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수모쿠

라미세계(裸未世界)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수모쿠
작품등록일 :
2021.08.23 08:23
최근연재일 :
2021.08.27 18:29
연재수 :
4 회
조회수 :
114
추천수 :
1
글자수 :
20,364

작성
21.08.27 18:29
조회
16
추천
0
글자
11쪽

어떡하지

DUMMY

어째서 몰랐던 것일까. 정작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손녀였는데도 너무나 큰 슬픔에 휩쓸려 떠올리지 못했었다. 노인이 가슴을 쳤다.


미친 사람처럼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집 주변을 헤맸지만 대답은 들리지 없었다.


노인은 다시 쓰러져 오열할 뻔했지만,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에 생각을 바꾸었다.


마을을 습격해 남자들을 죽인 야만인들은 여자들을 끌고 가 노예로 팔 것이었다. 식량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우는 것보다 그쪽이 더 이득이 컸다.


만일 전날 들이닥쳤던 야만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가고 있다면?


여자들을 전부 다 말에 태우고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여자들을 결박해 걷게 하고 그 옆을 감시하면서 가고 있을 것이었다.


여자들의 걸음은 빠르지 않다. 당연히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이런 시발! 이 병신! 멍청한 축생아!”


노인은 쌍욕을 해가면서 자신의 가슴을 퍽퍽 소리 나게 주먹으로 두드렸다.


밤새 무덤을 만들 것이 아니라 놈들의 뒤를 밟았어야 했는데...!


땅은 젖어 있었다. 날아가지 않는 이상 말발굽이 남게 돼있었다.


그 시간에 놈들을 추격했더라면!


노인의 걸음으로 야만인들의 행렬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그래도 훨씬 가까운 곳에 가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 적들은 노구를 이끌고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거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손녀 역시 노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더욱 흐릿해지고 있었다.


채찍질을 당해가며 강제로 걷고있을 것이었다. 불행이 예정되어있는 여정이었다.


‘어젯밤을 무사히 넘겼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열한 살 여자아이에게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불행한 사태가 자꾸 노인의 뇌리에 그려졌다. 노인은 그 그림들을 지워내려 미친 사람처럼 거세게 머리를 가로젓다가 휘청 균형을 잃고 주저앉고 말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추격한다고 해봤자 손녀를 되찾을 수 있을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가혹한 세금을 수탈당해 춘궁기가 되면 기아에 시달려야 하는 이곳보다 더 나은 곳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게 체념하려던 순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이 한 마리임을 알아차린 노인이 바로 소리 죽여 장검을 빼들었다. 칼로 말을 빼앗아볼 생각이었다.


네놈이 뭐건 상관없어. 일격에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내게 말을 빼앗기게 될 거다.


짐을 실은 말이 아니었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중무장한 병력이 타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식의 말발굽 소리가 날 리 없었다.


불타다 남은 기둥과 지붕들 뒤로 칼과 몸을 숨기면서, 노인은 그 소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기병을 상대로 검을 빼드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이 있어야만 야만인들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노인 역시 죽은 아들들이 그랬던 것처럼 싸움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중한 노인은 그 사실도 깨닫지 채 칼을 들고 말발굽 소리를 향해 다가들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야만인들이 노인을 끌고 가서 일을 시키거나 노예로 파는 경우는 없었다.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보이는 족족 죽이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곤 했다.


노인은 이미 가족들에게도 야만인들에게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서글퍼할 일만도 아니었다. 용도가 없어진 사람에게만 자유가 주어지는 세상이었다.


곡식 씨앗을 챙겨 다시 산속으로 들어간다면? 혼자가 될지언정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노인은 손녀를 다시 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안전’한 곳이 과연 이 세상에 있는 것일까...?


말은 마을 한복판으로 진입했다. 다행히 이동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금방 가까워졌다.


야만인이 아니었다. 말 위에는 완전무장한 갑사가 타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갑옷을 찌르고 반사되면서 눈부시게 빛났다.


찰그랑!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려던 기세는 간 데 없이, 노인은 칼을 내던지고 달렸다. 말 앞을 가로막으며 뛰어들었다.


“군관 나리! 군관 나리!”


그 나이를 먹도록 기쁨의 눈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노인은 눈물을 뿌리며 꿇어 엎드렸다.


“나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야만인들이! 쳐들어와서어! 마을 사람들과 저의 가족들을! 도륙했사옵니다! 저의 손녀가 놈들에게 붙들려... 어엑?”


발 앞에 뛰어든 노인 때문에 크게 놀란 말이 등을 곧추세우고 허공에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히히힝!


물론 미안한 노릇이기는 했지만, 노인이 보기에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 기수는 말을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고삐를 붙들고 균형을 잡으려 애를 쓰는 것 같기는 했으나 결국


“어억!”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말 위에서 떨어져 등부터 맨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등을 아래로 해서 낙마하게 되면, 아무리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충격을 받는다. 순간적이기는 해도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커헉!”


호흡곤란이 온 갑사가 뒤집힌 거북이처럼 버둥거렸다.


노인이 가진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나라에서건, 기병들은 낙마하게 되었을 시 말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는 요령을 숙지하게 돼 있었다.


아무리 숙련된 기수라고 해도 전쟁 중에는 낙마사고가 일어나게 마련. 이때 기수는 어떤 경우에도 두 발을 아래로 향하고 지면에 착지해야 한다. 등짝부터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자연히


‘얼씨구? 이 새끼 뭐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곧 마음을 돌려먹었다. 방금 말에서 떨어진 갑사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급하게 달려오느라 지쳤을 수도 있고.’


갑사는 간신히 일어서기는 했지만, 점입가경이었다. 체면을 차리려는 건지 제대로 균형도 잡지 못한 상태로 말고삐부터 부여잡았다. 그런데 낙마 충격에 다리가 풀려 있어 등자에는 발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댕그렁!


투구가 벗겨져 떨어져 땅에 뒹굴었다.


‘너 이 새끼! 투구 끈을 이렇게 헐겁게 묶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으로 군관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뻔했지만, 군관은 귀족이었고 지배층이었다. 한숨을 쉬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군관은 분명 노인을 의식해 허둥대면서 다시 말에 오르려는 것 같았다.


‘이왕 떨어진 거 숨이라도 좀 돌아오면 올라가지 그러니?’


숨이 안 돌아온 것도 문제였지만, 균형 감각이 회복되지 않은 것 역시 문제였다.


투구가 벗겨진 얼굴을 보니 동안의 미소년이었다.


‘뭐여 이 새끼? 수염도 안 났네? 몇 살이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어린놈을 대신해 고삐를 잡고 말을 진정시켰다.


‘시발. 요즘 군대 진짜 개판이네. 이런 세금 도둑놈새끼들... 혹시 우리가 너무 많이 잡아 죽여가지고 군관들 수급이 어려워진 건가?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는데.’


말을 진정시킨 뒤에는 아예 한쪽 무릎을 꿇고 양 손으로 깍지를 껴 내밀었다.


“오르시지요.”


군관은 노인의 손을 발로 밟고 간신히 말 위로 올라갔다. 시뻘개진 얼굴로 묻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아니 내가 안 그래도 내리려던 참이었는데... 발이 걸려가지고.”


노인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땅에 떨어진 투구를 주워 돌려주었다.


그리고 야만인들의 예상진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이 북쪽 국경을 넘어 다시 놈들의 근거지로 가려면 필히 거쳐야 할 지점들을 알려줬지만, 군관은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아... 실로 답답한 새끼가 아닌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곳 지명을 잘 모르는 건가?’


마을 여자들을 끌고 가는 중일 테니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소리까지 했지만, 표정 변화는 없었다. 멍하니 듣는 것 같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혹시 먹을 거 좀 가진 거 있나?”


노인은 기꺼이 배낭을 열어 음식을 꺼내 건네주었다. 군관은 음식을 받아들고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노인이 보기에는, 그동안 처먹어온 고급 음식들과의 괴리 때문인 듯싶었다. 그 꼬락서니를 본 노인도 얼굴을 잔뜩 찌푸렸지만, 군관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귀족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처음엔 깨작거리면서 먹어도 괜찮은지 보는 것 같더니만, 곧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노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최소한 어제 저녁부터는 굶은 모양새구먼.’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먹어치운 군관이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북쪽 국경까지의 지리를 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주 빠삭합지요. 이곳 토박이니까요.”


군관은 대뜸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북으로 가자.”

“예에?!”

“무엇하느냐? 손녀가 잡혀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오나... 나리. 본대에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습니까요?”

“본대?”


그 소리에 놀란 얼굴이 되더니 홱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아, 나는 그...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정찰? 정찰을 하러 오신 겁니까요?”

“그렇지. 정찰.”

“그러시다면 벌써 공격계획이 잡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요?”

“그렇다. 그래서 내가 먼저 놈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언뜻 이치에 닿아 있는 말 같기도 했으나 의문점이 생겼다.


‘단기필마로 정찰을 다닌다고? 습격 받으면 어쩌게?’


너무 야만인들을 만만히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규군 본대의 전력은 야만인들과는 비교 불가할 수준으로 강했다. 노인은 젊은 시절 뼈저리게 그 힘을 체감했던 적이 있었다.


먼저 정찰을 해보면서 신중히 접근하는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했다.


‘잠깐만. 이 새끼들이 이렇게 빨리 병력을 보내줄 리가 없는데? 마을 하나 털렸다고 당장 공격계획 짜고 정찰을 보내? 그것도 병사가 아닌 군관을?’


군관은 다시 말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 이 말을 같이 타고 북쪽... 아니 야만인들에게로 안내하게.”

“예. 나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대답은 했지만, 노인은 냉큼 그 손을 잡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육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말에 올라 그놈과 함께 나다니게 되면 ㅈ된다는 것을.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찌됐든 북으로 올라가야만 손녀를 다시 볼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그 손을 잡고 말에 올랐다. 손을 잡는 순간, 비로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손의 감촉 때문이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태어나서 고생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은 손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내리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노인을 말에 태운 군관이 말의 배를 찼다.


‘시발. 될 대로 돼라. 나는 손녀만 되찾으면 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라미세계(裸未世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어떡하지 21.08.27 17 0 11쪽
3 나는 자연인이다 21.08.25 10 0 11쪽
2 버림 받은 노인 21.08.24 17 0 11쪽
1 세계에게, 세계를 21.08.23 71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