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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편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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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스키
작품등록일 :
2024.02.0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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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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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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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에, 그것도 뒤주 감금이라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 이야기는 이미 당대부터 숱한 갈등과 첨예한 과거사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이냐부터, 부자 관계에서 잘못한 쪽은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그 잘못을 부추겼는지 등등을 둘러싸고 이미 영조 연간 말부터 죽고 죽이는 다툼이 재개되었고, 이는 종국에는 탕평정치의 붕괴, 간접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한 가지 원인이 되지요.


이 논쟁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기록이 극히 풍부한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의 기록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당쟁의 마지막, 탕평과 그 이면의 극한 대립이 일어나던 시대였기에, 각 붕당의 문인들은 다들 저들 나름의 역사 및 시국 해석을 담은 당론서를 남겼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산문의 걸작,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이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당쟁이 아닌 사도세자의 정신병, 그리고 그 정신병을 촉발하고 악화시킨 영조의 기질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당시 기준으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차마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한중록』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홍씨 본인부터가 그 집필 목적을 아버지 홍봉한과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라 밝히고 있고, 아버지 홍봉한의 행적을 부풀리고 미화하는 데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별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금방 그 의도가 드러날 만큼, 홍씨는 빼어난 문학적 소양과는 별개로 정치적 프로파간다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과정에 관한 묘사는, 아버지 홍봉한의 행적에 대한 약간의 윤색을 제외하면 대체로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정설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간략하게 사도세자의 비극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이훤은 1735년 영조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납니다. 당시 영조는 귀한 아들 효장세자를 잃은 상태였고, 그 후로는 몇 안 되는 후궁에게서 딸만 보았기 때문에, 42세 나이에 얻은 사도세자는 실로 귀한 아들이었지요. 관례를 무시하고 이훤이 돌이 지나자마자 세자로 책봉할 정도였습니다.


성격 문제와는 별개로 지성은 출중했던 아버지를 닮아, 이훤도 어렸을 적부터 총명한 자질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자질과는 별개로 사도세자는 자유분방한 데다가 게으르고 느긋한 성격이었고, 이는 무엇이든 꼼꼼히 통제하고 본인 뜻대로 관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 영조와는 상극이었지요.


결국 사도세자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영조는 사도세자를 어떻게든 자신이 바라는 후계자로 만들고자 훈계와 질타를 일삼게 됩니다. 거기에 신하들과 기싸움을 벌이던 영조가 툭하면 선위와 대리청정으로 파동을 일으키고, 점차 본인의 스트레스를 – 본인은 훈육이라 여겼겠지만 – 세자에게 풀게 되면서, 세자 역시 엇나가기 시작하지요.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이 175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손윗누이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요절하고, 본인 또한 한참 앓을 무렵, 또 한 번 양위 파동으로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한 이래로 본격적으로 이상행동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사도세자는 학문을 소홀히 하고 대신 도교 서적과 소설에 탐닉하게 되었으며, 특히 당시 인기 있던 도교 경전 『옥추경』을 읽은 뒤에는 벼락을 무서워하는 증세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소설과 그림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반대급부로 학문적 소양은 부족하여, 후대에 사도세자 문집을 낸 정조가 그 분량 중 상당 부분을 자신이 새로 쓰거나 표절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1756년에는 영조에게 금주령을 어겼다는 사실무근의 꾸지람을 듣고서 분에 차 날뛰던 중, 촛대를 넘어뜨려 창경궁 낙선당을 불태우는 사고도 치게 됩니다. 영조가 이 일로 또 본인을 추궁하자, 설움을 못 이겨 변명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우물에 투신하려 하지요.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자살 시도였습니다.)


이것이 가속된 계기가 바로 작품이 시작되는 1757년, 그나마 사도세자가 의지하던 법적 모친 정성왕후 서씨, 그리고 영조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던 왕실 큰어른 인원왕후 김씨가 연달아 사망하면서부터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아들을 아꼈지만, 영조를 두려워해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정작 사도세자 생전에는 정을 내보인 적 없던 생모 영빈 이씨(선희궁)는 아들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고,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정서적 학대에 그대로 노출되게 되었지요.


결국 1757년 음력 6월, 내관 김한채를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서 혜경궁과 내인들 앞에 나타나는 충격적인 사건을 시작으로 사도세자는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1762년 임오화변으로 죽기 전까지 그 손에 죽은 내관과 궁인의 수가 백여 명에 달한다고 몇몇 기록은 전하는데, 승정원일기의 해당 내용이 정조의 지시로 삭제되어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신빙성은 있다 하겠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따르면, 1758년 2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잠시 영조가 사도세자를 타이르며 왜 사람을 죽이느냐 묻자, 세자는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 따위를 죽여야 겨우 마음이 낫기 때문이라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버지 영조가 본인을 사랑하지 않아 서럽고, 툭하면 꾸짖기에 두려워서라고 밝혔지요.


이에 영조는 잠시 본인이 잘못했다며, ‘이제는 그리하지 않겠다’ 약속했으나, 영조가 사라지자마자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저딴 말을 믿느냐’ 하며 역정을 내었다 합니다. 홍씨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결국 아버지 영조가 저를 죽이고 어린 원손 – 후대의 정조 –을 세우고야 말 것임을 이 무렵부터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정신질환이 도졌을 때만 해도, 사도세자는 장인 홍봉한을 통해 당시 우울증 증세에 특효라 알려져 있던 청심환을 구해 먹는 등 어떻게든 대책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 근래에 사도세자와 홍봉한 사이의 서찰이 발견되면서 알려진 사실입니다 –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근대 의학이 정립된 이후로도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기까지는 숱한 난관이 있었는데,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한편, 영조가 세자를 미워한다는 사실이 궁 내외에 퍼지면서, 영조에게 승은을 입은 후궁 문씨가 공공연히 오만방자한 행보를 보이는 등, 세자 주변 환경도 점차 적대적으로 변해갑니다. 이 역시 사도세자에게는 또 다른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사도세자는 의대증, 즉 옷을 입기를 거부하는 증세를 내보이게 되고, 그것이 심할 때면 옷을 입히려 하는 사람을 때려죽이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영조가 편애하던 누이동생 화완옹주에게 찾아가 자신과 부왕 사이를 화해시키지 않는다면 죽이겠노라 협박하기도 하고, 혜경궁에게 바둑판을 던져 한쪽 눈을 실명시킬 뻔하기도 했으며, 본인이 아끼던 첩 박빙애를 본인이 직접 죽이기까지 했지요.


상술했듯 사도세자가 만약 1757~1758년 사이 자신을 폐하고 아들 이산을 대신 후계자로 삼으려는 부왕의 의도를 파악했단면, 이런 행적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뿐 아니라 자포자기하는 심정의 산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정신의학계에서는 이 무렵 사도세자의 증상이 조울증과 일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병세는 심해졌다 나아지기를 반복해, 혜경궁 홍씨 같은 주변인들을 희망고문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실제 사도세자가 ‘나아졌던’ 시기의 기록을 보면, 정말로 나아졌다기보다는 조증 증세에 해당한다고 볼 부분이 더 많습니다.


실제로 1762년, 결국 뒤주에서 죽기 직전 사도세자의 행적을 보면, 갑자기 토굴을 파고 그 속에 숨으려 한다던가, 영조를 칼로 찔러 죽이겠다며 떠든다던가 – 이것이 임오화변의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 어머니 선희궁에게 갑자기 영조의 가마와 똑같은 크기의 가마를 만들어 억지로 태운다던가 하는 등, 조증 증세로 해석될 만한 면이 농후합니다.


여하튼 참다 못한 영조는 결국 세자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본인의 국정 구상을 이어갈 재목 세손 이산을 후계자로 삼고, 그 걸림돌이 될 세자는 없애기로 한 것이지요.


유교 국가 조선에서 영조 본인이 직접 아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엄한 훈계’를 세자가 견디지 못하고 ‘사고사’한 것으로 만들고자, 뒤주에 감금한다는 엽기적인 – 본인 딴에는 창의적인 – 발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세자의 생모 선희궁도, 세자의 장인 홍봉한도, 영조의 의지 앞에 굴복하여 부득불 그 뜻을 따르게 되고,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죽은 아내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세자의 역모를 고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 특히 영조가 평생 정성왕후를 미워했음을 감안하면 더욱 기가 막힌 핑계입니다 -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됩니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마자 영조는 폐세자 교서를 내리고, 여드레 뒤 마침내 세자가 죽자 대충 장사지낸 뒤, ‘나는 잘못이 없다’ 하는 투의 묘지명까지 써서 함께 매장합니다. 그리고 정조는 죽은 첫째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본인의 후계, 세손으로 삼게 되지요.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이 남긴 상흔은 전혀 얕지 않았습니다. 이미 사리를 분별할 만큼 장성해 있던 이산은 말할 것도 없고, 사도세자 생전에는 애정 표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혹은, 영조가 두려워 차마 그리하지 못한) 생모 영빈 이씨는 스스로 자책하며 살다가 1764년 병사합니다.


그리고 영조가 바라던 탕평, 임금이 모든 선비의 스승이자 모든 정치적 담론의 주동자로서 조정을 절대적으로 장악한다는 그 야심찬 구상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영영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는 짓을 벌임으로써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요.


이후 이 ‘임오년의 의리’를 두고 영조 말년부터 정조 연간까지 다시 처절한 정치갈등이 벌어지게 되고, 더이상 세자빈이 아니게 되어 출궁당한 혜경궁 홍씨는 사가에 외롭게 남아 아버지 홍봉한이 임오화변 때 뒤주를 바쳤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몰락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후 정조 치세 중기에 겨우 조정 정국이 균형을 이루면서, 정조에 의해 홍문의 명예가 조금은 회복되고 본인도 조금은 희망찬 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마저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산산조각나지요. 정순왕후 김씨의 경주 김문은 홍씨의 친정 풍산 홍문과 대립하는 사이였고, 불과 수 년 사이 홍문은 이전보다도 더 비참하게 몰락해버립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으로 통칭되는 네 편의 자전적 글을 남긴 것도 이 파란만장한 시기의 일이었지요.


그 뒤 두 세기의 세월이 흘러, 본격적으로 영·정조 시기가 학술적·대중적으로 다뤄지면서 사도세자 이야기도 다각적으로 재해석되기에 이릅니다.


그중 일부로, 정신의학계 일각에서는 이미 숙종 시기부터 조선 왕실에 정신질환에 취약한 가족력이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정하은·김창윤(2014), “사도세자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 사도세자, 양극성 장애 환자인가 당쟁의 희생양인가”, 『신경정신의학』 53(5): 299-309).


이에 따르면,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대부터 양극성 장애로 의심되는 가족력이 보입니다. 숙종 역시 사도세자와 비슷하게 옷 입기를 거부하는 증세가 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장성한 뒤로는 고양이 키우기, 송시열에게 사약 내리기, 환국 등 다양한 취미생활로 스트레스를 풀었지요.


영조의 이복형 경종의 정신질환은, 어떻게든 그를 폄훼하려던 노론 측 기록이 풍부히 남아 있는데, 단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그 내용이 상세하여, 과장되었을지언정 어느 정도는 우울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장된 내용을 모두 믿는다면, 조현병 증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사실로 보기에는 그 근거가 많이 약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조의 경우, 『한중록』의 상세한 기록 덕택에 편집증 혹은 강박적 성격장애가 있었던 것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사도세자와 비슷하게 유년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영조였기에, 그 증상이 일찌감치 나타났던 것이지요.


영조가 탕평책을 펼치면서, 조정의 모든 정치적 담론이 자신을 거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 – 이른바 ‘의리의 주인’ - 이나, 양위 파동은 양반처럼 보일 정도의 온갖 정치적 쇼에 신하들을 강제로 참여시켜 탕평을 강요했던 것 역시 그러한 성향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담으로, 강박성 성격장애의 증상 중에는 금전에 인색하다는 것도 있는데, 영조가 균역법을 비롯해 조선의 그러잖아도 빈약했던 재정수입을 더욱 악화시키는 절세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조 또한 일정 부분 이런 기질을 물려받지 않았을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의리의 주인이 되기를 자처했던 영조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조는 조선 만민과 만물의 주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자처했고, 당당하게 그 취지를 글로 써서 반포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창덕궁 존덕정의 주렴에 쓰여 있습니다.).


영조와 달리 정조는 아버지가 사도세자라는 것 하나를 제외하면 꿀릴 게 하나도 없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고, 그 덕에 열등감이나 편집증에 시달리는 대신 업무와 술담배에 빠져 살고, 초계문신과 규장각 신료들을 갈구는 정도로 스트레스를 풀며 살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습관이 건강에 좋을 리는 만무했고, 결국 온갖 건강 문제에 시달리다가 종기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왕실의 정신질환 증세는 17~18세기 조선 왕실사뿐 아니라 정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겠습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에게는 크나큰 비극이 되었지만요. 본작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런 시점, 사도세자의 광증이 막 폭발하려던 찰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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