가져다줘. 시간이 없다."
[적마족 사냥꾼 바우가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알겠습니다."
'정말로 되잖아? 이딴 스킬들도 조금은 써먹을 곳이 있구나...'
바우는 내 말대로 크고 굵은 가지 하나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걸 지팡이 삼아 바우와 같이 적마족 무리가 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 녀석 뭐야? 혼자 걸을 수도 있잖아?"
"이봐. 혼자 걸을 수 있으면 진작에 걸었어야지. 우리 바우만 힘들었잖아."
"캬캬캬. 그런데 저 녀석은 왜 꿀 먹은 벙어리야? 창맛을 한번 더 봐야 하나?"
나는 저들의 조롱을 무시한 채. 무리의 리더인 라이언을 똑바로 응시하며 계속 걸어갔다.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나는 마족들의 시선이 무서워 겁을 먹어서 인지, 아니면 화살이 박혀있는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이 풀려서인지,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시선은 라이언에게서 때지 않았다.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오른팔로 엉덩이에 박힌 화살을 잡았고, 있는 힘껏 그것을 뽑아 버렸다.
그러자 엉덩이에선 새빨간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는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허벅지에 박혀있는 화살에도 손을 가져갔다.
"저, 저 녀석 지금 뭐하는거야?!"
"혼자서 자해라도 할 샘인가?"
아프다. 너무 아프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지금 당장에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쓰러질 수 없다. 지금 느껴지는 아픔과 고통을, 내 머리와 삐쩍 마른 육체에 새겨놓아야 했고, 저들이 나를 주목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생존기가 차근차근 시작되려 한다.
"니들은 이제 곧 죽을 거야."
나는 라이언을 마주 보고 입을 열었다.
"반말도 할 줄 알고 많이 마왕다워지셨군그래. 그런데 우리가 왜 죽는다는 거지? 네가 죽는다는 걸 잘못 말한 건가?"
라이언의 눈썹이 움직인다. 그는 매서운 시선으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갑자기 우리가 죽긴 왜 죽어!"
"피 좀 흘리더니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마인들이 큰소리치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나는, 저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화난 목소리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내 눈앞에는, 저들에겐 보이지 않는 푸른색 글씨가 써져있었으니까.
[겁을 상실한 용기]
-신체 능력이 5분 동안 30% 증가합니다.
무섭게 떨리던 다리가 조금은 진정되었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흘러내리던 피도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이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늘의 계시는 천사도 날 도와주시는 걸까. 이제 나에겐 조그마한 희망의 씨앗이 생겼고, 그 희망의 씨앗을 키우기 위한 행동을 할 차례다.
"잘 들어."
적마족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핏물이 흘러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겁주기를 사용한다.'
"지금 또 다른 마왕 후보가 무리를 이끌고 여기로 오고 있다. 나무들이 크고 많은 걸 보니 아마 고블린이나 오크, 아니면 다크엘프가 올 가능성도 있겠군."
내 말에 라이언을 제외한 적마족들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라이언이 내게 물었고, 나는 땅이 꺼지도록 절규했다.
"너희들은! 날 마왕 후보자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아무런 능력도 없을 거 같아? 나는 반인반마를 대표하는 후보자지만! 저들은 아니야. 저 새x들은 약해빠진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이후, 내 눈앞에는 여러 개의 푸른색 글씨들이 써 내려갔다.
[적마족 사냥꾼 바우가 한 번 더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추가로 감소합니다.]
[적마족 사냥꾼 로난이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적마족 사냥꾼 쿤이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3명이라...아쉽지만 괜찮아. 엄살을 발동한다.'
나는 지금 어릴 때 들었던 밤도깨비를 상상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고, 처음 이들을 만나 화살을 맞고 울부 짖었던 것처럼 목소리를 떨었다.
"너희는 모를 거야. 그 녀석들이 날 죽이기 위해 우리 마을을 어떻게 도륙했는지를, 날 지키기 위해 내 부모님이 어떻게 죽어가셨는지를, 그 녀석과 같은 마왕 후보자면서 약해빠진 나 자신을!! 혼신의 힘을 다한 주먹조차 닿지 않았을 때 느낀 그 절망감을.... 너희들은 절대 모르겠지...."
[적마족 사냥꾼 쿤이 불안해합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적마족 사냥꾼 바우가 불안해합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적마족 사냥꾼 로난이 불안해합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나도 모르게 죽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눈가가 붉어졌다. 마인들은 허수아비처럼 넋이 나간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저들을 하나하나 둘러 보고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겁주기 사용'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지금 오고 있는 녀석들이 우리 마을을 공격한 그 개새x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론 마왕 후보자들은 다들 강해! 곁에 있는 녀석들 또한 강하지. 너희가 얼마나 강할진, 나는 몰라.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쪽은 니들도 잘 알다시피 약해빠진 반인반마 후보자란 거야."
[적마족 사냥꾼 라이언이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적마족 사냥꾼 라툰이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적마족 사냥꾼 바우가 또다시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그는 당신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의 문턱을 넘나들 것입니다.]
[적마족 사냥꾼 로난이 한 번 더 겁에 질렸습니다. 능력치가 추가로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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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준비는 끝났다.
조그맣던 희망의 씨앗은 나의 기지와 고통을 양분 삼아 새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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