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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도
작품등록일 :
2018.01.28 19:36
최근연재일 :
2018.07.1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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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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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04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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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4화> 호사다마의 신고식

오랫동안 겪은 야구기자 시절의 경험을 풀어 쓴 자전소설




DUMMY

<4화> 호사다마의 신고식


넥타이 풀고 소매 걷어 부치고 중2 학생들이라도 읽을 수 있게 쉽게 우리말로 쓰라는 김 주간의 좌우명 또한 100% 흡수.

나 또한 외국어에 유독 서툴러 학창시절 외국인 이름이 나오면 소설 자체를 읽기 힘들었다. 해서 영미 쪽의 작품보다는 외국이라 해도 한자식 이름부터 익숙해 일본 소설이나 중국이나 대만의 무협소설이나 역사소설 읽기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아마도 내 자라온 성장환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다. 모친은 해방이 되면서 귀국선을 타고 돌아온 귀환동포이자 재일동포였다.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시에서 태어나 살다 해방이 되면서 고국을 찾아 돌아왔기에 아무래도 낯설고 말까지 설은 우리 땅 우리말보다는 일본말이 익숙하였으리라. 부친 또한 우리나라에서 자란 토종 한국인이라 해도 대구사범에 다니다 해방을 맞아 식민지 시절 배운 일본말이 더 익숙했을 터.

사실 두 분은 부부싸움도 일본말로 했다. 애들이 알면 곤란한 얘기는 으레 일본말로 했다.

그랬던 두 분이었으니 모두 소원성취하시고 돌아가셨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로 끝낼 뻔한 삶을 몇 년간의 일본어 공부를 거쳐 70년대 말 일본 나라(那良) 시 한국문화원 원장으로 발령받아 모친과 동반출국, 몇 년간 일본 생활을 하시기도 했다.

모친은 태어난 일본 땅을 한국문화원 원장 사모님으로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부친은 식민지시절 겪었던 설움을 어엿한 한국문화원 원장이 되어 밟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식인 내가 생각하기에도 썩 통쾌하고 속 시원한 일이었다.

야구기자로서 일반적인 글쓰기에도 든든한 선배들 덕분에 쉽게 자리 잡아 갔지만 내 기사, 내가 주특기로 내세울 수 있는 주특기는 인간승리의 '휴먼 스토리' 아니면 우리 야구사, 한국 야구사에 해박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뚜르르 꿸 정도로 밝아졌다는 거였다.

당연히 ‘주간야구’에 근무하면서 닦아진 내 노하우라면 노하우. 처음 장태영 감독의 ‘야구실록’으로 해방 이후의 야구사를 한 번. 다음엔 ‘한국야구 약사’로 해방 이전의 야구사로 또 한 번. 우리 야구사를 훑다 보니 자연스레 밝아지게 된 것이었다.

군기 빡세기로 소문난 기자들 사회에서 신고식이 없을 리 없었다. 날짜는 정태화 선배의 송별회 자리로 잡혔다. 나만 몰랐었다. 그렇게 날이 잡힌 줄도 모른 채 끝까지 술자리에 잡혀 있었다.

일단 들입다 따귀부터 올려붙이는 거였다. 느닷없는 기습에 정신이 없었다. 정태화 선배 다음으로 캡 자리를 물려받게 된 이원재 선배였다.

돌아보니 미리 얘기가 된 듯 정 선배며 김 부장이나 김 주간이 말리기는커녕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제야 눈치를 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 선배는 줄따귀를 때리면서 을러댔다. 따귀는 아프다기보다 약이 올랐다. 단단히 군기잡기에 나서기로 한 모양이었다.

“꼽냐? 꼬우면 덤벼 보든가.” 따닥.

“여고 선생? 그런 놈이 좆 빤다고 기자를 해?” 따다닥.

“등단 작가? 그런 분이 왜 기자를 해? 기자가 그리 만만해 보여?” 따닥.

“개나 소나 아무나 기자하는 줄 알아?” 따다닥.

그렇게 여남은 대의 줄따귀를 맞았다. 참기가 정말 어려웠다. 해도 용케 참아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더군다나 욱하는 성격의 나로서는 참으로 대견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선배는 한 살 위 뱀띠. 나도 대가리가 클 만큼 큰 30대 중반의 말띠. 몇 년 교직 생할하고도 몇 년을 더 헤맸으니 정상적인 기자들보다 5, 6 년은 늦어졌다.

그렇게 참고 견뎌냈다. 그 정도가 신고식이라면 신고식이었으니 다행이었다고 할까.

다행히 뒤끝은 없었다. 지금도 그 점 지금도 이 선배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아무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평소 술에 곧잘 취하는 주사가 있는 이 선배로선 술자리에서의 한바탕 푸닥거리쯤으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통과의례라 할 신고식은 안팎으로 있었다.

밖의 신고식이 이 선배의 줄따귀 세례였다면 안의 신고식은 월급문제와 수습기간을 두고 벌어졌다.

애초의 얘기대로라면 순조롭게 넘어가야 했다. 애초 홍 국장의 얘기가 그랬었기에.

구체적인 액수는 말하지 않았지만 얼추 저번 회사에서 받던 금액 정도는 맞춰 줄 줄 알았다. 처음 들어보는 수습기자 얘기도 그렇거니와 월급도 그에 맞추다 보니 상당한 금액 차이가 생기는 거였다.

내가 양보를 했다. 수습기간이 필요하다면 받아들이겠다. 한데 월급에서는 양보할 수 없었다. 생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만 둘 수도 있는 문제였다. 홍 국장 자신이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느냐며 은근 발을 뺐다. 해서 사표까지 냈다.

인생사 일장춘몽이었던가.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김 주간까지 나서게 됐다.

오랜 시간이 걸려 절충안으로 결론이 났다. 수습기간은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어 들었다. 날마다 써야 하는 수습일지 쓰기는 면제. 이를테면 글쓰기로 특채된 놈에게 그건 너무 하다 싶었을까.

월급은 수습기간 동안 김 주간의 판공비에서 매달 상당액을 보조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수습기간이 끝난 뒤엔 대충 김승우나 김병윤 등 경력 기자들의 월급 수준으로 맞춰 주겠다는 얘기.

만족스럽진 않아도 이쯤이면 내가 그만 둘 이유가 상당 부분 줄어 들긴 했다. 아마 선배 기자들과 편집국 간부들과 상당한 기간의 숙의를 거쳐 나온 결론인 듯했다.

이랬으니 내 고집만 내세우기도 뻘쭘해 그 정도 선에서 계속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서 내 호칭도 차차 정리되어 갔다. 이 선배가 깍듯이 ‘김도씨’로 불러 주었고 또래인 김병윤이도 처음엔 으레껏 갈구는 듯하더니 곧 풀렸다. 그는 ‘춘천 mbc' 아나운서로 있다가 넘어 왔다.

손아래라 해도 ‘물건’인 김승우와는 곧 술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를 ‘물건’이라 칭하는 것은 그의 유머 감각이나 파격적인 언행부터가 내가 보기엔 가히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선 그를 ‘천방지축’이라 이르고 있었다.

공채 1기로 들어와 혼자 남은 이창호도 처음엔 ‘김도씨’로 부르더니 금세 ‘김 선배’로 바뀌어 갔다. 입사 동기이자 공채 2기로 들어온 김대호 등은 빡센 수습기자 시절을 못 참고 김대호만 남고 다 떠나갔다. 공채 1기들은 다 다른 사에 스카웃돼 가고 이창호만 남게 되었고 공채 2기들은 새로 시험을 봐 경제지 등 일간지로 빠져 나가 김대호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 선배를 중심으로 남은 기자들은 팀웍이 좋았다. 김승우의 당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구단주 관련한 특종들. 박건배 해태 회장의 ‘해태 타이거즈 단체 회식에서 구단에 불만을 품은 선수들이 불고기를 먹지 않고 고스란히 태운 사건’ 이나 빙그레 김승연 구단주에게 ‘회장님, 술 한잔 받으시죠’ 라며 술을 권한 기사들. 이창호가 터뜨린 대형 트레이드, 삼성과 롯데 사이의 ‘최동원과 김시진 맞트레이드 건’ 까지.

당시엔 ‘만원사례’라며 그날 들어온 기자들에게 1만원씩 든 봉투, 곧 촌지를 돌리는 풍습도 있었다.

88년에 특히 그런 사례가 많았던 것은 88올림픽 덕분이었다. 올림픽과 프로야구를 같이 치르다 보니 일단 서울 시내는 ‘짝수 홀수 운행제’를 시행해 교통량을 조절했다.

처음 치러보는 ‘짝수 홀수 운행제’여서 허점도 많았다. 기자 신분증만 보이면 무사 통과였다. 야구기자가 좋은 것은 웬만한 교통단속에 걸릴 경우 기자 신분증이면 프리 패스. 거기에 야구기자들에겐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트렁크에 으레껏 싣고 다니는 사인 공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한 줄 알지만 출입구단에서 알아서 몇 박스씩 챙겨 주는 것이었다.

경찰들은 기자라면 겁부터 내는 법. 주간지 기자라 해도 기자 신분증이면 효과가 있었고 거기에 사인 공이면 웬만한 과실이면 눈을 감아 주었다.

당시는 교통단속에 걸릴 경우 5천 원짜리 지폐를 운전 면허증 크기에 맞춰 밑으로 끼어 건네면 면허증을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솜씨 있게 지폐만 빼서 가져가던 시절이었다. 핸들 잡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상식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88올림픽 때는 잠실야구장을 올림픽에 내주고 서울운동장, 곧 동대문야구장에서 밀린 프로야구 경기를 치렀다. 그러다 보니 ‘만원사례’가 심심찮게 나왔었다. 해도 가장 인기 높은 해태 타이거즈 경기라야 가능했다. '주간야구'도 이왕이면 해태 선수들을 표지모델로 내세우던 시절이었다. 핀매부수부터 달라지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잠실야구장의 경우 3만 석 안팎. 동대문은 그 절반인 1만 3천 석 정도. 잠실은 규모가 커서 개막전이나 올스타전, 포스트 시즌에나 ‘만원사례’여서 일일이 챙기기도 어려웠지만 규모가 비교적 작은 동대문은 달랐던 것이다.

‘만원사례’란 원래는 일제 강점기 극장가에서 시작된 관습이었다. 이를 기자들 등쌀에 시달리던 구단에서 발 빠르게 야구장에도 적용했던 것이다. ‘만원사례’라고 처음엔 실제 만 원씩 넣어 돌렸다. 어느 때부터인지 돈 가치가 떨어지면서 10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로 바뀌게 돼 좋이 술 한 잔 값이 되었다.

그러다 OB와 해태가 동대문구장에서 맞붙었다. 나는 OB 담당, 김승우는 해태 담당, 그날 따라 김대호는 선배들 따라 야구 보러 들렀다. 사실 김대호는 수습 시절이라 담당 구단이 없던 시절.

그러다 ‘만원사례’가 터졌다. 당시 OB 홍보실장이던 이태현이 속은 쓰렸겠지만 1인당 10만 원씩 든 ‘만원사례’ 봉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주간야구’ 기자들의 수입은간단히 30만 원. 경기가 끝나고 단체로 영동으로 넘어가 술 한 잔 거하게 먹을 수 있었다.

사실 지방경기가 끝나면 나는 불편함이나 싫어하는 눈치를 모른 척하고 구단 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교통편이라면 그처럼 좋은 교통편이 없기도 했지만 기자로서 취재욕심 때문이었다.

매니저인 구경백이와도 그렇게 친해진 사이였다. 그렇게 서울에 닿으면 캄캄한 새벽.

끝까지 선수들의 귀가를 책임져야 하는 매니저 구경백은 그제야 두리번거리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 외려 반가워 하기도 했다. 해서 맥주 한잔쯤 하기도, 해장국을 먹기도 했다.

참으로 막막했다. 지방 구장으로 취재를 하다 돌아온 새벽. 사방은 조용하고 캄캄하기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불을 잃은 한 마리 부나비처럼, 또는 날개나 더듬이를 잃은 곤충처럼 방향을 잃곤 했다. 그럴 때 나를 불러주는 누군가는 고마울 수밖에 없었고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닭다리’ 계형철 형과도 그렇게 친해졌다. 집이 명일동인 형과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 친해졌다. 집이 안산이었던 나는 서울이나 지방에 경기나 일이 있으면 으레 집에 가기를 포기하고 회사 근처 여관이나 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졌다. 부모님 댁이 바로 명일동 삼익아파트.

처음 ‘닭다리’팀의 회동엔 내가 먼저 끼어 들었다. 막막하던 초보 기자 시절. 누구라도 따라 붙어야 했다.

그렇게 닭다리 형을 따라 간 곳은 ‘중고신인’으로 한창 떠오르고 있던 한오종네 집. 오종이네 집이 강동 시영 아파트. 명일동과는 길 하나 사이였다.

신인왕은 데뷔 이후 5시즌 이내 투수는 30이닝 이상을 던졌느냐, 타자는 60타석 이상을 쳤느냐를 두고 자격여부를 가렸다. 문제는 당해 연도에 데뷔한 선수들만 해당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반적인 시각의 허점을 꿰뚫어 본 새로운 시각이었다. 5시즌 이내라면 모두 신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 ‘중고신인’ 바람에 불을 붙인 선수가 바로 한오종이었다. 180이 넘는 키에 말의 뒷다리를 닮은 하체를 가진 그는 동대문상고 한양대 출신으로 OB가 숨기고 있던 히든 카드. 강속구가 좋았다. 이 기사 또한 ‘주간야구’의 특종으로 일컬어졌었다. 정태화 선배가 서울신문으로 떠나기 전 친정집에 남긴 선물이기도 했다.

이 해 신인왕은 한오종이 아니라 이용철 (mbc)이 가져갔다, 한오종은 시즌 성적 4승 4패, 이용철은 7승 11패. 바람을 잡은 한오종은 단조로운 구질에 일찍이 밑천이 드러나 주저앉은 반면 이용철은 그런대로 꾸준히 제 몫을 해냈던 것이다. 사실 신인왕 가운데 가장 저조한 성적이었지만 나도 그에게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암튼 그날의 모임은 생일을 맞은 한오종을 위한 새벽녘의 생일 파티였다. 이처럼 같은 팀이라 해도 지역별로 모임이 있었다. 강동구 지역은 닭다리 형을 중심으로 외야수 김광림, 포수 조범현 등이 있었다.

멋도 모르고 따라간 한오종의 생일 모임에 아주 된통 걸렸다. 먼동이 터오고 번히 날이 밝아오는데도 술자리는 끝날 줄 몰랐다. 표시는 못하고 속으로 은근 마음을 졸였다. 기어이는 내가 출근시간이 됐다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에야 아쉬운 듯 끝났다.

‘중고신인’ 얘기를 마저 하자면 최초의 ‘중고신인’ 신인상은 현대유니콘스의 투수 이동학이 수상했다. 00년에 입단한 이동학은 입단 첫해 기록이 없다가 군대를 다녀온 03년에야 신인상을 받았다. 8승 3패의 성적.

11년 신인상을 삼성의 배영섭은 만 25세의 최고령 기록을 세우기도 했고 08년 삼성 최형우는 해태에서 벙출 된 방출선수 최초로 신인상을 거머쥐어 ‘인간승리’의 산 표본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내 첫 장편소설 ‘잿빛 비둘기의 도시’가 홍성이놈의 채근에 ‘밀알’에서 발간되었다. ‘밀알’출판사는 당시 인기 절정이던 정다운 스님의 동생 이향봉 스님이 운영하는 회사.

실제 운영은 향봉 스님이 하고 실무는 여성지를 그만 두고 편집장을 맡고 있던 홍성이놈이 하고 있었다. 홍 국장에게 돌려받은 ‘주간야구’ 응모작을 묵혀 두고 있다가 혹시나 싶어 원고를 놈에게 보여줬더니 다짜고짜 자기네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내자는 거였다.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글쟁이로서 내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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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야구 스포츠 자전 소설 연재 예정 [18. 03. 14(수)] 18.03.06 151 0 -
18 <18화> 그 때 그 시절의 꿈 18.07.12 285 0 13쪽
17 <17화> 야구기자의 자존심 18.07.06 202 0 11쪽
16 <16화> 뇌졸중의 후유증과 싸우기 18.06.28 245 1 11쪽
15 <15화> 재기의 몸부림 18.06.20 252 2 22쪽
14 <14화> 살아서 돌아오다 18.06.14 222 1 14쪽
13 <13화> 탈도 큰 탈,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18.06.07 170 1 11쪽
12 <12화> '오렌지블루' 이후 18.05.30 328 1 14쪽
11 <11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다 18.05.24 225 1 11쪽
10 <10화> 바다낚시로 사잇길 18.05.16 197 1 13쪽
9 <9화> '일간오늘'로 컴백 18.05.09 200 2 10쪽
8 <8화> '상처일기'에서 '비 비 비'로 18.05.02 246 1 13쪽
7 <7화> 어리보기 기자에게도 특종은 굴러 떨어진다 2 18.04.25 212 2 11쪽
6 <6화> 어리보기 기자에게도 특종은 굴러 떨어진다 18.04.17 270 2 18쪽
5 <5화> 잿빛 비둘기의 도시 18.04.10 266 1 10쪽
» <4화> 호사다마의 신고식 18.04.04 259 1 14쪽
3 <3화> 알고 보니 야구기자 사관학교 18.03.28 247 3 14쪽
2 <2화> 첫출근이 야유회 18.03.20 269 3 9쪽
1 <1화> 늙다리 기자의 첫출근 18.03.13 381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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