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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우스K 님의 서재입니다.

운명을 계승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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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우스K
작품등록일 :
2017.12.15 08:26
최근연재일 :
2020.03.21 23:23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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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글자수 :
113,108

작성
17.12.2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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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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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1쪽

1권-02화

DUMMY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마을 전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새파란 풀밭 위에 쓰러진 듯 누워 있었다. 크레이딘은 풀밭 위에 쓰러져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으나 그의 형은 숨이 매우 고른 것이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크레이딘은 사력을 다해 자신의 형, 제필리온을 잡으려고 쫓아다녔었지만 어검술을 다루는 실력자의 체력은 얼마나 무지막지하겠는가. 오히려 크레이딘이 제풀에 주저앉는 꼴이 되었다. 결국 뒤쫓는 것을 포기하고 형과 타협함으로서 이렇게 언덕 위에 누운 채 숨을 고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마을의 피해는 막심했다. 그들이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닌 결과 마을 곳곳이 검기 난무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내지르는 목소리나 마을이 부서질 때의 굉음은 오죽 시끄러운가. 그 때문에 한때 완벽한 소음차단을 자랑하던 마법 귀마개가 그로 인해 불티나게 팔려나갔을 정도였다. 그들 덕에 귀마개를 만들어낸 이 마을의 유일한 마법사는 상당한 거금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웃지 못 할 여담마저 있다.


아무튼 그로 인해 상당히 많은 돈이 마을의 피해를 보상하는데 들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두 형제의 집안 재산은 허름한 집의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의 형이 벌어오는 수입도 엄청났다. 그게 아니었다면 마을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크레이딘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대체 형은 직업이 뭐기에 그 많은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언제나 속 시원히 대답해준 적은 없었다. 그냥 웃으며 넘겼을 뿐이다.


호흡이 다시 안정될 정도로 기력을 되찾은 크레이딘은 이마로 흘러내린 땀을 손으로 훔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은 마치 푸른 강물을 거슬러 흘러가듯 느리면서도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달아오른 크레이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서늘히 식히고는 다시 흘러갔다.


그 때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입에 문 채 같이 하늘을 바라보던 제필리온이 문득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크레이딘, 이 바람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지?


그 물음에 크레이딘은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아리송한 얼굴로 형을 흘깃 쳐다보고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대꾸했다.


"글쎄? 단지 시원하다는 것?"


"훗, 간단하고 단순하긴 하지만 역시, 너 다운 말이다."


그 답변에 제필리온은 작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 위로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릴 정도의 제법 강한 바람이 일어나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는 의지만으로 자연을 움직여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제필리온은 휘도는 바람 중심축에 선 채로 차분히 말했다.


"자, 바람을 보아라. 바람이란 형태를 지니지 않은, 자유롭지만 외로움을 동시에 지닌 존재, 자유분방함의 권한을 가졌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외로움이란 고뇌를 지니게 된 거지. 하지만 그 자유로움을 타고 세상을 이렇게 어루만져주는 바람은 많은 존재를 접하면서 전해 받은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 슬픔을 통해 그 외로움을 떨치게 되는 것이야."


손을 거둬 일으킨 바람을 다시 흩어버린 그는,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는 크레이딘을 돌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제필리온이 거둔 바람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잔잔한 바람이 그들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을 타고 늦봄에 피어오른 꽃들의 그윽한 향기가 콧속으로 슬며시 흘러들었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그에 대응하는 고통이 따르는 법. 성인이 되면 다른 이의 간섭을 받진 않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접하고 경험하면서 점차 성장하는 거지."


그는 정색했던 표정을 풀고는 부드럽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이 18세면 보호에서 벗어나야 할 성인. 너도 이제 슬슬 세상에 나가 인간사회라는 것을 경험해 봐야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느닷없는 그의 말에 놀랐는지 크레이딘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18세가 되도록 여태껏 바깥세상은커녕 마을 바깥의 숲조차도 나기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해왔던 제필리온이었다. 게다가 언제고 몰래 마을을 벗어나려다 들켜 대련을 빙자한 구타에 죽기 직전까지 흠씬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 이렇게 마음을 떠보고는 트집을 잡아 패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든 크레이딘으로서는 도저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그런 동생의 마음을 알아챈 듯, 제필리온은 손으로 그의 푸른 머리카락을 부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너도 가정의 보호를 벗어나 한번 세상을 돌아보란 소리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장난스런 모습에 그제서야 안심이 된 듯, 겨우 의심을 푼 크레이딘은 표정을 푼 채 기대어린 눈빛을 하며 물었다.


"헤, 그럼 결국 성인식 같은 건가?"


"그렇다고 봐야겠지. 나도 네 나이 대에 혼자 여행을 떠났었으니까."


크레이딘 또한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7년 전 제필리온이 성인이 되자마자 홀로 집을 떠나 수년간을 대륙을 떠돌며 여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형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크레이딘은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어디까지나 이런 중요한 사안은 이 집안의 제일 어른인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하다. 본래라면 아버지가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했을 테지만, 이들 크레이딘과 제필리온의 아버지는 오래 전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들의 어머니가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음,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허락하신거야?"


자리를 털고 언덕의 풀밭 위에서 일어선 제필리온은 동생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대꾸하고는 바람에 휘날려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거야 당연하지. 준비하고 떠나기만 하면 돼."


어쨌거나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하니 여행에 걸리는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크레이딘은 이상하게 왠지 속이 답답해왔다. 그렇게 기다리고 고대해오던 세상 바깥을 향한 여행이건만, 뭔가 불길하다고 할까···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잠시 뿐. 그는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치부해버리고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동생을 향해 제필리온은 손을 내밀더니 장난스런 표정과 함께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럼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집에 돌아갈까? 레이디(Lady)?"


크레이딘은 그 모습에 힘없이 웃고 말았다. 이젠 더 이상 화내고 싶은 마음도,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뿐이다.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크레이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선선한 바람은 사라지지 않고 그들 두 형제와 언덕의 대지를 마치 축복해주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이제 여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리듯 하늘 중심에 자리한 태양은 점점 강렬해지는 그 열기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 * *


그들이 집에 들어오자, 주방에서 음식을 하던 한 부인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녀가 바로 크레이딘과 제필리온의 어머니인 '케냐 로덴시아'였다.


이미 40세는 훌쩍 넘은 그녀였지만 상당한 동안인지라 이제 겨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나라 구석진 곳에서 생활하는 터라 몸치장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서는 이곳의 구석진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족 부인과도 같은 정숙함과 자태가 은근히 엿보였다.


그들의 흐트러진 옷차림새를 본 그녀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한 듯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보일 듯 말 듯한 실소를 머금었다. 아침마다 늘 겪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야단쳐야 할 일은 단호해야 하는 법. 그녀는 미소를 지우고 약간 나무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마을 좀 어지럽히지 마렴. 그 때문에 사람들이 항의가 들어오는데. 게다가 피해보상에 들어가는 돈은 또 어떻고!"


"···다음부턴 주의할게요."


죄송스런 얼굴로 대답한 크레이딘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옆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모든 소동의 원인 제공자인 형이 능청스럽게 서 있었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주제에 왜 이렇게 뻔뻔하지?


그러나 제필리온은 동생의 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크레이딘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 계속 노려보다가 끝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편 두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던 케냐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매일 다짐은 받아놓긴 하지만 다음날 가면 언제 약속했냐는 듯 또다시 마을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얼마 뒤, 그럭저럭 아침을 먹은 제필리온은 자신의 방에서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자신의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의 가방 속엔 주로 옷과 마른 식량, 그리고 노숙에 필요한 도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대충 짐을 다 챙긴 그는 벽 한쪽에 달린 거울을 보며 자신의 옷을 한동안 단정히 매만지더니 침대위에 놓인 회색 망토를 자신의 옷 위에 둘러매었다. 그리고는 방 한구석 벽에 기대져 있는 자신의 검을 집어 올렸다.


스르릉!


그는 그 검을 검집에서 천천히 뽑아들었다. 검집 밖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갈색의 검신이 철목검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독특한 향내가 풍겨나왔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철목검(鐵木劍)은 연습용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검과는 다르게 거의 예술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검신과 힐트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전설의 장인들이라는 난쟁이족 드워프들의 작품인 듯하였다. 그 철목검은 어떠한 검보다도 날카로우면서도 나무의 특성인 유연성, 그리고 드워프들만의 특수 제련으로 인한 미스릴을 훨씬 능가하는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커튼이 쳐져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안에서 자신을 빨아들일 듯한 갈색 빛깔의 은은한 광택을 내는 철목검을 황홀한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답군."


제필리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좀 전까지 동생에게 보이던 장난스런 모습은 다 어디 갔는지 힘이 빠진 듯한 그의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그랬다. 태연한 척 동생에게 장난을 걸던 그의 모습은 가식적이었을 뿐이다. 제필리온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짙은 슬픔의 감정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


어느새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제필리온은 옷소매로 슬쩍 닦아내고는 돌아섰다. 모든 것을 동생에게 맡겨야 하는 자신을 돌아보자, 마음 한편이 착잡해 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그에게 주어진, 그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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