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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서사시입니다.

응, 이라고, 너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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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서사시
작품등록일 :
2019.06.21 11:33
최근연재일 :
2019.11.2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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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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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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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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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7)

DUMMY

병실에 막 도착했을 때는 해가 아슬아슬하게나마 하늘에 걸쳐있었다. 지금은 아예 지면 너머로 사라져버린 모습이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나의 꼭 붙잡고 있는 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내 눈은 너의 손에서 어깨로, 내가 좋아하는 너의 목덜미로, 마지막에는 너의 얼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곳에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너의 진심으로 화난 얼굴 때문에, 나는 그곳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도대체 요즘 뭐 하고 다니는 거야?”


“그냥....”


“밤새 뭘 하길래 17살짜리가 과로로 쓰러지냐고.”


화난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화를 내는 눈, 그리고 꾹 깨문 입술까지. 너는 이전에 과학실 앞에서 보여줬던 ‘화난 듯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이미 해가 져버린 하늘만큼이나 차가운 얼굴로 화를 내고 있었다.


“이거 때문이야?”


지퍼가 열려있는 가방, 그리고 네가 나의 눈앞까지 들이민 공책. 똑같이 생긴 공책은 어디에나 있겠지만, 저 공책은 분명 내 가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응. 남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나의 손글씨로 빼곡히 들어찬 공상 일지가 확실하다.


너에게만큼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물건을,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들켜버렸다.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 것치고 내가 생각해낸 변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난 아직 죽지 않았어. 지금도 네 눈앞에 살아있고.”


“그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전철에서도 들고 다닌 주제에 너에게만큼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유라면, 너의 반응을 예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너라면 분명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를 살려내고 싶어하는 나의 마음 따위는 뒷전으로 미루고 내게 화만 낼 것을,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논문의 첫 줄을 옮겨적기도 전부터 말이다.


“난 너한테 이런 걸 바라지 않아. 바란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논문을 베껴도, 그것을 머릿속에 강제로 집어넣어도.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너를 살릴 수 없잖아.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포기하는 일은 쉽다.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 여건의 차이를 극복하고서라도 이뤄내고 싶다는 의지가 없다면 포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시 이건 나랑 맞지 않았어, 라는 혼잣말로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여건이 되지 않지만, 그 여건의 차이를 감수하고 꿈틀거리는 나에게


이름도 모르는 의사가 사형 선고를 내려버린다면, 나는 픽하는 웃음 이상으로 화를 낼 것이다. 결국은 당신이 틀렸음을 증명해내겠지.


하지만 ‘가장 살려내고 싶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뭐가 있는데.”




네가 포기해버리면, 옆에서 발버둥 치던 나도 같이 포기해야 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야?”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체온이 떨어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난 도대체...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그리고 수그러드는 것만 같던 열이 한 번에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이 열을, 뜨거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색하다.


서툴다. 익숙하지 않다.


그렇기에, 되려 애먼 감정이 튀어나와버릴 만큼 마음이 고장나버리고는 한다.


“나도...가만히 있어야 해? 지켜봐야 해? 그러다 네가 죽고 나면, 그걸 극복할 때까지 혼자 울어?”


이렇게, 억울할 일이 없음에도 억울함을 느낀다거나. 그러다가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할 만큼 울먹인다거나.


결국은 아무리 닦아내도 눈가가 마르지 않을 만큼 울어버린다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거야? 응?”


화가 나는데, 몸속의 장기들이 살려달라며 손톱으로 위장을 긁어대는데


그 아픔을 표현할 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다거나.


“이건 정말...너무 잔인하잖아.”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지만, 그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고 있다.


결국, 나는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며, 너는 의사처럼 내게 한 번 더 사형 선고를 내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너는 더욱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에게서 이 말을 들어버린 순간, 나는 죽었다. 18일간 노력해왔던 아이가 죽었다.


무엇이라도 해내고 싶었지만, 결국은 공상밖에 펼치지 못한 소년이 싸늘하게 죽어버렸다.


숨은 쉬고 있으나 호흡은 생존을 증명해주는 신호일 뿐, 인간으로서 살아있느냐를 증명해줄 방법이 아니다.


나는 숨은 쉬고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너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지금은 ‘너를 살릴 수 없다면, 나는 살아가고 싶지 않아.’라는 비극으로 바뀌어버렸다.


모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




“이리 와 봐.”


네가 창문 끝에 서서 내게 손짓했다.


나는 너의 말에 홀려서, 촛불을 따라가는 나방이 되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쳐줄게.”




활짝 열어둔 창문 앞에서, 나를 등지고 서 있던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야. 해야만 하는 일이고.”




툭.


아니.


‘툭’처럼 가벼운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옷감이 강하게 구겨지는,




사람을 창밖으로 밀어버렸을 때나 날법한 소리였다.




“살아.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다리는 밟고 올라설 곳도 없어 바람에 흔들리기만 했다.


이제는 가치가 사라진 목숨이라, 이 몸은 너의 작은 손에도 여유롭게 붙들려 있을 만큼이나 가벼워졌다.




“대답해. 살아남겠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살고 싶다고 말하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그렇게 나의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그래. 그렇다면 대답해줄게.




“싫어.”




이게 나의 유언이야.


미안.




이후, 나는 너의 손을 꼬집었다.




아주 강하게.



.



나는 그대로 떨어졌다.


4층 난간에서,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다행히 머리를 부딪쳤다거나, 어디 날카로운 곳에 몸이 꿰뚫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 나무에 부딪혔을 때는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충격이 닿았을 때 즈음에는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화단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축축한 흙바닥에 반쯤 파묻히고 나서야 추락은 끝을 맺었다.




가장 처음에는 당연한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찾아왔다.


나는 죽지 않았구나.


그야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마저도 나무에 여러 번 부딪히면서 충격이 줄어들었잖아. 더군다나 마지막에는 이렇게 푹신한 흙 위에 착지했으니 죽기는커녕, 크게 다칠 일도 없지.


뭐, 그런 것치고는 팔꿈치도 그렇고, 갈비뼈 쪽이 지나치게 아프긴 했다.


어디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던 것도 아니고, 뼈가 부러져서 살을 뚫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프긴 더럽게 아프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던 표현이 딱 알맞을 만큼 아팠다. 앓는 소리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나뭇잎 사이로 하나둘 병실의 불이 밝아지고 있었다. 몇몇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 하는 듯했다. 그런데도 나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나뭇잎과 그림자로 절묘하게 가려지는 위치에 누워있다는 소리일 것이다.


풉.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일어날 힘도 없어서 누워있는 주제에, 나는 아주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아주 조금 뒤에 네가 나를 찾아냈다. 화를 내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그런 약한 얼굴이나 하고 있는 건지.


네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무엇이라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내게는 그저 밤에 어울리는 정적밖에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을 축축하게 적셔나갔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게다가 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아픔에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네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때의 나는 내가 말하는 것조차 잘 들리지 않던 상황이라 ‘했던 것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살아줘.




나도 알고 있다. 무리한 부탁이었다는 것을.




***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오른쪽 고막이 파열됐다. 그리고 오른손의 손목 인대가 늘어났다.


즉흥적인 투신의 대가는 생각보다 저렴했다. 보험 처리를 받아 2만 원도 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너 지금 그게 지금 자랑이야? 진짜 큰일 날 뻔했던 거 모르냐고!”


“미안한데 잘 안 들려. 고막이 나갔거든.”


“이게 확 진짜!”


“야, 잠깐 나 손목! 아아악! 잠깐!”


등을 노리고 달려드는 네 손을 막으려다가 실수로 오른손을 들어버렸다. 너의 스매싱은 자연스럽게 내 오른손에 직격했고, 나는 항복을 외칠 새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아픔을 호소하기만 했다.


“으이구! 꼴 좋다!”


이런 물리적인 아픔과는 별개로, 내게 아픔을 주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네가 억지로 숨기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너의 시퍼렇게 멍이 든 손등이다.


솔직히 나는 얼마든지 아플 수 있다. 내가 아픈 것이라면 상관없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의 우선순위는 얼마든지 미룰 수 있다.


너는 내 안에서 이미 나보다 커다란 나무로 자라버렸다.


이대로 햇빛도 양분도 받지 못하고 죽어서 너의 일부분이 된다 해도 나는 좋다. 그런 아쉬움쯤은 거뜬하게 가릴 수 있다.


4층에서 떨어져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일쯤은 몇 번이든 저질러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밖에 하지 못해서, 나는 너의 죽음을 늦출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너의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밖에 없는 거야?


그건 싫어.




일기 끝.




***




나는 이날 이후로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우는 일에만 열중했다. 거의 일주일을 통째로 날려먹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로 인해서 공백이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다음의 일기는 ‘일기 끝’으로부터 겨우 한 줄 아래에서 시작한다.


당시의 나는 페이지를 넘겨 여유롭게 날짜를 적고, ‘친애하는 당신’ 같은 인사말로 일기장을 깨울 여유가 없었다.




***




찾아냈다.


찾아냈어. 찾아냈다고.


방법을 찾아냈다.


지금 너를 만나러 가고 있어.


지금 너는 바쁜 걸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찌 됐든, 조금만 기다려줘. 지금 가고 있어.


너의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신났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줘. 지금 가장 기쁜 소식을 들고 가는 중이야.




***




이날은 내가 처음으로 너의 부모님을 만났던 날이다.


첫 대면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


작가의말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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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79회 - 어느 소설(10) 19.11.22 21 0 11쪽
79 78회 - 어느 소설(9) 19.11.19 16 0 13쪽
78 77회 - 어느 소설(8) 19.11.16 22 0 11쪽
77 76회 - 어느 소설(7) 19.11.14 27 0 10쪽
76 75회 - 어느 소설(6) 19.11.13 22 0 8쪽
75 74회 - 어느 소설(5) 19.11.11 33 0 11쪽
74 73회 - 어느 소설(4) 19.11.08 23 0 8쪽
73 72회 - 어느 소설(3) 19.11.05 39 0 14쪽
72 71회 - 어느 소설(2) 19.11.02 21 0 11쪽
71 70회 - 어느 소설(1) 19.10.29 23 0 12쪽
70 6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3) 19.10.26 38 0 11쪽
69 68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2) 19.10.24 19 0 9쪽
68 67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1) 19.10.21 22 0 8쪽
67 66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0) 19.10.19 31 0 13쪽
66 65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9) 19.10.16 26 0 11쪽
65 64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8) 19.10.12 22 0 10쪽
» 63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7) 19.10.10 26 0 11쪽
63 62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6) 19.10.09 16 0 9쪽
62 61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5) 19.10.07 34 0 17쪽
61 60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4) 19.10.05 75 0 10쪽
60 5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3) 19.10.02 29 0 18쪽
59 58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2) 19.09.30 28 0 12쪽
58 57회 - 작별인사 게임(1) 19.09.28 72 0 14쪽
57 56회 - 친애하는 너에게(완) +2 19.09.21 69 1 14쪽
56 55회 - 친애하는 너에게(12) 19.09.18 39 0 15쪽
55 54회 - 친애하는 너에게(11) 19.09.15 21 0 9쪽
54 53회 - 친애하는 너에게(10) 19.09.12 31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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