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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이윤후

길의 중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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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윤후
작품등록일 :
2012.07.11 15:56
최근연재일 :
2012.07.11 15:56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2,150
추천수 :
162
글자수 :
216,761

작성
12.05.02 12:34
조회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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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3쪽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2)

DUMMY

[사이린]



“사이린씨! 이리 와봐요!”

자신을 지목하는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놀란 사이린은 막 입안에 넣으려던 사탕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사탕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재빨리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종이로 감싸 주머니에 넣었다.

수도원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수녀인 하미로서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저 복도 너머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매서워서 도저히 뛰어가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이린은 올린 머리가 흐트러졌는지 손으로 짚으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사이린이 가까이 오자 하미로서는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보란 듯이 나무 계단을 가리켰다.

“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 듣겠어요? 여기도 저기도 먼지투성이잖아요.”

“그러게요. 제가 청소했을 때는 깨끗했는데 그 사이 먼지가 쌓였나 봐요.”

“사이린씨.”

하미로서는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말없이 빗자루를 건넸다. 이미 수많은 경험으로 인해 반항은 쓸모 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이린은 힘없이 빗자루를 받아 들고 다시 계단을 청소했다.






“으아으아으아-!”

해가 질 때까지 청소를 한 사이린은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넘어지면서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움직이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자기 침대 위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에이린이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사이린은 얼마 전 거지꼴로 수도원에 나타나 막무가내로 잠자리를 요구했었다. 수도원 측에서는 무례하게 구는 거지 한 명을 꼴사납게 생각해 거절의 자세를 일관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에이린이 “저기, 제 방이 비는데요.”라고 한 말이 구멍이 됐다. 결국 수도원은 말을 꺼낸 에이린과 합방을 시켰다.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대신 수도원 측에서는 사이린에게 수도복을 입고 기본적인 규칙을 따르며 아침 저녁 두 번의 청소 구역을 배정했다. 그리고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목욕을 할 것을 의무로 정했다. 사이린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도저히 인간의 냄새라 할 수 없었다.

지칠 때까지 몸을 신나게 휘두른 사이린은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거 참 이상하네. 왜 난 깨끗이 하는 거 같은데 그 할멈은 맨날 더럽다고 하는 거지?”

“그건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네요.”

발작이 끝나길 기다리던 에이린이 책을 덮으며 말했다.

“관점이요?”

“그러니까, 음… 사이린씨는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 떠돌았죠?”

그 말에 사이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네. 참 많이도 돌아다녔죠. 이런 생활을 한 게 몇 년 째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그거예요. 저희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곳에서 생활했지만 사이린씨는 항상 자연 속에 있었으니까 깨끗함의 관점이 다른 거죠.”

손가락을 들어가면서 이것이 정답이라 확신했지만 사이린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끄응… 그런가? 뭐 어쨌든 전 조금 있으면 여길 나갈 거지만.”

“에? 왜요?” 에이린은 깜짝 놀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알면서 뭘 그래요. 손님으로 있기에는 벌써 너무 오래 있었잖아요.”

“설마 방금 제가 한 말 때문은 아니죠?”

에이린이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아니죠. 그냥 나가야 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원한다면 저처럼 수녀가 될 수도 있어요.”

에이린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사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봐와서 아시겠지만 제가 조용히 있긴 힘든 성격이잖아요.”

“그래도…”

“이 얘기는 여기서 끝! 잘 자요.” 라고 하면서 사이린은 멋대로 촛불을 껐다. 원래 밤 늦게까지 책을 읽으려고 했던 에이린은 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촛불을 다시 붙일까 고민하다가 아쉬운 마음과 함께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부터 사이린은 바로 뒤에 서있는 하미로서의 감시를 받으며 계단을 청소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사이린이 중간에 졸 때마다 하미로서는 귀신같이 알아채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묶은 머리를 인정사정 없이 잡아당겼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기준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청소를 하던 사이린은 툭 던지듯이 말을 걸었다.

“에, 하미로서씨. 저 내일 나가요.”

“아까 전에 에이린에게 들었어요. 드디어 골칫덩이가 사라진다니 정말 기쁩니다.”

특별히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내심 아쉽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기분이 상했다.

“아니, 내일 나가는 사람한테 이렇게 힘든 청소를 시켜도 되는 건가요?”

“아직 나가건 아니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어서 도저히 반격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궁시렁 거리며 계단을 힘껏 쓸어 내리자 먼지가 부풀어 올랐다. 하미로서는 미간을 찡그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당장 나가면 청소는 안 해도 돼요.”

사이린은 포기하고 꿍한 표정으로 빗자루 질을 계속했다. 먼지는 계속 천천히 부풀어오르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때문에 사이린이 빗자루 질을 한 곳은 깨끗했다가도 이내 다시 더러워졌다. 하미로서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누르면서 화를 삼켰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여태까지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다 했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까지 모두 청소하고 두 팔을 들며 소리쳤지만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부풀어 올랐던 먼지가 계단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하미로서는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냉정하게 말했다.

“다시 하세요.”

절망 섞인 신음소리가 사이린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하미로서가 손뼉을 쳐 모두의 시선을 모으더니 말했다.

“내일은 드디어 사이린씨가 수도원을 나갑니다.”

그 말에 식사를 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구석에 조용히 있던 사이린에게 몰렸다. 사이린은 갑작스러운 관심에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한 웃음 밖에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하미로서가 말을 이었다.

“어찌되었던 한동안 같이 지냈던 식구로서 오늘은 사이린씨의 앞날을 위해 우리 모두 짧은 기도를 하도록 합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사이린은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그냥 원래 없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싶었는데 하미로서가 허락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일 때 몇몇 수녀가 사이린에게 다가와 헤어지게 되어 아쉽다는 말을 건넸다. 대부분 앞으로의 목표와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어봤는데 그럴 때마다 사이린은 두루뭉실하게 대답했다. 곁에 있던 에이린이 “그래도 많은 사람들하고 사귀었었네요.” 라고 말할 땐 배시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얘기하면서도 사이린은 내심 하미로서가 다가와 말을 걸어주길 기대했지만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매일같이 청소하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중간쯤 올랐을 때, 사이린은 걸음을 멈추고 계단을 자세히 쳐다봤다. 늦은 시간이었고 촛불로는 어둠을 몰아내기 부족했기 때문에 계단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확인 할 수 없었다. 뒤따라오던 에이린이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떨어뜨리셨어요?”

“아니요. 그냥 한 번 보게 되네요.”

“그것도 일종의 직업병 아니에요?”라고 에이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때, 위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오자 사이린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들어낸 사람은 하미로서였다. 그녀는 에이린의 인사를 받은 다음 사이린을 보며 말했다.

“사이린씨. 내일 떠나실 때는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침 일찍 나가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시겠지만 옷과 그 외 수도원 물건들은 반납해주시고요.”

“그 정도는 안다고요.”

“그럼. 다음에 봤을 때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이기를 바라겠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하미로서의 뒤에다 사이린은 혀를 삐죽 내밀었다가 에이린이 제지하자 집어넣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이린이 침대 위로 몸을 던지는 바람에 큰 소리가 났다. 그 장소에 처음 있는 사람이라면 깜짝 놀랐겠지만 이미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에이린은 무덤덤하게 넘어갔다.

“에이린씨는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없어요?”

사이린이 침대 위를 뒹굴면서 말했다. 에이린은 읽으려고 손을 뻗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 중에는 사이린은 왜 저리 가만히 있지 못할까 하는 의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글쎄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요. 딱히 아는 곳도 없고…”

“진짜요?”

“진짜요.”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빠른 답변이었다.

사이린은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침대 위에서 몸을 돌려 정자세로 누웠다.

“그래도 한번쯤은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두 번 하라면 고민되긴 하지만.”

“그러면 내일 나가는 것도 꽤 고민되시겠네요.”

“흐음, 그건 좀 애매하네요. 일단 불안하지는 않아요.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하미로서씨. 인정머리도 없지. 남들 일어나기 전에 조용히 나가라니. 식사 시간에 기도 해준 건 고맙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죠. 사이린씨 때문에 다른 수녀님들 일과가 흐트러져선 안되니까요.”

사이린이 원망과 슬픔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자 에이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제가 배웅해드릴게요. 그걸로라도 만족해주세요.”

사이린은 어린 아이처럼 뚱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린은 그녀에게 한번 웃어주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책에 집중하려고 해도 방금 전 사이린이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가보고 싶은 곳.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곳은 옛날에 살던 집이었다. 어디 있는 지도 모르고 형체만 조금 기억나는 옛날 집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족과 관계된 기억이었다.

집 뒤로는 조그마한 개천이 흐르고 집 앞으로는 잔가지와 녹색 잎이 수북한 나무가 있는 곳. 에이린은 현실적으로 기억에 의존해서 그곳을 찾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찾는 것을 시도도 안 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기만 기다렸지만 여태까지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두 사람은 수도원 문밖에 서있었다. 어젯밤에 한 약속대로 사이린은 수도원의 물건을 모두 반납했다. 때문에 수도원에 처음 왔던 날 입었던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사이린은 무심결에 내뿜은 숨결이 하얗게 눈에 보이자 깜짝 놀랐다. 여름이 코 앞인데도 새벽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추웠다. 옷이 얇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춥다고 할 수 있었다.

“뭔가 감동적인 인사 같은걸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네요.”

사이린이 허탈한 심정을 담아 말하자 에이린이 조그맣게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넸다.

“먹을 거리 몇 개 넣었어요. 가방은 하미로서님이 주셨고요.”

“그 사람이?”

사이린은 짐짓 놀라면서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을 받았다. 깨끗이 빨긴 했으나 오랜 시간 동안 거칠게 다뤄져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 옷에 매끈한 새 가방이 걸쳐진 모습은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사이린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가방이 생겼으니까 이제 물건 보관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그러게요. 예전에는 어떻게 했어요?”

“음… 그냥 되는 대로요. 주머니가 빵빵 해질 때까지 넣어본 적도 있고 치마로 싼 적도 있고. 지금도 여기에 그 자국이 있을 텐데.” 그러면서 낡은 치마를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주변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이린은 가방을 몇 번 이나 고쳐 매면서 줄을 조정했다. 그 모습은 숙련된 여행자보다 새 물건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사이린은 수도원을 올려보며 잠깐이지만 감상에 잠겼다.

“막상 가려니까 좀 그렇네요. 에이린씨랑은 이름도 비슷해서 좋았는데.”

“인연이 되면 언젠가 또 만나겠죠.”

“그렇네요. 에이린씨도 평생 여기 있지는 않을 테고.”

“그럼요. 몸 조심하세요.”

“에이린씨도요.”

사이린은 손을 한번 흔들고 바로 도시로 이어진 길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오히려 선명해졌다. 에이린은 사이린이 마을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지켜봤다. “에이린씨도 평생 여기 있지는 않을 테고” 이 말이 계속 남아 가슴을 옥죄었다. 신경 쓰지 말자. 에이린은 두 손으로 뺨을 살짝 두드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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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백년전쟁
    작성일
    12.06.09 22:43
    No. 1

    안녕하세요.
    글이 잔잔해서 그런지 편하게 읽혀서 좋네요.
    글의 중간즈음에 '두리뭉실'이라고 되어있는데요.
    네 글자 모두 '우'가 들어간 '두루뭉술'이 바른 표기라고 합니다.

    선호작 추가하고 갑니다. 힘내세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11 이윤후
    작성일
    12.06.10 15:23
    No. 2

    백년전쟁 // 감사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도 수정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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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중간에서 - 1장, 여름으로(2) +2 12.05.02 424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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