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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입니다.

이웃집 그 시인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작가돌
작품등록일 :
2021.10.23 23:47
최근연재일 :
2021.10.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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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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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1.10.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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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3화

DUMMY

(사라)"저기 그것 좀 어떻게 해줄래요?”

사라가 시우의 맨몸을 가리켰다.

뭐 보기에는 좋다만, 그래도 부끄러워서 대화가 되겠냐고.

(시우)"너 뭐냐고. 왜 내 집에서 이래라 저래라야?”

왜 이 남자가 여기 있는 거지?

사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확인라도 하듯 집 쪽을 돌아봤다.

(사라)"혹시 여기 살아요?”

검고 윤기나는 목재와 고풍스러운 벽돌로 치장한 2층집.

그걸 말해줘야 아냐는 시우의 험상궃은 표정.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천재 시인이 1층에 산다니.

그것도 ‘얼굴’ 천재 시인이.

영화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설 같다고 해야 하나.

낭만적 우연을 맞이한 사라는 이상야릇한 기대와 흥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시우란 인간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시우)"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뭐냐고 너.”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시우가 상체를 숙였다.

갑자기 밀고 들어온 시우의 얼굴은 수려하다 못해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사라는 멍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만 봤다.

(시우)"어이, 정신 좀 차리지.”

시우가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불쾌한 바람에 사라가 인상을 지푸렸다.

(사라)"오늘 2층에 이사오기로 돼있는데, 못 들었어요?”

(시우)"더위 먹었어? 세를 낸 적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이사를 와?”

뭐지 좀 무례한데.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시우의 태도에 사라는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해를 따라 그림자가 사라졌다.

한 여름 아스팔트처럼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시우)”야 대답 안 하냐고.”

시우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갑자기 잊고 있던 일을 기억한 사람처럼 사라가 벌떡 일어섰다.

(시우)“뭐야 갑자기?”

(사라)“말이 좀 짧다?”

(시우)“뭐”

(사라)“어따대고 초면에 반말이야.”

그랬다.

어린 걸 떠나 애든 어른이든 초면에 ‘요자’부터 빼고 시작하면 나사라는 가만 있지 않는다.

(사라)"죽을래?”

모퉁이를 돌다 사나운 개라도 만난 사람처럼 시우가 작게 움찔거렸다.

죽을래, 라고 말하는 사라의 표정은 정말 개 같았다.

그렇다고 시우가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시우)"난 나보다 동안인 줄 알았는지.”

시우가 그늘이 사라진 나무를 올려봤다.

(시우)"이제 보니깐 그늘 때문에 몰랐네.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얼굴이었어.”

이 새끼가 입만 살아가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라가 앞으로 걸어나오려 했다.

그러자 두손을 올리며 시우가 사라를 막았다.

(시우)"워워.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난 저기 세 준 적 없다고.”

그 말에 사라가 씩씩대며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아빠가 건네준 계약서였다.

(사라)"자 봐. 주소 여기 맞지?

눈을 치켜 뜬 시우가 주소를 쳐다봤다.

(사라)“여기 있는 게 나한준, 우리 아빠 이름이고, 여기 이윤슬, 이 사람이 임대인이고.”

이윤슬

그 이름에서 시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왜 거기서 튀어나오는지,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사라)"우리 아빠 아직 치매 올 나이 아니거든. 근데 계약서는 있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래?”

(시우)"이리 줘봐.”

다짜고짜 시우가 계약서를 낚아챘다.

어디 한 번 반박해보란 태도로 사라는 묵묵히 시우를 지켜봤다.

계약서를 읽어내려 갈수록 시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종이를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시우)"이게 정말 너희 아빠가 준 계약서라는 거지?”

(사라)"보고도 못 믿어? 임차인, 임대인 모두 싸인까지 해잖아.”

계약서 맨 밑에 휘갈긴 글씨로 분명 나한준, 이윤슬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위조할 한가한 사기꾼이 있을 리도 없고

이쯤 되면 수궁하겠지 싶었는데 순간 시우가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사라)"야! 뭐하는 짓이야.”

사라가 시우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계약서는 조각조각난 종이 쪼가리에 불가했다.

시우는 그 종이를 뭉쳐 툭 내던졌다.

공모양으로 뭉쳐진 계약서가 힘없이 사라 앞으로 굴러왔다.

사라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생명체는 도대체 뭘까.

이 상황에선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화조차 내지 못하는 사라를 보며 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우)"올라갈 생각 말고 여기 딱 붙어있어.”

시우에겐 사라의 기분이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무시한 채 그늘 밖으로 나간 시우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리가 오갔다.

멀리서 바라본 시우의 모습은 마치 엄마에게 떼쓰는 아이 같았다.

사라의 눈엔 그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다.


***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누나누나’거리는 걸로 보아 지금 통화하는 사람은 시우의 누나였다.

(시우)"누나, 정말 이럴 거야. 진짜 왜 그래.”

이윤슬.

계약을 한 당사자다.

그리고 시우의 입에서 법적 소유자란 말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집의 실질적 소유자는 누나인 이윤슬이란 얘기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2층에 올라가지 못할 이유가 사라에겐 없다는 것.

저 막대먹은 자식이 계약서를 찢긴 했어도 법은 그리 나약하지 않다.

저 따위가 엎을 만큼.

여긴 계약 기간까지 내 집이야 이 자식아.

시우가 전화에 정신이 팔린 동안 사라는 슬금슬금 계단으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쏜살같이 올라가 2층에 입성

그리고 문을 잠가버릴 생각이었다.

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운동선수였던 엄마의 길고 탄력적인 기럭지를 물려받았고

싸움은 못해도 도망만 다닌다면 아프리카 초원에서도 살아남는다는 아빠의 딸이었다.

주걱 든 엄마에 붙잡힌 적은 있어도 다른 누구한테도 잡힌 적이 없었다.

심지어 술 먹고 고성방가 지르다가 경찰이 쫓아올 때도.

어느 정도 거리와 각이 잡히자 사라는 슬슬 시동을 걸었다.

인간 탄환처럼 허리를 숙인 뒤 폭발적으로 가속해 계단에 다다랐다.

첫 발을 계단에 내딛고 마음 속으로 승리를 노래했다.

그때 독수리 같은 손이 목덜미를 낚아챘다.

(시우)"이게 어딜 올라가려고.”

자습 튀다 걸린 학생처럼 사라가 움츠러들었다.

이상하게 태도는 공손히.


(사라)"좀 빠르시네요. 육상 선수 출신이가?”

쭈볐쭈뼛 눈치를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사라)"아니, 톡 까놓고 얘기해서 법적으로 내가 저기 못 올라갈 이유가 없잖아. 통화 대충 들어보니 너 혼자 떼쓰는 거 같은데. 그냥 올려보내주지?”

그 말이 거슬렸던지 목덜미의 압박이 거세졌다.

(사라)"아, 아프잖아.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이것도 엄연히 폭력인데?”

(시우)"법이든 뭐든 저 방에 사람 둘 생각 없으니까, 나가. 내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는 거야.”


말을 끝내기 무섭게 시우가 사라를 끌어내려했다.

이 새끼가 정말.

이대로 끌려 나가면 이 놈 성격상 재진입은 불가다.

무슨 헌신짝도 아니고 하루에 두 번 버려지냔 말이다.

사라는 양쪽 난간을 붙잡고 버텼다.

(사라)"죽어도 못 나가. 아니 안 나가. 내가 왜 나가. 난 잘못 한 게 없다고!”

사라가 저항할수록 시우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붙잡은 옷깃이 고무줄 마냥 쭈욱 늘어나 있었다.

(시우)"도대체 왜! 집이 여기 하나야? 널린 게 집인데 왜? 위약금 준다니까.”

(사라)"그러는 넌 왜 그러냐. 법적으로 문제 없고 떼 쓰는 건 너잖아. 내가 여자여서 그래?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 너 나 알지도 못하잖아.”


시우는 말로 해선 안되겠다 싶어 모든 힘을 쥐어짰다.

사라의 얼굴이 검붉다 못해 혈압이 오를대로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쫓겨나는 건 둘째치고 송장으로 실려 나갈 판이다.

사라가 다급하게 돌아섰다.

갑작스러운 턴에 시우가 주춤했다.

사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자기가 어딜 찬 건지 알아볼 시간도 없었다.

예전에 엄마도 아빠의 그곳을 찬 적이 있다고 했다.

순전히 실수였다고 하는데 엄마는 그렇게 아파할 줄 몰랐다고 했다.

그 뒤로 아빠는 엄마가 발이라도 들라치면 반사적으로 그곳에 손이 갔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며 무척 미안해했다.

그때는 그냥 딸들 재밌으라고 한 말인 줄 알았지

막상 차보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사실 일부러 차려던 건 아니었다.

정강이를 걷어 찰 생각이었다.

그런데 들어올린 발의 높이와 사라가 올라선 계단의 높이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게 문제였다.

그 두 높이의 합이 바로 시우의 그곳 높이였다.

샌들 밖으로 드러난 맨살이 물컹한 무엇에 닿았을 때 사라는 아차 싶었다.

망했다.

처음에 정말 평온해보였다.

그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직감한 듯했고

아주 짧은 순간 뒤이어 찾아올 고통에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생각지 못한 일결을 맞은 시우는 그대로 나뒹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창백해진 얼굴과 원망, 공포의 눈빛만이 고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라)"괜찮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허리를 좀 쳐줘야 한다며? 도와줘?”


시우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그곳을 걷어차인 순간 시우의 의식은 몇 차원을 뛰어넘고 있었다.

잠깐잠깐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얼굴은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얼굴로 욕한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

119라도 불러야 하나 사라가 발을 동동거릴 때 누군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너 진짜 누나한테 이럴래. 어떻게 하는 짓이 지 조카만도···”

분노의 느낌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얼굴에 떠오른 당황의 물음표.

정황상 시우의 누나일텐데

사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처했다.

하지만 설명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여자는 이미 스스로 답을 내린 뒤였다.

쓰러져 있는 시우를 한번, 다시 모습이 엉망만인 사라를 한번.

분노의 느낌표가 다시 여자의 얼굴에 드리웠다.

“너 이 자식!”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문구가 적힌 돌을 밟고 도약한 여자는 가장 아픈 약점을 걷어차인 동생 위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성난 고릴라가 양 손을 내리찍듯이 사정없이 손을 내리쳤다.

동글동글하고 곰돌이 같은 인상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자)“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시우)"누나 갑자기 왜 그래. 좀 내려가 나 아프다고.”

뭐야. 이 너튜브에 올리려고 각 잡는 듯한 상황은.

비현실적으로 벌어진 일에 사라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 꼴을 확인했다.

시우 때문에 늘어진 넥카라에, 그 때문에 드러난 쇄골과 어깨.

얼굴을 시뻘겋고 목엔 졸린 자국이 선명했다.

거기에 거기를 붙잡고 신음하는 동생까지.

이건 누가 봐도 아주 불결하고 폭력적인 상황이었다.

황급히 달려간 사라가 윤슬을 붙잡고 말렸다.

(사라)"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

일촉즉발.

경찰까지 불렀으면 어찌 됐을지.

누가 보아도 성범죄 현장인데 사실 그게 올라가네 마네 하면서 벌어진 다 큰 남녀의 시트콤이었다니.

설명을 하는 사라도 어이가 없어서 설명하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뒤에도 윤슬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혼자 지진 난 땅에 발 올린 사람처럼 떨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조금씩 잦아드는 게 보였다.

하, 하고 다짐하듯 숨을 내뱉은 윤슬은 그대로 시우에게 다가갔다.

찰싹.

시우의 등짝에 선명한 손자국이 그려졌다.

(윤슬)“들어가줄래.”

몸에 묻은 흙을 털며 시우가 일어났다.

그곳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엉거주춤 다리를 꼬았다.

덜덜덜 다리를 떠는 폼이 귀공자 같은 시우에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말았다.

(시우)“글쎄 난 저 물건 들일 생각 없다니까.”

(윤슬)“제발 좀! 누나 피곤하니까 좀 들어가줘.”

지친 기색의 윤슬이 애원하는 얼굴로 시우에게 부탁했다.

역시 방금 전 보여줬던 난폭한 모습은 분노에 의한 일시적 일탈에 지나지 않았다.

강압보단 부탁을 신경질보단 웃음을 보이는게 동생에게 약한 윤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저래 가지고 어디 동생이 말을 들을까.

과연 시우가 들어갈지 사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봤다.

시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누나를 노려봤다.

순순히 들어갈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망했네.

누나라고 별 수 없구나.

이대로 시우의 고집 때문에 나가야 하나 단념할 때쯤 시우가 입을 삐죽 내밀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동안 윤슬이 한 것이라곤 ‘너 자꾸 이러면 언니한테 말한다’라고 읍소한 것뿐이었다.

언니? 그럼 누나가 또 있다는 말인가?


시우의 또다른 누나에 대한 궁금증을 갖으며 사라는 자기 에게 걸어오는 윤슬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사라 앞에 멈춰선 윤슬의 얼굴은 꽤 심각했다.

(윤슬)“하, 미안해요. 잠깐 숨 좀 쉬고.”

윤슬이 심호흡을 반복했다.

무거운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듯 심각했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윤슬)“화도 잘 못내는 주제에 한 번 화나면 흥분을 못 가라앉혀서요. 이제 좀 낫네.”

두 팔을 벌린 윤슬이 신선한 공기를 한 껏 들이켰다.

그러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윤슬)“이 윤슬이라고 해요. 집 주인이자 둘째 누나.”

윤슬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평상심을 되찾은 윤슬은 시우와는 전혀달랐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남매 맞냐 싶을 정도였다.

시우가 늑대라면 윤슬은 곰돌이?

처음 보자마자 온화하고 온순하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세상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은 사람.

무엇 보다 시우의 누나라기엔 좀 나이가 많아 보인다곤 할까.

근데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악수를 마친 사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라)“오늘 이사 와도 괜찮은 거죠?”

윤슬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윤슬)“계약했잖아요. 이제부터 2년 동안 사라씨 집이에요.”

펄쩍 뛰어오른 사라가 예스, 라고 외쳤다.

(윤슬)“사실 저 녀석 때문에 벌써 몇 번 계약 파기했거든요. 그래서 사라씨도 계약 파기해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죠.”

(사라)“이만한 집을 그 정도 월세에 어떻게 구해요. 전 절대 못 나갑니다.”

(윤슬)“근데 정말 괜찮겠어요? 쟤 보기보다 만만치 않은데.”

(사라)“걱정마세요. 저도 한 고집하거든요.”

사라의 씩씩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윤슬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라)“동생 분이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거에요? 혹시 제가 뭘 잘못이라도···”

사라가 시무룩해지자 윤슬이 손사레를 쳤다.

(윤슬)“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정우가 아직 어른이 덜 돼서 그래요. 가족 말고 누구랑 이 집에서 같이 있어 본 적이 없거든요.”

정우?

시우란 이름은 필명인가 보구나.

(윤슬)“제가 잘 타이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혹시 우리 정우 알아요?”


뭐지?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사라는 혼란스러웠다.

어제 일을 얘기하자니 편의점에서 술 먹고 자빠져 잔 게 부끄러웠다.


천재 시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뭔가 떳떳하지 않았고.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사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라)“아니요. 오늘 처음 봤는걸요.”

(윤슬)“그래요? 시우는 뭔가 아는 눈치여서.”

(사라)“그럴리가요. 오늘 처음 봤는데.”

(윤슬)“아까 들어가면서 ‘저런 잡스러운 물건이랑 두 번이나 엮이다니.’뭐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 같던데.”

혓바닥을 귀엽게 내민 윤슬이 해맑게 웃었다.

이 언니 뭐지.

굉장히 무례한 얘기를 ‘어머 정말 예쁘네요.’라고 말하듯 말하네.

(사라)“잘못 들으셨을 거에요. 흥분하셔서.”

(윤슬)“그런가. 어쨌든 이사 첫 날이니까 올라가서 푹 쉬어요.”

윤슬은 먼저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가볍게 목인사를 건넨 사라는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시우가 했다는 그 얘기가 어른거렸다.

잡스러운 것 잡스러운 것 잡스러운 것

그녀의 손에 붙들린 캐리어가 유난스럽게 달그락거렸다.

당장이라도 시우의 면상에 던지고 싶을 만큼.

개자식.

구해준 거 하나도 안 고맙다.

잘생기면 다냐.

인성이 쓰레기인데.

***

2층 실내는 외관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웠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안쪽까지 벽돌이라 클래식한 느낌이었고 게단식 구조로 나뉘어진 침실과 거실이 마치 아지트 같았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건 벽난로였다.

뭔가 범상치 않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벽난로라니.

완전 이국적이고 낭만적이잖아.

벽난로 안으로 머리를 넣어보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있어보이는 척, 폼을 잡기도 했다.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온 듯 기대감을 품고서.

커튼을 걷어내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창 밖으로 몸을 숙인 사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집은 아랫마을과 윗마을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뒷산을 개발해 만들어진 곳이라 산중턱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랫마을은 물론 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숨을 크게 들이시면 가슴이 뻥뚫릴 것만 같았다.

미세먼지는 논외로 하고.

창가에 걸터 앉아 다시 내부를 둘러보는데 1층부터 나 있는 나무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곳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시였다.

그놈이 쓴 건가?

사라는 천천히 시를 읽어내려갔다.


너무 깊은 뿌리에 다가가

다치지 않으면 좋으련만

불안을 달랠 길 없는 나는

말 끝에 홀로 선다.

당신이 한 말을 담아

혼자 속삭여야지

-아빠

그리고 그 옆

삐뚤빼뚤 조악한 글씨의 시 한편.


아빠와 나

아빠가 시를 쓰고

나도 시를 쓴다.

아빠가 쓴 시를 따라

나도 써야지.

-아들


고사리 손으로 뭐라도 써보겠다며 아빠를 졸랐을 시우.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아빠를 쳐다봤을 똘망한 눈

그런 눈을 한 어린 시우가 사라는 무척 귀여웠다.

이 글자만 봐도 귀여움이 샘솟는데.

하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사라는 대 자로 자빠졌다.

시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앞날이 막막했다.

윤슬에겐 자신만만하게 말하긴 했어도 마음 한 켠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 지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싫어하는데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무엇보다 지난밤 시우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그 사실.

목숨을 빚진 채무감 때문인지 가시방석에 누운 기분이다.

아 모르겠다.

사라가 머리를 헝클이며 눈을 감았다.

휴일 오후의 나른한 햇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따쓰한 품에 안기듯 낮잠에 빠지려 하는데 문밖에서 누군가 사라를 불렀다.

시우였다.

(시우)“야 2층. 할 말 있으니까 내려와바.”

퉁명스럽고 거친 목소리.

저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소매를 걷어붙인 사라는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성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간 뒤 팔짱을 낀 채 시우 앞에 섰다.

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 나뭇잎 떨리는 소리가 어색한 거리를 메웠다.

(사라)“아깐 미안했다. 그래서 나와줬고. 근데 이번이 마지막이야. 부른다고 나오는 건. 용건이 뭔데?”

아까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시우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애써 화를 참고 있었다.

(시우)“제 발로 나갈 생각 없지?”

(사라)“없는데?”

(시우)“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안 나가고 버티는 이유가 뭐야? 여긴 우리 집이니 내가 나갈 일은 없고, 껄끄러운 사람이랑 굳이 살 이유도 없잖아?”

(사라)“뭐 네 말도 일리가 있어. 근데 오늘 당장 갈 곳도 없고, 집 구하기도 귀찮고.”

사라가 집 주변을 돌아봤다.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은 아주 아름다운 집이었다.

이런 집에서 누가 나가고 싶겠어.

(사라)“그리고···”

그리고···

며칠 살아보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나가주겠다고.

그렇게 말할까 싶었는데 결국 사라는 입을 다물었다.

놈이 좋아할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시우)“그리고 뭐?”

(사라)“아니야. 뭐 어쨌든 난 이 집이 좋아서 나가기 싫다고.”

시우의 손이 천천히 말려들어갔다.

주먹 쥔 손에 핏대가 곤두섰다.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시우가 말했다.

(시우)“그래 좋아.

(사라)“뭐가?”

(시우)“내가 한 달 안에 네 발로 걸어나가게 해줄게.”

(사라)“뭐?”

거만하고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손가락 한 번 팅기면 널 내보내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짜증이 난다.

암을 유발하는 게 캐릭터인가.

왜 이리 끈질겨.

(시우)“난 정말 저곳에 나 말고 누군가 있는 게 미친듯이 싫어. 거기다 너 같은 사람 2층에 끼고 살 생각은 더더욱 없어. 매일 술 먹고 들어와서 얼마나 설쳐되겠어.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꺼져. 이 알코올 중독자야.”

그 말만 남기고 시우는 대문으로 걸어갔다.

꺼져···

이 알코올 중독자야···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잖아 그건.

몸이 점점 달아오른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준 말이 있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외가를 말하는 거야) 집안 내력 같은 게 있어.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자, 네 심장 소리를 느껴봐.”

엄마는 손수 사라의 손을 붙잡고 심장에 갖다댔다.

“불의를 보거나, 못마땅한 대우를 받을 때 우리는 무척 고요해져. 차분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발을 내딛지. 너도 그렇지 않았니? 무척 편안했지?”

정말 그랬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같은 반 학생을 폭행하는 교장의 딸과 그 무리들.

자포자기한 듯 거의 식물 같은 얼굴을 한 피해 학생.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사라의 가슴은 참 잔잔했다.

그 고요함 때문에 사라는 망설임 없이 달려나갈 수 있었다.

휴···

뜨겁게 불어오던 바람이 점점 가라앉고 요동치던 사라의 가슴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 내 시간이야.

대문을 막 나서려는 시우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시우가 돌아봤다.

예상치 않은 상황이라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사라는 있는 힘껏 시우를 밀쳤다.

조마조마한 거리까지 좁혀 벽에 기댄 시우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살의 떨림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전에 없던 생기와 싱그러움이 사라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당황한 시우를 비웃듯 파릇한 풀처럼 사라가 미소 지었다.

(사라)“사과해.”

(시우)“뭐?”

(사라)“나한테 함부로 한 거 사과하라고. 네가 구해준 건 고마운데 너한테 그런 대우 받을 만큼 밑진 거 없어. 네가 뭘 안다고 알코올 중독자라고 지껄여.”

시우가 풋,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는 것이었다.

(시우)“그럴 생각 없다면?”

(사라)“정도껏 하지? 너 같은 자식 한 두 번 겪는 거 아니야. 시크한 척, 위협적인 척, 나쁜 남자인 척 혼자 다하지? 근데 어쩌나 사람 잘못 건드렸네. 난 알거든. 그 가면 벗기면 뭐가 나오는지.”

시우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꿀꺽하는 소리가 조마조마하게 들렸다.

조금만 움직이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이 여자 뭐 하자는 거야.

(사라)“한 달 안에 집을 나가게 해주겠다고? 그럼 나도 내기 하나 하자. 한 달 안에 나한테 사과하게 만들어줄게.”

침묵.

바람 소리 이외에 들리는 거라곤 서로의 숨소리 뿐이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장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제압했다 생각될 때쯤 시우가 그 아슬아슬한 거리를 위태롭게 좁혔다.

이젠 살이 아니라 입이 닿기 일보직전이었다.

어젯밤 시우가 풍겼던 아카시아향이 그 사이를 타고 넘어왔다.

이 자식 뭐야. 왜 이래.

해보자는 거야?

시우의 반격에 당황하긴 했어도 사라 역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시우)“좋아. 어디 한 번 해봐. 네가 이 집에서 나가나 내가 사과를 먼저 하나.

서로를 노려보는 얼굴이 제법 매서웠다.

누구도 불러서지 않았다.

둘이 마주보며 생긴 깊고 큰 골 사이로 바람이 분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어디로 불어가는지 모를 바람이.


******

에필로그

몇 십 분 전.

사라가 2층 방에 들어가고 윤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마당에 놓인 벤치에 앉은 윤슬은 긴장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윤슬)“어떻게든 들어갔어. 시우가 난리치긴 했는데 그 여자도 보통내기가 아니더라.”


지금까지 일었던 일은 천천히 설명했다.

생떼에 가깝게 난리를 쳤던 시우.

그걸 걷어차버린 2층 여자.

설명이 끝나갈수록 윤슬의 목소리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윤슬)“근데 언니. 정말 이래도 될까. 시우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전화기 멀리서 한숨소리가 낮게 울렸다.

“윤슬아. 넌 그게 문제야. 너무 물러. 언제까지 감싸고 돌 거야. 중요한 것만 생각해. 우리가 뭘 해야하는지도.”

(윤슬)“그래도··· 이건 좀 폭력적인 거 같아서.”

“우리도 해볼 만큼 해봤어. 아빠도 원하실 거고. 이렇게라도 안 하면 시우는 병들어 갈 거야. 지금 시우한테 필요한 건 우리가 아니라고.”

윤슬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울지말고 이 년아. 애들이나 데리러 가. 레스토랑 예약해뒀으니까 맛난 것도 좀 먹고.”

(윤슬)“알았어. 퇴근하면 다시 얘기하자.”

“그래.”

전화를 끊고 윤슬은 묘비 쪽으로 걸어가 힘없이 주저 앉았다.

몸을 움크린 모습이 자식 잃은 엄마처럼 슬퍼보였다.

한참인가 묘비를 지켜보고는 묘비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윤슬)“아빠, 우리 시우 지켜줘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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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그 시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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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화 21.10.24 12 0 21쪽
1 당신이 왜 이 시점에서 나오는 건데 21.10.23 17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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