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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님의 서재입니다.

녹색눈동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지킬
작품등록일 :
2008.01.30 02:04
최근연재일 :
2008.01.30 02:04
연재수 :
10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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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3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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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녹색눈동자 - 99. 남겨진 자들

DUMMY

99. 남겨진 자들


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과 공간이 짓이겨지는 경험을 했으니 차라리 꿈이라고 하는 것이 더 믿을 법했다. 지오는 자신의 손으로 대천사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멍청하게 대치하고 있던 이바움과 젤그까지 죽였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이바움과 젤그의 힘까지 흡수한 타루나스와 지금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지오에게는 꽤 지루한 시간이었다. 타루나스는 상급 악마와 천사들에게 그랬듯이 이바움과 젤그를 따르는 중급과 하급에 해당하는 악마와 천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말살했다. 방주에서 기도를 하던 신관들은 절반 이상이 탈진해서 죽었고, 나머지는 이바움을 가장한 타루나스의 신탁을 받고 다시 자신의 나라로 흩어졌다. 이제 그곳에 존재하는 이는 타루나스와 지오, 그리고 레미뿐이었다.


“오래 기다렸구나. 바빠서 이제야 너와 마주하게 되었다.”

“레미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오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레미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레미는 타루나스 앞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타루나스가 조종하던 리프너스 앞에서도 기를 펴지 못했던 레미이니 당연했다. 마족의 피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타루나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타루나스는 벌벌 떠는 레미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레미를 살렸던 것은 내 능력을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몸의 일부가 완전히 죽지 않아서 가능하긴 했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창조자의 기쁨을 알 것도 같구나. 모든 것이 정비가 된다면 새로운 종족의 창조를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질이나 루크도 살려보려 했지만 흔적도 남지 않았더군. 어차피 마족이 아닌 이상 살리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왜 아직 절 살려두고 계십니까?”

지오는 마침내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가이다를 선택하든지, 타루나스를 선택하든지 자신의 운명은 정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루나스는 지오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타루나스는 지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거라. 네가 로나라는 동료의 삶을 위해 가이다보다 날 선택했다고 해서 감동을 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네 공을 인정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앞으로 이루어나갈 세계에 대해 누구 하나 정도는 알고 있었으면 해서다. 그 존재가 이왕 내 자식이면 더 좋겠지.”

“그렇군요.”

지오는 왼쪽 눈을 문질렀다. 이제 그의 녹색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변해있었다. 타루나스는 그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네 녹색 눈을 도려내고 나서 새 눈을 찾으려는데, 죽은 신관 중에는 네 오른쪽 눈과 같은 갈색 눈이 없더구나.”

“괜찮습니다. 오드아이면 어떻습니까? 살아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 다른 소원은 없느냐?”

“없습니다. 그냥 빨리 이곳을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변덕으로 다시 저를 죽일까 두렵습니다.”

“하하하, 그렇지.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난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난 이제 소멸보다는 창조 쪽으로 취미를 바꿀 생각이니까.”

지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타루나스 역시 지오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검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흠, 이바움과 젤그님의 힘을 대부분 흡수했어도 그걸 파괴할 수는 없더구나. 이곳 우주의 높은 존재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만든 것일까? 다른 차원으로 날려버리는 것도 위험하고 하니 일단 내가 보관하려고 한다. 위험하긴 하겠지만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모두 사라진 지금, 약간의 긴장감은 가지고 있는 것도 좋겠지.”

지오는 여유롭게 말하는 타루나스를 보며 무심결에 말했다.

“좋으시겠군요.”

“뭐가 말이냐?”

“아, 죄송합니다. 그냥… 영원히 살면서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으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부러웠습니다.”

“하하, 그게 그렇게 꼭 부러운 것만은 아니란다. 원하는 것을 다 얻게 되면 남는 허무함이라는 것은 느껴보지 않은 자는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젤그님이 그랬듯이 또 다른 우주에서 이 행성을 빼앗고자 찾아오는 강력한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난 그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고 스스로 소멸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단다.”

“일단 지금은 아니겠지요?”

“하하, 당연하다. 못해도 몇 만 년은 지나야 그런 마음이 들겠지.”

지오는 잠시 만 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지에 대해 계산을 해보았다. 그러나 20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머리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이다. 역시 부러울 수밖에 없다.

“신을 잃은 인간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이바움의 신관들은 이제 뭘 할까요?”

타루나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것까지는 그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글쎄다. 아마도 대답 없는 신 대신에 다른 신을 찾아 나서겠지.”

“혼란이 오지는 않을까요?”

“혼란은 있겠지. 그럴 때는 작은 위기를 선물하면 된다는 것을 이전 신에게서 배웠다.”

“예?”

“이를테면….”

타루나스는 검붉은 색의 커다란 살덩이를 손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규칙적이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구나. ‘자소’라는 상급 악마의 심장이다. 오, 그러고 보니 네게 선물했던 악마의 눈도 자소의 것이었지. 워낙 상급 악마이다 보니 녀석이 죽었어도 심장은 여전히 움직이더구나. 마력 또한 힘차게 뿜어내고 있다. 이걸 지상에 떨어트리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내가 왔던 우주에서 적당한 마족을 소환한다면 아마 그 마족 중 하나가 이 심장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제법 강력한 힘으로 인간들을 괴롭히겠지. 그러면 인간들은 마왕이 나타났다면서 앞을 다투어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지금의 혼란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지.”

“그렇군요. 신이라는 것은 참 편하네요.”

“넌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오는 잠시 벙어리가 되었다. 막상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지오는 옆에 있는 레미를 보며 말했다.

“레미의 나이를 생각하면 곧 죽을 테니 그동안 이 녀석과 둘이서 같이 지낼까 합니다. 그 뒤로는 남은 생을 마음껏 살고 싶군요. 이제 녹색 눈동자도 없으니 쉽지는 않겠지만 힘닿는 대로 여자들과 즐거운 밤을 보낼 생각입니다.”

타루나스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너다운 생각이로구나. 그런데 레미는 생각보다 빨리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보름달이 뜰 때마다 모습이 변하면서 발산하는 암흑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낸 레미였다. 그리고 네 눈동자는 그런 레미의 피를 더욱 진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지. 두 에너지가 안정하게 섞인 네 녹색 눈은 주변에 있는 에너지를 안정시키고, 또 활성화시키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새롭게 힘을 주어 이제는 마족에 더 가까운 모습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젠장, 나보다 더 오래 살다니!”

지오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료가 죽는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미는 지오가 늙고 병들어도 죽을 때까지 진심으로 돌봐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널 어디로 보내주면 되겠느냐? 엘프의 숲으로 보내줄까? 아니면 네가 원래 있던 파이타로?”

“헤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야겠지요?”

“글쎄다. 어차피 네 말을 믿을 누군가가 있을까?”

“그 말도 맞군요. 대륙 아무 곳이나 보내주십시오. 엘프의 숲이나 파이타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째서? 네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던 로나를 보고 싶지 않느냐?”

지오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전 저를 잘 압니다. 로나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만나게 되면 전 또 로나를 이용해먹고 욕심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로나는 평생 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 남은 삶은 좀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는 작은 부탁인데….”

“뭐냐?”

“제 얼굴 형태를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면 로나와 혹시 마주치더라도 눈치를 채지 못하겠죠. 겸사겸사 아직도 저를 쫓고 있을지도 모르는 펠나의 자식들이나 암살자들에게서도 안전하고요.”

타루나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인간의 관점에서 미남의 형태가 좋겠지? 키도 조금 늘려주마. 그런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펠나의 자식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마 더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에 대한 추적이야 신탁을 내리면 그만이다.”

지오는 타루나스가 결코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불로 불사의 몸을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지만 일단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나중에 벨쿤이나 프라우스에게 찾아가 세상을 구했으니 뭐 좀 달라고 조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만 이별하자꾸나. 아마도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헤헤,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후후, 잘 가거라. 아들아.”


타루나스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지오는 주변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치 워프를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정신이 없었다. 어지러움은 점차 심해졌고, 열심히 버티던 지오는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지오님, 괜찮으세요?”

레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오는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뭔가 낯설었다. 일어나는데 왠지 땅이 멀어 보인다. 지오는 그제야 타루나스의 말이 떠올랐다.

“망할! 키도 이렇게 간단히 늘려줄 수 있으면 눈동자 색깔 맞추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귀찮아서 대충 넣어줬던 거군.”

지오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주변을 살폈다. 낯선 곳이었다. 아무래도 근처 마을이나 도시를 가봐야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오는 레미를 보았다. 레미 역시 지오의 달라진 모습이 낯선지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레미야, 내 얼굴이 많이 달라졌니?”

“…네, 지오님이 아닌 것 같아요. 꼭 살 빠진 루크님 같아요.”

“헤헤, 그럼 엄청 미남이 된 거잖아! 이제 얼굴로도 여자들을 유혹할 수 있게 되었군.”

“저, 그런데….”

“응? 뭐가?”

“뒤를 좀 보세요.”

지오는 레미의 말에 무심코 뒤를 보다가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곳에는 붉은 눈 가득히 눈물을 머금은 루시카가 서있었다.

‘젠장! 타루나스 이 미친 작자가 장난을 쳤군. 뭐, 루시카 정도까진 괜찮겠지.’

자신에게 다가와 안기는 루시카를 보며 지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얼굴은 기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넌 어떻게 할 생각이냐?”

프라우스의 질문에 헤나는 조용히 답했다.

“대륙의 엘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엘프와 대륙의 모든 생명을 위해 희생하신 세 엘프에 대해 추모제도 가질 예정입니다.”

“그 다음엔?”

“전 만장일치로 다음 여왕에 추대되었습니다. 이제 엘프들의 섬에 있는 문 가문과도 활발히 교류를 할 계획입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그리고?”

“공용어 역사책을 쓸 생각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대륙 대부분의 종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희생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들의 희생 아래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좋도록 하려무나. 나와의 약속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상관없다.”

헤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프라우스는 그 미소가 질과 많이 닮아졌다고 생각했다.

“지오는 정말 죽었습니까?”

프라우스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역시 살아있군요. 역사를 기록하려면 그 현장의 증언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로나의 부탁도 있었습니다.”

“글쎄다. 벌써 반년이 지났다. 아직까지 연락도 하지 않고,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것은 지오가 너희에게 잊혀진 존재로 남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군요. 그것이 로나에게도 좋은 일이겠지요.”

“그런데 내 눈에는 네가 더 아쉬워하는 것 같구나.”

“그…그럴 리가요!”

“지오 걱정은 하지 말아도 될 것이다. 이바움과 젤그가 소멸하는 곳에 있었다면 그 에너지에 노출이 되었을 것이고, 녀석의 녹색 눈동자는 그 에너지를 한껏 흡수해서 몸 곳곳에 전달했을 것이다. 아마 쉽게 늙거나 병들 수 없는 몸이 되었겠지. 타루나스 그자가 그 사실을 알려줬을 리는 없으니 지금도 어딘가에서 젊음을 불태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다 수백 년이 지나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을 알게 되면 너에게도 찾아오지 않을까 싶구나.”

“그렇군요.”

“더 할 말은 없느냐?”

“없습니다. 반 년 전의 충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백 년 뒤에 찾아뵙지요.”

“그래. 기다리겠다.”



“지오님! 살려주세요!”

지오는 레미의 꼬리를 잡고 있는 루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붉은 눈의 아이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엄마처럼 잘 대해주는 레미를 자주 괴롭히곤 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루리야, 너도 이제 스물이다. 언제까지 레미 이모를 장난감으로 생각할 거니? 레미 이모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그러나 루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5년 전에 루시카를 통해 엘프의 숲에서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얌전했던 루리는 슬슬 장난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한 장난이었지만 암흑의 에너지가 내재된 힘은 지오를 몇 번이나 타루나스의 곁으로 돌려보낼 뻔할 정도였다. 지오가 혼을 내고 질색을 하자 그나마 자신의 힘을 견딜 수 있는 레미를 장난의 대상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레미라고 해도 루리의 장난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워낙 착한 탓에 어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너 자꾸 그러면 루시카한테 다 이를 거다. 아마 내일 오기로 하지 않았나?”

레미의 꼬리는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루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이가 루시카였다. 그리고 루시카는 충분히 그럴만한 존재였다. 이제 그 규모가 대폭 줄었지만 그래도 펠나 신전의 제사장이다. 가끔 지오를 찾아올 때면 루리는 10년 전의 얌전한 아이가 되곤 했다. 그래도 예전처럼 냉정함은 사라졌다. 엘프의 숲에서 헤나와 지내는 동안 밝은 웃음을 웃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아빠, 그러면 대신 벨쿤의 이빨 주세요.”

“또? 드래곤 병사도 알고 보면 불쌍한 녀석들이야. 뭐, 그래도 레미가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지오는 자신의 금고를 열고 안에 있는 작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이빨은 하나도 없었다. 지오는 짐짓 루리를 노려보았다.

“몰래 빼다 썼구나. 아빠 금고 열지 말랬지?”

“심심해요.”

“젠장, 여긴 오리아스야. 크로티스까지 가려면 얼마나 먼 줄 알아? 그리고 벨쿤 그 영감도 이빨 자주 뽑으러 온다고 얼마나 투덜대는데!”

레미가 와서 지오의 목을 감싸 안았다.

“친구도 없는 루리가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그리고 크로티스 가면 이실라님과 론체님도 볼 수 있으니 좋잖아요.”

“레미 넌 나보다 루리가 더 좋아?”

“설마요!”

“내가 자꾸 돌아다니면 정체가 드러나서 좋지 않다고!”

“에이, 키도 얼굴도 바뀌어서 말 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는데 이실라님한테 가서 먼저 정체를 밝힌 분이 누구였지요?”

지오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헤헤, 이실라가 슬퍼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전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있고….”

“그 정체를 밝힐 때가 론체님이 목욕하는 것을 엿보고 나서였죠?”

“그만! 너 요즘 부쩍 똑똑해진 것 같다? 이젠 나보다 더 말을 잘하네?”

“헤헤헤!”

“내 웃음도 따라하지 마! 그 벌로 가슴 주무르기닷!”

“꺄악! 루리가 보잖아요!”

루리는 대낮부터 레미의 가슴을 붙잡고 뒹구는 지오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늘 보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빠,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한참 레미의 옷 사이로 손을 들이밀던 지오는 루리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어? 그러면 나가서 애들 괴롭히지 마라. 전처럼 다리 부러트리거나 그러면 아빠가 곤란해져.”

“알겠어요.”

“그리고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지오 삼촌이요.”

“좋아! 재미있게 놀다 오렴. 내가 내년에는 벨쿤 영감 이빨 몽땅 뽑아다 줄게.”

“네.”


루리는 늙은 위크를 타고 넓은 저택의 정원을 가로질러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 언덕으로 오르다가 누군가를 보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나무 뒤에 있던 이는 루리의 인사를 보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미 루리가 본 것 같은데?”

옆에 있던 헤나는 로나를 끌고 루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잘 지냈니?”

“여왕님, 안녕하세요.”

루리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지오는 잘 있지?”

“지오 삼촌은… 아빠는 잘 지내세요. 이 근처 여자들 사이에 제일 인기가 좋으세요.”

“하하하, 역시 널 지오한테 보내지 말 걸 그랬나? 루시카가 찾아왔을 때, 지오한테 보낼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믿고 보냈는데… 여전히 바람둥이인 지오랑 같이 있으면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아.”

헤나의 말에 로나가 조심스레 반박한다.

“지오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죠. 그리고 루시카님도 가끔 오셔서 가르쳐주실 테고, 착한 레미도 있으니까요.”

“로나는 언제나 지오 생각밖에 없구나.”

로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가까이 있음에도 지오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금방 우울한 표정이 된다. 헤나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헤나 역시 로나를 핑계로 이곳까지 왔던 것이다.

“만나볼 생각은 없어?”

“아니요,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지오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네가 선택할 일이겠지. 지오와 지내고 싶다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해. 네 뜻을 존중할 생각이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당연한 거야. 넌 내 호위엘프이고, 또 친구니까.”

헤나는 질을 닮은 미소를 지으며 로나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제 갈까?”

헤나가 일어서자 로나도 천천히 일어섰다.

“루리야, 우리 본 것 지오한테 말하지 않는 것 알지?”

“어차피 아빠는 저한테 그런 것은 물어보지도 않으세요. 안녕히 가세요.”

헤나와 로나는 다시 한 번 지오가 사는 저택을 바라본 후 언덕과 이어진 숲으로 사라졌다.



“꺄아, 지오님, 간지러워요!”

레미의 엉덩이를 간질이던 지오는 문득 손을 멈추고 드러누웠다. 갑작스러운 지오의 모습에 레미는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레미 때문에 화가 나셨어요?”

“헤헤, 아니야.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루크나 질이 살아남고 내가 죽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야.”

“왜요?”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난 참 나쁘게 살아왔거든. 지금도 뭐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너도 알다시피 예전에는 정말 나쁜 놈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수많은 사람들 가슴에 아픔을 남겼는데,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

레미는 지오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오님이 세상을 구했잖아요. 레미는 지오님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헤헤, 그럴 자격은 오히려 질이나 루크에게 있지. 그들이 없었다면 난 그곳까지 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들은 죽었어. 솔직히 죽으면 끝이잖아. 아무런 즐거움도 없잖아.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들의 값지고 소중한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밖에 없어.”

레미는 오랜만에 지오의 눈을 혀로 핥아주었다. 지오가 눈물을 흘린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잊으셨나요? 지오님이 그러셨잖아요.”

“뭘?”

레미는 갑자기 일어나서 한쪽 발을 삐딱하게 디디며 지오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헤헤, 어차피 인생은 불공평해!”

지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레미는 다시 지오 옆에 누웠다.

“지오님 말대로 인생은 불공평해요. 그러니까 지오님은 그냥 즐겁게 살면 되요. 루크님도 질 여왕님도 그걸 바라실거에요.”

“헤헤, 우리 레미가 나보다 낫구나.”

“다 지오님이 가르쳐주신 거죠.”

“헤헤, 그렇긴 하지. 그럼 그냥 이렇게 계속 뻔뻔하게 살아보자.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벨쿤한테 이빨 달라고 협박도 하고, 예쁜 아가씨들과 신나는 밤도 보내고 말이야.”

“마지막은 싫은데….”

지오는 삐친 척을 하는 레미의 몸을 다시 간질이기 시작했다.


타르력 3585년 9월 어느 평화로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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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녹색눈동자 - 89. 안녕 로나(3) +4 08.01.25 1,157 7 21쪽
93 녹색눈동자 - 88. 안녕 로나(2) +7 08.01.23 1,102 4 24쪽
92 녹색눈동자 - 87. 안녕 로나(1) +8 08.01.22 1,053 5 20쪽
91 녹색눈동자 - 86. 고대의 무기 +5 08.01.21 1,224 5 21쪽
90 녹색눈동자 - 85. 남색의 활(2) +9 08.01.19 1,135 7 22쪽
89 녹색눈동자 - 84. 남색의 활(1) +6 08.01.17 1,044 4 20쪽
88 녹색눈동자 - 83. 회유(2) +11 08.01.16 1,043 3 23쪽
87 녹색눈동자 - 82. 회유(1) +7 08.01.14 1,204 5 22쪽
86 녹색눈동자 - 81. 한밤의 습격 +6 08.01.13 1,202 10 20쪽
85 녹색눈동자 - 80. 아놀드와의 재회 +4 08.01.12 1,219 4 20쪽
84 녹색눈동자 - 79. 주도권 +7 08.01.11 1,625 5 21쪽
83 녹색눈동자 - 78. 로나의 변화 +6 08.01.10 1,041 7 24쪽
82 녹색눈동자 - 77. 기억의 조각 +4 08.01.09 965 5 22쪽
81 녹색눈동자 - 76. 심문 +7 08.01.08 1,077 4 23쪽
80 녹색눈동자 - 75. 임시족장 니아 +5 08.01.07 1,609 4 20쪽
79 녹색눈동자 - 74. 바다 위의 전투(2) +6 08.01.05 1,193 6 22쪽
78 녹색눈동자 - 73. 바다 위의 전투(1) +6 08.01.04 1,601 4 20쪽
77 녹색눈동자 - 72. 살인 +6 08.01.02 1,349 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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