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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 황금공자는 파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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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작품등록일 :
2022.05.11 11:22
최근연재일 :
2022.05.17 16:41
연재수 :
7 회
조회수 :
547
추천수 :
48
글자수 :
43,816

작성
22.05.16 16:20
조회
56
추천
3
글자
14쪽

5. 아크란(2)

DUMMY

2.


오래전이다.

너무나도 오래전의 이야기다.


500년 전.

아득하고 또 아득하여 어쩌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과거.


허나 아크란은 잊지 않았다.

잊지 않으려 입안에 바늘을 가득 물었다.


노인의 목이 제국의 바닥에 뒹굴거리면 그의 일생을 기록했다.

아이의 목이 성벽에 내걸리면 아이의 꿈과 미래를 추억하며 기록했다.

여인이 능욕당하고 화형당하면 그녀의 사랑을 기록했고 전사의 육신이 능지처참당하면 그가 행한 희생을 기록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아크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길 십수 년.

총 구천이백삼십칠.


첫 글을 배울 때.

역사를 되짚을 때.

문화를 익혀나갈 때.


아이의 꿈과 미래를 토대로 제 미래와 꿈을 그리고 노인이 일평생 쌓아 올린 지혜를 공부하고.

여인이 제 가족과 사람들에게 품은 사랑과 전사들이 마땅히 짊어진 희생을 가슴에 품었다.


그렇기에 아크란은 잊지 않는다.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행한 명령을.

유크라이아가 흩날린 황금의 무게를.

황금에 홀려 일족을 학살하던 대륙의 규합을.


아크란을 제외한 모든 이들. ‘세계’가 자신들에게 등을 돌렸던 그 날을.


아크란은- 아크란의 후예. 파트란 마흐란은 잊지 않는 것이다.


***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작게 내리깔며 떴다.


옅은 흑발 사이사이로 불그스름한 적색이 감도는 머릿결.

색이 바랜 듯 하얀빛을 품어 회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언젠가 제멋대로 추측하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제 놈들이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내거는 상징이 그녀에게는 적었다. 너무나도 옅었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러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며 그렇기에 감정을 연기하는 것 역시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지금의 나는 황금의 호법.

황금이 내건 맹세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가난에 오랜 세월 시달려 황금을 떠나지 못하고 곁에 머무는 조금 어리숙한 원수.


그 정도면 충분했다.

파트란의 역할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파트란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다.


자신은 왜 나선 것일까.


그가 맹세를 지키지도 못하고 뒈질까 봐?


그럴 리가.


일전의 상황. 그 누구도 공자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맞물린 주먹은 암벽을 무너트릴 용력을 품고 있었으나 살기를 내포하지 않았다.


휘두르는 이에게는 상대를 해할 의사가 없었으며 기다리는 이는 지루한 듯 그 주먹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키는 이는 금방이라도 나설 듯 주먹의 끝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트란이 나설 이유는 터럭도 없는 장난질에 가까운 분풀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파트란은 나섰다.

...사실 그 이유를 파트란은 모르지는 않았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무너진 탁자 위. 대리석 조각 따위에 짓이겨진 서류 뭉텅이. 그리고 바스러질 듯 그녀의 손아귀에서 구겨진 서류.


믿지 않았다.

이제는 이놈들이 우리를 기만하기 위해 개지랄을 한다고 여겼다.


맹세? 분명 허점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제 목숨을 구차하게 유지할 쥐구멍이 없을 리가 없다 여겼다.


그래서 몸소 그의 저택을 찾았다.

그가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는 날 그 목을 제 손으로 꺾어주려 그 본진에 쳐들어왔다.


그 뒤는 쉬웠다.


제 제안에 제대로 속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유지장치도 없이 파트란을 받아들였다.


그 후 수일 평생 누려온 것보다 값비싼 의류들 따위로 몸을 치장했고 관심도 없던 예법과 자세 따위를 배웠다. 너무도 쉽고 편했다.


...사실 조금 정도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긴 했다. 망할 집사가 너무도 깐깐해서.


그렇다고 하여도 연고도 없이 고향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아남고 이어가기 위해 싸워오던 그 날에는 티끌조차 비교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파트란은 데르마이안을 찾았다.


우리의 터전을 잡고 일족의 부흥을 일으킬 전초를 찾기 위해서.


데르마이안에는 그 기회가 널려 있으니.


제 원한을 단전 깊숙한 곳까지 억누르고 거짓된 연기를 그리며 제 감정만 참으면 충분히 그 전초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 제안을 가장 먼저 내민 작자가 황금의 후예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한 오라기의 빛조차 용납하지 않듯 집어삼키는 칠흑의 머릿결.

세상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듯 모순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제 누이와는 전혀 다르게 가문의 상징을 고스란히 타고난 황금의 후예.


그는 무심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너무도 거대한 맹세를 아무렇지 않게 거론했다.


듣는이도. 내뱉는 이도 믿지 않을 거짓 나부랭이에 가까운 제안을.


헌데 그 맹세가 거짓이 아니라고 황금의 후예는 주장한다. 제 목을 걸고서.


파트란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서류를 훑는다.


성지(聖地).


무신(武神) 아크란이 나고 자란 땅.


노인의 일생이 그곳에 이어졌고.

아이의 꿈과 미래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여인의 사랑이 그곳에서 시작되었고.

전사의 희생이 그곳을 위해 바쳐졌다.


구천이백삼십칠에 달하는 기록 속에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적이 없는 우리의 고향.


다시는 되찾지 못할 옛 과거 속에 홀로 남은 우리의 긍지.


파트란은 허리 숙여 그 서류를 제 손에 쥐고 탁탁 먼지를 털어내었다.


“지키셔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다.”

“저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도록 해라.”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땅하다.”


파트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황금의 후예- 루덴은 곧은 자세로 파트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속에 잔잔한 믿음이 깔려있듯 부드러웠다.


첫 만남부터 지금껏 그의 시선은 줄곧 그러했다.


그 시선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파트란은 대륙 그 누구보다 유크라이아에 원한이 깊을지도 모를 사람인데.

언제 어느 때 돌연 복수자가 되어버릴지 모를 사람인데.


저렇게 올곧은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것인지.

파트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해하려는 생각을 접고 파트란은 제가 정리한 서류 더미를 루덴에게 턱 내밀었다.


“굉장히 중요한 미래가 약속된 서류입니다. 땅바닥을 나뒹구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마치 경고하듯 내뱉는. 아니 분명 그런 의도를 담은 충고에도 루덴은 아무렇지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서류를 받았다.


그 모습이 괜스레 맘에 들지 않아 파트란의 미간이 슬쩍 구겨질 때.


“하! 그런 거였어? 네가 황족들을 나한테 내팽개치고 서브 홀 따위를 찾은 이유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아린이 어이없다는 듯 루덴과 파트란을 노려보았다.


아린은 기운을 갈무리하며 구기듯 제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훑었다.


“네가 아크란의 후예라 이거지? 보결로 입학한 것으로 짐작해 보면 정체를 숨기고 몰래 입학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숨기려면 좀 제대로 숨기지 그랬어? 저딴 병신에게 들킬 정도라면 누가 조사해도 알아차릴 수준이었을 텐데.”


노골적인 비하를 담은 그녀의 목소리에도 루덴은 관심 없다는 듯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오히려 아린의 말에 반응한 이는 파트란이었다.


파트란은 허술하게 제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이중 삼중으로 신분을 준비하여 아크란 부족과 엮일 거리조차 없도록 신중을 가했다. 제 실력을 보결 중에서도 아슬하게 입학할 정도의 둔재로 위장했다.


그럼에도 루덴은 파트란의 정체를 학기가 시작도 되기 전에 알아차렸으며 숨겨둔 실력까지 어느 정도는 파악하는 듯 보였다.


그 덕에 루덴의 정보력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 여겨 위험도를 높였건만 그 누이는 루덴을 병신이라 말한다.


위장인가? 제 오라비의 능력을 숨겨주기 위한?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아린의 태도는 너무도 일관적으로 사나웠다.


“너 후회 할 거야.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벌인 이유가 고작 이딴 여자 하나 때문이라면.”


아린이 확신하듯 거칠게 내뱉은 말.

그 말에 무심하게 감겨있던 루덴의 눈이 점차 벌어졌다.


잔잔하다. 그 검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적의도 없는 잔잔한 고요만이 담겨 있었다.


겨우 그것뿐이건만. 아린과 파트란은 이 유모를 중압감을 느꼈다.


“후회?”


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시 잠기던 그가 돌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모두가 하게 되겠지.”

“뭐? 무슨 의미야 그게?”

“글쎄. 네가 알아도 될 이야기는 아니다.”

“야!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버럭 소리치며 달려드는 아린에게 루덴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밀어냈다.


“이제 이유도 알았으니 그만 귀찮게 하고 물러나거라. 아니면 저때 거절한 식사라도 같이 하고파서 그러느냐?”

“누, 누가 네놈이랑 식사 따위를--”

“그러면 그만 가거라.”

“이...씨! 그래!! 간다! 가!”


계속되는 축객령에 열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아린이 확 등을 돌리며 제가 박살 낸 대문을 지나 성큼성큼 나아간다.


“좀 변하나 했더니...병신...”


입술을 꾹 씹으며 괴롭게 내뱉곤 그녀는 모습을 감췄다.


루덴은 아린이 떠나간 방향을 잠시 지켜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은 반드시 다를 것이다.”


이윽고 그리 혼자 다짐하듯 내뱉는 모습을 파트란은 지켜보았다.


3.


어느덧 저녁놀이 저물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살피니 창밖으로 주홍빛이 슬금슬금 방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형형각색으로 제 모습을 강조하던 세상은 어느덧 주홍색에 물들어 있었다.


오전 중 세상이 떠나갈 듯 소란스럽던 시간이 마치 허깨비처럼 느껴질 듯 조용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를 따르듯 심장의 박동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숨결이 점차 길게 이어진다.


길게 이어지는 호흡 속 미적지근하고 조금 아늑한 자그마한 이물의 침투함을 느꼈다.


이물은 혈관을 타고 흐르며 가슴께 중심의 심장을 툭툭 괜스레 자극하듯이 건드렸다.


두근- 그 자극에 멈춰있던 심장이 꿈틀 박동하였다.


그 박동이 내 몸을 타고 귀를 울렸다.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겹치듯이 고막을 울렸다.

모순적이게도 심장의 박동은 하나가 아니었다.


푸른 심장.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붉은 심장과는 다르게 후천적인 배움으로 혹은 재능으로 발아하는 두 번째 심장이 이물- 마나를 느끼며 제 가동을 알린 것이었다.


작고 미력하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박동하던 심장에 비교하자면 씨앗조차 되지 못했다.


최초의 루덴은 이리도 허약하다.


그럼에도 나는 걱정되지 않았다.


기억은 건재하고 수십의 생에 동안 쌓아왔던 깨달음은 거대한 성이 되어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비록 나약한 몸뚱이와 심장으로 되돌아와 그들을 10할 활용하지는 못할지언정 제 한 몸 간수하는 것쯤은 충분했다.


더군다나 이번 생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누군가를 보살펴 줄 필요도 없으며 위할 필요도 없으며 이끌어줄 필요도 없다.


그 사실이 커다란 개방감을 내게 전해주었다.


고작 마음가짐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세상이 뒤바뀐 것 같았다.


앞으로 이틀 후면 드디어 학기가 시작된다.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스토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흐름이 다시 새차게 흘러갈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자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힘을 키우는 것은 당연하다.

찰나라도 완전한 평안을 얻기 위해 행하지 않던 단련을 시작할 것은 당연하다.


세력을 불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


아직 중립으로 있건 혹은 다른 파벌에 속해있건 나에게 필요한 이들을 거머쥘 것이다.


우선적으로 규합할 이들은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해 두었다. 그들을 얻을 방법까지도.


보구나 기연을 얻을 방도 역시 잊지 않고 잘 기록해 두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그저 미래를 기다릴 뿐.


천천히 감겨있던 눈을 떴다.

주홍으로 물들었던 세계는 어느덧 푸른 달빛에 물들어 있었다.


문득 고쳐진 문가 쪽에 파트란이 서 있는 것을 눈치챘다. 경비라도 서고 있는 것일까.


샤워라도 한 모양인지 머릿결에 물기가 살짝 남아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머릿결이 자수정처럼 반짝거렸다.


오전 중의 이벤트는 그녀에게 나라는 사람의 중요성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되었을까.

작은 의문이 들었다.


호감도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관계는 이리도 형성하기 어려웠다.


다만 파트란에게 있어 부족을 제외한 대륙의 전 인류가 마이너스 일테니 그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유크라이아는 그중에서도 최악의 종속들일 테니 의미가 없지 않나 싶다.


한참 동안 파트란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기색을 알아차린 듯 파트란이 시선을 주었다.

파트란은 뭘 쳐다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강하다. 괴물 같다 싶을 정도로 강하다.

내가 괜히 처음으로 얻어야 할 사람으로 그녀를 선점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때의 파트란과 조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달밤에 취해서일까 괜스레 그것이 더욱 궁금해졌다.


툭. 허리춤을 건드렸다.

빙의 직전까지의 루덴이 장식에 가깝게 걸치고 있던 명검은 여전히 허리춤에 있었다.


그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파트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파트란.”

“...왜 그러십니까.”

“나를 한 번 정도 때려보고 싶지 않으냐?”


파트란의 지척까지 다가가 그리 농이 섞인 제안을 던지자 살짝 눈을 깜빡이더니.


“그것보다 한 번 정도 죽여보고 싶습니다만.”


그리 서슬퍼러한 답변을 내뱉으며 눈매를 휘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참으로 그녀다운 답변에 피식 웃음을 흘렸고 파트란은 그 뒤를 따랐다.


***


...모든 것이 끝나 바닥에 나자빠진 상태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농담 따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역시 괴물 같은 여자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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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 클래스 +1 22.05.17 46 3 12쪽
» 5. 아크란(2) +1 22.05.16 57 3 14쪽
5 4. 아크란(1) 22.05.14 65 7 14쪽
4 3. 황금공자(3) 22.05.13 69 7 17쪽
3 2. 황금공자(2) 22.05.12 80 8 16쪽
2 1. 황금공자(1) +1 22.05.11 95 10 13쪽
1 프롤로그 22.05.11 136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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