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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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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148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5.03 13:59
조회
346
추천
6
글자
10쪽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3)

DUMMY

[사이린]


사이린은 무척 화가 나있었다. 매표소 직원이 배표를 팔지 않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입고 있는 옷이 좋지 않아 돈이 없어 보여 표를 팔지 않는 건 줄로 알고 정확한 뱃삯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직원은 오히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거, 여자는 혼자서 배 타지 못한다니까. 남자가 한 명이라도 동행 해야 해요.”

애써 정중하게 말했지만 비웃음이 한껏 묻어있는 말투였다. 사이린은 매표소 창구를 주먹으로 힘껏 치고 싶었지만 입으로 그르렁 소리만 내고 돌아섰다. 직원은 그녀의 등에 대고 한숨을 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얼핏 보니 여자는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는 사람은 가족 아니면 애인, 남편과 함께였다. 여자 혼자이거나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전혀 없었다.

사이린은 먼발치에서 돌 벽에 기대어 눈에 힘을 주고 매표소를 한없이 노려봤다. 방금 일어난 일을 눈 앞에서 목격한 직원과 줄을 선 사람들은 그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체했다. 직원은 일을 하는 도중에 눈만 움직여 사이린을 훔쳐봤다. 그럴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 섬뜩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이린은 어디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지만, 직원은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아 등을 피고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한참을 노려보고 있던 사이린이 손가락으로 눈을 쓰다듬더니 갑자기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직원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멀리서 계속 노려보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으나 일의 원인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뭔가 잘못되면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직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뒤쪽을 불안하게 바라보자 표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도 직원의 시선을 쫓아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 뒤에 서있던 부인과 아이들도 뒤를 돌아봤고 어느새 줄에 서있는 모든 사람이 사이린을 보고 있었다.

사이린이 웅크리고 죽은 듯이 앉아있던 시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한 생각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줄을 선 사람 중 한 명이 염려의 말을 하러 입을 열려는 순간 사이린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두 번 정도 더 움직이더니 손가락으로 여전히 눈을 비비고 있는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에 뭔가가 들어갔는데 그게 너무 아파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린은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노려보기를 하기 위해 눈을 떴다. 그러자 매표소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줄을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표를 구입해 배에 올랐다. 사이린은 서있던 자리를 고수하며 낡디 낡은 배가 떠날 때까지 매표소를 노려보려 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서있었더니 다리가 아파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버렸다. 주변의 눈총을 샀지만 눈만은 꿋꿋하게 매표소를 노려봤다. 비록 눈에 준 힘은 아까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지만. 매표소 직원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매표소 밖으로 나와 사이린에게 걸어갔다. 직원이 바로 앞에 왔을 때 사이린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직원을 올려봤다.

“슬슬 죄책감이 드시나요?”

다 큰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원망과 피곤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사이린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헛기침으로 웃음을 무마하고 얼굴 표정을 가지런히 했다.

“이렇게 해도 안됩니다. 여자 혼자서 배를 타지 못하는 건 오래 된 규칙이에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어요.”

누가 들어도 흠집을 발견할 수 없는 완벽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이린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여자는 왜 혼자 배를 못 타는 거야?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직원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머리 속이 잠시 새하얘졌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래왔던 것이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구나 했을 뿐이다.

“전 잘 모르겠네요.”

“쳇, 쓸모 없네.”

그 말은 직원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너무나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아까 전부터 쭉 쌓여왔던 불만과 합쳐져 결국 직원으로 하여금 눈앞의 여자가 손님이 아닌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글쎄요.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저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여기 새벽에 나가는 배도 있지 않나?”

사이린이 꺼낸 새로운 주제는 직원의 머리를 다시 한번 멈추게 만들었다. 저 멀리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곳이 아닌 단순히 강을 따라 이동용 배만 띄우는 이 곳에서 자신이 아는 한 새벽에 나가는 배는 한대도 없었다.

“새벽에 나가는 배는 없습니다.” 직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상하네.”

사이린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 바람에 먼지가 여기저기 날리다가 그 중 하나가 직원의 입안에 들어가 기침을 일으켰다.

“아, 미안.” 사이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게 그 얼굴을 보자마자 아직 직원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적개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여자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대신 자리했다.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이린은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직원은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매표소로 돌아가다가 문득 자기가 왜 반말을 들어야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표 구입을 거절당한 사이린은 다른 방법을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꼭 배를 타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일단 수도원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 때 마을을 떠나는 배가 보였기 때문에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분명 수도원에서 나올 때 배가 하나 나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때가 새벽이 아니라면 시간 개념을 다시 잡아야 한다. 기억해보면 해가 떠올라 주변이 밝아졌을 때, 배는 이미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이 말이 사실이어서 배가 새벽에 다니지 않는 것이라 해도 여자 혼자서 배를 타지 못한다는 사실이 기분을 언짢게 했다. ‘아니, 여자 혼자가 아니지.’ 몇십 명이나 되는 단체라도 여자들만 모여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걸을까?’ 하지만 이미 배라는 매력적인 운송수단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발도 아프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걷기는 하기 싫었다. 거기에 여자 혼자서 사람이 없는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못된 놈들의 표적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웬만한 나쁜 일이 알아서 피해가는 환상적인 운의 소유자인 리슈넬 언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도 되겠지만, 아쉽게도 사이린은 그렇게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어떻게 해결할 자신은 충분히 있었지만 예방이 최우선이었다.

이 도시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 상대적으로 사람이 없는 강가에도 돌로 반듯하게 길이 나있었다. 강 위에 얹혀진 저녁 노을이 약해지자 그나마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이린은 이제 잠자리 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주머니에 남은 돈을 수 차례 확인했지만 뱃삯을 간신히 치를 돈이었다. 혹시나 가방에 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을 뒤적여봤지만 에이린의 말 한대로 먹을 거 몇 가지만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는 조금 거짓말하고 좀 더 챙겨줘도 괜찮은데… 사이린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종이에 쌓인 말린 과일은 아주 달아서 마음에 들었다.

강 주변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제방 위쪽에 앉아 말린 과일을 깨작거렸다. 모두 다 합쳐 한 주먹 거리밖에 안됐기 때문에 두고두고 먹을 심산이었다. 검붉은 말린 살구를 한 개를 먹고 종이 안의 말린 과일들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입 안에 남아있는 단맛이 더 먹으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다 먹으면 나중에 후회할 게 뻔했다. 사이린은 눈을 질끈 감고 과일을 종이에 다시 싸서 가방 안에 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뿌듯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단맛의 유혹이 계속 되자 두 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기분이 가라앉는 조건은 강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짙붉은 노을을 잠시 동안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이린은 다시 가방을 뒤적거렸다. 손 끝에 말린 과일이 쌓인 종이가 느껴졌지만 지금 찾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가방에서 꺼낸 것은 검정색의 흙 피리였다. 수도원에 있을 때는 조용히 생활해야 해서 아예 처음부터 압수당했기 때문에 가끔씩 너무 불고 싶어지는 때가 있었다. 가방이 있어 편해진 것 중 하나는 이 흙 피리의 보관이다. 그 전에는 옷 안에 보관했는데 많이 불편했었다. 사이린은 주변을 둘려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피리를 입에 물었다. 서툴지만 청아한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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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백년전쟁
    작성일
    12.06.10 21:05
    No. 1

    사이린과 리슈넬의 관계가 처음 소개됐군요.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싶어 되짚어보니 홍보하시는 글을 본 것이더라구요.

    지나치게 관여하는 게 아닌가 해서 저어되지만, 이곳에도 프롤로그 내지는 공지 형식을 취해서 어떤 내용의 글인지 소개가 된다면 보기에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1 이윤후
    작성일
    12.06.11 12:10
    No. 2

    백년전쟁 //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확실히 길의 중간에서는 제목만으로 감이 안 오기 때문에 소개가 있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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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5) 12.05.07 350 6 15쪽
4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4) +2 12.05.04 321 6 18쪽
»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3) +2 12.05.03 347 6 10쪽
2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2) +2 12.05.02 423 5 13쪽
1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1) +4 12.05.01 1,339 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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