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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선생 님의 서재입니다.

슬픈 고삼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얌선생
작품등록일 :
2023.04.25 00:21
최근연재일 :
2023.05.19 16:47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685
추천수 :
10
글자수 :
128,593

작성
23.04.25 07:52
조회
42
추천
2
글자
11쪽

3화. 커닝의 이유(1)

DUMMY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가네 방학도 가고. 봐 이제 겨우 6시인데 저녁 느낌이 나잖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규를 따라 유석은 고개를 젖혔다.


거대한 휘핑크림 같은 뭉게구름이 서쪽 하늘에 떠 있고, 파란 하늘에는 연하게 곶감빛이 돌았다.


도서관 계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정규와 유석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다.


“왜, 하늘에 뭐가 있어?”


화장실에 다녀온 도민도 옆에 나란히 앉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뭐가 있는데, 어디 있어 어디.”


“안 보여? 저거, 안 보여?”


검지손가락으로 뭉게구름 너머를 가리키며 정규가 말했다.


“저기?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도민은 정규의 손가락 끝이 향하고 있는 하늘을 손으로 햇빛까지 가리며 쳐다봤다.


“도민이 넌 눈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저거 말이야. 저기 수능 정답이 씌어 있잖아.”


그제야 장난임을 눈치챈 도민이 정규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정도 주먹쯤은 피할 수 있다는 듯 정규는 복싱 선수처럼 두 주먹을 턱밑에 붙이고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모습에 유석은 웃음이 터졌다.


도서관 정문까지 걸어가며 정규와 도민은 밀고 툭 치고 쫓아가고 도망쳤다.


“아, 나도 집에 가고 싶다. 매번 먼저 집에 가면서 공부까지 잘하는 유석이 저 녀석은 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정규야, 오늘 우리도 유석이 따라서 공부 그만 할까? 내가 인사동에 맛있는 돈가스 집 아는데 거기서 저녁 먹고 불타는 금요일, 어때. 아무리 고삼이지만 우리 너무 불쌍한 거 아니냐?”


도민의 말에 정규가 반색했다.


“돈가스? 그거 확 땡기는데.”


“유석아, 너도 돈가스 오케이지?”


둘의 대화에 유석은 뜨끔했다.


“미안 나 오늘은 정말 안 돼. 엄마가 외식할 거라고 일찍 오라고 했어.”


유석은 재빨리 거짓말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절친인 정규와 도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도민이 볼멘소리를 했다.


“너희 집은 또 외식이냐. 그렇게 외식을 하니까 나날이 빵빵해지지. 고삼 돼서 5킬로나 쪘다며. 어머니한테 외식 좀 줄이자고 해. 그래야 나처럼 이렇게 식스팩이 생기는 거야, 임마.”


정규가 도민의 옷을 슬쩍 들추며 말했다.


“식스팩이 어딨다는 거야, 배둘레햄밖에 안 보이는데.”


“야, 어디 벌건 대낮에 남의 은밀한 속살을 들추냐?”


“쪽 팔린 건 아네. 도민이 너나 뱃살 관리 좀 해라 딱 바지 밖 10센티다, 10센티. 그리고 젠 외식을 많이 해서 빵빵한 게 아니고 중학교 때부터 원래 빵빵 했어, 오죽하면 ‘곰돌이 유’라는 별명이 붙었겠냐.”


그렇게 친구들과 한참 웃고 떠든 다음에야 유석은 도서관 정문을 나섰다. 정문 밖 내리막길 중간쯤에서 돌아다보니 정규와 도민이 어깨동무를 하고 열람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둘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유석의 주머니에는 천 원밖에 없다. 저녁을 먹을 돈이 없었다.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모아둔 돈이 아직 남았지만, 방과 후 수업이 끝난 다음날부터 친구들과 매일 도서관에 와서 쓰는 점심값과 음료수 값으로 쓰기에도 빠듯했다.


정규와 도민에게는 미안하지만 거짓말로 둘러대고 저녁 식사는 집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가의 가게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규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팥죽 가게 앞에는 벌써 줄을 길게 섰다.


유석은 그 팥죽을 한 번 먹었었다. 그 후로 정규가 점심으로 팥죽을 먹자고 하면 금세 유석의 입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팔천 원이나 하는 팥죽 값은 유석에게 또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


“난 죽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퇴근 시간 전이라 지하철은 한산했다.


유석의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 둘이 머리를 맞대고 태블릿pc에 열중하고 있었다. 터치할 때마다 화면은 형형색색의 멋진 사진들로 바뀌었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이 갔다.


멋진 자연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낯익은 폭포 사진에 눈이 시원해졌다. 화면 구석에 빅토리아 폭포라는 영문자가 보였다.


지리 수업 시간에 빅토리아 폭포의 사진을 본 적 있었다. 사막과 초원, 그리고 정글이 있는 신비의 대륙 아프리카.


유석은 잠비아와 짐바브웨라는 낯선 땅에 있다는 그 폭포를 가겠다는 꿈을 품었다.


넋 놓고 사진을 건너다보고 있는데, 유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데도 받지 않자 여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유석은 폴더폰을 꺼내는 게 창피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전화벨이 울리게 둘 수는 없었다.


유석은 몸을 돌려 핸드폰을 꺼냈다. 부끄러움에 손이 빨갛게 되는 것 같았다.


“유석아, 너 지금 어디야?”


상대가 준영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뜨끔했다.


“어, 어, 집에 가는 길인데.”


“잘 됐다. 나 지금 너네 동넨데, 잠깐 얼굴 좀 볼까.”


만나기 싫었다. 만나지 않으려면 또 거짓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준영에게까지 거짓말을 한다면, 정규와 도민에게 한 것까지 해서 거짓말로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처럼 흉측한 모습이 될 것만 같았다.


유석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글쎄, 왜 그러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데?”


“너네 동네 근처에 온 김에 너 뭐하나 해서. 이야기 할 것도 좀 있고. 왜 시간 없어?”


“그런 건 아닌데, 집에 들어가 봐야 해서.”


“얼굴 잠깐 보자는 건데, 뭐. 잠깐이면 돼. 저번에 만났던 놀이터 있잖아. 거기서 기다릴 테니까 그리로 올래.”


멍했다. 유석은 거짓말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닐 거야,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또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딱 한 번이라고 했잖아. 그래, 모두 준영이 보고 좋은 애라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다문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갈아타야 할 버스는 15분이 지나서야 왔다. 버스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데도 유석은 무인도에 홀로 표류한 듯 외로움을 느꼈다.


몇 번씩이나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가 닫았다. 준영과 만나지 않으려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러는 중에 버스에서 내렸고, 놀이터로 가는 골목길 앞에 섰다.


뙤약볕이 미끄럼틀 뒤편에 있는 느티나무의 그림자에게 자리를 내준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글거렸다.


비어있는 시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준영이 보였다. 유석을 발견하고 준영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둘은 모래밭을 지나 패랭이꽃이 한 무더기 피어있는 벤치에 앉았다. 지난 5월에도 앉았던 곳이다.


준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도서관 다닌다며?”


유석이 준영의 옆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너하고 도서관에나 다닐 걸. 괜히 기숙학원에 들어갔나 봐.”


유석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너 기숙학원에 들어갔어?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하던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괜히 유난 떠는 거 같아서. 도서관에 가니까 공부는 잘 되지?”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는데 잘 되고 못 되고 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넌 어때? 기숙학원 좋아? 개학 얼마 안 남았으니까 거의 끝났겠네?”


“아니, 내일 다시 들어가야 돼. 병원에 가느라고 잠깐 나왔어. 계속 소화가 안 돼,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아.”


아닌 게 아니라 준영의 얼굴이 수척했고 표정도 어두웠다.


“다음 주가 개학인데, 또 들어가? 몸도 안 좋다며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기숙학원이 돈이 얼만데. 돈도 돈이지만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아껴서 공부해야지. 그리고 난 의지가 약해서 집에선 공부 못해, 그런 데라도 가야 공부를 하지.”


“얼씨구, 네가 의지가 약하다고? 기숙학원에선 개그도 가르치나 봐.”


유석을 따라 준영이 웃었다. 유석은 준영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준영은 인기가 좋다. 학급 아이들은 수학이든 영어든 모르는 게 있으면 준영에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그에게 아이들은 ‘친절한 준영 씨’라는 별칭을 붙였다.


준영과 전교 1등을 다투는 형주가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숨 막히는 고삼 생활을 하면서도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준영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위로를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러기는 유석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5월까지는.


놀이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멍하게 쳐다보던 준영이 느닷없이 무릎 사이로 머리를 파묻었다.


준영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봤어. 참담했지. 그때부터 먹는 것도 없는데, 늘 속이 꽉 뭉친 것 같이 소화가 안 돼. 공부도 안 되고 하루 종일 멍하고 손에서 진땀만 나. 내가 왜 그러는지 유석이 넌 알지? 그래, 수학 말고는 또 모조리 3등급, 4등급이야. 국어는 시간 안에 다 풀지도 못해. 도대체, 난 왜, 미치겠어, 왜 3학년 와서, 2학년 때는 안 그랬는데, 이게 진짜 내 실력일까? 주 죽을 거 같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준영을 유석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부모님도 많이 놀라셨나 봐. 족집게 과외라도 붙이시겠대, 돈이 얼마가 들든. 그러면 된다고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셔. 근데 유석아, 그렇게 하면 정말 수능 시험에서 1등급 2등급이 나올까? 족집게 과외라도 받으면 S대 최저 학력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을까?”


오열이라도 할 거 같은 준영의 떨리는 목소리에 유석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지난 5월의 상황이 필름을 다시 돌리듯 똑같이 재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석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준영이 5월에 했던 부탁을 또 할까 봐 두려웠다.


유석은 쫓기듯이 말했다.


“준영아,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못 맞추면 어때. 그냥 최저 학력 기준 없는 대학에 가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해. 그러면 오히려 니 실력이 나올 거야. 그리고 나 같이, 그 정도 대학이라도 가면 소원이 없겠다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석은 아차 싶었다. 준영이 의대를 가려고 한다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전교 1등인 성적으로 보나, 학교 안팎에서 활동에 참여해 쌓은 눈부신 스펙으로 보나 준영이 의대에 합격할 가능성은 높았다. 게다가 준영을 아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그처럼 성품 훌륭한 사람이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응원을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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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커닝의 이유(2) 23.04.25 4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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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화. 그따위 유전자 필요 없어(2) 23.04.25 47 1 14쪽
1 1화. 그따위 유전자 필요 없어(1) 23.04.25 98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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