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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아 님의 서재입니다.

Six Bu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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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723X
작품등록일 :
2019.08.14 23:21
최근연재일 :
2019.11.23 20:01
연재수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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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추천수 :
3
글자수 :
25,346

작성
19.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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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4

DUMMY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라스틴이었다. 긴 돌계단을 더듬거리며 따라 내려와 이어진 곳이 광대한 카타콤이라는 사실과 지면에 발을 딛자마자 입구 양쪽에서 대기하던 남자들에게 붙잡혀 무릎 꿇린 상황에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미소를 띠고서 파엘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손대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글쎄, 내가 자네를 보고 싶은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나름 이 넓은 유럽 땅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계인데 말일세.”

“의지하는 방식이 과격하시네요.”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억센 손들을 흘긋 바라보며 라스틴이 말했다. 파엘로는 지하 굴 중심을 떠받치는 커다란 기둥 앞의 책상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간만에 얘기나 할까 해서 찾았네. 자네가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내가 보자고 불렀으면 안 왔을 것 아닌가. 자네 쪽 회선에 접근할 수 있는 계정을 빌렸지.”

“이런···상당히 난처하게 됐네요. 큰 제안을 기대하고 중요한 약속을 깨고 온 건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되네. 큰 건이라는 건 변함없으니.”


큰 건이라는 말에 라스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상황에 이어 대화의 주도권까지 가져온 파엘로는 한결 느긋해진 목소리로 서두를 꺼냈다.


“그래, 먼저 확인할 게 있지. 우리 애는 잘 있나?”

“글쎄요? 누구 말씀이신지?”

“벌써 잊어버렸나. 이거 섭섭하군···라벨라, 기억이 안 난다는군. 아무래도 자네 도움이 필요할 듯 한데.”


파엘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스틴의 등 뒤를 지키고 서있던 라벨라의 손이 부드럽게 라스틴의 목을 휘감았다. 동시에 잘 갈아진 손톱 끝이 그의 목을 긁어내렸다. 파고 들어갈 틈을, 온 몸의 핏줄과 이어진 두 줄기의 혈관이 지나가는 자리를 찾듯이. 말끔히 지워졌던 향수 냄새가 스멀스멀 다시 피어올랐다. 숨 막힐 정도로 짙고 달콤해서 한번 스며들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독의 향기가. 경동맥을 찾은 손톱이 살갗을 가볍게 누르자, 그제서야 라스틴은 입을 열었다. 손톱을 피하려 목을 살며시 뒤로 빼면서.


“아, 아. 기억났습니다. 무당거미 씨 말씀이신 거로군요?”


그가 능청을 떨며 뱉어낸 ‘무당거미’라는 단어에 라벨라는 손을 거둬들이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코드네임 무당거미. 스틸렛 최상위 암살팀 ‘거미조’의 총책이자, 스틸렛의 전 2인자. 공식적으로 알려진 마지막 행선지는 영국의 어느 섬이었고,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럽 어느 조직에도 알려지지 않은 잠적. 그 배후에 에스파돈, 정확히는 라스틴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자네 책임인데?”

“좋을 대로 저희에게 떠넘기시고는 너무하신걸요?”

“글쎄···그 아이를 어느 조직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안전하게 숨기고 정기적으로 살핀다. 그걸 조건으로 ‘계약’을 맺지 않았나. 뭐, 그게 싫다면···어쩔 텐가?”


유럽의 뒷세계를 좌우하는 조직들 중, 에스파돈은 무력이 없었다. 유럽 전역의 정보를 쥐고있는 해커조직이었기에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조직은 없었다. 달리 말하면, 에스파돈은 언제든 다른 조직에 흡수될 위험을 안은 채였다. 그걸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견제하던 게 스틸렛이었다. 파엘로의 말은 그 처지를 이용하기 위해 던진 서두였고, 라스틴은 그걸 잘 알았다.


“안전하게 잘 계십니다. 모스크바, 그것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크렘린궁 턱밑에 계시니, 아무리 정신나간 조직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생각은 못 하겠지요.”

“공작이 알고 있던데?”

“이런, 왕실 첩보부에서 정보를 얻었나 보군요.”

“그 정보는 인터폴에서 넘어갔겠지?”


이미 알고 물어보는 질문에 라스틴은 그저 빙글거리는 미소만 띄우고 있었다. 아직 날카롭게 선 라벨라의 손톱이 한 발짝 뒤에서 그를 노리고 있었으니 더더욱 허튼 말은 할 수 없었으리라.


“이런···우리를 못 믿는 겐가?”

“그럴 리가요. 다만 이탈리아가 다소 멀어서 말이죠.”

“이 정도면 계약 위반이라고 봐도 되겠나?”

“에이, 그건 좀 너무하신 것 같은데요. 우리도 살 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치도 겁먹지 않은 척 태연자약한 라스틴을 보고 파엘로는 웃으며 라스틴을 내리누르고 있던 부하들에게 그를 풀어주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직접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주었다.


“그러면 우리 계약에 조건 하나를 추가해야 할 듯 한데, 그건 괜찮은가?”

“그냥 의뢰로 처리하시면 될 것을 너무 번거로운 방법을 쓰셨군요.”

“그냥 의뢰가 아니니 그렇지.”


내내 여유를 보이던 파엘로의 목소리가 일순 낮아져 카타콤의 개미굴을 따라 울려나갔다. 본격적인 일 얘기는 여기부터라는 것일까.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가 인터폴과 우리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네. 알고도 놔둔 건 자네가 말했다시피 자네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인 걸 알았기 때문이야.”

“뭐, 그러실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그래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줄을 선택해야 될 때가 온 게지. 나랑 같이 말이야.”

“그게 무슨···”

“공작에게 일을 받았네. 정보를 얻어 달라더군”

“예? 웬만한 정보는 왕실에서 받지 않던가요?”

“왕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일이라더군. 이미 공작의 정보원도 왕가 쪽 용병에게 당한 모양이고.”

“가만히 있을 공작이 아니잖습니까? 왕가는 이미 장악했을 텐데요.”

“왕실에서 다른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달리 보자면 왕실에서 편히 부릴 수 있는 수족을 포기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일 테고.”


이야기를 듣는 라스틴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제블린 가는 영국 왕실을 등에 업고 유럽 뒷세계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조직이자, 영국 최고의 실력자 가문이었다.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영지가 없음에도 음지에서 연합왕국의 왕관을 수호하는 일로 공작위를 하사받고, 상원을 필두로 하원까지 전 의회를 장악한 무서운 세력이었다. 그런 가문이 왕실과 적대관계로 돌아선다는 것은 전 유럽의 뒷세계 세력 판도가 변할 거라는 확정적인 신호였다. 파엘로가 겨냥한 것이 이 지점이었다. 인터폴과의 불편한 공생을 계속할지, 필연적으로 흔들릴 판에 도박을 걸어볼 것인지.


“···일단 일 내용을 들어보고 정하죠. 무슨 일입니까?”

“내용 자체는 특별할 건 없었네. 유럽 본토 지하의 상세한 도면을 원하더군. 지하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적당한 자리를 찾는 것인지···”

“군사 목적의 시설을 건설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공작가 정도의 규모라면···”

“그런 거라면 왕실의 지원을 받아서 영국에 짓는 게 낫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군요···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본토라고 했으니 러시아도 포함하지 않겠나. 자네에겐 다소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그거야 뭐 이미···도면의 종류는요?”

“본토 지하로 지나가는 모든 걸 원하던데.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건지···”

“그 정도면 정부기관만 털어내면 되겠군요.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기한은요?”

“한 달. 어때, 할 수 있겠나?”

“빡빡하긴 하지만요. 대신, 넘겨드리는 건 제 판단이 섰을 때로 하죠. 어떤가요?”

“그렇게 하지. 판단이 빨리 서길 바라네.”


그러고서 파엘로는 라벨라에게 눈짓을 했다. 라스틴을 위로 돌려보내라는 의미였다. 라벨라는 ‘가실까요?’라고 묻는 듯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고, 라스틴은 화답하듯 손을 얹었다. 그대로 그들은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로 향했다.

*

긴 계단을 다시 걸어올라오자 어느새 밤이 짙게 깔려 있었다. 창백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있는 골목 어귀까지 라스틴을 안내한 뒤 라벨라는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조만간 다시 보겠네?”

“그땐 저희 쪽에서 정중히 모시지요. 그럼, 또 뵙죠.”


가볍게 인사를 받은 후 라스틴은 가로등 불빛 저 너머로 걸어갔다. 라벨라는 한동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돌아서서 어디론가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어, 녹센. 나야. 중요한 일이야. 지금 당장.”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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