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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서사시입니다.

응, 이라고, 너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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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서사시
작품등록일 :
2019.06.21 11:33
최근연재일 :
2019.11.24 22:04
연재수 :
8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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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6
글자수 :
447,778

작성
19.09.1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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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53회 - 친애하는 너에게(10)

DUMMY

“있잖아."


긴 공백을 깨고 네가 입을 열었다. 더불어 머릿속에 펼쳐지던 스무 살의 모습도 상영이 종료되었다.


“자는 거 아니었어?”


줄곧 입을 다물고 있길래 자는 줄 알았더니, 너는 졸린 기색은커녕 텔레비전의 화면이 반사될 정도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응. 잠은 안 와. 그보다 있잖아.”


“응. 말해.”


“너 혹시 술 마셔본 적 있어?”


“있어.”


“야,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아직 미성년자라고!”


“그건 그렇지만, 거짓말을 할 마음은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응. 마셔본 적 있다. 그것도 아주 어릴 적, 한참 친척 간에 교류가 있을 적의 일이다. 그때 큰아버지로부터 술 한 잔을 받은 기억이 있다.


“어떤 맛이었어?”


“최악의 맛이었어.”


‘쓰고, 떫고, 입에서 한동안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나게 하는 액체’


내게 각인된 술이란 그런 액체였다. 게다가 심장은 또 이상하리만큼 빨리 뛰게 되는, 단순히 몸에 안 좋다는 말보다도 치명적이게 위험하다는 말이 훨씬 어울리는 액체.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술이었다.


“흠...왠지 마셔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 같은 표현이네.”


“응. 그러니까 술은 나중에 마셔.”


“그래도 난 몸만큼은 어른이잖아. 그냥 어른도 아니고, 내년이면 임종 직전의 노인인데도?”


“결국은 마셔보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


너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남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로.


“임종 직전의 노인이라면 더더욱 안돼. 그리고 성인의 기준은 주민등록상의 나이로 정해지고.”


“치. 까다롭기는.”


너는 괜히 베고 있던 내 다리에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뭐, 심술이라고 해봤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는 게 전부였지만.“


“어릴 때 봤던 꼬마 탐정 만화 기억나? 왜, 겉보기에는 초등학생인데 속은 나이가 많은 애 있잖아.”


“그 꼬마 탐정님도 본체는 고등학생이야. 몇십 년째 고등학생인 게 문제지만.... 그리고 남의 몸에다가 장난치지 마.”


“흐흐, 칠 건데?”


너는 모를 거다. 지금 내가 어떤 심정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지.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어도 지금쯤이면 3절의 후렴구까지는 불렀을 것이다.


“이렇게 한가하게 티비나 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엄청나게 심심해.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아.”


너는 내가 무어라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읏차’하는 기합과 함께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때 너의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나의 얼굴 앞으로 지나가서, 자칫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간 코가 박살 날 뻔했다.


“갑자기 튀어 오르기는...위험하게.”


“그러니까 게임 하자!”


“허...무슨 게임?”


나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게 내 코가 부러질 뻔한 일은 안중에도 없어서, 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너의 아날로그 방식의 게임보다도 너와 누워서 지루한 텔레비전을 보는 쪽에 훨씬 관심이 있었다. 네가 내 허벅지에다가 장난을 친 것처럼, 나도 너의 머리카락에 장난을 쳐보고 싶었다. 괜히 손톱으로 빗질을 해준다던가, 그런 소심한 복수 말이다.


그러다가 장난삼아 볼을 눌러보기도 하고, 조금 뒤에는 손가락으로 누르던 곳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의 장난보다는 진지하게, 하지만 금방 웃어넘길 수 있도록 가벼운 장난을 칠 생각이었다. 뭐, 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바람에 전부 무산되었지만.


“음...그러게? 무슨 게임을 해볼까?”


“종목도 안 정하고 무작정 게임을 하자고 했다라.... 왠지 너 다워서 좋네.”


“응. 나도 네가 좋아.”


“대답이 이상하잖아....”


너는 조금 더 버릇처럼, 그리고 장난처럼 내게 ‘좋아’라는 말을 해줄 필요가 있다. 아직 나는 장난처럼 던진 말에도 볼이 뜨거워지고 말 끝을 떨어버릴 만큼이나 면역력이 없다.


“아! 저 게임 하자!”


나는 너의 눈을 피하려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너는 그것과 거의 같은 타이밍에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마침 예능 방송의 진행자가 어느 벌칙 게임을 설명해주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또 한 번 거의 같은 타이밍에, 우리는 서로 완벽하게 다른 말을 내뱉었다.


두 말이 충돌했다. 너의 “저거 괜찮지 않아?”와 나의 “저건 절대 아니야.”가.


우리는 몇 초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조금 뒤에는 완벽하게 같은 타이밍에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우리 진짜 안 맞다, 그치?”


“흐...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죽이 척척 맞으면서 늘 왼쪽과 오른쪽 같은 방향에서 엇갈려버린다. 우리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서로 성격이 다른 사람끼리 만나야 인간관계가 오래간다고 하더라.”


“그래? 어떻게?”


“방법은 간단해. 서로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둘 사이에 탄력이 생긴대. 유연해지고 깊어지는 거지.”


“오호,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조율해볼까?”


“그것도 간단하지.”


나는 너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랗게 기지개를 켰다. 굳어있던 몸을 풀기 위함이기도 하고, 머릿속의 잡념을 털어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 말까?”


“하자, 저 게임.”


우리는 서로 완벽하게 다른 방향을 보고 있어서 조금의 조율이 필요해 보인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렸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서로 완벽하게 다른 방향을 보고 있기에 완벽하고 찬란하다.


서로의 등을 맞댈 수 있고, 여차하면 방금처럼 완벽히 뒤를 돌아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다.


언젠가 내 시선의 끝에 네가 머물렀던 것처럼, 그리고 너의 시선 끝에 내가 머물렀던 것처럼.


그러니까.


머릿속의 괜한 생각들아, 사라져라. 사라져라.


부디 멀리 사라져 버려라.


계절이 바뀌어도 내 안에서 스러지지 않는 벚꽃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나는 아직 이 여름에 핀 벚꽃을, 여름의 손님을 떠나보낼 마음이 없으니까.


.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너는 내게 질문을 던지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당연하지’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공수를 바꿔서 다시 진행한다. 수비자가 ‘당연하지’ 이외의 대답을 하게 된다면 공격자의 승리로 게임이 끝난다. 이보다 간단한 게임이 있을까.


게임의 규칙이 간단한 만큼 승패가 갈리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이 진행될수록 질문이 공격적으로 변하는 일이 많은 모양이다. 저기 텔레비전 속의 연예인들만 봐도 벌써 서로의 아슬아슬한 사생활들을 찔러대고 있지 않은가.


“자, 이번 게임은 조금 세게 갈 건데 괜찮지?”


“마음대로. 돌부처가 뭔지 보여주지.”


“자신 있나 보네? 그러면 내가 먼저 질문한다?”


너의 기습적인 고백 같은 질문만 어찌어찌 넘기면 방어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을 너무 쉽게 봤던 모양이다.




“나를 대상으로 야한 상상 같은 거 해본 적 있어?”


이 게임에서 수비자가 얼마나 불리한지 깨달았을 때, 나는 겨우 ‘당연하지’라는 패 한 장밖에 쥐고 있지 않았다.



“당...당연하지....”


“응? 뭐라고? 잘 안 들렸는데?”


“당,당연하다고! 당연하지!”


누군가 목숨만 보장해줬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창문 밖으로 탈출했을 것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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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78회 - 어느 소설(9) 19.11.19 16 0 13쪽
78 77회 - 어느 소설(8) 19.11.16 22 0 11쪽
77 76회 - 어느 소설(7) 19.11.14 27 0 10쪽
76 75회 - 어느 소설(6) 19.11.13 22 0 8쪽
75 74회 - 어느 소설(5) 19.11.11 33 0 11쪽
74 73회 - 어느 소설(4) 19.11.08 23 0 8쪽
73 72회 - 어느 소설(3) 19.11.05 39 0 14쪽
72 71회 - 어느 소설(2) 19.11.02 21 0 11쪽
71 70회 - 어느 소설(1) 19.10.29 23 0 12쪽
70 6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3) 19.10.26 38 0 11쪽
69 68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2) 19.10.24 19 0 9쪽
68 67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1) 19.10.21 22 0 8쪽
67 66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0) 19.10.19 31 0 13쪽
66 65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9) 19.10.16 26 0 11쪽
65 64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8) 19.10.12 22 0 10쪽
64 63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7) 19.10.10 25 0 11쪽
63 62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6) 19.10.09 16 0 9쪽
62 61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5) 19.10.07 34 0 17쪽
61 60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4) 19.10.05 75 0 10쪽
60 5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3) 19.10.02 29 0 18쪽
59 58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2) 19.09.30 28 0 12쪽
58 57회 - 작별인사 게임(1) 19.09.28 72 0 14쪽
57 56회 - 친애하는 너에게(완) +2 19.09.21 69 1 14쪽
56 55회 - 친애하는 너에게(12) 19.09.18 39 0 15쪽
55 54회 - 친애하는 너에게(11) 19.09.15 21 0 9쪽
» 53회 - 친애하는 너에게(10) 19.09.12 31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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