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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쟁이 님의 서재입니다.

잿빛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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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쟁이
작품등록일 :
2016.01.10 21:43
최근연재일 :
2016.01.29 08:05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12,844
추천수 :
257
글자수 :
109,885

작성
16.01.14 19:07
조회
492
추천
13
글자
10쪽

1. 영원의 돌(11)

DUMMY

“이리나.”


넬슨이 두툼한 책을 쾅 덮으며 말했다. 붉게 달아오른 양 볼이 그의 흥분상태를 보여줬다. 마치 칭찬받길 원하는 소년의 모습처럼. 다만 앞의 남자는 칭찬에 매우 인색해 넬슨의 흥분은 곧 맥주김 빠지듯 식었다. 그래도 자부심은 여전했다. 넬슨이 자신있게 말했다.


“당신이 준 편지의 주인공은 이리나라는 여자가 틀림없소.”


“확실한가?”


“확실하오.”


“대단하군.”


짤막하고 무미건조했지만 넬슨은 남자도 내심 놀랐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눈빛이 그 증거였다. 몇 시간 전 남자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편지의 주인공을 죽일 듯 이글이글 타고 있었는데 반해, 지금은 분노는 여전했으나 차분했다. 더욱이 그 눈빛 속에 넬슨을 인정해주는 낌새가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시선은 넬슨 앞의 책표지에 꽂혀있었다.


‘아타낙시아 마법학교 학생명부’


옆에 주석으로 달린 종이에는 연도를 의미하는 804가 적혀 있었다.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냈지?”


“흠... 흠... 그게 사업 상의 비밀이라...”


넬슨은 헛기침하며 대화를 피했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나지 않고 빤히 그를 쳐다봤다.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본다거나 하는 행동은 없었지만 그마저도 넬슨은 마주칠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눈을 내리깔으니 남자의 주먹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펴져 있던 남자의 손은 어느새 다시 꽈악 오므려져 있었다. 넬슨의 팔뚝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 그렇다 해도 알려드릴 수...”


남자의 주먹이 위로 올라왔다. 촛불에 비친 주먹에 굳은살이 훤히 드러났다. 넬슨에게는 그정도면 충분했다.


“벼... 별거 아닙니다. 그 편지가 씌여진 양피지를 분석해봤습니다.”


“양피지?”


남자의 고개가 살짝 갸웃했다. 넬슨은 스스로 긴장하지 말자고 되뇌였다. 어느새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뀐 것도 모르면서.


“네, 그 양피지는 뎃산 지방의 산양 가죽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쪽 산양 가죽으로 만들어진 양피지는 일반 양피지보다 두껍고 무겁지만 아주 질깁니다. 특히 불에 매우 강해 나라에서 저장하는 공문서나 마법 실험을 하는 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합니다. 사고가 나도 훼손이 덜 되니까요.”


여기까지 말하고 넬슨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남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남자는 아직 주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넬슨은 그것을 끝까지 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에... 이런 효율성 때문에 뎃산 지방의 양피지는 거의 대부분 왕실에서 구입합니다. 서민들은 쓰지 않는 양피지죠. 이와 같은 점에서 미루어 저흰 이 편지의 주인공이 귀한 집 딸내미거나 마법사, 혹은 마법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여자라고 추측했습니다. 거기다 당신...”


남자의 호칭을 두고 넬슨이 잠시 멈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호칭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넬슨은 얘기를 계속 했다.


“당신한테 아저씨라 한 걸 보아 아주 젊은 여자고, 금품을 가져갔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 귀한 집 딸내미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더욱이 그런 여자가 당신을 직접 업고 왔을리는 없죠. 항상 딸려가는 놈들이 있으니까요.”


끄덕


“따라서 그쪽 가능성은 아주 낮아 제외시켰습니다. 그렇다고 그 여자가 마법사일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마법사란 존재가 애초에 드물지만, 그렇게 드문 마법사 중에서도 젊은 여자마법사는 정말 드뭅니다.”


끄덕


“그래서 저흰 마지막 가능성, 이 여자는 마법사는 아니되 마법과 연관이 있는 여자라고 추측했습니다. 거기다 편지로 당사자의 필체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법 상점, 마탑, 마탑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마법사 등등 닥치는 대로 조사해 그 나이대의 여자들을 추린 뒤, 형편이 좋지 않거나 급전이 필요한 여자들을 우선 순위로 조사해나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마법 상점 집 딸, 마탑의 마법사들의 시중, 마법 학교에 재학 중인 여학생들 등등의 글씨를 구해 편지의 필체와 대조해보았죠. 그렇게 주욱 하다보니 일치하는 필체가 하나 있더군요.”


남자의 주먹은 완전히 내려가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넬슨은 다시 신이 났다. 자신감도 어느정도 되찾았다. 물론 여전히 존댓말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게 이 여자란 말인가?”


“네. 이리나, 평민이라 성은 없습니다. 올해 22살, 마법학교에 재학 중인 몇 안 되는 평민입니다. 마법학교의 평민들이 대부분 부유한 지식층인데 반해 이 여자 집안은 닐토란 지방의 그저 그런 평민입니다. 가끔 이런 철부지들이 있긴 하죠, 마법사라는 로망 하나만 보고 오는...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항상 돈이 부족할 건 뻔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등록금 철이죠. 이리나라는 아가씨에게는 매우 돈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머지 자잘한 증거들도 모두 일치합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있지?”


“마법학교 여학생 기숙사 2층 맨 끝방, 호실로는 209호입니다.”


넬슨은 남자가 자신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려고 마법학교의 행정원을 꾀는데 퍼부은 노력을 알긴 알까 의문이었다. 비록 맹장 길드가 탈드론의 뒷골목을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마법 학교의 직원을 매수한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조직원들의 인맥을 잇고 이어 갖은 회유와 구워삶기를, 정말 매우 짧은 시간만에 해냈다. 넬슨은 부하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한 적이 있었나 떠올려봤다. 없다. 그가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부하들은 훨씬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넬슨은 자기도 부하를 패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마스터로 컨셉을 바꿔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포기했다. 그의 주먹은 누구처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이제 됐습니까?”


“마법학교는 어딨지?”


“성 가운데 왕의 광장에서 북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 가다 왼쪽으로 가면 됩니다. 워낙 규모가 큰 곳이라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당신 이름이 뭐지?”


남자가 이름을 묻는다. 넬슨은 잠깐 고민했지만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넬슨이라고 합니다.”


“이 조직은?”


“맹장 길드입니다.”


“맹장 길드? 이름이 특이하군.”


“맹장은 몸에서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영 도움이 안되는 기관이죠. 도움을 주기는커녕 맹장염에라도 걸리면 생사가 오락가락합니다. 우리같은 것들은 나라에 도움이 안되지만 우릴 건드린다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들 처지가 맹장같아서 이름지었습니다.”


“맹장 길드... 그렇군.”


남자의 감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넬슨은 아주 희미하게 그가 웃는 모습을 본 것 같아 갸웃했다. 그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괜한 자존심에 사실대로 말한 게 아닌지...’


“고마웠다. 넬슨, 맹장 길드의 마스터.”


남자는 뒤로 돌았다. 이대로라면 저 남자는 그냥 가버린다. 맹장 길드를 단신으로 초토화시킨 남자가 길드 마스터의 방까지 왔다가 태연히 가버리는 것이다. 넬슨의 사전에, 아니 그전에 맹장 길드의 마스터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솟았는지 자신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넬슨이 버럭 외쳤다.


“넌!”


남자가 멈춰섰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 동작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 남자가 다 돌아섰을 즈음에는 방 안의 공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긴장상태가 되었다. 넬슨은 남자를 이글이글 노려보면서 외쳤다.


“상대방 이름을 물었으면 네 이름도 말해야지. 이 돌주먹 자식아, 네 이름은 뭐냐!”


마스터의 도발에 맹장 길드의 조직원들은 단체로 앞이 캄캄해졌다. 어떤 이는 벌써 바닥에 기절해 입에서 뽀글뽀글 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넬슨을 보는 남자의 심정은 다소 복잡했다. 존댓말과 반말을 번갈아하는 이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반면 넬슨은 남자를 태워죽일 듯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 깍듯한 존댓말에 벌벌 떨며 정보를 알려주던 사람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방안은 고요했다. 넬슨은 아마 10초쯤 지났을 거라 짐작했다.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10초가 10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뒤늦게 ‘그래도 존댓말은 붙일 걸 그랬나.’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물컵마저 깨지기 직전인 게 지금의 상황이다. 넬슨이 뒤에서 조그맣게 거품무는 소리를 듣고 기절한 조직원을 속으로 병신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순간이었다.


“아둠.”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 한 마디가 방안 분위기에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왔다. 여전히 팽팽하고, 차갑고, 무거웠으나 이제 조직원 중 맞아죽을까 공포를 느끼는 자는 사라졌다. 남자가 다시 강조했다.


“내 이름은 아둠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투벅투벅 나갔다. 맹장길드 본부는 여전히 조용했다. 점점 작아지는 남자의 발소리만이 그가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조직원들은 남자가 떠나자 새삼 그들이 사랑있음을 느꼈다. 발작하던 놈도 어느정도 진정된 모양이다. 넬슨은 낮게 욕지거리했다.


“제길, 어디서 이름도 가명같은 새끼가...”


아둠. 넬슨은 그 가명같은 이름이 진짜라고 믿었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왠지 그 남자가 가명을 알려주진 않았을 거란 묘한 확신이 들었다.


“썅, 누가 들으면 가명인 줄 알겠네.”


정말 근거없는 확신이었다.


작가의말

문피아에 처음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게 1월 9일인데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연참대전에 참가했을걸 아쉽습니다. ㅎㅎ 다다음달을 노려야겠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6.01.21 20:45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7 찍쟁이
    작성일
    16.01.21 21:05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6.01.22 17:08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7 찍쟁이
    작성일
    16.01.29 18:43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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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 영원의 돌(22) 챕터1 마지막화. +10 16.01.21 371 9 9쪽
24 1. 영원의 돌(21-3) +3 16.01.21 419 4 6쪽
23 1. 영원의 돌(21-2) +1 16.01.21 321 6 7쪽
22 1. 영원의 돌(21-1) +3 16.01.20 333 4 6쪽
21 1. 영원의 돌(20) +5 16.01.19 375 7 13쪽
20 1. 영원의 돌(19) +3 16.01.19 446 7 7쪽
19 1. 영원의 돌(18) +3 16.01.19 406 8 12쪽
18 1. 영원의 돌(17) +3 16.01.18 519 7 10쪽
17 1. 영원의 돌(16-2) +4 16.01.17 386 10 9쪽
16 1. 영원의 돌(16) +4 16.01.16 532 10 6쪽
15 1. 영원의 돌(15) +1 16.01.15 474 7 3쪽
14 1. 영원의 돌(14) +1 16.01.15 535 10 7쪽
13 1. 영원의 돌(13) +2 16.01.15 465 10 11쪽
12 1. 영원의 돌(12) +4 16.01.14 373 11 14쪽
» 1. 영원의 돌(11) +4 16.01.14 493 13 10쪽
10 1. 영원의 돌(10) +3 16.01.14 413 11 13쪽
9 1. 영원의 돌(9) +1 16.01.13 390 10 3쪽
8 1. 영원의 돌(8) +3 16.01.13 430 11 7쪽
7 1. 영원의 돌(7) +3 16.01.13 458 10 8쪽
6 1. 영원의 돌(6) +2 16.01.12 408 9 3쪽
5 1. 영원의 돌(5) +1 16.01.12 597 13 8쪽
4 1. 영원의 돌(4) +3 16.01.12 665 16 9쪽
3 1. 영원의 돌(3) +1 16.01.12 423 15 8쪽
2 1. 영원의 돌(2) +6 16.01.11 470 1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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