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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선생 님의 서재입니다.

슬픈 고삼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얌선생
작품등록일 :
2023.04.25 00:21
최근연재일 :
2023.05.19 16:47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687
추천수 :
10
글자수 :
128,593

작성
23.04.25 00:44
조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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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4쪽

2화. 그따위 유전자 필요 없어(2)

DUMMY

✭✭✭



3년 전,

제호가 중학교 3학년이던 여름방학의 어느 날 오후.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제호는 에어컨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삼인 누나는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학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관문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급하게 났다.


누나의 점심 식사를 차리고 있던 엄마가 손을 멈추며 말했다.


“아빤가, 지금 시간에 웬일이실까?”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엄마를 따라 제호도 목을 뺐다.


그 순간 무언가가 쪼개지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엄마와 제호는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영서, 이 년 어디 갔어!”


이번에는 무언가를 걷어차는 소리가 났고, 뒤따라 무섭고도 섬뜩한 아버지의 고함이 들렸다.


제호의 눈에 누나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짝! 짝! 퍽! 쿵! 쿵!’


흑인 노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들었던 채찍 감기는 소리 같은 게 났고 이어 둔탁한 것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엄마를 쫓아 제호는 누나 방으로 뛰어들었다.


제호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몇 년 전의 그 장면만큼이나 끔찍한 장면이었다.


그때와 다른 건 머리가 산발이 되어 방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게 엄마가 아니라 누나인 것만 달랐다.


“야 이 년아, 그따위 대학 가라고 내가 피 같은 돈 벌어서 갖다 바친 줄 알아, 네년 학원비로 들어간 돈이 도대체 얼만지나 알아!”


머리채를 잡힌 누나의 몸이 헝겊 인형처럼 꺾이고 뒤집혔다. 방바닥에 머리를 내리 찍힐 때마다 누나의 초점 잃은 눈이 번뜩였다.


엄마가 몸을 던져 누나의 얼굴을 가슴으로 안았다.


한 몸처럼 붙어버린 엄마와 누나 위로 아버지의 새하얗게 미친 손이 끝없이 쏟아졌다.


제호는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공포로 몸속 모든 혈관의 피가 멈춘 듯했다.


엄마는 “나를 죽여!”, 라고 소리쳤고, 누나는 죽은 듯이 몸을 돌돌 말고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아버지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버지는 책상 위 연필꽂이에서 가위를 빼 들었다.


누나에게 달려든 아버지는 누나의 검고 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어 가위를 움켜쥐었다.


아버지의 가위질은 엄마의 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바닥에는 잘려 나간 누나의 검은 머리카락과 엄마의 붉은 피가 엉겨 붙었다.


산발이 되고 군데군데 흉측하게 잘린 누나의 머리카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그제야 광기가 가라앉는지 아버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버지는 누나의 책상을 향해 가위를 내던졌다. 책상 유리가 깨지고 가위가 나뒹굴었다.


“제호 너도 누나 꼴 당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


밀치는 아버지의 손에 제호가 나동그라졌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거칠게 났다.


엄마는 몸서리치며 울었다.


그칠 것 같지 않던 엄마의 울음이 그치자 누나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갔다.


그날 밤 누나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엄마는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출근하자마자 누나의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임 선생님은 누나 친구 몇 명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다음,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영서 아버님께서 어제 학교에 상담 오셨을 때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게 안쓰러우셨는지 학급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리셨어요. 담임으로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일주일이 지난 후, 집에 들어온 누나는 아버지가 있을 때는 절대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더 이상 공부도 하지 않았다.



✭✭✭



가방을 챙겨 자율학습실을 나서는데 유석이 놀란 눈으로 따라 나왔다.


“제호야 어디 가? 담임 선생님에게 많이 혼났어? 미안해, 전해주지 말걸 괜히 내가 전해줘서”


“너가 뭐가 미안해. 그리고 오 상사에게 혼난 거 아냐. 집에 일이 생겨서 가는 거니까 넌 신경 쓰지 마. 내일 보자.”


유석이 표정으로 무슨 일인데, 하고 묻고 있었지만 제호는 발걸음을 빨리해서 교문으로 향했다.


학교 밖으로 나온 제호는 갈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엄마와 누나가 있는 집으로 가려고 했다. 가엾은 엄마와 누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금방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집으로 가는 것이 아버지의 광기에 불을 지필 것이고, 엄마와 누나를 더 큰 곤경에 빠뜨릴 것이 분명했다.


제호는 무작정 걸었다.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기세였다.


제호는 폐쇄된 공간으로 그것이 버스든 지하철이든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혹시 아버지를 만날까 두려워서.


제호는 골목길을 피해 대로로만 걸었다. 대로에서는 아버지를 만난다 해도 사람들이 많으니까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제호는 길도 건물도 낯선 동네에 서 있었다.


허기가 졌다. 참담한 심정과 상관없이 배꼽시계는 돌아가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서 보니 삼천 원이 다였다.


길 건너편에 편의점이 보였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발길을 틀어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 딸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데, 삼천 원마저 써버리면 갈 곳이라고는 집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올까 봐 꺼두었던 전원을 켰다.


제호는 3번 버튼을 길게 눌렀다. 단축키 1번은 엄마이고, 2번은 누나, 3번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금은 1반인 석민이다.


통화연결음만 계속되고 석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5분 후에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별수 없이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제호야, 전화했었네.”


귀에 익숙한 석민의 목소리에 울컥 서러움이 북받쳤다. 제호는 감정을 누르려고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말했다.


“석민아, 너 지금 어디야?”


“미술학원이지, 방금 저녁 먹고 들어오느라 전화를 못 받았어. 제호 넌 어디야?”


“잘 모르겠어. 그냥 무작정 걸었는데 걷다 보니까 모르는 동네야.”


핸드폰에서는 석민의 숨죽인 숨소리만 들렸다.


“석민아, 미안한데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제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석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럼 당연히 빌려줄 수 있지. 근데 어떻게 하지 나 지금 만 원 정도밖에 없는데 그 정도도 돼?”


“응 괜찮아. 미술학원 주소 핸드폰에 찍어줘 내가 바로 갈게.”




버스에서 내린 제호는 미술학원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석민이 다니는 미술학원은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있었다.


제호는 다시 핸드폰 전원을 켜고 석민에게 전화를 했다.


학원 건물 유리창에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석민이일 것이다.


석민은 신호가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너왔다.


“찾아오는 게 어렵지는 않았어?”


걱정스레 묻는 석민을 바라보는 제호의 눈에 물기가 돌았다. 제호는 눈길을 피했다.


석민이 건넨 돈은 사만 원이 넘었다. 학원 친구들에게 빌린 모양이었다.


“고마워, 석민아. 나 갈게 그만 들어가 봐.”


자꾸 등을 떠미는 제호를 석민이 아무 말 없이 두 팔로 안았다.


제호보다 머리 하나는 큰 석민의 품에 안긴 자그맣고 동그란 제호의 몸이 위태로워 보였다.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석민을 미술학원으로 돌려세우고, 제호는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제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석민을 만났으니 이제 핸드폰을 켜둘 필요가 없었다.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 수십 개가 들어와 있었다. 대부분 엄마와 누나로부터 온 것이겠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것도 있을 것이다.


제호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석민이 횡단보도 건너에서 머리 위로 두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제호야, 나 10시에 끝나. 오늘 우리 집에서 자도 돼.”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는 석민을 쳐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점점 짙어졌다.


제호는 미술학원에서 멀지 않은 분수 광장에 앉아 있었다. 석민을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갈 곳이 없어서였다.


10시가 지나자, 분수가 꺼졌다. 광장이 적막해졌다. 공원 옆을 흐르는 실개천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스멀스멀 머리를 드는 외로움에 제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그들 속에 섞여 지나가는 버스들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북적대던 정류장도 점점 한산해졌다.


제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깡! 깡! 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호는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끌리듯 갔다.


야구 연습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커다란 새장 같은 철망 안에서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깡! 깡! 깡!


남자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하얀 야구공이 날았다.


제호는 남자의 옆 칸으로 들어갔다.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투입구에 넣고,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눈을 부릅뜨고 피칭 머신을 노려봤다.


‘탕’, 소리와 함께 하얀 야구공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제호는 힘껏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헛스윙.


야구 방망이에 맞지 않은 공은 뒤에 설치된 장비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또 공이 날아왔고, 제호는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다.


또 헛스윙.


모두 열 개의 공이 날아왔는데 겨우 세 개를 맞췄다.


제호가 야구 방망이를 제자리에 놓으려다 멈칫했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는 제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귀에는 아버지의 음성이 음산하게 맴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수백 번도 넘게 들은 말.


“이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야구 방망이로 맞으면서 공부했어, 피멍이 들어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면서 공부했어!”


제호는 어둠이 짙은 거리를 달렸다. 숨이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신호가 막 바뀐 횡단보도를 한달음에 건넜다. 출발하려던 자동차가 위협적으로 클랙슨을 울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이리저리 꺾으며 골목길을 달렸다. 등에 매고 있는 가방에서 절그렁 절그렁 소리가 났다.


제호의 손에 들린 것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 빛났다.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


골목길이 공사장으로 막혔다. 더는 갈 수 없었다.


제호는 널려있는 건축 자재 위에 털퍼덕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야구 방망이를 움켜쥔 손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때의 야구 방망이도 이것과 비숫하게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호기심에 난생처음 담배를 피었었다.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아버지는 제호를 다그쳤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거짓말보다 나쁜 짓은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


무서웠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거짓말을 한 거는 아니니까 아버지가 용서해줄 거라는 생각에 처음 담배를 피웠는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용서를 빌었다.


제호의 말을 다 들은 아버지는 베란다로 나갔다.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는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베란다에 있었는지 제호는 알지 못했다.



✭✭✭



그날의 공포가 느껴져 잔뜩 일그러졌던 제호의 눈이 순간 횃불처럼 커졌다.


너무나 낯익은 사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 보들보들한 천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닦고 또 닦는 것.


골목 안 담벼락을 따라 쭉 세워져 있는 자동차들 중에서 맨 앞에 있는 것.


아버지의 자동차였다.


물론 눈앞에 있는 것은 자동차 모델과 색깔만 같은 것이었지만, 제호의 눈에는 분명 아버지의 차로 보였다.


제호는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사제처럼 느릿느릿 자동차로 다가갔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야구 방망이가 하늘을 향해 섰다. 가로등 불빛에 반짝했다. 무서운 속도로 야구 방망이가 허공을 수직으로 갈랐다.


퍽!!!


단단한 물체에 의해 하나의 물체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


스파크가 튀었고 유리가 바스러졌다.


퍽! 퍽! 퍽! 퍽! 퍽···


앞 유리는 거미줄 모양으로 으깨졌고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호는 자세를 바꿔 수직으로 내리치던 야구 방망이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자동차의 옆 유리가 단번에 박살났다.


괴기스러운 환호성을 지르며 그 옆 유리도 또 그 옆 유리도 박살냈다.


골목길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욕을 하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제호는 야구 방망이를 내리치고 또 휘둘렀다.



경찰서의 형광등 불빛에 제호의 팔과 얼굴, 목덜미에 엉겨 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엄마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소독약이 묻은 천으로 상처를 닦았다.


소독약이 닿을 때마다 따갑고 쓰라렸지만, 제호는 찡그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자동차 주인은 아버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경찰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칠 때마다 자동차 주인은 더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쏟아지는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꼿꼿이 세운 아버지의 뒤통수가 닭 머리처럼 보였다.


문득 궁금했다.


언제나 저렇게 당당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야구 방망이 앞에서도 당당했을까.


경찰의 책상 위에 놓인 야구 방망이를 보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벌벌 떠는 아버지를 상상했다.


제호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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