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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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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도
작품등록일 :
2018.01.28 19:36
최근연재일 :
2018.07.12 20:44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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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2
추천수 :
25
글자수 :
103,344

작성
18.04.1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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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5화> 잿빛 비둘기의 도시

오랫동안 겪은 야구기자 시절의 경험을 풀어 쓴 자전소설




DUMMY

<5화> 잿빛 비둘기의 도시(4. 11)


제목을 ‘비둘기 울음’에서 ‘잿빛 비둘기의 도시’로 바꾸기로 했다.

오래 싸웠다. 홍성이 놈 얘기는 ‘비둘기 울음’이 너무 약하다는 거였다.

그런가 보다 해서 다른 제목으로 하는 데까진 편집장인 홍성이 놈과 합의를 봤다. 그럼 뭘로 바꾸냐는 문제로 끙끙댔다. 도시와 비둘기, 프로야구가 들어서면서 고사 위기에 몰린 아마야구. 그리고 그 동대문운동장 언저리에 사는 비둘기. 뭐 그 근방에서 헤매다 나온 제목이 ‘잿빛 비둘기의 도시’였다.

언젠가 고사될 아마야구와 동대문 운동장에 사는 비둘기들을 한군데 뭉뚱그려 넣은 제목이 ‘잿빛 비둘기의 도시’. 그때만 해도 어려서 제목이라면 한군데 뭉뚱그려 넣으먼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원제 그대로 ‘비둘기 울음’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 더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편집부에서 교열을 보던 이지은의 귀띔.

“김 선배. 사실 선배 작품이 당선작이예요. 상금 줄 돈이 여의찮으니 다른 핑계를 댄 거죠.”

아, 그랬던 거구나. 홍 국장이 일부러 나를 불러내 원고를 돌려줬던 일이며 지난 겨울의 한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김형. 작품은 좋은데 현장감이 좀 떨어지네. 이따 시즌에 들어가면 빈 자리가 생길지 모르니 같이 일해 보면 어떻겠소?”

아, 그거였구나. 해서 내가 야구기자가 된 거였구나.

하지만 몇 달 동안 겪은 야구기자 생활은 생각보다 고달프기도,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가 있었다. 이미 야구기자로서 재미를 알아 버린 뒤였다.

이때쯤은 상금 천만 원, 이천만 원은 뒷전이었다. 야구기자가 됐고 어쨌거나 내 이름으로 된, 처음으로 내 단행본 한 권이 나온 것 아닌가.

여성지 기자로 떠돌던 대학 동기 홍성이놈이 출판사에 자리잡아 편집장으로서 펴내는 첫 작품이니만큼 많은 신경을 써 만들었다. 특별히 같은 예술대 회화과 선배로 중대 앞 ‘할머니 집’에서 알게 된 이상욱 형의 독창적인 그림까지 곁들여. ‘할머니 집’은 중대앞 후미진 골목에 있던 선술집으로 우리 문예창작과나 회화과 학생들의 단골집이었다.

하지만 잔뜩 정성을 들인 그 그림을 앞표지가 아닌 뒤표지에 넣은 것이 아쉬웠다. 성기를 잔뜩 세운 말 한 마리가 야구장을 돌아다니는 그림이었다.

이상욱 형과는 책이 나오고 난 다음 통화를 했다.

“형. 고맙소. 표지에 쓴 그 그림 가지고 있소?”

출판사에서 돌려받아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는 대답.

“그래요, 형. 죄송하지만 그럼 그 그림 나한테 팔 수 있소?”

형이 반갑게 대답했다.

“돈 얘기는 만나서 하자.”

나는 내 첫 단행본의 표지 그림이자 아는 회화과 선배의 그림 하나 팔아주자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말을 좋아하는 말띠인지라, 내 책의 주인공을 참으로 잘 표현해냈다는 생각에 꼭 가지고 싶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유난히 말이 뛰는 걸 좋아 해 한때 경마장을 드나들기도 했었다. 특히 말들이 많이 나오고 뛰어 다니는 서부영화의 광팬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 그림을 가지지 못했다. 내가 약속을 어겼는지 상욱이 형쪽에서 그랬는지 만나지 못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닿을 수 있었던 인연이 그처럼 잘 날던 연의 실이 끊어지듯 끊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대목이다.

그 책은 초판 5천부를 찍었음에 초판도 채 못 팔고 절판되고 말았다. 사장인 이향봉 스님이나 편집장인 홍성이 놈이 3만부를 예상해 3만부를 넘기면 인세를 대폭 올리기로 특약까지 넣었던 판권계약이었음에.

이원재 선배가 말했었다.

“김도씨 당신 ‘주간야구’에 들어옴으로써 당신 인생도 많이 바뀔 것 같아.”

이 선배와 단 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한마디 던진 말이었다.

‘왜요?’라는 물음에 “몰라. 암튼 그런 예감이랄까 그런 생각이 드네.”

그랬다. 이 선배의 고마운 예감 덕일까.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시즌이 끝나자 당시 OB의 운영부장을 맡고 있던 정진구 부장이 말했다. 역시 88년의 마지막 경기는 동대문구장이었다.

“김 형. 시즌동안 고생했으니 술이나 한 잔 합시다.”

해서 간 곳은 이태원에 있는 어느 가라오케. 스포츠서울의 이종남 선배. 일간스포츠의 박호윤 등이 OB 담당으로 한데 얼렸다. 구단 쪽에는 정 부장 외에 박해종, 윤동균 등 고참 선수들이 끼었다.

포수 출신인 박해종은 육군 야구부나 기업은행의 주전 포수로 대표팀 포수까지 지내다 은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보험업으로 자리잡은 인물. 나는 그의 팬이기도 했다.

육군야구부 시절 고교 야구를 보려 들린 동대문구장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인연이 있었다. 그의 준수한 외모와 중저음의 목소리에 반해 단박에 그의 팬이 되었다. 대표팀 포수라는 스타가 옆자리의 여자에게 조용하고 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야구 룰이며 용어를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당시 동대문 야구장을 드나들며 많은 유명인들을 만났다. 영화배우 하명중은 중앙고 출신인지 중앙고의 경기에 곧잘 나타났다. 내 애창곡 중 하나인 ‘애원’을 부른 신인가수 여운도 대구고의 에이스 출신으로 대학팀들의 스카우트를 뿌리치고 가수의 길을 선택한지라 야구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목이 메어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 님은 철새따라 가버렸네

허무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소리

그대는 아나요 무정한 내 사랑아

몸부림쳐봐도 재회의 기약없이

가버린 그 님을 소리쳐 불러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여운이와 달랐지만 역시 팬이었던 박해종을 기자가 돼 같이 술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리 정 부장에게 부탁해 그의 사인공을 따로 챙겨 두기도 했다.

사실 내 작품 ‘떠돌이 포수의 노래’의 모델은 박해종이었다. ‘주간야구’에 연재하던 당시 내 직속후배인 유승안이라거니 내가 담당하던 해태 타이거즈의 장채근이라거니 심지어 MBC에 있던 심재원이라거니 등등 설이 많았지만 실은 박해종에다 심재원을 버무린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누구 한사람이 아니라 모두를 뭉뚱그려 놓은 인물일 수도 있었다.

그는 컴백을 해볼까 하고 왔다가 프로에 적응을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아마도 그날의 술자리는 시즌이 끝난 뒤풀이 술자리이기도 했지만 박해종으로선 고국에서 가진 마지막 술자리가 아니었을까.

암튼 그날의 술자리는 내겐 복잡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윤동균과의 불편한 기억 때문이다.

평소엔 친했으나 그의 티 나는 행동, 난 체하는 말 등 나와는 여러 가지로 안 맞았다. ‘불가근 불가원’이 기자들의 모토인지라 술자리에선 겨우 참아 눌렀으나 집으로 돌아와 엄한 경비들한테 터졌다.

당시 집이 안산이었으므로 으레 명일동 삼익아파트 부모님 댁으로 갔다. 들어서는 길에 경비원하고 시비가 붙어 경비들이 떼거지로 모여들어 몰매를 주었다.

아마도 사소한 시비였을 거였다. 경비로서 당연할 "누구시냐?"는 물음에 나는 나대로 술도 한 잔 했겠다, 윤동균과의 불쾌한 기억이 남아 있어 대뜸 욕지거리로 나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경비가 나도 몰라보느냐 면서 시빗조로 나갔을 것이다.

분명 내가 실수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 얼굴에 피가 난 게 문제라면 문제. 경비들과 승강이 중에 코 옆이 찢어져 명일동 버스종점에 있는 동네 외과에 들러 일곱 바늘을 꿰매는 대형 사고로 커졌다.

막 잠을 청하려던 부모님들은 무슨 액땜일까. 못난 아들을 데리고 한밤중에 병원을 찾아 헤매게 됐으니.

그래서였을까. 인생사 새옹지마.

그 덕분에 안산 15평 임대아파트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입성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궁리 끝에 길 건너편 한라 시영 18평 아파트를 사주었던 것이다.

내친 김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두 분이 장안동 중고차 시장을 뒤져 중고 프레스토를 사 주셨다. 내가 매제네서 물려받아 끌고 다니던 ‘맵시’와 바꿔 오신 것이었다.

이랬으니 이 선배의 고마운 예감, “ ‘주간야구’에 다님으로써 당신 인생이 많이 바뀔 것 같아."라는 말이 그대로 맞아 들어간 것 아닌가.

이렇게 88년 시즌이 끝났다. 내 담당 OB도 김성근 감독이 물러나고 2군 감독으로 있던 이광환 감독 체제가 들어섰다. 박용민 사장아래 경창호 단장 체제에서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기사도 나오지 않았다.

시즌이 끝나자 야구장이 아닌 OB 선수들이 가을 훈련 중인 이천 훈련장으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하루는 이천에 들렀더니 매니저 구경백이 특히 나를 반기며 맞았다. 이광환 감독이며 신용균 2군 감독 등과 인사를 나누고 경백이쪽을 보니 분명 낌새가 달랐다.

분명 나와 할 얘기가 있는 눈치였다. 슬그머니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와 물었다.

“뭔 일이여?”

“으응. 김 형. 김성근 감독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

“어디든 가게 되겠지. 근데 왜?”

“이런 기자 보소.”

사실 내 자신 초짜 기자가 언감생심 욕심을 낼 특종 기사가 아니었기에 반쯤 접어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기자냐는 투로 한마디 던졌다.

“태평양으로 간대, 아마도. 아니, 확실히.”

못 미더운 듯 한마디 더했다.

“나보고도 같이 가자는데 잠시 고민 중. 상열이 형이 따라 갈 건가봐.”

상열이 형이라면 박 상열. 동대문 상고를 나온 언더 투수. 나이가 많으니 아마도 간다면 코치로 갈 것이었다. 그도 김성근 감독과 같은 기업은행 출신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머릿속을 정리할 겸 화장실로 갔다. 일단 회사에 보고부터 하자.

해서 화장실을 나와 화장실 앞 공중전화에 매달렸다. 당시에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화장실 앞에 딱 한 대 있던 공중전화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구경백이 보고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빼 물었다. 아마도 ‘너도 기자긴 기자구나’ 였을까.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글쟁이로서 내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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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화> 그 때 그 시절의 꿈 18.07.12 285 0 13쪽
17 <17화> 야구기자의 자존심 18.07.06 202 0 11쪽
16 <16화> 뇌졸중의 후유증과 싸우기 18.06.28 245 1 11쪽
15 <15화> 재기의 몸부림 18.06.20 252 2 22쪽
14 <14화> 살아서 돌아오다 18.06.14 222 1 14쪽
13 <13화> 탈도 큰 탈,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18.06.07 170 1 11쪽
12 <12화> '오렌지블루' 이후 18.05.30 328 1 14쪽
11 <11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다 18.05.24 225 1 11쪽
10 <10화> 바다낚시로 사잇길 18.05.16 197 1 13쪽
9 <9화> '일간오늘'로 컴백 18.05.09 200 2 10쪽
8 <8화> '상처일기'에서 '비 비 비'로 18.05.02 246 1 13쪽
7 <7화> 어리보기 기자에게도 특종은 굴러 떨어진다 2 18.04.25 212 2 11쪽
6 <6화> 어리보기 기자에게도 특종은 굴러 떨어진다 18.04.17 270 2 18쪽
» <5화> 잿빛 비둘기의 도시 18.04.10 267 1 10쪽
4 <4화> 호사다마의 신고식 18.04.04 259 1 14쪽
3 <3화> 알고 보니 야구기자 사관학교 18.03.28 247 3 14쪽
2 <2화> 첫출근이 야유회 18.03.20 269 3 9쪽
1 <1화> 늙다리 기자의 첫출근 18.03.13 381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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