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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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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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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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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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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2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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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3)

DUMMY

<2018.01.22. 월요일 / 경기도 용인>


유엔은 TV 소리에 잠이 깼다.


시노가 먼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케이블 TV로 일본방송을 보고 있었다.


“뭐야?”

유엔이 잠이 덜 깬 소리로 물었다.


“일본말이 생각 안 나서.”

시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언제 가?”

“모레.”


“그렇게 빨리?”

“비행기 좋은 거 타라고 돈도 받았는걸.”


“비지니스 타는 거야?”

“아니, 이코노미 끊었어.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내 돈인데 아껴 써야지.”

시노는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돈 세는 동작을 흉내 냈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다.”

“엄마도 보고 싶고, 이왕 가는 거 빨리 가려고. 내일 사무실에 업무 인수할 사람 올 거야. 건수가 적어서 금방 정리될 거야. 아빠 쪽 일은 아빠가 알아서 정리한대.”


“아침 먹자.”

유엔이 거실 한구석에서 놓인 박스에서 즉석밥 하나를 꺼내자, 시노가 바로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야. 밖에서 맛있는 거 사 먹자. 며칠 있으면 가는데.”


“언제 돌아와?”

“나도 몰라.”


“근데, 이해가 안 가. 그 사람이 시키는 말을 왜 들어야 하는지.”

“아빠가 이제 독립하래.”


“근데, 그게 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일본이든 한국이든 내가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그런 걱정. 허드렛일만 해서는 엄마 병원비를 벌 수 없다는 생각.”


“병원비는 걱정 없다면서.”

“지금은 그렇지만,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고 난 후라면 달라지지 않을까?”

“설마?”

“설마가 아니야. 공짜 점심은 없다고.”


“아빠가 있잖아.”

“난 아빠를 믿지 않아. 지독하게 힘들게 살았어, 어릴 때.”

시노가 아빠를 믿지 않는 이유는 가난이나 무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린 시노는 보았다, 남에게 폐를 끼치며 벌어온 돈으로 살림을 꾸려야 하는 엄마의 무너진 자존심을.


“근데 누구야, 일본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유엔의 질문에 시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도 몰라. 나중에 알려준대.”


“안 무서워?”

“당연히 무섭지. 그래도 괜찮아, 난 거짓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나쁜 아이니까.”


시노가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아빠를 닮아가고 있다는 건 아직 깨닫지 못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흘째 눈이 내려 한낮에도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베란다에 둔 드럼 세탁기가 얼어서 빨래를 토해 놓은 게 구정물과 함께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제 기온은 영하 15도까지 내려갔고, 빨래는 전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빨래를 녹일 요량으로 촛불을 켜두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엔과 시노의 옷이 한데 엉겨 붙어 꽁꽁 얼어 있었다.


“빨래가 저 모양이네, 어떻게든 바닥에서 뜯어내 봐야겠다.”

유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냥 둬. 봄 되면 땅에 붙은 채로 마르겠지.”


“누가 보면 흉가에 온 줄 알겠다.”

“빨래 입장에선 쓸쓸하지 않고 좋지 뭐. 내 옷이랑 네 옷이랑 엉겨 있으니까.”

하지만, 시노의 말은 쓸쓸한 건 바로 자기라는 말처럼 역설적으로 들렸다.


“봄에 올 거야?”

“글쎄. 3월 되면 학교 가야 하는데, 한 달 만에 돌아오긴 어렵겠지? 아마 휴학해야 할 것 같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캠퍼스 커플 해보고 싶었잖아. 듣자 하니 과 동기들은 이미 물 건너갔고, 혹시 알아? 한 해 쉬고 나면 연하남 만날 기회가 생길지.”

“넌 어때?”


“남자 동기들이 날 킬빌이라고 부른대. 체육복 입고 학교 와서 허리 꼿꼿이 세우고 다닌다고.”

“그런 심한 소리를 하다니, 라고 편들어주고 싶지만 미안, 친구들 눈이 예리하네.”


“그나마 그건 다행이야.”

“또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흉노족, 어떤 애들은 나보고 흉노족 닮았대.”

“흉노족이 어떻게 생겼는데?”


“말 타고 다니면서 창으로 사람들 잘 찌르게 생기지 않았을까?”

시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게 뭐야?”


“심지어 흉노족 닮았다는 말은 칭찬이래. 흉노족 닮아서 마음에 든다고 말이야.”

“미친 거 아니야?”


“왜? 난 아예 이쪽 컨셉으로 쭉 밀고 나갈까 생각 중이야.”

“쓸만한 남자 부하 몇 명 거느리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그 말 듣고 보니, 말 타고 학교 다니고 싶어지네.”

유엔은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시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더니 갈아입을 옷을 골랐다.

“추워서 씻기도 싫다. 대충 입고 나가서 밥부터 먹고 온천 가자.”


“온천?”

“겨울 노천탕이 얼마나 좋은데. 다리는 따뜻하고 입으로는 입김 나오고. 내일은 바쁘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야.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온천 갔다가 아울렛 가자. 빨래도 못 하는데 쇼핑이라도 해야지.”

“좋아.”




<2018.01.23. 화요일 / 경기도 용인>


오은명은 이희경과 함께 아침부터 정 대리를 만났다.


서울의 L 호텔 객실 프리미어 룸이었다. 세 사람은 원탁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할 이야기가 많을 때는 식당이 아니라 교외 휴양지에서 종종 만나기는 했지만, 호텔은 처음이었다.


종일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하겠다는 오은명의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오늘은 좀 길어질 거예요.”


“우선, 제가 먼저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케이진이란 청년의 양아버지 이름은 마에다 고이치(前田 光一). 1966년 10월 5일 가나자와(金沢) 태생입니다. 에도 막부 시절부터 이시카와 지역의 유력한 집안이라 친척들도 아직 고향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마에다 고이치는 도쿄에 있는 명문 사립대학교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후 도쿄에서 취직해서 정착했습니다. 27세에 결혼을 해서 96년생 히데오, 99년생 유토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정 대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한 식품 유통업체가 동남아시아 경제위기 때 거래처 도산으로 줄부도가 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을 수습하러 인도네시아 출장을 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때 동반했던 아내가 강도를 만나 비명횡사하게 됩니다. 사업 실패와 아내의 사고 이후 주위와 연락을 끊고 지냈다고 합니다. 집안이 명문가이긴 하지만 종손은 아니고 방계입니다. 장남 위주의 상속문화 때문에 별로 물려받은 건 없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강해서, 사업이 망해가면서도 고향에는 끝까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식재료를 수입하면서 차츰 사업도 회복해서 혼자 힘으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정 대리는 메모에서 잠시 눈을 떼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오은명을 한 번 쳐다봤다.


“그게 바로 전에 말씀드린 박재열 대표와의 의심스러운 거래입니다. 동광무역은 마에다 고이치에게 필요 이상의 호의적인 계약을 15년이나 지속했습니다.”


정 대리의 설명을 듣던 오은명은 거친 숨소리를 냈다. 잠시 멈춘 정 대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11월 27일 지병인 고혈압이 원인이 되어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에다 고이치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양자를 한 명 데려와 키웠다고 합니다. 워낙 눈에 띄지 않아 친척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양자는 희한하게 한국 국적을 갖고 한인 학교에 다녔습니다.”


정 대리가 정확한 발음으로 긴 설명을 이어가는 중 오은명은 몇 번이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긴장한 오은명은 몹시 초조한 표정이었다.


“그 양자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마에다 고이치에 대해 조사하는데 시간을 많이 쓰느라 아직 양자에 대해선 많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워낙 주변에 알려진 게 없습니다. 이름은 케이진이라고 합니다. 양아버지의 성을 따서 마에다 케이진이라고 부르지만 한국 성은 따로 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확인 못 했습니다.”


“나이는요?”

“큰아들보다 두 살 작다고 했으니, 1998년생일 것 같습니다.”


오은명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두 팔을 뒤로 뻗어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가만히 앉아 있기도 어려울 만큼 불안정해 보였다.


“케이진이란 청년 이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아세요?”

듣고만 있던 이희경이 말했다. 정 대리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뒤적였다.

“규옥 규에 보배 진. 규진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대에 있던 오은명은 뒤로 넘어가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대답은 이희경이 대신했다.

“언니가 잃어버린 아들 이름이 바로 규진입니다.”


벌떡 일어난 오은명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정색하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 케이진이란 청년은 어디에 있나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집에서 나간 것 같습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정리를 해보죠. 박재열이 제공하는 호의적 거래의 대가로 마에다 고이치는 다섯 살 아이를 양자로 맞아 15년 동안 길렀다. 작년 겨울 양아버지가 죽고, 친아들 두 명과 같이 살던 양자 케이진은 집에서 나왔다. 박재열은 최자현을 급히 일본으로 보내면서 어떤 청년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청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찾을 수 없나요?”


“주변 친구들을 통해서 수소문 중이긴 하지만, 친구들 말로는 연락이 어렵다고 합니다. 핸드폰도 없고,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하는 친구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왜 연락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죠? 그보다도 어떤 친구들과 어울렸나요?”


“그 한인 학교에는 크게 두 부류의 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근무하는 주재원의 자식이나 한인 학교를 일본 유학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자기들만의 사교육 그룹을 만들어 방과 후에 수학이나 영어 공부를 같이했다고 합니다. 일단 이쪽 친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정 대리의 말에 오은명은 당연히 그랬겠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일교포 쪽은 좀 복잡합니다. 원래부터 일본에 살았던 교포 3세,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파친코 도박장이나 술집을 운영하는 부모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거칠게 살아가는 재일교포일수록 한국 국적에 애착을 많이 가진다는 말이기도 하죠. 이쪽은 부모를 닮아서 아이들도 거칠게 놀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케이진은 이쪽 친구들과도 썩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오은명은 다행이라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지막 부류는 비교적 근래에 일본에 건너온 뉴커머 무리입니다. 여기도 여러 그룹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케이진은 부모 직업이 변변하지 못한 가난한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다고 합니다.”

오은명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는 걸 보더니 정 대리는 마지막 메모를 읽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은 포기했지만, 뭔가 배우고 싶어 하는 친구. 케이진은 그런 학생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오은명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정 대리의 말에 대꾸했다.

“사람 참 간사하죠? 아들이 살아있기만 해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이제 무사하다는 소식 듣자마자 어떤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는지 궁금해하고 있네요.”


정 대리는 대답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주위 환경이 어땠는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어요, 이제.”



오은명은 안정을 찾고 침착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김 실장에 관해 알아낸 건 없나요? 김 실장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걸 추적한 거 아니었나요?”

“그 부분은 확인이 안 됩니다.”


“아마 맞을 거예요. 그걸 박재열이 눈치챘겠죠. 그래서 최대식을 시켜 일을 꾸몄겠죠.”

“그렇다면 우리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케이진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건 위험부담이 큽니다. 마에다 고이치의 주변을 조사할 때와 달리 아무래도 많은 사람과 접촉해야 하는 일이라. 그리고, 저는 아직도 박재열 대표가 왜 조카를 납치해서 일본에 숨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정 대리는 그 이유를 말해달라는 표정으로 오은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진작 설명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무래도 유언장 때문인 것 같아요.”


작가의말

한데 엉긴 채 바닥에 얼어붙은 유엔과 시노의 빨래처럼 어쩔 수 없는 사이가 있습니다. 봄이 되어 저절로 녹기 전에 억지로 뜯어내다간 쭉 찢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인연. 남보기엔 흉한 몰골이라도, 그들은 쓸쓸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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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5장 잃어버린 아들 (1) +1 18.10.19 194 3 11쪽
13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4) 18.10.16 199 3 12쪽
»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3) 18.10.12 220 3 13쪽
11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2) 18.10.09 209 4 13쪽
10 4장 국적불명의 케이진 (1) 18.10.07 247 4 11쪽
9 3장 굴속의 너구리 (3) 18.10.02 219 4 11쪽
8 3장 굴속의 너구리 (2) 18.09.29 242 4 12쪽
7 3장 굴속의 너구리 (1) 18.09.26 260 3 11쪽
6 2장 유엔과 시노 (3) 18.09.25 270 5 12쪽
5 2장 유엔과 시노 (2) 18.09.20 271 3 12쪽
4 2장 유엔과 시노 (1) 18.09.13 298 3 11쪽
3 1장 염곡동 살인사건 (3) 18.09.06 328 6 13쪽
2 1장 염곡동 살인사건 (2) 18.08.30 364 8 13쪽
1 1장 염곡동 살인사건 (1) +1 18.08.22 582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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