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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입니다.

이웃집 그 시인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작가돌
작품등록일 :
2021.10.23 23:47
최근연재일 :
2021.10.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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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06

작성
21.10.2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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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화

DUMMY

이름 이시우

나이 25세

직업 시인

그냥 시인도 아니고 전업시인.

오로시 시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단 뜻이다.(이젠 시를 안 써도 먹고 사는 수준이 됐지만)

스무살 때 이미 그 나이에 찍히기 어려운 숫자를 통장에 갖고 있었다.

국내 유수의 시상을 휩쓸고 상금을 꽤 쌓은 덕분이었다.

그 돈이면 놀고 먹고 탱자탱자까진 아니어도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프랑스 문학 협회 월계시상을 수상한 후엔 적어도 3대는 먹고 살 수 있게 됐지만.

노벨문학상과 함께 3대 시문학상이란 타이틀이 컸다.

시 안 읽는 시대에 시집은 날개돋인 듯 팔리고 이시우 의 시로 노래를 만들고 싶단 전화가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그런 이시우가 사건 순간에 창고에 있었던 건 순전히 둘째 누나 때문이다.

둘째 누나는 아랫마을이라 불리는 상현1동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알바생이 탈주할 때마다 시우를 땜방으로 쓰곤 했는데 그건 시우가 월계시상을 수상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좋아 역대급 천재 시인이지 둘째 누나에겐 그저 열다섯살 차이 나는, 자식 같은 동생일 뿐.

게다가 시를 쓰지 않을 땐 백수나 다름없으니 누가 그 좋은 일꾼을 가만둘 리 없었다.

첫째든 둘째든, 누나들 앞에선 작아만졌기에 시우는 순순히

야간 점원은 자기 시간에 물건이 많이 들어온다며 연락도 없이 야반도주해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건 소주 열 짝, 맥주 십여 박스.

이 편의점은 술만 잘 나간다.

거기에 더해 각종 음료수 수십 상자.

상자더미가 끝을 알 수 없는 산처럼 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똥을 버리고 도망갔구나. 인간아.

시우는 이 산을 정녕 오늘 넘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소주 한 짝을 옮기고 냉장고에서 나오는데 밖이 좀 소란스러웠다.

창고와 매장 사이의 벽이 두꺼워 그 정도 소음이라면 꽤 큰 소동이었다.

하지만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묵묵히 짐을 옮겼다.

매장이 난장판이 되든 물건이 도난 당하든 상관없다.

둘째 누나를 향한 소심한 복수이기도 했고 본래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설마 알바 뽑히기 전까지 내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 건가.

점점 커져가는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불평만 쏟아내고 있을 때였다.

어떤 소리 하나가 깜빡이 없이 끼어든 차처럼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살고 싶어.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짧디짧은 정전기처럼 순간 스치고 간 소리였다.

환청으로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작은 정전기가 때론 더 강렬한 법이다.

시우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건 정말 사람 목소리이고 위기에 빠진 사람의 애원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시우는 그 미스테리한 일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시우에겐 반복되는 일상과 같은 듯했다.

단지 이번엔 좀 특별하고 혼란스럽다곤 할까.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음성에 남일에 무감각했던 시우가 동요했다..

목소리에 이끌리듯 매장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 앞엔 겁에 질린 한 여자가 뒷걸음 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메리카 흑불곰을 닮은 남자는 약오른 얼굴로 그녀 앞에 서있었다.

그가 여자를 향해 들어올린 둔중한 손은 크기만 보아도 무시무시했다.

뭘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시우가 손 써볼 겨를도 없이 남자가 여자의 뺨을 내리쳤다.

(사라)”아아악!”

쓰러지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건 뾰족한 카운터 모서리였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정말 죽는다.

안돼. 안된다고.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시우가 여자에게 달려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모서리까지 단 몇 센티미터를 남기고 시우가 사라를 끌어당겼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시우의 동작은 간결하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유리를 안은 사람처럼 우아하게 사라를 품에 안았다.

시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사라를 보았다.

무언가 기대와 설렘에 찬 눈빛.

시우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닌데.

꼭 자기를 알아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얼떨떨해진 시우가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기절한 사람처럼 사라의 눈이 감겼다.

이어서 코끝을 찌르는 술냄새.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골이 아팠다.

그리고 결정타를 날리듯 코 고는 소리가 매장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상황에 잠이 오냐?

무슨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시우가 사라를 내동댕이쳤다.

(성추행범)”너희 영화 찍냐?”

성추행범이 꼴같잖다는 듯 그들을 노려봤다.

자기 보다 어린 시우를 얕잡아본 듯 했다.

하지만 기세는 시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싸늘해진 공기가 서서히 성추햄범을 엄습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의 모습은 사라를 구할 때와 전혀 딴판이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섬뜩한 시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 한 번 죽여 본 듯한 표정에 성추행범이 뒷걸음질쳤다.

그를 따라 시우가 성큼 걸어나갔다.

(성추행범)”야 오지마! 오지 말라고. 오면 확 씨 이 여자 가만히 안둔다.”

손에 잡히는대로 시우에게 던지다가 옆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를 붙잡았다.

여자가 살려달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시우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져 시우가 그를 제압하려는 순간 성추햄범이 여자를 시우에게 던져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시우)"미친 놈. 싱겁기는.”

얼떨결에 시우에게 안긴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며 시우에게서 떨어졌다.

(여자)”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당장 위로와 안심 섞인 말이 필요한 타이밍.

(시우)”경찰엔 신고했죠?”

(여자)”네.”

여자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보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런 여자를 내려보는 시우의 표정은 냉담했다.

(시우)”이따 갈 때 먹은 건 치우고 가요. 그건 손님 몫이니까.”

그러곤 발길을 돌려 사라가 누워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대놓고 무시당한 여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 멍하니 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우가 향한 곳은 사라가 자빠져 자고 있는 곳이었다.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사라는 대자로 누워 배를 긁적였다.

참 잘도 잔다.

근데 이 물건을 어떻게 치운다?

시우가 편의점 창으로 어둑해진 거리를 살폈다.

당장 손님이 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경찰이 곧 온다 했으니···

고민 끝에 시우는 유유히 카운터로 들어갔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게 시우의 조치였다.


***

경찰이 오고 몇 가지 조사와 질문이 있었다.

시우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대답했고, 성추행을 당한 여자는 시우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씨씨티브이를 돌려보는데 남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우를 보았다.

(남경)”무슨 운동하셨어요?”

시우는 별 거 아니라며 묵묵히 동영상을 돌렸다.

조사를 다 마치고 경찰은 며칠 내로 사건 경과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했다.

(시우)”혹시 제가 경찰서에 가야 하나요? 시간 내기가 좀 귀찮아서.”

(남경)”피해자는 저 손님이랑 여기 잠든 이분까지인데···”

순경이 한심하다는 듯 사라를 가리켰다.

(남경)”하지만 아무래도 인상착의라든가 증언 확보가 더 필요할 수 있어서요. 그때 되면 협조 부탁드립니다.

묵묵부답.

공손히 고개를 끄덕인 남경이 무안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지만 시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시우에겐 경찰서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사정이 있었다.

그런 시우에게 남경이 명함을 내밀었다.

(남경)”혹시 근처에 다시 나타나면 112나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순경이 건넨 명함엔 지질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남경)”이 지역 담당형사에요. 모쪼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협조’를 강조했지만 알겠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같이 온 여경이 여전히 벌벌 떠는 여자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경)”이 두 분은 저희가 안전하게 모실테니 걱정마시고요.”

시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걱정을 무슨.

사라를 들쳐업은 남경이 앓은 소리를 냈다.

문 밖을 나서면서 앞서 걷던 여경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경)”근데 여기 요즘 들어서 좀 이상하지 않아요? 작년보다 사건이 더 많아 진 것 같은데.”

***

이름 나사라

나이 31세

직업 건축사무소 ‘흰’ 소속 6년차 건축가

드센 남자들만 즐비한 건축업계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며 당당히 일하고 있는 여자.

정의감이 강해 불의 앞에 굽히지 않고 위험한 일에 먼저 앞장서는 사람.

당차고 자유분방한 탓에 남자보단 여자에게 인기가 많지만 그런 걸 오히려 즐기며 씩씩한 삶을 사는 사람.

그게 나사라였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 때문에 종종 사건을 일으키는 게 문제였다.

다음날 아침 사라의 방.

천장이 빙그르르 돈다. 돌아.

어젯밤 술을 얼마나 마신 걸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지막 기억.

멋진 놈. 눈부시게.

그래, 나 이시우 시인 봤잖아.

정말 멋진 얼굴이었어.

주변으로 퍼지는 아카시아향이며, 아늑한 품까지.

근사했지.

마치 꿈 같고 꿈꾸듯 잠이 들었는데.

무언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사라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방에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사느냐 죽느냐.

잔뜩 벼려진 촉이 말해주듯 어딘가 익숙하고 살벌한 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간담이 서늘했다.

뿅뿅 뿅뿅 뿅뿅

누군가는 앙증맞고 귀엽다 하겠지만 오로지 이 집안 사람들만 아는 신경질적인 소리.

뭐지, 이 심상찮은 기운은.

나에게 당장 도망가라는 소리야 이건.

사라는 어젯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빛의 속도로 되짚었다.

술마셨고 나래와 싸웠고 술마셨고 평상에서 잤고 토했고 편의점에 갔고, 기억은 없고.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무언가 번뜩였다.

그래. 기억이 없는 게 잘못이야. 도망가야해!!!

뿅뿅, 뿅뿅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라가 도망가려고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앞에 뿅망치를 든 엄마가 서있었다.

키는 166에 온몸에 힘이 넘치고.

쌀 30키로를 거뜬히 들고,

심심할 때마다 데드리프트를 하는 여자.

날씬하고 긴 몸에 어찌 그런 힘이 나오겠냐마는

근육이 아름답게 붙은 몸은 탄력적이고 생기가 넘친다.

전 소프트볼 국가대표 선수.

워낙 실력이 뛰어나 미국이며, 일본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고.

남자로 태어났다면 메이저리그는 제패했을 거란 여자.

그녀의 손에 뿅망치는 목수의 도끼, 토르의 망치 같았다.

사실 할아버지는 지식, 덕망, 체력을 갖추라 하여 지덕체로 이름을 짓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떻게 여자에게 그런 이름을 줄 수 있냐며 할머니의 뜻에 따라 체를 애로 바꿨다.

그만큼 체력은 타고난 것이다.

(지덕애)”나사라. 오늘을 살아가 아니라 죽자네.”

지덕애 여사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뿅망치를 꼬옥 쥐었다.

(사라)”엄마, 아니 그게. 어제 내가 좀 일이 있어서. 근데 그게 그 일이 기억이 안나서, 뭔가 이상하고 요상야릇한 건데 기억이 안나서 말하기 어렵지만 기억을 기억해내려고만 하면?”

(지덕애)응?

응?

지금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거야.

자기 자신도 알 길 없는 말이 튀어나올수록 뿅망치 소리는 커져만갔다.

그것의 두려움을 사라는 너무 잘 알았다.

자라오면서 몸소 체험한 것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몇 년 전 아빠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걸 보고 깨달았다.

뿅망치 든 엄마를 절대 건들지 말자.

당시 주식으로 재산의 반을 날려먹은 아빠 때문에 집엔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엄마는 뿅망치를 들었고 아빠를 장파열로 보내버렸다.

그 뒤로 아빠는 뿅뿅 소리만 들으면 딸꾹질을 했다.

딸꾹

지금도 거실에서 사라를 가엾게 바라보며 아빠가 딸꾹질을 한다.

(사라)”엄마 나 진짜 안돼. 내일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 제발 온전하게 보내줘. 제발. 요즘 회사에서 소문도 안 좋은데. 엄마 살려줘.”

사라가 엄마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지덕애)”사라.”

(사라)”네네. 어머님.

(지덕애)”아랫마을 사라야. 이젠 술쳐먹고 경찰차에 실려오는 사라야.”

(사라)”나 어제 경찰차에 실려왔어?”

지 여사의 말에 사라가 신기하다는 듯 해맑게 물었다.

상황 파악 못하고.

당장이라도 불구덩이에 던져놓을 기세로 지여사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사라)”알겠어. 닭머리 치고 있을겡.”

(지덕애)”내가 너에게 선택권을 줄게. 저번에 아빠 응급실 가는 거 봤지?”

(사라)”응응.”

(지덕애)”엄만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어. 이젠 동네 창피해서 사라의 사자만 나와도 고개를 숙여. 근데 아빠는 그렇다 치고, 사랑스러운 딸을 어떻게 때릴 수 있겠니.”

(사라)”고럼 고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덕애)”그래서 엄마가 제안 하나를 할텐데.”

(지덕애)”나가.”

(사라)”응?”

사라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리 몽둥이를 분질렀으면 분질렀지 집 밖으로 내쫓은 적 없던 지 여사였다.

술에 취해 데크에서 자다 걸렸을 때도

길바닥에 잠든 사라를 동네 주민이 업고 왔을 때도

피를 볼 지언정 북어국은 따박따박 먹였는데

도대체 왜.

(사라)”이건 아니지. 엄마, 아무리 엄마가 좀 난폭하기로서니 그렇다고 내쫓을 사람은 아니잖아.”

뻔뻔스러운 딸의 태도에 더 노여워진 지여사가 뿅마치를 치켜들었다.

사라는 가드를 올리며 엄마의 일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기절해야 정상인데? 싶을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사라가 가드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덕애)”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경찰이 얘기해주더라.”

(사라)”일?”

아 그러고 보니.

그제야 어젯일을 기억해냈다.

성추행범이 있었고 내가 소리치니까 날 때렸는데.

(지덕애)”또 나설 자리 구분 못하고 나섰더라.”

(사라)”아 그게··· 엄마랑 약속한 게 있긴 해도 어제 술도 마셨고, 무엇보다 아니 글쎄 그 새끼가 눈 앞에서 성추행을 하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어?”

(지덕애)”그래 잘했지. 잘한거야.”

지 여사의 목소리엔 힘도, 감정도 없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라)”근데 왜? 뭐가 문제야 엄마.”

(지덕애)”어린이보호구역에서 담배 피던 남자랑 실랑이 붙었을 때 엄마 어땠는지 알아? 병원에 있다는 얘기 듣자마자 맨발로 달려갔어. 발바닥이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지하철 철로에서 아이 구했을 때는 또 어때. 죽을 뻔 했다는 소식 듣고 네 아빠, 장파열로 입원하던 와중에도 의사 말 어기고 너한테 달려갔어.”

(사라)”왜 또 지난 얘길해. 미안하다니까. 요즘은 자제하고 있어. 그래도 죽을 뻔한 아이 구한 걸 예로 든 건 좀 심했다.”

(지덕애)”그래 네 말 다 맞아. 부끄러운 자식은 두지 않아서 좋았고 그걸로 스스로 자위했어.”

(사라)”그래. 타고 난 건데 어떻게 바꿔.”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라의 목이 타들어갔다.

(지덕애)”그러니까, 나가. 오늘부터 너 내 딸 아니니까. 아빠도 동의했다.”

사라는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어리둥절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슬프고 단호한 표정.

빈말이 아니었다.

사라의 등줄기가 서늘했다.

심각한 거다.

뭐야 이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지 여사가 사라의 목덜미를 잡았다.

(지덕애)”네 발로 나가기 어려우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할 수 없어.”

정말 이대로 끌려 나가면 엄마도 뭐고 없을 것 같았다.

정말 나 버려지는 거야.

발악해야돼

사라는 엄마를 붙잡고 늘어졌다.

(사라)”엄마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사랑하는 딸이 밖에서 옳은 일을 하고 오면 칭찬이나 지지를 해줘야지. 이건 아니야. 이러고도 이게 엄마야.”

순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지덕애 여사가 사라를 놓아버렸다.


그 바람에 헌신짝 버려지듯 사라가 내동댕이쳐졌다.

(지덕애)”그래 엄마야 엄마라서 그래. 부모가 자식하는 일 지지하고 응원해줘야지. 근데 남 돕자고 내 자식 다치는 꼴 못 보는 것도 부모야. 네 몸에서 피 흘릴 때마다 피눈물 나는 것도 부모라고!”

여사는 단호했다.

(지덕애)”됐으니까 나가. 너 바뀌기 전에 내가 죽을 거 같아. 이젠 자식이라곤 네 동생 수라만 보고 살 거니까 나가!!!”

그 외침이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들었다.

등줄기를 흐르던 땀이 차갑게 식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굳어버린 사라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분명 엄마는 아빠를 장파열로 보냈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서 더 개기면 정말 죽는다.


***

마당엔 캐리어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나한준이 포메라니안 시로를 앉은 채 기운 없는 얼굴로 사라를 기다렸다.

툴툴거리며 한준에게 다가간 사라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나한준) “잘가라 딸아. 아주 연 끊는 건 아니니까 종종 들르고.”

(사라)”아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자다가 떨어진 날벼락에 사라가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나한준)”부모라는 게 그런 거야. 자식은 무조건적인 지지와 존중을 원하지만 너무 사랑해서 그러기 어려운 것도 부모맴이지. 네가 이해해줘. 아빠도 그렇고 엄마도 너 키우느라 맘고생 많았다.”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불물 안가리는 사라 때문에 경찰서든 병원이든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쫓을 건 뭐람.

당장 어디로 가라고.

(나한준)”다짜고짜 쫓아내는 건 아니여. 그래도 너희 엄마가 애 집은 구해주고 버려야 한데서 집 하나 구해놨어.”

그 말에 당장 급한 불은 끈 심정이었다.

사라가 엉덩일 털고 일어서며 물었다.

(사라)”전세?”

(나한준)”우리가 돈이 어딨어서. 네 동생 수라 대학 등록비도 내줘야 하는데. 월세야. 첫달은 아빠가 냈고 다음달부턴 네가 내.”

집세 얘기가 나오자 정말 이게 현실이구나 앞날이 캄캄했다.

월 15만원씩 집에 생활비로 내긴 냈는데.

혼자 살아본 적 없고 막막하다.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참에 확실하게 독립하자고 사라는 마음 먹었다.

(사라) ”엄마, 어디 귀여운 딸 없이 잘 살아보슈. 나도 하나도 안 슬프다 이거야. 어디 얼마나 잘 사는지 한 번 두고 보시라고!”

말을 마친 순간 열린 문 밖으로 엄마의 뿅망치가 날아왔다.

캐리어를 붙든 사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 같이 내뺐다.


***

아빠가 알려준 집은 아랫마을 상현 2동과 윗마을 상현1동 경계에 위치한 2층집이었다.

당장 입주가 가능했다기에 어디 좀 이상한 곳 아닌가 싶었는데 나름 아담한 잔디와 연못에 테라스까지 있는, 아름다운 벽돌집이었다.

대부분 낡디 낡은 주택 사이에 저 홀로 유럽 분위기가 느껴지는 집이라니.

쫓겨나길 잘했다고 해야 하나?

캐리어를 짊어맨 그녀는 현관부터 나있는 자갈길을 따라 쭉 들어갔다.

자갈길 중간 쯤에 묘비석 같은 돌덩이 하나.

‘뭐야 무섭게. 이거 리얼 무덤?”

돌엔 반듯한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허리를 숙여 사라는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돌에 새겨진 문구를 읽었다.

‘쭉 살다보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아일랜드의 소설가 겸 극작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재치와 유머가 섞인 문장.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집마당에 덩그라니 새겨놓았을까.

정말 무덤인가?

무덤인지 확인하려 돌 옆에 처진 경계선을 넘으려는데 누군가 사라의 등 뒤로 걸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사라가 돌아보는 순간 경악하며 나자빠졌다.

(사라)”아악!”

눈 앞에 당당히 모습을 보인 맨살에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긴팔과 두툼한 팔뚝. 넓은 어깨에 갈라질 곳 갈라지고 단단할 곳 단단한 몸통.

아름다운 굴곡과 비율을 가진 남자가 웃통을 벗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패션 모델 같은 비주얼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서 얼굴을 가린 두 손 사이로 눈만 깜빡였다.

(사라)”당신 뭐야. 왜 한 낮에 남의 집에서 그러고 있어?”

아무말 없이 남자는 사라 앞으로 다가갔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성나 있는 근육만 빼고.

그늘 밑에 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 왜 이렇게 더워.

그늘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남자)”’당신 뭐야’는 내가 할 소리지. 너 뭐야. 누군데 무단 침입까지 하고선 변태처럼 쳐다보는 거야?”

두 손을 내린 사라가 그림자를 벗은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를 마주한 사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당했던 남자 역시 혼란스러워하며 사라를 보았다.

(남자)”너!”

(사라)”당신!”

이시우와 사라의 두번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

에필로그

사라의 집. 사라가 집을 나가고 얼마 뒤

(나한준)”걔가 잘 살까?”

(지여사)”걱정말아요. 자다 가도 배고프면 꿀딴지 털 년이니까.”

(나한준)”그게 아니라 사라가 어디 혼자 살 수 있는 아이냐고. 사람은 안 무서워해도 귀신을 무서워하잖아.”

빨래를 개고 있던 지여사가 한준의 말을 듣고는 빨래를 내던지며 한준을 쳐다봤다.

가스불이라도 켜놓고 여행 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지여사)“아 그걸 잊고 있었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했다.

(지여사)“미치겠네. 그 년 술 때문에 쫓아낸 건데 알코올 중독자 돼서 돌아오겠네”

사라가 알콜 중독자 소리까지 들어가며 술을 마시게 된 이유.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고, 권한 적도 없던 술을 갓 스무살에 스스로 마시게 된 이유.

그건 사라가 귀신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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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이 왜 이 시점에서 나오는 건데 21.10.23 17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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