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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급 회귀자의 탑 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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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펜리힐드
작품등록일 :
2024.05.08 10:37
최근연재일 :
2024.05.09 11:58
연재수 :
4 회
조회수 :
461
추천수 :
15
글자수 :
26,411

작성
24.05.0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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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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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9쪽

4화. 마도서의 제작에 필요한 것.

DUMMY

###

생명이란 살아숨쉬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마모가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섭식 행위를 통해 꾸준히 영양분을 보충해야만 한다. 존재란 존재의 유지를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명을 죽이고 그 생명의 모든 것을 취한다.


생존을 위해서.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렇게 살아간다.


간혹 생명을 품지 않은 암석, 혹은 광물 같은 것을 먹어치우는 특별한 존재들도 있긴 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것도 무언가를 먹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존재가 존재를 취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콰드드득.


옅은 마력 파장이 도예준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마력의 파동을 견디지 못한 숲 일대의 나무들이 갈가리 찢겨져 흩어졌고, 단단한 바위들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도예준은 허공에 흩날리는 나무 파편들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육신 내부를 관조했다.


스스슥.


포식의 권능으로 암스킬러를 먹었음에도 유의미한 변화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암스킬러는 제법 진귀한 마물에 속했지만 존재가 지닌 격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피부 미용과 노화 방지의 효과 덕분에 재벌들에게나 인기가 좋을 뿐이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다.


또한 존재의 격을 올리고자 먹은 것도 아니다. 굶주림의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암스킬러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격이 낮다곤 해도, 어쨌든 먹지 않았는가.


도예준은 식사를 끝내곤, 눈을 감았다.


파츠츳.


육신을 타고 도는 이능의 힘이 느껴졌다.


색감으로 표현하면 푸른색.


온도로 치자면 눈 내린 하얀 겨울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운들이 발끝부터 시작하여 척추를 타고 흐르더니, 그대로 신체 곳곳으로 흩어져 육신의 깊숙한 곳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능의 힘이면서도 기억이었고 기억이자 지식이며 지식이자 지혜였다. 또한 존재의 이야기였다.


기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보의 해일이 영혼의 강둑을 넘어 범람하더니, 도예준의 육신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암스킬러 기억이다.


포식의 권능으로 섭취한 암스킬러의 기억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그것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진 일생의 모든 기억이었다.


깨끗함과는 거리가 먼 탁한 강물의 아래를 유영하며 먹잇감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던 기억. 준성체 시절 강철의 작살을 쥔 암석 리자드맨에게 위협을 받았던 기억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살았는지.


그 모든 것들.


암스킬러의 역사가 도예준의 육신과 영혼으로 녹아들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장자의 이야기다.


호접지몽.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포식의 권능은 먹어치운 존재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말 그대로 그 존재의 관념적인 것들까지 전부 흡수한다.


그렇기에 포식의 권능은 가끔 존재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호접지몽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도예준이 암스킬러의 기억 따위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오래전에 극복한 문제였다.


도예준은 쓴웃음을 짓곤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암스킬러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콰득. 콰드득.


손끝으로 허공의 수분이 모여들더니 작고 뾰족한, 마치 날카로운 창날의 끝과도 같은 얼음의 송곳니가 만들어졌다.


암스킬러의 주력기인 빙결의 능력이었다.


탑의 축복이라 불리는 스킬을 사용한 게 아님에도, 마법으로 현상을 비튼 것이 아님에도 허공에 얼음의 결정이 맺혔다.


포식의 힘이다.


존재를 먹어치우고 그 존재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는 고유권능.


고고한 탑의 성좌들로 하여금 자신을 탑의 종말마저 먹어치우는 종말의 포식자라 부르게 만든 불가해의 이능.


신들조차 두려워한 불가해의 권능이다.


하지만 도예준은, 자신에게 주어진 포식의 권능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버릴 수만 있다면 당장 버렸을 만큼, 차라리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즐거워야할 식사 시간을, 불쾌하게 만드는 권능이니까.”


도예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쇠솥을 한켠에 치우고 숲길을 따라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바스라지며 사브작 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육신에 잔류하고 있던 암스킬러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번에는 죽음의 기억이다.


자신이 먹어 치운 암스킬러의 기억이 아닌, 그 암스킬러가 살아생전에 보았던 다른 무언가의 죽음.


모체의 죽음이다.


암스킬러가 치어였던 시절, 그 암스킬러를 직접 낳고 길렀던 모체격의 암스킬러가 인간들에게 죽은 기억이었다.


기억 속 풍경이 뇌리에서 펼쳐졌다.


녹조로 더럽혀진 강.


강둑을 타고 얕게 자란 풀들 사이로는 탄피가 가득하다.


도예준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인간 낚시터.


기억 속의 그곳에 세 척의 조잡한 대나무 뗏목이 둥둥 떠있었다. 뗏목 위로는 미끼로 선출된 사람들이 보였다. 덜덜 떨며 수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숨기지 못한 공포가 가득하다.


도예준이 먹어치운 암스킬러의 어미는, 수면 위의 인간들을 보더니 거칠게 몸을 떨며 저항하고 있었다.


본능.


유전자에 각인된, 종의 역사에 각인된 근원적인 욕망.


주술에 가까운 그 욕망을 이겨내기 위해서.


하지만 결국 모체는 치어인 새끼를 버려두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타앙. 탕. 탕.


AK-47이 발포되며 만들어진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매캐한 화약 냄새.


붉은색의 피.


희희덕 거리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금강목재파 조폭들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까지 들려왔다.


치어 시절의 암스킬러는 분노와 슬픔으로 몸을 옅게 떨었다.


도예준은 암스킬러의 기억에 실소를 흘렸다.


“뻔한 이야기군.”


그래, 뻔하지만 강렬한 먹잇감의 기억이다.


딱히 슬프진 않았다.


마치 자신의 기억인 것마냥 선명했으나 슬프진 않았다.


먹어치운 먹잇감의 슬픔을 곱씹으며 공감하고 슬퍼하기엔 지금껏 너무 많은 생명들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웃기지 않은가?


먹어치운 먹잇감의 슬픔에 공감하여 눈물을 보인다면, 사이코패스도 그런 사이코패스가 달리 없을 것이다. 맛있게 처먹을 땐 언제고 왜 그 먹잇감의 슬픔에 함께 슬퍼한단 말인가.


역겹지 않은가?


그건 먹잇감에 대한 모욕이고 강자의 기만일 뿐이다.


물론, 도예준에게도 그런 시절은 있었다. 먹잇감의 슬픔에 공감하고 그 먹잇감의 숙원을 대신해서 이루어주던 시절이.


변명을 하자면 그땐 젊었다.


아니, 어렸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릴 것이다.


역겨운 자기만족.


먹잇감의 기억을 토대로 먹잇감의 숙원을 이루어주고 그것을 통해 속죄에 가까운 자기만족을 느끼곤 했다.


죄가 사해지는 기분에 중독됐다.


하지만 그 머저리 같은 짓거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오래된 기억이다.


종말의 탑의 중립도시인 적성별의 뒷골목.


그곳에서 제법 명성 있는 해결사로 활동하면서 그 역겨운 자기만족과 속죄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이었다.


등반을 포기한 패배자들로 가득한 그 역겨운 욕망으로 가득한 뒷골목에 열예닐곱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무심코 문을 열고 집을 나섰을 때 마주한, 한겨울의 첫눈처럼.


맑고 깨끗한 아이였다.


그 순백의 아름다움에 뒷골목을 가득 채운 저열한 욕망들도 아주 잠깐 씻겨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을 만큼.


당시 자신이 살고있던 뒷골목에서 범죄를 저지를 만큼 간담이 큰 부랑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 소녀는 그 어떤 부랑자의 위협도 받지 않고 자신의 앞까지 이를 수 있었다.


도예준은 아직도 그때 소녀가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끝끝내 부랑자들을 헤치고 자신의 앞에 도달한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호, 혹시 저를 먹어주시고 그 대신, 저를 위해 속죄해주실 수 있나요? 제 기억을, 제 존재를 먹으신 후에······.


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소녀는 스스로 먹잇감이 되길 자처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탁했다.


이유야 뻔했다.


너절하고 너절한, 닳고 닳은 뻔한 이유였다.


복수.


소녀는 부모의 복수를 바랐다. 자신의 가족들을 속임수로 가득한 계약으로 묶은 뒤,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버린 어느 이름 모를 성좌에 대한 복수를 부탁했다.


한겨울의 첫눈처럼 새하얗게 보였던 그 소녀는, 사실 진즉에 그 마음이 까맣게 불타고 재만 남은 아이였다.


그리고 그날.


도예준은 역겨운 자기만족일 뿐인 속죄를 그만 두게 되었다. 이후로도 간혹 먹어치운 먹잇감의 바람을 대신 해서 이루어줄 때는 있었지만, 적어도 속죄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더는 역겨운 방식으로 마음의 짐을 덜지 않기로 했다.


허기와 갈증.


끝이 없는 이 빌어먹을 저주 탓에 어차피 무언가를 계속 먹어야만 한다면, 그런 삶이라면, 이건 내려놓을 게 아니라 자신이 평생을 짊어지고 갈 하나의 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간혹 그 짐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울 때도 있었지만, 그저 운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며 훌훌 털고 잊어버렸다.


그래,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군.”


생각해본다.


아마도, 어쩌면 전생의 자신은 큰 죄를 저지른 것일지도 몰랐다.


마땅히 즐거워야할 식사 시간이 이토록 불쾌함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어쩌면 저 종말의 탑을 만들어냈을 그 이름 모를 대신격의 식사 시간에 총이라도 갈긴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무한의 허기와 갈증이라는 이 끔직한 저주와 그 저주에 버금가는 포식의 고유권능이 재능으로 주어졌을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를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한 것이 분명했다.


우스운 것은, 저 종말의 탑을 만들어낸 그 창조주의 잔존사념이 깃든 무덤의 집행관들조차 자신의 몸에 깃든 그 저주를 아주 조금 삼킨 것만으로도 모조리 죽어버렸다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이 저주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다.


“하긴,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지.”


답은 없다.


대신 답이라고 짐작할만한 것은 있다.


종말의 탑 마지막 층.


그곳을 공략하고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운다면, 어쩌면 이 무한의 굶주림도 사그라들지 않을까?


부와 명예?


인류의 구원을 바라는 숭고한 마음?


틀렸다.


그저, 이 끔찍한 굶주림이 해결되길 바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두 팔이 멀쩡했고, 지금의 자신이라면 과거에는 시도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탑의 등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제대로된 마도서를 만들어볼 계획이었다.


질기고 튼튼한, 결코 망가지지 않는 마도서를.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일단 탑을 등반하기 전에 서울로 올라갈 필요가 있었다. 마도서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당장 떠오르는 재료들만 해도 적지 않다.


황금사자의 갈기, 뷜레크 숫양의 뿔, 노을 묻은 석토의 진흙, 여명 아래에서 죽은 여왕벌의 날개 한쌍.


“품질 높은 자작나무로 만든 종이도 구해야겠군.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종이도 나름 유니크한 맛이 있지만, 질기고 튼튼한 건 역시 자작나무가 나을 테니까.”


지금의 안산에서는 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재료들이었다. 그나마 도시의 기능을 유지 중인 서울의 마법상점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따.


마법상점을 이잡듯 뒤져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말하는 갈색 오크 마을.


그곳을 방문한다는 선택지도 남아있었다.


정부에서 접근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면서 그 일대 전역을 밤의 장막으로 폐쇄를 해버린 상태지만, 아주 잠깐 장막을 걷어내는 것 정도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법을 위반하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정도의 위법은 요즘 시대에는 가볍게 웃고 넘어갈 작은 헤프닝에 불과했다.


살아남기 위해 남녀노소 누구나 법을 위반하는, 조금의 위법 정도는 생존의 미덕처럼 여겨지는 야만의 시대다.


금강목재파처럼 인간 낚시를 하는 것도 아닌 장막을 걷어내는 것 정도라면 짐작일 뿐이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도예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한국 정부가 직접 관리 중인 서울의 플레이어 관리국 창고를 털어버리는 것보단 지극히 소시민다운 위법 아닌가?


구태여 위법의 수준을 논하자면, 차가 다니지 않는 시골의 한적한 도로를 무당횡단하는 수준.


도예준은 왠지 모를 뿌듯함에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평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나쁘진 않군.”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볼 계획이었다.


종말의 포식자 같은 흉악한 이명으로 불린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평범하게 탑을 등반하는 고상하면서도 고독한 미식가, 그게 이번 삶의 목표였다.


생각보다, 어려울 거 같지는 않았다.


###

쿠릉. 쿠르르릉.


군용중형 트럭인 두돈반에 시동이 걸리면서 묵직한 엔진소리가 울려퍼졌다. 차량의 정비를 끝낸 배불뚝이 중년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곤 두돈반의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요즘 시대에 두돈반처럼 튼튼한 차량은 귀했다. 연료를 구하는 것도 이곳 안산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사실 원래 두돈반의 소유주는 금강목재파였다. 지금은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들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상태였고.


“후우우.”


중년 남자는 이른 오전, 조폭들에 의해 인간 낚시터의 인간 미끼로 던져졌던 기억을 떠올리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실 그때는, 이제 드디어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갑자기 플레이어로 각성한 그 젊고 잘생긴 남자가 강대한 이능의 힘으로 금강목재파를 쓸어버리기 전까지는.


“뭐, 뭐라고 말하지······?”


중년 남자는 도예준의 모습을 떠올리곤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맙다는 인사는 진작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중년 남자에겐 다시금 도예준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때문이었다.


“와아아! 벌써 수리 끝내신 거예요? 아니, 수리라기 보단 키 없이 시동을 거느라 오래 걸리셨던 건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젊은 여자가 차 문을 열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커리어 우먼을 연상케 하는 세미 정창 차림. 지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고상한 분위기의 젊은 여자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른 오전, 자신과 함께 암스킬러의 미끼로 던져졌던 동료 아닌 동료였다. 마찬가지로 도예준에게 구원을 받았고.


“뭐, 뭡니까······?”


갑작스런 여자의 등장에 중년 남자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외모는 같았지만 오전의 그 여자가 맞나 싶을 만큼 분위기가 달랐다.


분명 그 뗏목 위에서는 암스킬러의 등장에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기 바빴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함부로 말도 걸기 힘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것들이 연기였던 것처럼.


“차, 차량이 필요한 거라면 하우스 근처에 아직 멀쩡한 차들이 있을 겁니다. 저, 정비라면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일단 내리신 다음에 같이 이야기를······.”


“응? 아저씨? 설마 내가 착각한 건 아니죠?”


“뭐, 뭘 말하는 겁니까?”


“난 아저씨가 그 사람에게 가는 줄 알았는데. 맞죠?”


세미정창 차림의 여자는 차량의 시트를 포함한 수납이 가능한 임시 선반을 전부 뒤적이더니, 그곳에도 원하는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아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없네요. 단 걸 싫어하나보다, 조폭들은. 초코바라도 하나 있었으면 싶었는데. 오늘따라 당이 부족한 느낌이라. 아, 인사가 늦었네. 전 유선아예요. 풍산 유씨.”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자기소개에 중년 남자는 한순간 할 말 잃어버렸다. 하지만 유선아는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안전벨트를 착용하고는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그 사람 식사 끝내고 떠나면 두돈반 정도로는 따라잡기 힘들 걸요? 늦기 전에 출발!”


“자, 잠깐만요! 함께 움직이기에는 우리가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으이구, 아저씨. 이런 야만의 시대에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할까. 겁은 원래 내가 먹어야 하는 게 맞지 않아요?”


산뜻한 웃음과 함께 내뱉어진 여자의 말에 중년 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젊고 예쁜 여자와 중년 남자가 한 장소에 있다면 여자가 겁을 먹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은, 그냥 그런 시대였다.


법이란 것이 싸구려 장식만도 못해진 야만의 시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유선아는 중년 남자조차 느껴질 만큼 농밀하고도 짙은 위화감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확신하건데, 대단히 위험한 느낌이었다.


오전에 자신들을 암스킬러의 미끼로 던져버린 그 금강목재파의 조폭들이 동네 꼬마들처럼 느껴질 만큼.


중년 남자는 떨리는 마음을 오랜 노력 끝에야 간신히 진정시키곤 물었다.


“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그 떨림 가득한 물음에, 유선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매혹적인 미소였다. 숲의 여우를 연상케 하는.


“아저씨, 길게 말하진 않을게요. 알았죠?”


“아, 알겠습니다.”


“흐응, 어디보자. 뭐라고 설명하면 좋으려나? 아, 그래요. 그냥 나도 아저씨처럼 그 사람에게서 특별한 무언가를 느꼈다고 설명하면 편하겠네요. 형언하기 힘든 그런 운명적인 느낌?”


“우, 운명적인 느낌이요?”


“설명은 이만하면 충분하죠? 그러니까, 출발!”


유선아가 다시 한 번 창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고, 중년 남자는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곤 엑셀 페달을 밟았다.


여전히 유선아가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무서운 여자를 강제로 차에서 내리게 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를 굴려보면 방법이야 있겠다만 그 사이에 도예준이 멀어질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중년 남자를 움직이게 만든 문장이 있었다.


‘······운명적인 느낌.’


중년 남자는 유선아가 내뱉은 그 말을 마음 속으로 곱씹고는 표정을 굳혔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자신도 분명 그런 느낌을 받았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도예준을 본 순간, 그 경이로운 초월적 이능의 힘에 놀라기보단, 그 기이한 느낌에 놀랐다.


그리고 그 기이한 느낌은, 지금의 중년 남자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종말의 탑.


그 증오스러운 탑에게 딸을 빼앗긴 중년 가장에게는.


사실,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운명을 믿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만큼은 그 빌어먹을 운명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탑에게 딸을 빼앗긴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마찬가지로 오늘 그 남자를 만나게 된 것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차재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평범한 47세 직장인이 처음으로 운명을 믿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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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마도서의 제작에 필요한 것. 24.05.09 90 2 19쪽
3 3화. 각성파장. 24.05.09 89 4 17쪽
2 2화. 회귀. 24.05.08 104 4 15쪽
1 1화. 종말의 포식자. 24.05.08 179 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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