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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님의 서재입니다.

녹색눈동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지킬
작품등록일 :
2008.01.30 02:04
최근연재일 :
2008.01.30 02:04
연재수 :
10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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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19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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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녹색눈동자 - 85. 남색의 활(2)

DUMMY

85. 남색의 활(2)


“여기쯤에서 그리면 될 것 같아.”

지오는 루크의 목에 생긴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로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모아두었던 마법석을 던져주었다. 지친 표정의 로나는 말없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지오 일행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이제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가면 쿠라드산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엘프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모두가 지쳐버린 상태였다. 갑옷 덕분에 큰 상처는 없지만 만신창이에 가까운 몸이 된 루크와, 화살도 몇 개 남아있지 않은데다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한 로나였다. 물론 지오는 외형적으로는 멀쩡했다. 그저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과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 때문에 신경질적이 된 것을 제외한다면 셋 중에서 유일하게 맑은 정신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다. 그리고 지오가 판단할 때 지금이 한계라고 생각했다. 사방이 적이었고, 그들은 아주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다. 가끔 누군가 암살자들 일부를 처리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나마도 오늘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다.

“다 그렸어요.”

빠르게 마법진을 모두 그린 로나는 이제 지오가 준 마법석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로바를 부르려는 것이다. 마지막 일전을 준비해야 하기에 도움이 될만한 것은 모두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소환이 잘못되어 전혀 이상한 곳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이 된 로나가 섬세한 명령도 수행할 수 있는 로바를 공격적으로 운용한다면 생각보다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레미의 건틀렛을 줄로 엮어서 임시 모자를 만든 지오는 마지막 점검으로 몸에 있는 베일의 관을 어루만졌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닫게 되면 시원스레 열어버릴 생각이었다. 그 예언자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을 죽이려던 이들을 곤란하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으로 세상이 위험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어차피 자신이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영웅들이 하는 일이다. 지오는 그런 영웅의 희생으로 편하게 살고 싶은 평범하고 겁 많은 사기꾼일 뿐이었다.

“지금 소환할까요?”

마법석의 배치까지 끝나자 로나는 지오에게 물었다.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포위망이 뚫려 달아날 기회가 생긴다면 미리 부른 로바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위크와 질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이번 싸움이 어느 쪽으로 끝이 나건 가장 안전한 녀석들을 바로 위크와 질리일 것이다. 지오는 잠깐이지만 말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루크 너는 계속 싸울 수 있어? 대체 너한테 쿠라드산으로 가라고 한 그 망할 녀석은 언제쯤 나타나 우리를 구해줄 생각이야? 이대로 가면 다 죽을 것이 뻔한데 말이야.”

지오의 말에 루크는 말이 없었다. 부쩍 이가 많이 나간 자신의 대검을 손질할 뿐이다. 배낭을 가득 채웠던 무기는 이제 등에 메고 있는 세 자루의 검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는 싸우다가 부서지거나 쫓기는 도중에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루크는 어딘가 여유가 있었다. 아직도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로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불안한 듯 지오를 보았다.

“수가 많아요. 궁수나 마법사도 많고, 갑옷을 잔뜩 껴입은 검사도 많아요. 썬더스태프는 이제 서너 번만 쏘면 오늘은 더 쓸 수 없어요. 화살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마지막 화살 두 개는 남겨놓을까요? 놈들한테 죽기는 싫으니까 내가 지오님을 쏴죽이고, 나도 죽게요.”

“웃기지 마! 내가 왜 죽어?”

지오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로나를 노려보고는 뒤쪽에 있는 바위를 슬쩍 곁눈질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자신이 숨어들 곳이었다. 아래쪽이 비탈이라 위험하긴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자칫 지오를 노리다가 실수하면 곧바로 비탈을 굴러 부상을 입게 되니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마음의 준비가 끝났을 때, 마치 그것을 기다린 것처럼 포위망이 급격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소환할까요?”

로나가 묻는다. 그러나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검사가 달리기 시작했어요. 동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와요. 남쪽과 서쪽은 궁수가 배치되고 있어요. 아니, 남쪽에서도 검사가 달리기 시작했어요. 중갑옷을 입고 있어요. 이제 소환해요?”

“아직이야! 어디에 떨어지건 놈들의 혼란을 일으켜야 해. 검사들이 최대한 루크에게 달라붙으려 할 때까지 기다려!”

“궁수들이 조준을 시작했어요.”

“기다려!”

로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제 화살의 비가 쏟아질 것이고, 그 비를 피하고 나면 검을 든 검사들이 사방에서 돌격을 해올 것이다. 지오는 여전히 주변을 살폈다. 이제 검사들은 지오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주변에 박히기 시작한다. 로나는 재빨리 그 화살들을 주워서 부지런히 화살통에 넣었다. 루크도 왼손에 검을 하나 더 들었다. 검사들의 함성이 울린다. 미세하게 땅이 울릴 정도로 많은 수였다. 그리고 화살의 비가 지오와 그 동료를 본격적으로 덮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지오는 외치며 바위 아래로 뛰어들었고, 로나는 소환을 시작했다. 화살 하나가 마법진에 놓인 마법석 하나를 튕겨냈지만 마법진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니 조심해요!”

로나의 외침과 함께 마법진에 있는 마법석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로바가 소환이 되는 것이다.


쿠쿵!

땅이 진동한다. 산사태는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커다란 울림이 있었을 뿐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마치 엄마와 아이들이 소풍을 나온 분위기였지만 그 어느 엄마도 소풍을 험한 이아타 산맥으로 정하지는 않는다.

“소리가 엄청나게 크네요.”

한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이들을 한 번 내려보고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등에는 활 하나를 메고 있었고, 특별한 장신구 하나 없었다. 아이들도 별다른 특징은 없다. 그저 앞의 여자처럼 붉은 눈에 검은 머리칼을 가졌다는 것이 특이할 뿐이다.

“루시카님,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되지 않나요?”

당돌한 아이였다. 기껏 열 살이나 먹었을까?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길바닥에서 장난이나 칠 나이인데 벌써부터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어휘력과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옆에 있던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벙어리가 아닌가 할 정도로 조용했고, 몸도 다른 아이에 비해 약해보였다. 루시카는 다시 한 번 두 아이를 내려보았다. 마치 어린 키루스와 자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난 지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건 제사장께도 비밀이니 그렇게 알거라.”

“예?”

여자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루시카를 보았지만 마주 보는 눈빛이 무섭게 다가오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불만이 있는 얼굴이다.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카는 새로 들어온 붉은 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로, 베시가 다음 제사장에 루시카를 점찍었다는 뜻이나 같았다. 어린 펠나의 자식들을 관리하게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일단 제사장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어린 시절부터 루시카의 교육을 받고 명령을 받은 펠나의 자식들은 자연스레 루시카를 어머니로 여기고 따르게 된다. 최근 10년 사이에 루시카는 이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가끔 임무를 받아 대륙에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특별한 때였다. 그리고 그때 짬을 내어 지오를 만나러 가기도 했던 루시카다. 그런데 최근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원래 어린 펠나의 자식들은 다섯 이상이 모여야 교육을 시작한다. 그런데 최근 베시는 겨우 둘밖에 모이지 않았는데 루시카에게 교육을 시키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륙에 퍼져있던 펠나의 자식들을 있는 대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루시카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급기야 베시마저 루바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루시카는 몰래 조사를 했고, 모든 일의 중심에 지오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두 아이의 교육을 핑계로 이곳까지 추적해온 것이다. 만약 베시가 안다면 루시카는 죽게 될 수도 있었다.

“너희는 이곳에서 기다려라. 혹시 너희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펠나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강조해라. 그러나 놈들이 너희보다 약하다면 그냥 죽여도 좋다.”

말이 없던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만에 차서 이야기를 해대던 아이는 인상을 쓰며 루시카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루시카님은 지금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습니다.”

루시카는 슬쩍 무릎을 꿇어 이 당돌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페리?”

“루시카님은 이런 이상한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몇 주째 교육을 해주고 계시지 않으니까요.”

“그래, 맞다. 그래서 페리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건….”

아무리 그래도 페리는 어린애였다. 대답을 못하고 있자 루시카는 옆에 있던 아이에게 물었다.

“크리스 너도 페리와 같은 생각이냐?”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크리스는 잡고 있던 페리의 손을 놓고 옆에 있는 나무에 조용히 앉았다. 루시카의 명령을 듣겠다는 뜻이었다. 페리는 친구의 배신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신 역시 그렇게 할 걸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루시카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들고 페리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니?”

“활입니다.”

“무슨 활인지 아니?”

“그냥 활인 것 같습니다.”

“만져 보거라.”

페리는 영문도 모르고 활을 만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뒤쪽에 있던 크리스도 그 모습에 조금은 놀란 표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달을 함께 지냈던 친구가 자신의 눈앞에서 몸이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활을 만진 손은 달궈진 냄비 속에 들어간 버터처럼 빠르게 녹고 있었다. 페리는 온 힘을 다해 그것에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비해 강력했던 암흑의 힘마저 그것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걸리는 것을 귀찮아한 루시카는 화살 하나를 꺼내 그대로 페리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페리의 심장이 멈추면서 저항하는 힘이 사라지자 몸은 완전히 남색으로 물들었고, 그나마도 빠르게 녹고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지나면 남색의 물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루시카는 무심한 얼굴로 페리의 눈앞에 활을 들이댔다.

“이건 남색의 활이다. 화살에 맞으면 치료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은 뼈까지 녹아버리지. 주인 외의 존재가 활을 만지기만 해도 마찬가지다. 방금 네가 봤듯이 말이야. 너도 페리처럼 되고 싶으냐?”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겁이 나서 고개를 저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눈앞에서 친구가 죽고, 그 원인을 제공한 활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떨지를 않는다. 루시카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이 아이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죽이려던 마음을 접고 다시 활을 등에 멨다.

“나와 같이 가자. 어차피 문제가 생기면 거기서 널 죽이면 되니까.”

루시카의 말에 크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거대한 울림이 있었던 곳이다. 바로 로나가 로바를 소환한 곳이었다.


“으아아악!”

지오는 비탈을 구르고 있었다. 하필 로바가 소환된 곳이 지오가 있던 바위 옆이었고, 소환이 되면서 로바의 손이 바위를 때렸던 것이다. 그 충격으로 지오는 비탈을 굴렀고, 재빨리 로나가 뒤를 따랐지만 루크는 쫓아갈 수 없었다. 수많은 이들에게 포위가 된 것이다. 루크는 지오를 따라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금 자리가 싸우기에 좋았고, 차라리 지금처럼 모두가 자신에게 몰리게 하는 것이 나았다. 싸우면서 지오를 따로 엄호할 필요도 없다. 로나가 쫓아갔으니 위험하면 그때 가도 늦지 않았다. 예상대로 지오를 쫓는 이들은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죽인 다음에 쫓을 생각인 것 같았다. 로바는 소환이 되었지만 따로 명령이 없자 똑바로 일어난 뒤로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명령을 내려야 할 로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로바가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압감이었다. 로바를 등지고 싸울 수 있어서 루크에게도 좋았다. 그런데도 루크는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아직 펠나의 자식들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끌어낸 다음에 한 번에 없애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 루크는 여전히 힘을 아끼고 있었다.


“지오님!”

로나는 비탈을 구르는 지오를 따라잡았지만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가속도를 받아 무섭게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큰 나무나 바위에 부딪히면 위험했다. 더구나 아래쪽 비탈은 절벽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로나의 썬더스태프가 빛을 뿜었고, 지오가 구르는 한참 앞쪽에 제법 큰 구덩이를 만들었다.

쿵!

지오는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면서 멈출 수 있었고, 충격도 그리 받지 않았다.

“제길! 골렘 자식이 왜 하필 거기로 떨어지는 거야?”

지오는 간신히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위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루크 혼자서 싸우는 모양이었다. 당장 로나에게 도와주러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무방비가 되기에 지오는 로나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비탈을 다시 오르기로 했다. 다행이었다. 절벽으로 떨어졌다면 그야말로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빨리 좀 올라와요!”

“헤헤, 알았어.”

갑자기 변한 로나가 신경질을 내기 시작한다. 지오는 비위를 맞출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로나가 자신의 손을 놓을까 두려워 꼭 붙잡았다. 지금의 로나라면 지오를 뿌리치고 혼자 올라갈 수도 있었다.

‘질한테 가면 로나 대신 성격 좋은 엘프 하나 달라고 해봐야지.’

거칠게 자신의 손을 이끄는 로나의 뒷모습을 보며 지오는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비탈 위쪽은 여전히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루크를 둘러싼 검사들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몰아치면 무릎을 꿇을 것 같은데 계속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반해 루크를 상대하다가 쓰러진 이들은 스무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혼자서 일류급 암살자나 검사를 이만큼이나 해치웠다면 이미 일국의 기사대장 이상이었다. 가끔 궁수와 마법사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이 괴물이 입고 입는 갑옷은 마법과 화살을 모두 튕겨낸다. 오히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아군의 화살이나 마법에 맞아 피해가 생기는 때도 있었다.

“괴물 같은 자식!”

한 검사가 달려들며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괴물과도 같은 루크의 대검에 몸통이 잘려나갔다. 아직도 대검으로 사람의 몸통을 가를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는 것에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괴물이 아니었다.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다. 그러면서도 모든 힘을 쏟지는 않았다. 아직 가장 무서운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끝도 없이 버티고 있어. 빨리 이 녀석을 없애고 지오를 찾는 것이 낫겠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루크는 비로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목표로 했던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펠나의 자식들이었다. 각기 다른 무기를 든 네 명의 여자가 나타나자 분위기는 반전이 되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의뢰자로부터 펠나의 자식들이 도움을 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었다. 비록 악마를 섬기는 자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탐탁치는 않았지만 눈앞의 괴물을 없앨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루크는 펠나의 자식들이 나타나자 로바의 다리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들 넷이 한꺼번에 공격하기 좋은 자리를 주는 것은 위험했다.

“그런 골렘 뒤에 숨으면 살 것 같아?”

펠나의 자식들은 갑자기 양손에 힘을 모았다. 암흑의 마법을 쓸 작정이다.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외쳤다.

“화염 마법을 골렘에게 날려!”

마법사들은 일제히 그 말에 따랐다. 뜨거운 화염이 로바의 상체를 감싼다. 거기에 펠나의 자식들이 암흑의 힘을 쏟자, 로바는 상체부터 천천히 녹아갔다. 루크는 마법이 집중되어 녹고 있는 로바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로바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어깨 부분까지 녹아가고 있었다.


“로바?”

지오를 끌고 올라가던 로나는 로바의 이상 징후를 감지했다. 위험했다. 마법석이 뜨거운 열에 점차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이상한 상태에서도 로나에게 있어 로바는 특별한 존재였다.

“로바!”

로나는 지오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갑자기 위로 날듯이 달렸다.

“로나! 날 두고 가면 어떻게 해?”

지오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로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골렘이 잘못하면 영원히 소멸할 수도 있는 위기인 것이다. 위쪽으로 날아가듯 달리는 로나를 바라보며 욕을 퍼붓던 지오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여기 하나가 숨어 있었네?”

지오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보니 붉은 눈의 여자가 미소를 짓고 있다. 들고 있는 채찍은 어디서 많이 본 채찍이었다. 예전 키루스가 들고 있던 채찍이다. 그리고 그 채찍이 살아있는 뱀처럼 뻗어 나와 지오를 막 덮치려 하고 있었다.

“어어?”

지오는 채찍을 피하려고 무심결에 손을 놓는다는 것이 양손을 모두 놓고 말았다. 놀란 여자가 빠르게 채찍을 놀렸지만 간발의 차이로 지오의 머리를 스치며 땅을 때렸다.

“으아아아!”

지오는 비탈을 다시 구르기 시작했고, 그 뒤를 채찍을 가진 여자가 뒤쫓았다. 그러나 비탈은 위험해서 빠르게 쫓을 수 없었고, 지오는 점차 더 빨리 굴렀다. 그리고 로나가 썬더스태프로 파두었던 완충지대 옆을 그대로 스치고 지나가더니 작은 바위 턱에 걸려 붕 떠올랐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주 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지오는 수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절벽이었다.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절벽이다.

“살려줘어어어!”

메아리치듯 지오의 소리가 땅으로 꺼져간다. 그 모습에 채찍을 든 여자는 아깝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한 명이 저절로 처리가 되었으니 다른 동료를 도와 나머지도 없애려 하는 것이다.


“으아아아악!”

떨어지는 지오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워낙 높은 절벽이라 떨어지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바닥이 보이는 순간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헤나! 제발 살려줘!”

지오는 외쳤지만 불행히도 헤나는 그곳에 없었다.

“제길! 누구라도 좀 살려줘!”

눈물이 흘렀지만 눈물방울은 위로 올라갔다. 떨어지는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죽을 것이다. 그 와중에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레미다. 평소처럼 그렇게 밝은 얼굴로 웃고 있다. 지오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레미야.”

“뭐가요?”

지오는 환청이 들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청이 아니었다. 낮은 숨결이 지오의 볼을 간지럽힌다. 어느 사이에 지오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푸득푸득!

아래로 향하는 중력에 저항하는 힘찬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지오는 점차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지오는 용기를 내어 아래를 보았다. 뾰족한 돌과 짐승의 뼈가 널려 있는 바닥의 모습이 보인다. 떨어지기 직전에 다시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지오의 시야에 검은 피막으로 덮인 기다란 날개가 보였다. 예전에 봤던 다크엘프 하디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볼드와 같은 마족에 가까운 날개였다. 지오는 이제 자신의 볼을 간질이는 숨결의 주인공을 조심스레 보았다.

“레미?”

“네?”

레미가 대답을 한다. 지오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은 레미였다. 그리고 레미는 등에 달린 커다란 날개를 연신 움직이며 지오를 절벽 위쪽으로 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니 지오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우리 레미가 살아있었구나! 우리… 우리 레미가 살아있었구나!”

지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즘 들어 생긴 병이 또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다. 레미는 지오가 울자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은 절벽 위로 올려야 하기에 부지런히 날갯짓을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날갯짓이 힘들 정도로 지오가 레미를 꽉 붙들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오님, 울지 마세요. 지오님이 울면 레미도 슬퍼져요.”

레미는 울고 있는 지오를 달래며 그렇게 위로 위로 힘겹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

정연란으로 이동했군요^^

혼란이 없어 다행입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정규 - 로엔 (bn_060)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3-03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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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녹색눈동자 - 89. 안녕 로나(3) +4 08.01.25 1,157 7 21쪽
93 녹색눈동자 - 88. 안녕 로나(2) +7 08.01.23 1,102 4 24쪽
92 녹색눈동자 - 87. 안녕 로나(1) +8 08.01.22 1,053 5 20쪽
91 녹색눈동자 - 86. 고대의 무기 +5 08.01.21 1,224 5 21쪽
» 녹색눈동자 - 85. 남색의 활(2) +9 08.01.19 1,135 7 22쪽
89 녹색눈동자 - 84. 남색의 활(1) +6 08.01.17 1,044 4 20쪽
88 녹색눈동자 - 83. 회유(2) +11 08.01.16 1,043 3 23쪽
87 녹색눈동자 - 82. 회유(1) +7 08.01.14 1,204 5 22쪽
86 녹색눈동자 - 81. 한밤의 습격 +6 08.01.13 1,202 10 20쪽
85 녹색눈동자 - 80. 아놀드와의 재회 +4 08.01.12 1,219 4 20쪽
84 녹색눈동자 - 79. 주도권 +7 08.01.11 1,625 5 21쪽
83 녹색눈동자 - 78. 로나의 변화 +6 08.01.10 1,041 7 24쪽
82 녹색눈동자 - 77. 기억의 조각 +4 08.01.09 965 5 22쪽
81 녹색눈동자 - 76. 심문 +7 08.01.08 1,077 4 23쪽
80 녹색눈동자 - 75. 임시족장 니아 +5 08.01.07 1,609 4 20쪽
79 녹색눈동자 - 74. 바다 위의 전투(2) +6 08.01.05 1,193 6 22쪽
78 녹색눈동자 - 73. 바다 위의 전투(1) +6 08.01.04 1,601 4 20쪽
77 녹색눈동자 - 72. 살인 +6 08.01.02 1,349 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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